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검독(梅花劍毒)
4화
사흘 뒤 해질녘, 청성파 외곽 길목. 주막 앞은 조용하고 행인도 없다. 대신 푸른 도포 두 벌이 검문 탁자를 지키고, 허리춤에 쌍도를 찬 흑색 무복의 사내가 기대어 서 있다. 곽영주의 직속 부하다. 전생에서 파문을 통보하러 왔을 때 곽영주 뒤에 서 있던 얼굴.
강유신은 소나무 그늘 아래서 걸음을 멈췄다. 품속의 청성파 제자 패를 손끝으로 쓸었다. 의원 조수로 변장했다. 봉합된 오른손 상처도 그럴듯한 설명이 된다.
행인의 보따리 검사가 끝나자 흑색 무복 사내가 길 위를 훑는다. 시선이 소나무 그늘을 스친다. 강유신은 숨을 낮추지 않고 천천히 그늘 밖으로 걸어 나왔다.
사내의 시선이 꽂혔다. 왼쪽 눈 밑 칼자국에서 멈춘 눈빛. 오른손 집게손가락이 도자루를 한 번 쓸었다. 의심이 아니라 확인이다.
강유신은 발을 돌렸다. 자연스럽게 왔던 길로 되짚자 등 뒤로 발소리가 몇 걸음 따라붙는다. 검문 탁자 쪽에서 “무슨 일입니까” 묻는 소리.
“아니다.”
발소리가 멈췄다. 강유신은 산길을 내려가며 제자 패를 품 깊숙이 밀어 넣었다. 청성파 입구는 이미 봉쇄됐다. 얼굴 확인 체계다. 길목을 벗어나자마자 귀곡 방향 샛길로 접어들었다.
이틀 밤을 걸었다. 사냥꾼 움막, 계곡 바위 밑을 거쳐 닷새째 밤 귀곡에 닿았다. 좁은 골목마다 기름 등불이 걸리고 주점과 약재상 문이 열려 있었다.
얼굴을 보지 않고 거래하는 동네. 강유신은 낡은 약재 창고를 개조한 임시 거처 앞에 멈췄다. 문틈으로 희미한 등불이 샜다.
문을 두 번 두드리자 안쪽에서 미세한 공기 갈라짐이 일었다. 독침 발사 전 소리. 강유신은 움직이지 않고 품에서 반쪽 비급을 꺼내 문틈으로 밀어 넣었다. 빗장이 열렸다.
당소란은 남색 저고리에 비취 비녀로 머리를 틀어 올리고, 왼손에 해독침을 낀 채 서 있었다. 얼굴은 피곤했으나 눈빛은 날카로웠다.
“청성파는 막혔다.”
강유신이 들어서자 당소란은 빗장을 다시 걸었다. 방 안은 약초 냄새로 가득했고, 구석 조제 탁자 위에 당소란의 반쪽 비급이 펼쳐져 있었다. 강유신이 품에서 자신의 반쪽을 꺼내 올렸다. 비단에 먹으로 쓴 원본과 거친 닥종이에 숯으로 그린 기억 복원본이 나란히 놓였다.
당소란이 두 비급을 번갈아 내려다보다가 기억본의 경혈도 흐름을 손가락으로 따라가다 멈췄다.
“여기.”
자신의 원본에서 같은 지점을 짚었다. 두 손가락이 같은 자리에 정지했다. 독맥의 분기점. 방광경과 임맥이 교차하는 지점이었다.
“포개 봅니다.”
당소란이 원본을 기억본 위에 올렸다. 등불 빛에 비단과 닥종이의 결이 스며들며 두 장의 경혈도가 완전한 인체 전도로 합쳐졌다. 독공의 맥은 왼쪽 심장에서 시작해 오른쪽으로 역류하고, 매화검법의 기의 흐름은 오른쪽 단전에서 시작해 왼쪽으로 순환했다.
“상보 구조다.”
당소란은 고개를 저었다.
“매화검법의 기의 흐름을 거꾸로 돌리면 독공의 맥과 정확히 겹칩니다. 마지막 세 초식이 활성화하는 경로가 독맥 역행의 통로와 완전히 일치해요. 내공이 부족하면 쓸 수 없는 초식들에 독기를 밀어 넣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강유신은 대답 대신 오른손으로 검자루를 쥐었다. 당소란은 탁자에서 물러났다.
“이론만으로 안 됩니다. 몸으로 확인해야 해요.”
당소란은 해독침 세트를 길이별 굵기별로 정렬하고, 청동 병에서 작은 환 한 알을 손바닥에 떨어뜨렸다.
“임시 해독제입니다. 역류하는 독기를 일시적으로 순응시키는 효능이 있어요.”
강유신이 환을 삼켰다. 방 한가운데로 자리를 옮기고 당소란은 침대 옆에서 해독침을 손가락 사이에 꼈다.
강유신은 검을 빼들고 매화검법 열두 번째 초식 자세를 취했다. 오른발 앞, 왼발 비스듬히, 검 끝은 허리 높이. 평소라면 내공을 끌어올릴 자세였지만, 그는 의도적으로 내공을 비웠다.
당소란이 왼손을 뻗어 강유신의 오른쪽 어깨 뒤에 손바닥을 댔다. 미세한 독기가 실처럼 흘러들자 어깨 근육이 굳고 등줄기를 따라 땀방울이 맺혔다.
“독기를 검 끝까지 밀어 넣으세요. 내공으로 누르지 말고.”
강유신의 검 끝이 파르르 떨렸다. 떨림은 검신을 타고 손목으로, 어깨로 전해졌다. 독기가 경락을 따라 내공의 길을 반대로 밀려드는 이물감에 근육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검 끝에서 푸른 빛이 번뜩였다.
내공 부족으로 평생 쓸 수 없었던 열두 번째 초식이 독기를 받아들인 순간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검신을 감도는 푸른 기운이 매화 꽃잎 모양으로 흩어졌다 모였다. 등판을 타고 흐르던 독기가 검 끝에서 뿜어져 나와 공기를 갈랐다.
“됐…….”
당소란의 말이 끝나기 전, 강유신의 오른팔이 갑자기 검게 변색됐다. 팔꿈치 아래서 멈춰 있던 독기가 어깨를 넘어 목으로 치솟았다. 검을 쥔 손이 하얗게 경직되며 검 끝의 푸른 빛이 한순간에 흩어졌다. 무릎이 꺾였다.
당소란이 달려들어 오른손 해독침을 강유신의 목 옆 혈에 꽂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침이 박힐 때마다 검은 독기가 피부 아래에서 꿈틀거리다 가라앉았다. 다섯 번째 침을 꽂자 손에서 검이 챙그랑 떨어졌다.
당소란은 침을 더 꽂지 않고 손바닥으로 강유신의 등 한가운데를 짚었다. 독기를 역류시키는 대신, 이미 순환하기 시작한 독기를 따라 내공을 흘려 속도를 늦췄다. 강유신의 어깨가 천천히 내려가고 경직됐던 등 근육이 풀렸다. 목에 박힌 침들 사이로 검은 피가 한 방울씩 맺혔다.
당소란이 숨을 내쉬며 손바닥을 뗐다.
“검독쌍수. 같은 창시자가 만든 체계입니다.”
강유신은 바닥에 떨어진 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통제가 안 된다.”
“당연합니다. 독기를 받아들여 초식을 완성하는 건 가능하지만, 내공이 없으면 밀려드는 독기를 막을 수 없어요. 검에 실을 순 있어도 몸은 못 버텨요.”
당소란은 침을 하나씩 뽑으며 말을 이었다.
“마지막 세 초식은 원래 내공이 충분한 경지에서 쓰는 검입니다. 내공을 독기로 대체하면 초식의 위력은 그대로지만 몸이 독을 견디지 못해요.”
강유신이 상체를 일으켰다. 오른팔의 검은 변색은 사라지지 않았고, 침 구멍에서 마지막 한 방울이 어깨를 적셨다.
“해법은.”
당소란은 탁자로 돌아가 포개진 비급을 내려다보았다. 독맥과 검기 순환의 흐름이 정확히 반대로 그려진 그림. 손가락으로 심장 부위를 짚었다.
“두 길을 동시에 도는 겁니다. 내공과 독기를 같은 속도로 반대 방향으로. 그러면 상쇄되지 않고 공존합니다. 지금 이런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아마 창시자 외에는 없을 거예요.”
손가락을 심장에서 단전으로 옮겼다.
“실전에서 쓰려면, 실패하면 단순한 중독이 아니라 심맥이 끊깁니다. 검과 독의 조화는 실전에서 더 위험합니다.”
강유신은 떨어진 검을 주워 천천히 검집에 꽂았다. 한 번에.
“다시 한다.”
“안 됩니다. 지금 상태로는.”
당소란은 탁자에서 해독침을 한 개 더 집었다. 침 끝의 약액이 등불 빛에 반짝였다.
“오늘 밤은 여기까지입니다.”
강유신은 말없이 침대에 등을 기댔다. 오른손은 여전히 검자루를 쥔 채였다. 탁자 위 비급 두 장은 포개진 채 등불 아래 놓여 있었다. 완성된 경혈도 위로 검은 독기와 푸른 검기의 흐름이 서로를 감싸며 맴돌았다.
새벽 안개가 귀곡의 비탈길을 감쌌다. 강유신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오른팔의 검푸른 빛이 팔꿈치에서 멈춘 채 맥박에 맞춰 희미하게 일렁였다. 당소란이 떠나기 전 놓고 간 해독침이 어깨 아래 불룩한 살이 오른 팔 위쪽 세 곳에 꽂혀 있었고, 침 끝에서 스민 독기가 투명한 액체로 방울져 흘렀다.
바깥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두 명, 한 명은 무겁고 한 명은 비었다. 강유신은 검자루에 손을 얹었다.
문이 열렸다. 당소란이 먼저 들어왔고, 그 뒤로 철위령이 몸을 낮춰 문틀을 통과했다. 갈색 삼베옷에 아침 이슬이 배어 어두운 얼룩이 져 있었다.
“꼬박 하루를 달려왔더니 다리가 천근이네.” 철위령이 허리춤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무거운 소리가 났다. “연락을 받고 오긴 왔는데.” 그가 방 안을 둘러봤다. “궁색하군. 작은 것도 불태웠다더니.” 당소란의 손놀림이 약초를 고르며 짧게 멎었다.
강유신이 탁자 건너편을 턱짓했다. “앉아라.”
철위령이 평상에 걸터앉으며 주머니를 열었다. 그 안에서 종이 두 장이 나왔다. “먼저 이걸 봐.”
“네가 그걸 왜 가졌는지부터.” 강유신은 움직이지 않았다.
철위령의 눈이 졸린 듯 가늘어졌다. “철혈문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나.”
“사라진 지 십 년.”
“멸문당한 지 십 년.” 그의 말투에서 농담이 사라졌다. “열여섯에 문주의 아들은 가문의 주문서를 들고 도망쳤다. 남궁세가의 별관에 숨어든 건 사 년 전이다.”
당소란이 고개를 들었다. “남궁세가 비밀 별관.”
“그래. 거기서 이걸 찾았다.” 철위령이 왼손을 탁자 위로 올렸다. 넷째 손가락에 낀 검은 반지가 등잔불을 받아 표면의 무늬를 드러냈다. 세 개의 사선이 원을 가로지르는 문양. 강유신이 귀곡 주점의 동전에서 본 것과 같았다. “문주 대대의 징표다.”
“증거를 봐.”
철위령이 종이 두 장을 펼쳤다. 첫째는 누런 마지에 적힌 주문서였다. 상단에 남궁세가의 인장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철혈문 토벌을 의뢰하며, 생존자 일체를 처리할 것. 의뢰 금액과 기한이 글자 아래 나열되어 있었다. 둘째는 백비단에 쓴 학살 명령서였다. 문주를 시작으로 직계와 방계, 고용인들까지—목록이 나이 순으로 정리돼 있었다.
마지막 줄에 철혈문 문주 아들, 시신 미확인이라는 글자가 작게 적혀 있었다. 당소란이 숨을 들이켰다.
철위령은 종이 끝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내 이름이 이 줄이다.”
강유신은 두 문서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남궁세가 인장의 좌측 하단, 작은 글씨로 쓰인 별관의 위치가 눈에 들어왔다. “별관은 어디지.”
“귀곡에서 북쪽으로 이틀 거리. 매화령 서쪽 계곡에 있다.”
“열여섯 살에 혼자서.” 당소란이 손을 뻗었다 멈추었다.
“사 년 동안 하인으로 숨어 있었다. 그 집 앞마당의 돌계단이 몇 개인지도 안다.” 철위령의 손가락이 반지를 빙글 돌렸다. “이제 묻겠다. 강유신, 네놈의 복수는 어디까지냐.”
강유신은 대답 대신 검자루에서 손을 떼고 주문서를 접어 품에 넣었다. 학살 명령서는 당소란 쪽으로 밀었다. 당소란이 문서를 집으며 말했다. “남궁세가 별관이라면, 그쪽 무인들도 있겠군요.”
“스무 명 안팎. 외부인 출입은 없고, 한 달에 한 번 물자 수레가 들어간다.” 철위령이 탁자 모서리에 팔꿈치를 얹었다. “정보료는 네가 곽영주를 잡은 다음에 받기로 하지.”
강유신이 일어섰다. 오른팔의 독기가 움직임에 반응해 잠시 짙어졌다. 당소란이 그 팔뚝을 바라봤다. “침만으로는 한계가 있어요. 오늘 중에 해독제를 다시……”
“알고 있다.” 강유신이 허리춤에 찬 청성파 제자 패를 한 번 만졌다. 검지의 봉합된 상처가 천에 닿자 불빛에 비친 그의 얼굴이 짧게 경직됐다. 당소란은 더 말하지 않고 약초와 절구를 꺼냈다. 빻는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오후가 되자 안개는 걷혔지만 구름이 낮게 깔렸다. 당소란은 은신처 문을 나서며 품속의 해독침 세트를 확인했다. “오독문 잔당 흔적을 찾아볼게요.
은거처 근처 루트는 제가 더 잘 아니까.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올게요.” 문이 닫혔다. 강유신은 벽에 기댄 채 눈만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혼자 보내도 되나.” 철위령이 평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막아도 갈 거다.” 강유신은 눈을 감고 오른팔의 침을 하나씩 뽑아내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당소란은 귀곡의 좁은 골목을 벗어나 외곽으로 향했다. 은거처가 불타기 전 자객 하나가 도주했던 방향이다. 풀숲에 이틀 전 비에 반쯤 씻긴 발자국이 남아 있었고, 오독문 특유의 사문 밑창 무늬를 식별할 수 있었다.
그녀는 허리를 낮춰 흔적을 따라갔다. 숲이 끝나는 지점에 반쯤 무너진 돌담과 떨어진 문짝, 기울어진 서까래의 폐가가 나타났다. 마당 한가운데 깨진 항아리 조각들 사이로 발자국이 멈춰 있었다. 한 사람이 서서 무언가를 기다린 듯한 발의 각도였다.
당소란은 손목의 암기통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때, 발밑의 흙이 살짝 눌렸다. 땅속에서 얇은 철사가 튀어 올라 그녀의 발목을 감았다.
당소란의 몸이 곧바로 뒤로 물러났지만 철사는 놓지 않았다. 두 번째 격발음이 들렸다. 폐가의 창문 너머에서 가는 관이 튀어나왔고, 관 끝에서 흰 가루가 분사됐다.
그녀는 숨을 멈추며 소매를 휘둘러 가루를 쳐냈지만, 한 줌은 공기 중에 부유했다. 피부에 닿자마자 스며드는 냉기. 그 순간, 발목 근처의 철사에서도 같은 가루가 묻어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신경독이었다.
오른쪽 다리가 먼저 풀렸다. 그다음 왼손. 암기통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당소란은 숨을 몰아쉬며 벽 쪽으로 몸을 던졌다. 넘어지면서 손을 뻗어 벽돌을 짚으려 했으나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어깨가 바닥에 부딪히고 머리카락이 흙에 쓸렸다.
몸이 완전히 마비되기 전, 마지막으로 남은 손가락 하나가 허리춤의 주머니를 열었다. 그 안의 작은 청동 병을 굴려 바닥에 떨어뜨렸다. 병이 깨지며 부패 촉진 독이 흘러나왔다.
그 독이 흙에 스며들자 주변의 풀들이 순식간에 시드는 소리가 났다. 당소란의 시야가 천천히 흐려졌다. 그녀의 눈앞에 떨어진 벽돌 조각 하나, 그 표면에 먹으로 쓴 깨끗한 해서체가 보였다.
이 여자는 맡아 두겠다. 혼자 와라. 먹물 위에 찍힌 인장은 청성파의 푸른 소나무 문양이었다.
은신처에서 해가 기울 무렵,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강유신이 눈을 떴다. 그는 벽에서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열었다. 북서쪽에서 풍겨오는 썩은 풀, 급속한 부패의 단내. 당소란이 가진 부패 촉진 독의 냄새와 같았다.
“찾은 건가.” 철위령이 물었다.
강유신은 검을 들었다. 오른손으로 검자루를 쥐자 상처 부위에서 독기가 팔뚝을 따라 번졌다. 손가락이 붓고 손등의 핏줄이 검은색으로 부풀었다.
쥐는 힘은 그대로였다. 그가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그때, 바깥에서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전서구 한 마리가 창문 틈으로 날아들었다.
깃털 사이로 청성파 송림 특유의 송진 냄새가 밴 채였다. 철위령이 새의 다리에서 가느다란 죽간을 풀어 열자 짧은 글이 드러났다. 강유신, 네 여자를 살리고 싶다면 내일 청성파 비무대로 와라.
철위령이 죽간을 탁자 위에 던졌다. “함정이다.”
강유신은 대답 없이 죽간을 집어 들었다. 곽영주의 필체였다. 그는 청성파에 있었다. 정갈하고 단아한 획 하나하나에 온화한 미소가 배어 있었다.
철위령이 문 앞을 막아섰다. “지금 가면 저들이 원하는 대로다. 별관을 먼저……”
“비켜라.” 강유신의 목소리는 무게가 없었다. 검을 쥐기 전에 내는 호흡처럼 고요했다. 독이 번진 손은 이미 검자루를 감싸고 있었다. 손가락 마디가 붉게 부풀었고 손목까지 검은 실핏줄이 그물처럼 퍼졌다.
문을 열자 귀곡의 어귀가 어둠 속에 드러났다. 비탈길 양옆으로 폐가들의 그림자가 늘어서 있었다. 그 그림자들 사이로 낮은 발소리가 하나둘 움직였다.
오독문의 사문이 찍힌 밑창이 흙을 스치고 있었다. 강유신은 검을 든 손을 내리지 않았다. 부은 손가락 사이로 칼날이 달빛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