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검독(梅花劍毒)
1화
귀곡의 주점은 낮부터 어두웠다. 창호지 너머로 햇살이 들어오는데도 구석은 늘 그늘에 잠겼다.
철위령이 탁자 위에 봉서 하나를 밀어 넣었다. 봉랍은 이미 뜯겨 있었다. 강유신은 집지 않았다.
“곽영주가 남궁세가에 보낸 거다.”
철위령이 탁주잔을 빙글 돌렸다. 웃는 얼굴이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청성파 비전 세 초식. 해독법 포함.”
강유신의 손가락 하나가 탁자 모서리를 짚었다. 나뭇결이 살짝 눌렸다.
“언제.”
“한 달 전.”
강유신은 봉서를 집어 들었다. 종이를 펼치자 곽영주의 필체가 드러났다. 깔끔한 해서체. 초식의 요지만 발췌해 적은 기록이었다.
철위령이 술잔을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남궁세가 답신도 빼냈다. 복사본이지만.”
그가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더 꺼냈다. 강유신이 받아 들었다. 답신은 짧았다.
청성 비전 확인. 귀중한 증표로 삼을 것.
증표. 강유신은 종이를 내려놓았다.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값은.”
“나중에 받지.”
철위령이 빈 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잔 밑바닥이 나무를 두드리는 소리가 가볍게 울렸다.
“이건 내 선의야. 정보상을 사귀면 이런 것도 받을 수 있다는 증거.”
“선의.”
강유신의 목소리는 평평했다.
철위령이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네놈 복수에 내가 필요한 한, 그 선의는 계속될 거다.”
그가 손가락으로 탁자 위의 무언가를 톡톡 두드렸다. 작은 동전 한 닢이었다. 무심코 장난치는 듯했지만, 강유신은 동전의 문양을 보았다.
철혈문의 표식이었다.
사라진 지 십 년째인 문파의 문장. 동전은 닳아 있었다. 오래 품고 다닌 것이다.
“옛날 물건이네.”
철위령이 웃으며 동전을 집어 넣었다. 그 웃음 속에 칼날 하나가 스쳤다.
“남궁세가 좋아하는 문양이지. 은문 말고도 이런 취향이 있다더군.”
강유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철위령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 한마디를 던졌다.
“곽영주 다음 행선지다. 남궁세가 별장. 열흘 뒤.”
작은 목간 하나가 탁자 위에 떨어졌다.
강유신이 목간을 집었다. 철위령은 이미 주점 문을 나서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동전 한 닢이 마지막 햇살에 반짝였다.
강유신은 목간을 품에 넣고 일어났다.
귀곡의 뒷골목은 좁고 비탈졌다. 흙벽 사이로 바람이 돌았다. 강유신의 걸음은 소리가 없었다.
골목 중간쯤에서 발을 멈췄다.
바람에 섞인 냄새. 단내였다. 썩은 꽃잎 같은. 독에 절은 자만 풍기는 체취.
강유신은 벽에 등을 붙이고 숨을 낮췄다. 시야 끝에서 인영 넷이 좁은 골목을 막고 있었다.
그 사이에 여자 하나가 서 있었다. 남색 치마저고리. 비취 비녀.
당소란이었다.
추격자 중 하나가 손에 철사(鐵絲)를 감아쥐고 앞으로 나섰다.
“당 소저. 비급만 내놓으면 살려 보낼 생각입니다.”
당소란은 입을 열지 않았다. 손가락만 소맷자락 안으로 살짝 움직였다.
강유신은 그 손끝의 미세한 움직임을 보았다. 독침을 쥐는 손놀림이었다.
셋은 무리였다. 추격자들은 당문의 전투 방식을 이미 알고 있었다. 둘이 양옆으로 벌어졌다. 진형이었다.
당소란의 숨이 한 번 깊어졌다.
강유신이 움직였다.
검을 뽑지 않았다. 대신 바닥의 자갈 한 알을 차 올렸다.
돌멩이가 벽에 맞고 튕겨 추격자 하나의 뒤통수를 때렸다.
“뒤에!”
추격자들이 돌아보는 순간, 당소란의 손이 소매 밖으로 번쩍였다.
독침 셋이 바람을 갈랐다.
하나는 어깨에 꽂혔고, 둘은 피해졌다. 맞은 자가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나머지 셋이 당소란에게 달려들었다.
강유신이 검집을 짚었다.
장검이 빠져나오는 소리는 바람 소리보다 작았다. 검날이 햇빛을 받으며 은빛 선 하나를 그렸다.
매화검법. 낙화.
검끝이 흐트러지며 떨어지는 꽃잎을 그렸다. 단단한 초식이 아니었다. 흩어지고 부서지는 검의. 하지만 그 안에 바람을 담았다.
검풍이 골목을 휩쓸었다.
그 순간, 당소란의 손가락이 한 번 더 움직였다. 미세한 가루가 공기 중에 흩뿌려졌다. 마비독. 당소란은 이것을 검풍의 흐름에 실어 보낸 모양이었다.
우연이었다. 기막힌 우연.
검풍이 마비독을 빨아들였다. 낙화 초식의 바람이 독을 추격자들의 숨통으로 밀어 넣었다.
추격자 하나가 헛숨을 들이켜며 목을 움켜잡았다. 둘째가 비틀거렸다. 셋째가 검을 휘둘렀지만 손끝의 감각이 이미 사라지고 있었다.
강유신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검날이 세 번 번쩍였다. 목과 가슴과 손목.
피가 흙바닥에 번졌다. 셋이 거의 동시에 쓰러졌다. 숨이 멎는 시간이 조금씩 달랐을 뿐이다.
강유신이 검을 거둬 검집에 꽂았다. 오른손에 미세한 저림이 밀려왔다. 검풍에 실렸던 독이 조금 손으로 번진 것이다.
당소란이 돌아섰다.
“누구.”
강유신은 손의 저림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네 비급 반쪽을 본 적이 있다.”
당소란의 눈동자가 살짝 굳어졌다. 침묵이 흘렀다.
“어머니 유품이다.”
목소리는 지나치게 담담했다. 이내 한마디 더.
“그걸 어떻게 아는지.”
“내가 기억하는 페이지와 이어져야 한다.”
강유신은 품속에서 접은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였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백지. 종이를 펴는 동작 자체가 답이었다.
“독문 비급. 오독문의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 오래된 거다.”
당소란이 종이를 응시했다. 백지에 무슨 뜻이 있는지 알겠다는 듯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너도 반쪽만 있다.”
“그렇다.”
강유신은 종이를 접어 품에 넣었다. 손의 저림이 점점 올라오고 있었지만 얼굴은 평온했다.
당소란이 피 묻은 골목을 한 번 훑고 다시 강유신을 보았다.
“이게 거래야.”
“거래다.”
강유신이 등을 돌리며 짧게 덧붙였다.
“네 적과 내 적은 아마 통한다.”
“따라간다.”
강유신은 멈추지 않고 걸었다. 당소란의 발소리가 뒤를 이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비탈진 골목을 함께 미끄러졌다.
해질녘이었다. 귀곡 변두리의 창고는 오랫동안 버려진 곳이었다. 나무 판자 사이로 마지막 붉은 빛이 갈라져 들어왔다.
촛불 하나가 탁자 위에서 타고 있었다.
당소란이 품속에서 비단 보자기를 꺼냈다. 조심스럽게 펼치자 손바닥만 한 양피지가 드러났다. 가장자리가 불에 그을린 흔적이 있었다.
강유신은 철위령에게서 받은 목간을 내려놓고, 밀서와 답신을 탁자 위에 펼쳤다.
당소란이 비급 쪽을 탁자 중앙으로 밀었다.
“내 어머니가 당문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거다.”
“당문 본가가 아니라.”
“방계 출신이니까.”
차분한 톤이었다. 화도 실망도 아니었다. 사실을 확인하는 말투.
강유신은 비급을 집어 들었다. 글자는 낡은 해서체. 하지만 중간중간 기이한 기호들이 섞여 있었다. 독문에서만 쓰는 암호.
그 기호 하나를 보자 기억이 스쳤다. 전생에서 보았던 비급의 페이지. 거기 적혀 있던 것과 같은 계열의 부호였다.
“이 기호.”
강유신이 손가락으로 작은 문양 하나를 가리켰다. 세 개의 사선이 원을 가로지르는 모양.
당소란이 그 위에 손가락을 겹쳤다.
“독의 순환을 나타내는 표식이다. 어머니가 이걸 그릴 수 있다는 건…”
말을 마치지 않았다.
강유신이 기억 속 페이지의 서두를 낮게 읊조렸다.
“독은 맥을 타고 기를 멈춘다. 기가 멈춘 곳에 꽃이 핀다.”
당소란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비급을 뒤집었다. 뒷면 가장자리에 작은 글씨가 있었다.
…그 꽃은 피를 빨아 자라며, 열매는……
끊겨 있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이어져.”
당소란의 숨소리가 변했다. 흥분을 숨기지 못한 목소리.
“네 기억과 내 비급이.”
강유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시선은 탁자 위의 다른 물건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철위령이 건넨 밀서. 그 봉투의 밀랍 인장. 남궁세가의 은문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철위령이 장난치듯 보여준 동전. 철혈문의 문양.
남궁세가의 은문과 철혈문의 문양.
강유신이 동시에 두 문양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같은 사람이 새겼다.”
당소란도 두 문양을 번갈아 보았다.
“선이 닮았다. 획을 긋는 각도가.”
그녀의 관찰력이었다. 독을 다루는 자만이 가진 섬세함.
강유신은 오른손의 저림이 어느 순간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대신 목뒤에서 미열 같은 것이 올라왔다. 독이 완전히 빠져나가지 않고 흔적을 남긴 것이다.
그 열을 느끼며 강유신은 생각했다.
철위령은 단순한 정보상이 아니었다. 철혈문의 잔존자. 남궁세가에 대한 적의. 그가 말한 ‘선의’는 선의가 아니었다.
당소란도 같은 결론에 도달했는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정보상. 믿을 만한 사람인지.”
“아니다.”
강유신의 대답은 단호했다. 탁자 위 문서들을 정리하며 덧붙였다.
“하지만 지금은 쓴다.”
당소란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비급 반쪽을 조심스럽게 보자기에 싸서 품에 넣었다.
강유신은 촛불을 바라보았다. 불꽃이 흔들렸다.
내일 새벽 귀곡을 떠난다.
당소란의 은거처.
비급의 완전한 해독.
그리고 복수.
복수는 곽영주의 목을 베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남궁세가 전체가 그 증거를 품고 있었다.
강유신은 촛농이 탁자에 떨어져 굳는 것을 보았다.
“내일 새벽.”
그가 짧게 말했다.
“귀곡을 나선다.”
당소란은 창가로 걸어갔다. 판자 틈으로 마지막 노을이 사라지고 있었다.
“기다리겠다.”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고, 눈은 어둠을 향해 있었다.
강유신은 촛불을 불지 않았다. 밤새 타게 두었다. 무너지는 밀랍이 탁자에 천천히 번지는 동안 그는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철위령은 지금쯤 귀곡 내 자기 거점에서 이 내일을 준비하고 있겠지.
그가 왜 이 정보를 흘렸는지.
그 답은 아직 오지 않았다.
하지만 의문은 이미 날이 서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