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 두 번 피다
4화
옥기린이 진열장 아래 칸에서 작은 나무 상자를 꺼냈다. 자물쇠를 따고 뚜껑을 열자 짙은 향이 번졌다. 말린 꽃잎과 나무껍질 조각, 불투명한 수지 덩어리가 한지에 싸여 있었다.
화소월이 상자 속을 보자마자 한 걸음 물러섰다.
“만독향이다.”
“알고 있었나.”
옥기린이 작은 칼로 수지 덩어리의 끝을 긁어 숯불 위에 올렸다. 향이 실내로 퍼지자 서문경의 손끝에서 올라오던 검은 기운이 멎었다. 통증도 함께 가라앉았다.
“독을 늦추는 향을 왜 네가 갖고 있지.”
화소월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옥기린은 대답 없이 서문경의 손목을 잡아 맥을 짚었다. 손가락 세 개가 차례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독기가 단전 쪽으로 내려가던 흐름을 향이 막았다. 만독지환 제조 과정에서 쓰는 중화향과 성분이 유사해.”
옥기린이 서문경의 손을 놓았다.
“이 향을 가진 이유는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고, 지금 중요한 건 그 출처가 아니야.”
“중요한 건 뭐지.”
서문경이 손등을 뒤집어 검은 기운이 사라진 손끝을 확인했다.
“이 향을 이용해 백무영을 검봉대로 끌어낼 수 있다. 만독지환의 반응을 일으키는 향이 문파 안에서 퍼지면, 독을 빼돌린 자는 그 근원을 찾으려 움직이겠지.”
옥기린이 숯불 위의 향을 눌러 껐다.
“내일 밤, 검봉대에서 매화검법 첫눈 의례가 열린다. 백무영이 주관할 거야. 그 자리에 향을 피우고 서문경이 나타나면?”
“백무영은 서문경을 죽이려 들 거요.”
화소월이 팔짱을 풀었다.
“대신 의례 자리에서 함부로 칼을 뽑으면 문파 전체가 목격한다. 검술이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도.”
서문경이 침상에서 일어났다. 왼손을 들어 손등을 등불 아래로 가져갔다.
“의례를 거쳐야 완성되는 초식이 있다. 첫눈이 내린 밤 매화나무 앞에서 사흘간 행하는 전수 의례 없이 익힌 검은 사십오 도 각도에서 검속이 반박자 느려.”
서문경이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전생에 내가 그 결함을 알았을 땐 이미 파문된 뒤였다. 백무영이 의례 기록을 조작해 자신은 의례를 마친 것처럼 꾸몄다는 걸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지금은 있나.”
옥기린의 질문에 서문경이 손등을 뒤집어 보였다. 손가락 마디와 손목 사이, 피부를 따라 얕은 흉터들이 매화 꽃잎 다섯 장처럼 둥글게 배열돼 있었다.
“의례를 마친 자의 손등에는 매화나무 가지가 남기는 흔적이 생긴다. 전수 과정에서 나뭇가지 끝에 손등을 세 번 긁히는 절차가 있어. 백무영의 손등에는 그 흔적이 없어.”
화소월이 서문경의 손등을 들여다봤다.
“이 흉터가 의례의 물증이 되는 거군.”
“그렇다. 검봉대에서 백무영이 내 검을 피하지 못하는 순간이 오면, 의례 없는 검술이 가진 결함은 만천하에 드러난다.”
옥기린이 약재를 빻던 막자사발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계획은 이렇다. 화소월이 정보망을 통해 검봉대 의례에 구파일방 증인들을 불러모은다. 나는 의례 전에 향을 피워 백무영의 신경을 건드린다. 서문경은 의례가 시작되는 순간 등장해 검을 겨눈다.”
“사파가 개입하면.”
서문경의 말에 옥기린이 막자사발을 밀어두고 작은 도자기 병을 꺼냈다. 선반에서 집어든 병이었다. 마개를 열자 쇠 냄새가 번졌다.
“흑혈산이다. 사파 전사들이 흔히 복용하는 독을 무력화하는 약재야. 검봉대 주변에 살포하면 사파 쪽 인원은 전투력이 반감된다. 독문 계열의 내공을 가진 자일수록 효과가 커.”
화소월이 병을 받아 들었다.
“흑혈산은 구하기 어려운 물건인데.”
“십 년 전 한번 구해둔 적이 있다. 당시엔 쓸 일이 없었어.”
옥기린이 서문경을 돌아봤다.
“한 가지 물어야겠다. 네 몸 상태로 검을 쥘 수 있겠나.”
서문경이 침상 옆에 세워둔 검을 집었다. 손끝에 남은 저림이 검집을 쥔 손으로 번졌다. 검을 뽑아 허공에 두 번 그었다. 초식의 궤적이 정확히 사십오 도 각도로 휘었다.
“독이 진행되기 전엔 문제없다.”
“진행 속도는 향으로 조절할 수 있어. 다만 네가 검을 휘두를수록 혈류가 빨라지고 독기도 움직인다. 길어야 한 시진이다.”
서문경이 검을 집어넣었다.
“충분하다.”
밖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다. 문틈으로 스민 바람에 등불이 흔들렸다.
“그럼 각자 준비하지. 나는 유포할 암호를 정리할 테니.”
화소월이 곁방으로 향했다. 문 앞에서 멈춰 서더니 말을 보탰다.
“서문경. 검봉대에서 이기든 지든, 그 자리에선 살아서 돌아와. 정보 동맹은 네가 죽으면 무용지물이니까.”
서문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화소월이 곁방 문을 닫았다.
옥기린이 서문경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붕대를 감겠다. 왼쪽 견갑 쪽이 아직 덜 아물었어.”
그가 선반에서 붕대를 꺼내는 동안 서문경은 탁자 위의 만독지환 병을 집어 품에 넣었다. 병은 여전히 차가웠다.
다음 날 밤. 검봉대.
첫눈이 내렸다. 바람 없이 곧게 떨어지는 눈송이가 매화나무 가지에 쌓였다. 검봉대 중앙의 매화나무 주위로 횃불이 둘러서고, 구파일방의 증인들이 자리잡았다. 청성파 장로 셋과 화산파, 점창파에서 온 인물들이 석좌에 앉아 있었다.
백무영이 매화나무 앞에 섰다. 흰 도포 자락이 눈에 젖는 대로 내버려뒀다. 그의 오른손에 검은 비단에 싸인 의례검이 들려 있었다.
검을 뽑아 허공에 세로로 그었다. 초식이 시작되려는 순간, 바람이 방향을 틀었다. 남쪽에서 불어온 바람에 익숙한 향이 실렸다. 만독지환의 반응을 일으키는 그 향이었다.
백무영의 검끝이 흔들렸다. 아주 잠깐. 장로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가 검을 다시 고쳐 쥐는 동작은 누구라도 볼 수 있었다.
“의례를 멈춰라.”
서문경의 목소리가 검봉대 입구에서 들렸다.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왼손에 검을 든 채 횃불 아래로 걸어 들어왔다. 발소리가 눈 위에 또렷이 찍혔다. 장로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파문된 자가 감히 검봉대에…!”
누군가 외쳤다. 서문경은 대답 없이 걸음을 멈추고 백무영을 올려다봤다.
“백무영. 네 검술은 매화검법이 아니야.”
“무슨 소리냐.”
백무영의 목소리가 낮았다. 서문경이 왼손을 들어 손등을 횃불 아래 드러냈다. 매화 꽃잎 모양의 흉터가 선명했다.
“의례를 치르지 않은 자의 매화검이 가진 결함을 아느냐. 초식이 사십오 도 각도에서 반박자 느려진다. 네가 방금 그어 보인 첫 획도 그렇다.”
서문경이 검을 뽑았다. 느리게. 검날이 눈송이를 양단했다.
“증명해 주마.”
백무영이 물러서지 않았다. 도리어 의례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네까짓 파문자가 무슨 근거로…!”
서문경이 달려들었다. 네 걸음으로 거리를 좁히고 검을 사십오 도 각도로 내리그었다. 백무영이 막았다. 쇳소리가 횃불 사이로 번졌다. 이어서 두 번째 초식이 이어졌다.
서문경의 검이 매화나무 가지를 스치듯 휘었다. 백무영이 막으려 했지만 검의 궤적을 따라잡지 못했다. 그의 검이 서문경 검의 끝을 반 치 뒤에서 베었다.
장로석에서 누군가 숨을 삼켰다.
“저건… 매화검법의 초식이 맞나.”
“각도가 분명 파문된 자의 검이 더 정확하다.”
백무영이 한 걸음 물러서며 검을 가로로 휘둘렀다. 서문경이 피하는 대신 자신의 검으로 밀어 올렸다. 두 검이 맞부딪혔다.
“의례를 치르지 않은 자는 이 초식에서 발이 멈춘다.”
서문경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백무영의 오른발이 눈 위에 붙박혔다. 반박자. 그 짧은 지연으로 백무영의 허리께에 서문경의 검이 닿았다. 검끝이 도포를 찢고 피부를 스쳤다.
그때였다.
검봉대 주변 어둠에서 열 개의 그림자가 동시에 튀어나왔다. 사파 전사들이었다. 복면을 한 그들이 장로석과 서문경 사이를 갈랐다. 백무영이 물러서며 왼손을 들자 그의 약지에 검은 반지가 번뜩였다.
“잡아라. 죽여도 좋다.”
백무영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서문경이 몸을 돌렸다. 세 명의 전사가 동시에 덤벼들었다. 서문경의 검이 첫 번째 전사의 손목을 쳤다. 검을 떨어뜨린 전사의 옆으로 두 번째 전사가 단도를 찔러왔다.
서문경이 피하지 않고 단도를 검로 흘려보냈다. 세 번째 전사가 등 뒤에서 덮쳤다. 그때 검봉대 입구에서 화소월이 뛰어들었다.
“서문경! 피해!”
그녀의 손에 통신문 뭉치가 들려 있었다. 흑시루에서 빼낸 사파 지령서였다. 백무영의 시선이 통신문을 포착했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가 흑시루를 뒤진 놈이냐.”
백무영이 전사들에게 손짓했다. 세 명이 화소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화소월이 통신문을 품에 움켜쥐고 물러섰지만, 사파 전사들의 발이 더 빨랐다. 하나가 그녀의 어깨를 낚아챘다.
“이 문서 어디서 났느냐.”
백무영이 다가가며 통신문을 낚아챘다. 화소월의 손에서 종이가 찢겨 나갔다. 전사 하나가 그녀의 팔을 등 뒤로 꺾었다. 뼈가 우두둑 소리를 냈다.
“화소월… 가족 몰살의 뒤를 쫓던 그 년인가.”
백무영이 종이를 대충 훑어보더니 접어 품에 넣었다.
“십 년 전에 깨끗이 정리한 줄 알았는데, 새끼 한 마리가 숨어 있었구나.”
화소월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입술이 떨렸다.
“네가…!”
“끌고 가라. 흑시루 지하에 가둬. 입을 열게 만들어야 하니까.”
백무영의 말에 전사들이 화소월을 질질 끌었다. 그녀의 발이 눈 위에 두 줄기 고랑을 팠다.
서문경이 달려들려 했다. 그러나 남은 전사 다섯이 검을 겨누며 앞을 막았다. 좌측 견갑의 상처가 찢어지며 붕대 아래로 피가 번졌다. 독기 요동으로 양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서문경이 굴하지 않고 검을 다시 쥐었다. 허나 이미 한 시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손끝에서 검은 기운이 번져나갔다.
백무영이 전사들의 뒤로 물러서며 손을 올렸다. 전사 둘이 화소월을 끌고 검봉대 후면 계단으로 사라졌다. 백무영도 그 뒤를 따랐다. 행동 하나하나가 정돈돼 있었다. 처음부터 준비된 철수 동선이었다.
옥기린의 흑혈산이 사파 전사들의 움직임을 둔화시키고 있었지만, 서문경 자신도 한계에 가까웠다. 전사 둘이 좌우에서 달려들자 서문경의 검이 오른쪽을 막았지만 왼쪽 공격은 피하지 못했다. 전사 손바닥이 서문경의 명치를 가격했다.
숨이 막혔다. 무릎이 꺾였다. 세 번째 전사가 검을 치켜들었다. 그 순간, 횃불 뒤쪽에서 금속성 파열음이 울렸다. 누군가 검봉대 난간을 부수며 뛰어들었다.
철호였다.
그는 왼쪽 시야가 실명된 상태에서도 오른손 검으로 전사 둘의 동선을 동시에 차단했다. 허리춤에서 단도를 뽑아 서문경을 붙잡은 전사의 손목을 내리찍었다.
“일어나십시오!”
철호가 외쳤다. 서문경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전사들이 재정비하는 틈에 철호가 서문경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물러서십시오. 제가 막겠습니다.”
철호가 서문경을 검봉대 바깥쪽으로 밀어냈다. 사파 전사들이 달려들자 철호가 검을 가로로 크게 휘둘렀다. 그의 검은 사십육 도 각도였다. 매화검법의 각도보다 단 일 도가 차이 났지만, 그만으로도 초식의 위력은 반감됐다. 그래도 전사들의 첫 번째 돌진을 막아내기엔 충분했다.
서문경이 검봉대 계단을 밟으며 뒤를 돌아봤다. 철호의 등이 보였다. 전사들의 검에 옆구리가 찢기고 있었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옥기린의 주점.
철호가 서문경을 부축해 문을 열었다. 두 사람의 옷은 눈과 피로 얼룩져 있었다. 옥기린이 달려나와 서문경을 붙잡아 침상에 눕혔다. 붕대를 풀고 상처를 확인한 뒤 약재를 빻기 시작했다.
철호는 방 한가운데 서서 숨을 몰아쉬었다. 왼쪽 옆구리 상처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지만 그는 붕대를 찾지 않았다.
“그쪽도 앉게. 상처가 깊어.”
옥기린의 말에 철호가 고개를 저었다.
“할 말이 있습니다. 하고 곧장 떠나야 합니다.”
그는 품에서 접힌 종이를 꺼내 서문경 앞에 내밀었다. 한지 여러 장을 실로 묶은 것이었다.
“뭡니까.”
서문경의 목소리가 잠겼다.
“십 년 전, 파문 회의에서 제가 했던 증언의 진상입니다.”
철호의 손이 떨렸다. 문서의 가장자리가 피로 얼룩졌다.
“그날 저는 서문경이 비전검법을 훔치는 걸 봤다고 증언했습니다. 거짓말이었습니다. 백무영이 제 출신을 알았고, 그걸 근거로 협박했습니다. 침묵하지 않으면 가족이 위험해진다고.”
철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저는… 11년째 청성파 제자입니다. 본래 이름은 강철호. 생부는 흑룡채의 도적이었고, 어머니는 생부의 손에 죽었습니다. 그 사실을 아는 이는 진장로님과 저뿐입니다. 파문 회의 사흘 전 밤, 백무영이 그걸 들먹이며 저를 찾아왔습니다.”
철호가 왼쪽 눈을 가리켰다. 실명한 쪽이었다.
“처음엔 거절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누군가 제 숙소에 인화석 분말을 뿌려두었습니다. 아침 햇살에 반응해 폭연이 일어나면서 이쪽 눈이 실명됐습니다. 그때 깨달았죠. 백무영은 그냥 협박하는 자가 아니라고.”
서문경은 문서를 펴지 않았다. 그저 철호를 올려다봤다.
“그게 자필 증언입니까.”
“예. 거기에 날짜, 시간, 백무영이 했던 정확한 말까지 전부 적었습니다. 마지막 장에는 제 도장을 찍었고, 진장로님의 증인 서명도 받았습니다.”
철호가 무릎을 꿇었다. 상처에서 피가 더 흘렀다. 옥기린이 다가서려 하자 철호가 손을 들어 막았다.
“늦었습니다. 열한 해가 지났습니다. 그래도 이걸 드립니다. 당신이 받아주신다면….”
철호가 허리춤 단도를 풀어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목숨을 걸고 증명하겠습니다. 지금 화소월이 끌려간 곳이 어딘지 압니다.”
“흑시루로 갔소. 백무영도 이미 그쪽으로 향했고.”
서문경의 대답에 철호의 고개가 들렸다.
“흑시루 지하 감금실이라면 진입 경로가 단 하나뿐입니다. 외곽 담장 서쪽 배수구를 통해 지하로 내려가는 길입니다. 순찰대 시절 세 번 확인했습니다. 백무영이 사사로이 쓰기 시작한 지 이 년째입니다. 현재 경비는 사파 전사 열 명 안팎. 한 시진 뒤면 교대가 있을 겁니다.”
철호가 일어났다. 상처에서 피가 방바닥에 떨어졌다.
“제가 미끼가 되겠습니다. 정문 쪽에서 소란을 피우면 사파 전사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립니다. 그때 배수구 쪽으로 접근하십시오.”
옥기린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네 상처로 그런 움직임은 자살 행위다.”
“알고 있습니다.”
철호가 검집을 고쳐 쥐었다. 그의 오른손은 떨리지 않았다.
“제 인생에서 이보다 더 값지게 죽는 법은 없을 겁니다. 열한 해 빚졌습니다. 이제 갚고 싶습니다.”
“네가 죽을 수도 있소.”
서문경의 목소리는 낮고 평평했다. 철호가 처음으로 옅은 웃음을 보였다.
“그럼 죽겠습니다. 그게 제 몫이면.”
철호가 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몇 걸음 걷다가 멈춰 섰다.
“서문경. 그날. 파문 회의장을 나서는 당신의 뒷모습이 아직도 여기 남아 있습니다.”
철호가 자신의 가슴께를 주먹으로 두드렸다.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문이 열리고 닫혔다. 눈 위를 밟는 발소리가 흑시루 쪽으로 멀어졌다.
서문경은 침상에 앉은 채 철호가 떠난 문을 한동안 보지 않았다. 탁자 위에 놓인 자필 증언서를 천천히 집어 들었다. 아직 읽지 않은 이면을 넘기려는 순간, 옥기린이 손을 멈췄다.
“잠깐.”
옥기린이 다가와 문서를 받아 들었다. 이면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등불에 비춰보자 종이 이면에 얕은 눌림 자국이 드러났다. 누군가 그 위에 다른 종이를 대고 무언가를 눌러 썼던 흔적이었다.
“숯가루를 뿌려보겠다.”
옥기린이 작은 붓으로 숯가루를 종이 이면에 떨어뜨렸다. 흔들어 퍼뜨리자 눌린 부분에 가루가 끼며 글자가 드러났다. 숫자와 지명, 약재명이 적힌 일람표였다. 그가 서가로 걸어가 비급 기록 해독본을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두 문서를 나란히 놓고 들여다봤다.
“이건… 백무영이 작성한 독 검술 실험 기록이야.”
옥기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날짜가 십 년 전으로 되어 있어. 흑시루에서 사파 포로들에게 칼날에 바른 독을 시험하고, 생존자 데이터를 사파에 넘긴 기록이 분명하게 적혀 있다. 그리고 이 약재 배합 비율은….”
옥기린이 숯가루로 드러난 일람표의 한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반대손으로 비급 해독본의 해당 부분을 가리켰다. 두 수치가 정확히 일치했다.
“비급 기록과 사파 통신문이 하나의 문서로 합쳐지고 있어. 이것만으로도 백무영이 무림법에 저촉되는 불법 실험을 주도한 물증이 된다.”
서문경이 두 문서를 번갈아 보았다. 왼손이 문서 위에서 떨렸다. 독기인지 분노인지 구분되지 않는 떨림이었다.
잠시 후 밖에서 전서구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철호가 흑시루 정문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연락이었다. 구출의 시계가 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