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카로운 꽃잎은 독을 머금고
1화
악몽은 짧았다. 조운휘에게 언제나 같은 자리였다.
청운검문의 연무장. 매화검식의 마지막 초식을 전수받던 날. 스승의 손이 그의 어깨를 짚었다.
네가 대를 이어라. 바로 그 순간, 이재혁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떠올랐다. 웃고 있었다. 왼쪽 입꼬리만 올라간 미소였다. 그리고 검날이 — 매화가, 흩어졌다.
조운휘는 눈을 떴다.
잠룡독이 좌측 경맥을 따라 뻗어 있었다. 혈도 세 곳이 막힌 감각이 왼팔을 무겁게 눌렀다. 독은 어깨에서 멈춘 상태였다. 아직. 그는 상체를 일으켰다.
은신처는 폐쇄된 약재 창고였다. 선반에는 빈 도자기 병들만 쌓여 있고, 바닥의 짚단이 눅눅했다. 그는 짚단을 정리하지 않고 허리춤의 검을 집었다.
손때에 반들거리는 검집. 오른손 검지와 중지의 굳은살이 익숙하게 검집을 감쌌다. 오늘은 검을 쥘 날이 아니다. 풀어둔 흑발을 검은 끈으로 다시 묶었다.
바깥은 아직 새벽이었다. 조운휘는 자리에서 일어나 목 왼쪽을 가볍게 문질렀다. 붉은 흉터 자리가 저릿했다.
파문인의 낙인이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악몽은 이미 잊었다. 문을 밀고 어둠 속으로 걸어 나갔다.
당예린의 처소는 성도 외곽, 대나무 숲에 숨은 단층 목조 건물이었다. 뒷문 위로 약초를 말리는 시렁이 걸려 있고, 처마 끝에는 바람이 불 때마다 은실로 엮은 독충 문양이 반짝였다.
조운휘는 대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동쪽 창문을 통해 부엌으로 들어갔다. 발소리는 없었다. 보법이 무게 중심을 바닥에 거의 남기지 않았다.
부엌의 벽면에는 약도마와 채를 썰어 널어둔 건재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공기 중에 씁쓸한 약초 냄새가 엷게 깔렸다. 안방으로 통하는 미닫이 문틈으로 촛불이 새고 있었다.
문을 열자 당예린은 등을 돌린 채 앉아 있었다. 자주색 당삼을 걸친 어깨 위로 푸른 기 도는 흑발이 흘러내렸다. 손에는 약연 — 곱게 간 약재를 정제하는 도구 — 이 들려 있었다.
“미리 연락도 없이 남의 집 부엌을 따다니, 예법이 그 모양이냐.”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허리춤의 약통들이 작게 부딪혔다. 당예린은 느긋하게 약연을 돌리고 있었다. 그녀 앞에는 세 가지 약재가 각기 다른 비단천 위에 정량으로 놓여 있었다.
조운휘는 문 옆에 섰다.
“잠룡독 유지 치료를 받으러 왔다.”
“아, 그래? 나는 빈손으로 찾아온 손님은 술이나 한잔 하러 온 줄 알았네.”
당예린이 고개를 돌렸다. 황금빛 눈이 촛불을 받아 짧게 반짝였다. 오른쪽 눈 밑의 검은 점이 움직였다.
입가에 옅은 비웃음이 걸렸다. 그녀는 약연을 내려놓고 손가락을 탁탁 털었다. 손톱 끝에 보이지 않는 가루가 떨어졌다.
“대가는.”
말투는 가벼웠지만 눈은 장난치지 않았다.
“내 체질 데이터다.”
당예린의 손이 멈췄다. 촛불이 흔들리며 그녀의 얼굴 절반이 어둠에 잠겼다가 드러났다.
“체질? 그냥 독에 중독된 줄 알았더니, 체질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특별하단 뜻이구나.”
“쌍극합일이다.”
침묵. 당예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장난기라기보다는 칼날을 살피는 눈이었다. 그녀가 약연을 밀어내고 완전히 뒤돌아앉았다.
“허풍은 아니고?”
“확인할 방법이 있을 거다.”
“있지.”
당예린이 벌떡 일어났다. 허리춤의 약통들이 딸그락거렸다. 그녀는 벽 쪽의 약장에서 납작한 옥제 패찰을 꺼냈다. 표면에는 가느다란 침이 박혀 있고, 손잡이에는 독충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독기 반응 측정기다. 팔을 걷어라.”
조운휘는 왼쪽 소매를 접었다. 팔뚝 안쪽, 잠룡독이 흐르는 경맥 위로 피부가 미세하게 검푸르게 변색돼 있었다.
당예린이 그의 팔을 잡지 않았다. 대신 옥패를 팔뚝 위 1치 거리에서 멈췄다. 침 끝이 살짝 떨렸다. 옥패에 새겨진 독충 문양이 희미하게 발광했다.
“잠룡독 맞네. 그런데 이 반응은…….”
그녀의 목소리에서 가벼움이 사라졌다. 의원의 말투였다. 당예린이 옥패를 거둬들였다.
“양극의 기가 동시에 맴돌고 있다. 독을 걸러내는 쪽과 독을 머금는 쪽이 공존해. 이런 체질은 난생처음 본다.”
그녀가 조운휘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매일 와야 한다. 독의 진행 속도를 기록하고, 내가 처방을 조절한다. 네 체질 데이터는 치료가 끝날 때마다 내가 채취한다. 거부권은 없다.”
조운휘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다만 눈을 피하지 않았다.
“수락이다.”
당예린이 옥패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의 손이 약재 위를 훑었다. 손톱 사이에서 미세한 가루가 떨어져 약연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그녀가 약연을 다시 집어 들기 직전, 조운휘가 말했다.
“한 가지.”
“뭐.”
“치료 과정에서 내 몸에 접촉할 땐 미리 알려라.”
당예린의 입꼬리가 다시 올라갔다. 이번에는 진짜 웃음에 가까웠다.
“내 맘대로 할 거다. 네 몸은 이제 내 실험실이니까.”
조운휘는 대답하지 않고 목의 옷깃을 옆으로 젖혔다. 왼쪽, 낙인이 찍힌 흉터가 촛불 아래 드러났다. 붉은빛이 감도는 오래된 상처. 그 위로 경맥이 잠룡독의 독기를 따라 꿈틀거렸다.
“여기부터 시작한다.”
당예린의 시선이 흉터에 멈췄다. 그녀는 질문하지 않았다. 대신 약연을 든 손을 내려놓고 얇은 침을 꺼냈다. 은빛 침날이 촛불을 타고 번뜩였다.
“숨을 멈추지 마라. 독이 역류한다.”
가볍던 목소리가 일절 사라졌다. 당예린의 손가락이 흉터 가장자리를 따라 침을 밀어 넣었다. 깊이 반 촌. 조운휘의 오른손 검지가 검집을 한 번 눌렀다. 그것이 유일한 반응이었다.
침이 세 개 더 들어갔다. 잠룡독이 경맥을 거슬러 침 끝으로 배어 나왔다. 검은 액체가 은침을 타고 흘러내렸다. 당예린은 다른 손으로 약연에 갈아둔 해독제를 침 주변에 발랐다. 독과 약이 만나 미세한 김을 냈다.
“기록 시작한다.”
그녀가 작은 책자를 꺼내 붓을 들었다. 침 끝에서 채취한 독액을 옥패에 묻히자 독충 문양이 푸르게 변했다.
“잠룡독 진행률, 좌측 견정혈(肩井穴) 기준 사할(巳割) 단계. 쌍극합일 체질 반응은…… 양극 비율 7대 3. 독을 머금는 쪽이 우세하다.”
조운휘는 묵묵히 듣고 있었다. 흉터 위로 침이 뽑혔다. 당예린이 솜에 약을 묻혀 상처를 닦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 같은 시각에 와. 한 번이라도 거르면 독이 하루 만에 천천혈(天泉穴)까지 내려간다.”
그녀가 책자를 덮으며 말했다. 조운휘는 옷깃을 바로 세우며 일어났다. 흉터는 다시 검은 무복 속으로 사라졌다.
“데이터다.”
당예린이 붓을 놓고 무심하게 말했다. 조운휘는 오른손을 폈다. 굳은살이 박인 검지와 중지가 촛불 아래에서 마치 옻칠한 듯 윤기가 없었다.
“하루 만에 얻기에는 꽤 많은 정보야. 특히 이 흉터…… 낙인이지?”
조운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예린이 피식 웃었다.
“말 안 해도 상관없다. 그건 데이터 밖의 일이니까.”
그녀가 일어서서 약장을 열었다. 조운휘는 그 사이 문 쪽으로 두 걸음 물러섰다.
청운검문 본전은 낮이었다.
백옥으로 쌓아올린 연단 위로 청색 구름 문양이 수놓인 비단이 휘날렸다. 문도(門徒) 삼백 명이 좌우로 도열하고, 구파일방에서 파견된 감시탑의 장로 두 명이 연단 아래 객석에 앉았다.
이재혁이 본전 정중앙으로 걸어 들어갔다. 흰 도포의 소매가 바닥에 끌리지 않도록 왼손으로 살짝 걷어 쥐었다. 발걸음은 느렸고, 얼굴에는 단정한 미소가 고정돼 있었다.
“청운검문 제4대 문주 대리 추대 의식을 거행합니다.”
장로원 최고 원로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재혁이 연단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옆에서 사제 하나가 흑칠 목판 위에 놓인 청옥 반지를 바쳤다. 반지에는 청운검문의 상징인 구름 속 검날이 미세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재혁, 그대는 검문의 얼굴이오. 정파의 도리를 수호하리라 맹세하시오.”
원로가 청옥 반지를 집어 들었다.
“청운검문의 명예를 걸고 맹세합니다.”
이재혁의 목소리는 온화했다. 맑고 깨끗한 음색이 본전 전체에 울렸다. 그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원로가 청옥 반지를 그의 왼손 약지에 끼웠다. 반지가 손가락에 밀착되는 순간, 이재혁의 왼쪽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누구도 보지 못했다.
“일어서십시오, 문주 대리.”
이재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삼백 문도의 고개가 동시에 숙여졌다. 그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청운검문의 번영을 기원하옵니다!”
이재혁은 연단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봤다. 왼손 약지의 청옥 반지가 대낮의 햇살을 받아 푸르게 굴절됐다. 오른손은 가지런히 허리춤에 얹었다. 그 손은 검객의 것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곱고 부드러웠다.
그가 입을 열었다.
“여러분의 신뢰에 부끄럽지 않은 문주가 되겠습니다. 청운검문은 앞으로도 강호의 약자를 보호하고, 정의의 검을 휘두를 것입니다.”
환호가 터졌다. 이재혁은 미소를 유지하며 연단을 천천히 내려왔다. 발걸음은 가볍고 품위가 있었다.
그가 감시탑 장로들 앞을 지날 때, 객석의 한 장로가 짧게 고개 숙였다. 이재혁은 답례하지 않았다. 다만 미소를 조금 더 깊게 만들었다.
본전 바깥에서 축포가 터졌다. 요란한 폭음과 함께 오색의 비단 가루가 하늘로 흩어졌다. 문도들이 연단으로 몰려와 이재혁의 도포 자락에 손을 대려 했다. 이재혁은 두세 걸음 물러서서 그들의 손길을 자연스럽게 피했다.
그는 아무도 모르게 왼손 약지를 만지작거렸다. 청옥 반지 안쪽 면. 거기에 새겨진 작은 글자가 손끝에 닿았다. 이재혁은 그 글자를 읽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독왕곡의 증표.
이재혁은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다만 그 웃음 속에서 오른쪽 입꼬리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해질녘이었다. 당예린의 처소 대청에는 해독제 가마솥에서 피어오른 김이 자욱했다. 조운휘는 왼팔에 붕대를 감은 채 일어섰다.
침 치료와 약재 도포가 끝난 뒤였다. 잠룡독의 독기는 어깨 아래로 물러나 있었다. 당예린은 책자에 오늘의 기록을 마저 적고 있었다.
조운휘는 그녀에게 등을 보이고 문 쪽으로 걸었다. 목의 붉은 흉터가 무복 옷깃 위로 반쯤 드러나 있었다. 당예린이 붓을 멈췄다.
“물어볼 게 있다.”
조운휘의 발이 멎었다.
“네 검지와 중지, 그 굳은살은 검술 수련 흔적이 분명한데, 좀 이상하더라. 일반적인 검객은 엄지와 검지에 굳은살이 박히거든. 그런데 네 살은 마치 검을 거꾸로 쥐거나…… 아니면 특정 검법에 특화된 손 모양이야.”
당예린이 그의 등 뒤에서 말했다.
“데이터 밖의 일이라고 하지 않았나.”
조운휘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대꾸했다.
“데이터 밖이지만 궁금한 건 어쩔 수 없잖냐. 사천 사람 원래 오지랖이 넓어.”
당예린이 붓을 탁자에 던지며 웃었다. 조운휘는 이미 문 앞이었다. 그가 미닫이문을 반쯤 열었다.
“첫 고리다.”
목소리는 무표정했다. 말하고 나서 바로 몸을 숙여 문밖으로 나갔다. 당예린의 눈이 좁아졌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책자를 끌어당겨 오늘 기록한 맨 마지막 줄을 다시 읽었다.
쌍극합일 체질. 좌측 경맥 잠룡독 반응 — 파문 낙인과 상관관계 의심됨.
그녀는 붓을 다시 들어 그 줄 옆에 작게 덧붙였다.
검거궤적(劍去軌跡). 과거 이 검으로 뭔가를 잃었다.
당예린은 촛불을 끄지 않았다. 대청 바깥, 대나무 숲으로 사라져 가는 발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책자를 접어 품에 넣고, 허리춤의 약통을 한 번 건드렸다. 약통들이 딸그락, 하고 울었다.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그녀는 촛불을 입으로 불어 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