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잔매귀도

1화

월령협곡의 바위 그늘 아래서 청현은 숨을 죽였다.

회귀한 육체가 아직 낯설었다. 손바닥을 펴고 쥐는 동작 하나하나가 어딘가 어긋나 있었다. 십 년 익힌 감각은 머릿속에 남아 있는데, 팔과 다리는 한 번도 검을 쥐어본 적 없는 젊은 몸이었다.

협곡 안쪽, 달빛이 바위 사이로 비스듬히 꽂히는 지점에 네 개의 그림자가 있었다.

하나는 강휘였다.

청현은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청색 비단 도포의 옷자락이 바람에 살짝 들렸다. 강휘는 상대 셋에게서 한 걸음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만천문 흑의를 입은 밀사들. 가슴에 은실로 박은 문양이 달빛에 희미하게 반사됐다.

“밀서다.”

강휘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봉투 한 통을 밀사 중 키 큰 자에게 건넸다.

“장문인께서 기다리신다.”

밀사가 받으며 말했다. 강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돌아섰다.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협곡 북쪽 오솔길로 사라지는 데 채 열 발짝이 걸리지 않았다.

청현은 몸을 일으켰다. 복수의 대상이 지금 눈앞에서 걸어 나갔다. 다리는 따라가려 했으나 머리는 멈췄다. 저 밀서가 먼저다. 전생에 보지 못한 물건이다.

협검을 빼들었다. 2척 7촌의 얇은 날이 바람을 가르며 움직였다. 보법은 매화검의 기초다. 왼발을 축으로 오른발을 반 걸음 내딛는 동작까지는 좋았다. 그다음이 문제였다.

몸이 기억을 따라가지 못했다.

밀사들이 동시에 돌아섰다. 키 큰 자가 봉투를 품에 넣고 나머지 둘이 좌우로 흩어졌다. 청현의 검이 가장 가까운 밀사의 옷깃을 스쳤다. 베이기 직전 상대가 상체를 젖히며 거리를 벌렸다.

“청풍파 검법?”

밀사 하나가 낮게 읊조렸다. 손가락이 허리춤으로 갔다. 작은 주머니를 풀자 쓴 냄새가 번졌다.

당가 계열이다.

청현은 숨을 멈췄다. 전생에 이 냄새를 맡은 적이 있었다. 만천문이 구매한 독 중에서도 하급 축에 들지만, 경락을 타고 올라 마비시키는 성분이 섞여 있다. 팔 년 전 당가령과 거래하던 문서에 적혀 있던 것과 같았다.

밀사가 주머니를 흔들었다. 가루가 달빛 아래 퍼졌다. 청현은 뒤로 물러서려 했다.

발이 바위에 걸렸다. 균형이 무너지는 찰나, 몸이 먼저 반응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허리를 비틀어 가루의 중심을 피했다.

전생의 감각이 육체를 밀어붙였다. 하지만 속도가 부족했다. 오른발이 바위를 박차고 앞으로 튀어나갔어도, 검 끝이 밀사의 목에 닿기까지 한 호흡이 모자랐다.

밀사가 뒷걸음질 치며 두 번째 주머니를 꺼냈다. 나머지 둘도 같은 손동작으로 허리춤을 더듬었다. 셋이 동시에 살포할 태세였다. 청현은 물러서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현재 육체로는 결정타를 넣을 타이밍을 잡지 못한다.

바람이 방향을 틀었다.

협곡 입구 쪽에서 그림자 하나가 바위를 딛고 뛰어올랐다. 남색 협의에 회색 로브를 두른 여인이었다. 오른손에 쌍단검 하나를 쥐고 있었다. 긴 흑발이 땋아져 왼쪽 어깨 위로 흘렀다.

착지와 동시에 여인의 검 끝이 청현을 겨누었다.

“손 떼라.”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였다. 밀사들이 일제히 자세를 낮추는 게 보였다. 여인은 시선을 밀사들에게서 청현에게로 옮겼다.

“만천문 놈들하고 같이 있던 자가 누구냐.”

청현은 대꾸하지 않았다. 눈은 밀사 셋을 훑고 있었다. 가운데 있는 키 큰 자의 오른손이 주머니에서 빠져나와 소매 안으로 들어갔다. 독침 발사기다. 손목을 젖히는 각도로 보아 표적은 청현의 왼쪽이었다.

“한 방에 셋.”

청현이 짧게 말했다. 여인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지금 날 겨누고 있을 때가 아니다.”

발동됐다.

밀사의 소매에서 가느다란 침이 날아왔다. 청현은 이미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오른발로 지면을 박차며 왼쪽으로 비스듬히 뛰었다. 그대로라면 침은 허공을 갈랐을 것이다.

여인이 반 걸음 앞으로 나와 있었다. 검을 든 손이 아니라 빈 왼손이 침의 궤도 안에 들어와 있었다. 청현은 팔을 뻗어 여인의 어깨를 밀쳐냈다.

밀쳐진 여인의 몸이 옆으로 기우는 순간, 침이 청현의 왼쪽 어깨 뒤쪽에 박혔다.

타는 듯한 감각이 즉시 경락을 타고 퍼졌다. 왼팔의 감각이 둔해지며 손아귀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검을 떨어뜨리지는 않았으나,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여인이 자세를 바로 세웠다. 회색 눈동자가 청현의 어깨를 스쳤다. 검을 겨누던 손끝이 반 뼘 내려갔다.

밀사 키 큰 자가 발을 구르며 외쳤다.

“지금!”

바위 밑에서 굵은 쇠사슬이 터져 나왔다. 청현의 발밑 지면이 갈라졌다. 함정이었다. 석판 여러 장이 일제히 기울어지며 아래로 구멍이 열렸다. 여인의 발아래도 마찬가지였다.

청현은 균형을 잡으려 했으나 왼팔이 말을 듣지 않았다. 손가락이 바위 모서리를 스치고 미끄러졌다. 여인이 팔을 뻗으려는 동작을 보였지만 이미 늦었다. 둘의 몸이 동시에 지하로 떨어졌다.

두 명 높이쯤 추락해 거친 돌바닥에 부딪혔다. 청현은 오른쪽 어깨로 굴러 충격을 분산시켰다. 왼팔은 여전히 둔했다.

위에서 석판이 다시 맞물리는 남궁소리가 났다. 쇠사슬이 바위를 끄는 남궁소리가 이어졌다. 발소리 셋이 석실 위에서 움직이다가 멈췄다.

입구가 봉쇄됐다.

어둠 속에서 여인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청현보다 먼저 일어난 듯, 발걸음이 돌바닥을 한 번 울렸다.

“네가 맞은 침.”

여인이 어둠을 향해 말했다.

청현은 왼쪽 어깨를 짚었다. 독이 경락의 세 군데 혈을 막고 있었다. 전생의 기억으로 독의 성분을 더듬었다.

당가 하급 마비독. 두 시진이면 풀린다. 그보다 빨리 풀 방법도 알고 있었다.

“두 시진.”

청현이 답했다.

여인은 더 묻지 않았다. 품에서 부싯돌을 꺼내는 남궁소리가 들렸다. 작은 불꽃이 튀며 석실 내부가 드러났다. 가로세로 열 걸음 남짓한 공간이었다. 벽면은 깎아낸 암반이고, 바닥에는 깨진 목상자 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남궁소리는 불빛을 벽에 가져다 대며 출구를 찾기 시작했다. 청현은 앉은 채로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의 혈을 짚었다. 독이 번진 경락을 따라 내공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미약한 기를 밀어넣었다. 감각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청풍파.”

남궁소리가 등을 보인 채 짧게 던졌다.

청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왼쪽 어깨에서 번지는 마비가 팔꿈치까지 내려왔다. 청현은 등을 돌에 기댄 채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의 혈도를 짚었다.

촉촉하게 젖은 옷감 아래로 독침이 박혔던 자리가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내공을 끌어올리자 기의 흐름이 마비된 경락 앞에서 둔탁하게 막혔다. 하단전의 기반이 얕아서였다. 전생 같았으면 일초면 밀어냈을 독이다.

지금은 아니었다.

청현은 숨을 한 번 들이쉬고 손을 떼었다.

석실 반대편 벽을 등지고 앉은 남궁소리가 검자루를 손바닥 위에 올린 채 눈을 뜨고 있었다. 표정은 없었다. 시선만 청현의 왼쪽 어깻죽지에 접힌 옷감 주름 위에 멈춰 있었다.

“청풍파.”

단어 두 개였다.

청현이 손등에 묻은 피를 바지에 닦았다.

“그래.”

“그 검법은.”

남궁소리의 목소리는 벽에 부딪혀 짧게 울렸다.

“매화검.”

청현이 일어섰다. 마비된 왼팔이 축 처졌다. 검을 오른손으로 뽑았다. 날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반사됐다.

“하나쯤 보여줘야 네가 움직일 테니까.”

그가 검을 들어 허공에 첫 획을 그었다.

전생의 감각이 손목에 남아 있었다. 팔이 기억하는 궤적. 손끝에서 검 끝으로 이어지는 기의 흐름. '매화초현'의 첫 번째 전환점에서 검날이 떨렸다.

끊겼다.

내공이 부족한 탓이 아니었다. 현재 육체의 경락이 그 흐름에 맞지 않았다. 전생의 몸은 더 넓은 통로로 기를 실었다. 지금은 좁았다.

검을 내리자 남궁소리가 말했다.

“망가졌어.”

청현은 대답하지 않고 다시 검을 들었다.

이번에는 천천히 궤적을 그렸다. 기를 밀어넣지 않고 검의 무게와 손목의 각도만 확인했다. 전생의 감각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게 했지만, 현재 육체는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달리 정했다.

세 번째 시도에서 그는 기의 양을 절반으로 줄였다. 손끝에 실린 미약한 기운이 검날을 타고 흘렀다. 첫 전환점을 지나 두 번째 꺾임까지 이어졌다. 검 끝에 바람이 갈리는 남궁소리가 났다.

남궁소리의 등이 벽에서 떨어졌다.

“교정했어.”

“이걸로 충분하다.”

청현이 검을 거두며 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초식의 여파로 바닥의 먼지가 날리며 석실 안쪽 벽면을 드러냈다. 거기에 새겨진 문양.

세 개의 산봉우리가 겹쳐진 형상. 만천문의 휘장이었다.

청현이 벽으로 다가갔다. 남궁소리도 그의 뒤에서 움직였다.

문양 아래로 길게 긁힌 자국이 여럿 있었다. 손톱자국이었다. 누군가 이 벽을 긁으며 출구를 찾다가 죽었다. 바닥에는 뼛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옆에 놓인 녹슨 검 한 자루도.

“만천문.”

남궁소리가 낮게 중얼거렸다.

청현은 쪼그려 앉아 뼛조각 옆의 것을 집었다. 길이 두 치 정도 되는 얇은 침. 끝이 검게 변색돼 있었다.

“당가 계열이다.”

“독침?”

“오금독. 하단전으로 올라가기 전에 경락을 태운다.”

청현이 침을 내려놓으며 왼쪽 어깨를 만졌다. 아까보다 마비의 범위가 넓어지지 않았다. 내공이 억제하고 있었다.

“해독제는.”

“지금은 필요 없어.”

그가 일어서며 말했다. 남궁소리의 시선은 여전히 만천문 문양에 붙박혀 있었다.

석실 상부에서 작은 구멍을 통해 가느다란 연기가 새어 들어왔다. 푸른빛이 도는 연기였다. 바닥에 닿자 돌 표면이 부글거리듯 변색됐다.

“연막독.”

남궁소리가 소매를 찢어 두 장의 약포를 꺼냈다. 하나를 청현에게 던졌다.

“비상용. 빚이야.”

청현이 약포를 받아 코와 입을 가렸다. 약재 향이 폐로 밀려 들어왔다.

연기는 점점 굵어졌다. 석실 천장의 중앙 구멍 세 개에서 동시에 뿜어져 나왔다. 남궁소리가 약포를 덧대며 벽 쪽으로 물러섰다.

“모서리. 남서쪽.”

청현이 검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석재가 다르다.”

남궁소리가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벽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세 번째 타격에서 남궁소리가 바뀌었다. 얇았다.

그녀가 검을 뽑았다. 청현도 오른손에 검을 다시 쥐었다. 연기가 허리 높이까지 내려왔다. 바닥에서 한 자 정도 위까지 시야가 잠겼다.

남궁소리의 검로가 먼저 벽을 쳤다. 돌가루가 튀었다. 청현이 그 옆에 붙어 같은 지점을 찔렀다.

한 번. 두 번.

‘매화초현’의 동작을 그대로 밀어넣었다. 수련할 때보다 더 적은 기로, 더 짧은 궤적으로. 전생에 그가 모르던 방법이었다. 현재 육체가 가르쳐준 길이었다.

남궁소리가 그 흐름을 곁눈으로 쫓았다.

“매화검 맞군.”

“청풍파라면 만천문과 무슨 관계지.”

청현이 벽의 균열에 검을 찔러넣으며 답했다.

“관계 없어.”

벽이 갈라졌다. 바깥 공기가 흘러들었다. 어둡고 축축했다. 통로였다.

연기가 그 순간 급속히 팽창하며 시야를 잠식했다. 석실 상부에서 밀사들의 발소리가 급히 멀어졌다.

굉음이 들렸다. 석실 외벽 어딘가에서 쇠사슬이 끌리는 남궁소리.

청현이 검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움직인다.”

발동됐다.

밀사의 소매에서 가느다란 침이 날아왔다. 청현은 이미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오른발로 지면을 박차며 왼쪽으로 비스듬히 뛰었다. 그대로라면 침은 허공을 갈랐을 것이다.
잔매귀도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