매화, 두 번 피다
2화
주막 문은 안쪽에서 열렸다.
문틈으로 먼저 나온 것은 등잔불이었다. 기름에 절은 심지 타는 냄새가 약초 썩는 냄새를 뚫고 올라왔다. 불빛을 든 손은 뼈마디가 굵고 손톱 밑이 검었다. 손의 주인은 허리를 굽힌 노파였다.
“닫혔어. 내일 해가 뜨고 오게.”
서문경은 물러서지 않았다. 품에서 만독지환을 싼 천을 반쯤 풀어 녹색 유리병을 비추었다.
“옥기린에게서 연락이 왔을 거다. 독을 맡기러 온 사람이라고 전해라.”
노파의 눈이 병을 훑었다. 불빛에 비친 유리병의 색이 짙은 녹색에서 검은빛으로 변했다.
“만독곡 물건이군.”
문이 더 열렸다. 노파는 등을 보이며 복도 안쪽으로 걸어갔다. 서문경이 뒤따라 들어서자, 문이 저절로 닫혔다. 빗장 걸리는 소리는 없었지만, 바깥바람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복도는 좁고 길었다. 양옆 선반엔 병과 단지가 빽빽했다. 어떤 병에는 라벨이 붙어 있었고, 어떤 병은 천으로 입구가 봉해져 있었다. 쥐오줌풀 냄새, 녹각 태우는 냄새, 썩은 감 냄새가 겹겹이 쌓여 있었다.
복도 끝 방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들여보내.”
노파가 옆으로 비켜서며 턱짓했다. 서문경이 안으로 들어서자, 방 한가운데 놓인 탁자 앞에 사내가 앉아 있었다. 오십 줄.
왼쪽 눈 밑에 작은 점이 있었다. 옥기린이었다. 탁자 위에는 약사발과 유발, 놋쇠 저울이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앉아.”
서문경은 탁자 건너편 의자에 앉았다. 만독지환을 천에서 완전히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병이 나무판에 닿으며 가볍게 울렸다.
옥기린은 병을 집어 들지 않았다. 허리를 약간 숙여 병의 색을 관찰하고, 손가락으로 병 입구를 막은 밀랍의 상태를 확인했다. 코를 가까이 대지도 않았다.
“만독지환 맞군. 진품이다.” 그가 탁자 모서리에 놓인 물수건으로 손끝을 닦았다. “흑풍림에서 가져왔나.”
“아는 사람이냐.”
“만독곡에서 만든 독은 빛깔로 산지가 구분된다. 이 녹색은 흑풍림의 토양에서 자란 약재로 추출한 거야.” 옥기린이 비로소 병을 집어 들었다. “만독지환 자체는 강호에 열 점도 안 남은 물건이다. 그중 다섯 점이 만독곡에 있고, 나머지는······.”
“사파의 손에 있다.”
“정확히는 사파의 ‘돈줄’ 손에.” 옥기린이 병을 내려놓았다. “이걸 분석해 달라고?”
“향에 반응하는 성질을 확인하고 싶다. 어떤 향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진행을 늦추는 최적 조건을 알고 싶다.”
옥기린은 잠시 서문경을 보았다. 눈 밑의 점이 움직이지 않았다.
“값은.”
“분석 결과의 첫 번째 사본은 그대가 가진다. 만독지환의 향 반응 데이터는 강호에서 거래 가능한 정보 중 손꼽힐 만한 가치다.”
“그건 분석이 성공한 뒤의 이야기.” 옥기린이 유발을 집어 탁자 위를 한 번 두드렸다. “실패할 수도 있다. 과정에서 내가 쓸 약재와 시약은 별도다.”
“필요한 약재 목록을 달라. 내일 안으로 구해오겠다.”
옥기린의 손이 멈췄다.
“내일 안으로? 이 목록에 들어갈 물건은 반 이상이 사파 루트에서나 구할 수 있는 것들이다. 자네, 그 정도 뒷줄이 있나.”
“있다.”
옥기린은 더 묻지 않았다. 유발을 내려놓고, 붓을 들어 옆에 놓인 종이에 빠르게 글을 썼다. 열한 가지 약재와 시약의 이름이었다. 그중 일곱 가지는 사파의 밀거래 루트를 통하지 않으면 구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종이를 건네며 옥기린이 말했다.
“이 물건들을 가져오면 분석을 시작한다. 기간은 사흘. 그 안에 첫 번째 향 반응 데이터를 뽑겠다.”
서문경은 목록을 접어 품에 넣었다. 몸을 일으키려는 그에게 옥기린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한데······ 이걸 분석하다 보면 알게 될 거야. 만독지환을 빼돌린 자가 누군지도.”
서문경의 동작이 반 박자 멈췄다.
“이미 알고 있다. 백무영이다.”
옥기린이 처음으로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입꼬리를 당기는 움직임에 가까웠다.
“매화검법을 배운 자가 매화검법으로 배신자를 치려는군. 재미있어.”
서문경은 답하지 않았다. 옥기린도 더 묻지 않았다. 다만 그가 탁자 위의 만독지환을 조심스럽게 들어, 옆 선반 위 작은 궤짝 안에 넣었다. 궤짝 뚜껑을 닫으며 말했다.
“내일 해 질 녘. 그때까지 약재를 가져와.”
서문경은 일어서서 문 쪽으로 걸었다. 노파가 다시 나타나 복도를 밝혔다. 주막 입구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자, 노파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밖에 손님 하나 대기 중이야. 부르기 전엔 못 들어온다고 했는데, 자네 아는 사람인가.”
서문경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런 시간에, 그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름을 댔나.”
“아니. 그냥······ 오래전 빚을 졌다고만 했어.”
서문경의 손가락이 검자루에 닿았다 떨어졌다. 문밖에서 발을 구르는 소리도, 헛기침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숨소리 하나만이 문틈으로 새어 들었다. 불규칙하고, 얕았다.
철호였다.
서문경이 화개루 정문을 나선 직후였다. 저녁 어스름 속에서 골목 돌벽에 기댄 인기척이 움직였다.
“서문 대협. 나요, 철호입니다.”
서문경이 걸음을 멈췄다. 몸을 돌리자 골목 어귀에 순찰대 갈색 단령의 사내가 서 있었다.
“화개루 안에서 봤소. 당신인 줄 알았소.”
“그래서.”
“드릴 말씀이 있소.”
“파문된 자에게 할 말이 남았더냐.”
철호의 시선이 바닥을 스쳤다. “그때 증언하지 못했습니다. 백무영이 파문 회의 전날 밤 저를 찾아와, 매화검법 전수 기록에 당신 이름이 없고 의례를 받은 적이 없다고 했소. 제가 직접 확인한 것도 아닌데, 그 말을 믿고 입을 다물었소.”
“지금 와서.” 서문경의 목소리는 낮았다. “증언 거부가 아니라, 조작이었다는 말을 하는 것이냐.”
철호의 어깨가 굳었다. “흑풍림의 시신을 봤습니다. 생사가 걸린 자리에서 매화검법을 썼다면, 당신 검은 진짜라는 얘기 아니오. 그렇다면 전수 기록이 잘못된 것이고, 백무영이 제게 한 말은 거짓입니다.”
“그래서, 그걸 지금 나에게 확인받으러 온 것이냐.”
“아니오. 당신에게 빚을 졌소. 그 빚을 갚고 싶소.”
서문경은 잠시 침묵했다. “비전각 열람 기록이다. 파문 회의 사흘 전부터 회의 당일까지, 매화검법 전수 기록을 열람한 자의 명단. 비전각은 출입 기록을 따로 두지 않느냐.”
“그건 장로의 허가 없이는——”
“그 빚을 갚고 싶다고 했다.”
“어렵소. 하지만… 가능성이 없진 않소.”
“그럼 그걸로 빚을 갚아라.”
철호는 잠시 망설이다가 “알겠소.” 하고 물러나며 포권을 취했다. 서문경은 받지 않았다. 철호는 고개를 숙이고 골목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전생에서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던 철호가 움직인 것은 죄책감 탓만은 아닐 터였다. 서문경은 발길을 돌려 낭인 거점 쪽 여관으로 향했다.
같은 밤, 백무영의 거처 밀실. 왼쪽 어깨에 붕대를 감은 백무영이 탁자 앞에 앉아 있고, 사영이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섰다. 손등의 칼자국이 촛불에 번들거렸다.
“만독지환을 잃었다고 들었다. 연락책도 죽었고, 현장에 매화검법 흔적이 남았고.”
“서문경이다. 그 자식이 살아 있었다.”
“살아 있든 말든, 그건 네가 처리할 일이다.” 사영이 탁자 앞에 섰다. “만독지환은 만드는 데 삼 년이다. 그걸 네놈의 부주의로 사라지게 했어.”
“내 부주의가 아니——”
“입 다물어라. 사흘이다. 사흘 안에 서문경을 찾아내고 만독지환을 회수해라. 사흘이 지나면 만독곡에서 사람이 올라온다. 그 전에 못 찾으면, 네놈이 책임을 져야 한다. 어떤 책임인지는 알겠지.”
백무영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사영은 몸을 일으켰다. “한 가지 더.
서문경이 매화검법을 썼다면, 장로들 사이에서 말이 나올 거다. 파문된 자가 어째서 정통 검법을 구사하는지. 네놈의 입지가 흔들리기 전에 처리해라.”
사영이 절룩이며 나가자, 백무영은 찻잔을 벽으로 던졌다. 도자기 파편이 바닥에 흩어졌다. 파문시켰을 때 죽이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살아서 돌아왔고, 매화검법을 고스란히 구사했다. 한 번에 처리해야 했다. 장로들에게 말이 퍼지기 전에, 사영의 시한이 끝나기 전에. 문파 내 가장 영향력 있는 진장로를 내 편으로 만들면 뒤집을 수 있다.
백무영은 옷을 갈아입고 진장로의 별채로 향했다. 밤이 깊어 인적이 없었다. 문을 두드리자 무거운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백무영입니다, 장로님.”
문이 열렸다. 진장로는 평복 차림으로 책상 앞에 앉았다. “이 밤에 무슨 일이냐.”
백무영은 포권을 취했다. “급히 아뢸 일이 있습니다. 서문경이 사파와 결탁한 정황이 있습니다. 흑풍림에서 사파 연락책과 만난 건 서문경이었고, 저는 그 거래를 저지하려 현장에 갔던 것입니다.”
“네가 순찰대에 보고한 내용과 다르군.”
“순찰대에는 전모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서문경은 매화검법 의례를 정식으로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검법을 구사할 수 있었다는 건, 사파 쪽으로 초식이 유출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진장로가 책상을 두드렸다. “서문경이 떠돌며 사파와 접촉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이번 일이 벌어졌다, 그런 말이냐.”
“예. 서둘러 문파 회의를 소집해야 합니다. 서문경이 살아서 돌아왔다는 소문이 퍼지기 전에, 그를 사파의 첩자로 규정해야 문파의 기강이 서고 검법 유출도 차단할 수 있습니다.”
“매화검법 의례가 다가오고 있다. 이 시기에 회의를 여는 것은 위험부담이 크다.”
“의례이기 때문에 더 시급합니다. 의례 당일에 서문경이 나타나 검법의 정통성을 주장한다면 문파 전체가 혼란에 빠집니다. 그 전에 매듭지어야 합니다.”
진장로는 팔짱을 꼈다. 서문경이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파문의 정당성에 의문이 일 수 있고, 의례 전에 불거지면 전수 의례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었다.
“좋다. 내일 오시에 장로 회의를 소집하마. 네 주장을 제출하려면 증거를 보강해 두어라. 특히 전수 기록 관련 문건을 챙기고.”
“고맙습니다, 장로님.”
백무영은 포권을 취하고 별채를 나섰다. 문을 닫는 손이 안도와 긴장으로 약간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