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공녀의 재계약
1화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피비린내에 숨이 막혔다.
리아나는 눈을 떴다.
시야에 익숙한 천장이 들어왔다. 벨루아 저택의 침실. 옅은 담쟁이 무늬가 새겨진 커튼 사이로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히 밀려들고 있었다. 그 빛의 각도가 낯설었다. 저녁 무렵이었어야 할 텐데.
심장이 느리게 내려앉았다. 손을 들어 올리자 검붉은 얼룩 하나 없는 손가락이 천천히 접혔다. 독이 퍼져나가던 감각이 없다. 내장이 타들어 가던 열도, 귓가를 때리던 연회장의 비명도.
사라졌다.
리아나는 상체를 일으켰다. 이불이 무릎 아래로 흘러내렸다. 손바닥으로 침대보를 짚자 부드러운 면직물의 촉감이 되돌아왔다. 오른손을 뒤집어 손목을 확인했다. 붉은 띠가 단단히 묶여 있었다.
그 띠를 풀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아는 것과 다른 것을 확인하기 위해 방 안을 천천히 훑었다.
협탁 위의 작은 탁상시계. 유리 덮개에 금이 가 있던 그 시계가 멀쩡히 똑딱이고 있었다. 벽에 걸린 달력은 제국의 478년 여섯 번째 달. 서가 한구석에 가지런히 꽂힌 약학서 세 권 — 이건 3년 전 그녀가 독물학에 빠져 있을 때 모은 장서였다. 다음 해 화재로 반쯤 타 없어졌던 책들이다.
리아나는 천천히 발을 바닥에 내렸다. 차가운 대리석이 발바닥에 달라붙었다. 세면대 위의 거울로 걸어가 자기 얼굴을 확인했다.
스물한 살의 얼굴이었다. 아직 피로가 각인되지 않은 눈가, 왼쪽 눈 밑의 작은 갈색 점. 기억 속 마지막 순간에 깊게 패여 있던 미간의 주름은 없었다. 짙은 에메랄드 그린 눈동자가 거울 속에서 그녀를 응시했다.
3년 전이다.
한 번뿐이라고 했던 회귀의 기적이 그녀에게 주어졌다. 정확히 오늘이다. 오늘 저녁, 벨루아 백작 저택의 소규모 만찬에서 시종 하나가 쏟는 와인을 받아내지 못해 가문의 체면을 깎아먹는 날. 바로 그 작은 실수 때문에 리아나는 사교계에서 경솔하다는 평가를 얻었고, 그 평가는 3년 뒤 그녀의 말 한마디를 누구도 믿지 않게 만든 첫 고리였다.
그 만찬은 가도 돌아올 게 없다.
대신 갈 곳이 생겼다.
리아나는 거울 앞에서 머리를 정돈했다. 히비스커스 빛 긴 웨이브를 단단히 올려 묶었다. 옷장에서 청색 면 드레스를 꺼내 입고, 허리띠 안쪽에 작은 단검을 밀어 넣었다. 겉으로는 평범한 외출복이었다. 마지막으로 망토를 두르며 협탁 서랍에서 벨루아 가문의 은장 인장이 박힌 문장 반지를 꺼내 왼손 검지에 끼웠다.
저택 밖으로 나서자 마부가 놀라 뛰어왔다. “공녀님, 저녁 만찬 준비가 아직—” “취소해. 대신 클라우스 하인겔 공작 저택으로 마차를 준비시켜.”
마부의 입이 벌어졌다. “공작 저택이면… 예고 없이…” “지금.”
마차가 저택을 떠날 무렵 해는 낮아지기 시작했다. 리아나는 마차 창틀에 손을 얹고 스쳐 지나가는 거리를 보았다. 저택가의 담쟁이, 상점 간판들, 거리의 등불 — 모두 3년 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하나하나가 기억 속의 그림과 같았다.
그녀는 눈을 감지 않았다.
마차가 클라우스 하인겔 공작 저택의 정문에 멈춰 섰을 때는 이미 어둑어둑한 저녁이었다. 철제 정문 위로 푸른 늑대 휘장이 펄럭이고 있었다. 문지기 장교가 마차를 가로막았다. “벨루아 가문의 리아나 공녀입니다. 공작님께 긴급히 전갈을 드릴 일이 있어 왔습니다.”
장교는 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확인했다. “약속이 잡혀 있지 않으신데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전달해 주십시오. 연회장에 관한 정보를 가져왔다고.”
그 말에 장교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곧 누군가에게 전갈을 보냈고, 몇 분 뒤 정문이 열렸다.
하급 집사 한 명이 리아나를 안내했다. 공작 저택의 복도는 좁고 석벽이 드러나 있었으며, 군데군데 걸린 검과 방패가 장식의 전부였다. 그 끝에 서재가 있었다. 집사가 문을 열자, 책상 너머에서 칼렌 클라우스 하인겔이 일어서고 있었다.
쨍한 코발트 블루의 눈이 리아나를 향했다. 흑단처럼 짧게 정돈된 머리, 왼쪽 턱에서 광대뼈로 이어지는 얕은 흉터. 군복 상의만 걸친 어깨 너머로 실전용 대검이 벽걸이에 걸려 있었다.
리아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예고 없이 찾아와 송구합니다, 공작님.”
칼렌은 그녀를 한 번 훑고는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
자신은 앉지 않고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아 팔짱을 꼈다. 왼손 검지에 낀 스톰블루 보석 반지가 낮은 탁음과 함께 책상에 닿았다.
“연회장 정보라고 했나.” “네.” “말해 봐.”
리아나는 의자에 앉아 등을 곧게 폈다. “사흘 뒤 제국 연회장에서 독살이 시도될 예정입니다. 대상은 황태자 전하입니다.”
칼렌의 눈이 좁아졌다. 한 박자 늦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재미있군. 그걸 벨루아 가문의 공녀가 어떻게 알았지.”
정보 출처를 묻는 첫 번째 검증이었다. 예상한 바다.
“출처는 밝힐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정보가 사실이라는 전제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전제를 내가 믿어야 말이지.”
칼렌이 천천히 책상 앞으로 걸어왔다. 리아나의 의자에서 한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키 차이 때문에 그는 그녀를 거의 내려다보는 각도였다.
“예고도 없이 찾아와 제국 연회의 독살 음모를 꺼내고, 출처는 못 밝힌다. 이게 협상인가, 시험인가.”
리아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제안입니다. 공작님.”
칼렌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저는 그 음모를 저지할 방법을 알고 있고, 그 방법에는 공작님의 위상이 필요합니다. 그 대가로 저는 공작님께 계약 결혼을 제안합니다.”
서재 안의 모든 소리가 순간적으로 밀려난 것 같았다. 벽난로의 장작 터지는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울렸다. 칼렌은 웃지 않았다. 그 냉담한 얼굴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계약 결혼.” “네.” “네가 나한테?”
거기에 실린 어조는 의문도 경멸도 아니었다. 정말로 궁금하다는, 분석 중인 자의 날선 집중이었다.
“조건은.” “공작님께서는 계약 기간 동안 가문의 명예 회복에 필요한 지원을 벨루아 가문에 제공하십니다. 그리고 저는 제 정보와 계획으로 연회장의 위협을 제거합니다.”
칼렌이 손끝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반지는 한 번만 울렸다. “네 가문의 명예 회복. 그게 지금 급한 일인가.”
“사흘 뒤 연회장에 설 자격을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칼렌의 고개가 아주 살짝 기울었다. 리아나는 그가 ‘자격’이라는 단어를 삼키는 것을 보았다.
“정보 출처도 못 밝히면서 그 자격을 내가 인정하길 바라는 거냐.” “공작님께서 이 정보의 실체를 확인하실 시간은 충분합니다. 그동안 저는 이 저택에서 하룻밤 머물 수 있겠습니까.”
칼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돌아서서 책상 위 서류를 집어 들었다. 아무 의미 없는 서류였다. 그는 읽지도 않고 한 번 훑은 뒤 다시 내려놓았다.
리아나는 시선의 초점을 옮기지 않았다. 그가 결정하는 순간을 기다렸다.
“내일 아침까지 답을 주겠다.”
칼렌이 다시 마주 섰다. 코발트 블루의 눈이 더 짙어져 있었다.
“하룻밤 체류는 허락하지. 다만 한 가지 더 물어야겠다. 네가 지금 이 자리에서 제안한 그 말들, 그 대가로 내가 이걸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하려는 거냐.”
“그때는 다른 이를 찾습니다.”
칼렌의 입가에 처음으로 옅은 실소 비슷한 것이 스쳤다. 리아나는 그 웃음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았다. 흥미였다. 상대를 평가하는 자의 쌀쌀한 흥미.
“집사에게 손님방을 준비시키겠다.”
칼렌이 집무용 종을 한 번 울렸다. 문이 열리자 그가 지시했다. “벨루아 공녀를 동관 손님방으로 모셔라. 내일 아침까지 출입을 제한하지 않는다.”
리아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짧은 목례와 함께 등을 돌렸다. 문을 나서기 직전, 칼렌의 낮은 음성이 따라붙었다. “공녀. 출처를 못 밝힌다고 했지.” “네.”
리아나가 멈춰 섰다.
“그 말을 믿지는 않는다. 다만 확인할 시간은 네게도, 나에게도 있다.”
등 뒤에서 서류가 다시 책상 위에 놓이는 소리가 났다. 칼렌은 더 묻지 않았다. 리아나는 문 밖으로 나왔다.
복도를 따라 안내받으며 그녀는 손끝으로 망토 주름을 한 번 접었다. 칼렌은 정보 출처를 의심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그녀라는 인물 자체를 하나의 변수로 등록했다. 신뢰가 아니라 계산으로 이쪽을 올려놓은 것이다.
그 태도가 낯설지 않았다. 회귀 전에도 그는 그런 남자였다. 의심하고, 검증하고, 그럼에도 쓸모 있다고 판단하면 품 안에 들였다.
그 품 안에 드는 것이 이번 생의 첫 번째 목표다.
발걸음이 동관 입구에 닿았을 때 리아나는 짧게 심호흡했다. 이 저택의 하룻밤은 일방적인 양보가 아니다. 그가 검토하겠다고 말한 순간, 계약은 이미 그에게도 선택지가 되었다.
서재 문이 닫히고 복도에 발소리가 멀어진 뒤, 칼렌은 의자에 깊이 기대어 눈을 감았다. 리아나가 나가고 십 분쯤 지났을까. 감았던 눈을 뜨고 그가 집무실 옆 작은 객실 침대에 누운 것은 한 시간이 더 지나서였다.
서재 문이 닫히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리아나는 세 걸음쯤 걸어가다 멈춰 섰다. 복도 벽의 촛불이 기류에 흔들리며 그림자를 길게 늘였다. 이곳이었다.
회귀 전, 바로 이 복도에서였다.
3년 전의 리아나는 이 집무실 앞에서 네 시간을 기다렸다. 연회장 독살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가문을 위해, 단 한 번의 면담을 구걸하러 왔었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날 밤 그녀는 저택 뒷문으로 쫓겨났고, 사흘 뒤 아버지가 체포됐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리아나는 오른손으로 왼쪽 손목의 붉은 띠를 한 번 쓸었다. 천 아래 흉터가 단단하게 느껴졌다.
이번엔 다르다.
발걸음을 옮겼다. 계약 제안 초안은 이미 칼렌의 책상 위에 있다. 하룻밤 체류 허가도 받았다. 복도에 선 지 고작 몇 분, 그리고 그녀는 스스로 걸어 나오는 쪽을 택했다.
복도 끝에서 대기 중인 하급 집사 한 명이 허리를 굽혔다.
“손님 방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부탁합니다.”
서재 안, 칼렌은 문이 닫히고도 한동안 서 있었다.
탁자 위에는 리아나가 건넨 계약 제안 초안이 펼쳐져 있다. 여섯 장 분량의 빼곡한 필적. 그녀가 직접 써 내려간 문서다. 조항 하나하나에 실용적인 계산이 배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문서가 아니라, 방금 전 그녀가 앉았던 의자로 향했다.
협상 중이었다. 리아나가 손을 뻗어 찻잔을 집는 순간, 소매가 살짝 밀려 올라갔다. 붉은 띠 아래로 드러난 건 얇고 흰 피부가 아니었다. 언뜻 보기에도 오래된, 그러나 결코 단순하지 않은——
손목을 한 바퀴 두른 흉터.
칼렌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전장에서 본 상처와는 달랐다. 저건 속박의 흔적이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닌, 장기간 같은 부위를 반복해서.
그녀는 재빨리 소매를 내렸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웃으며 계약 조건을 이어갔다.
칼렌은 천천히 책상으로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손가락으로 탁자 모서리를 두 번 두드렸다. 습관적인 동작이었다.
리안의 검사, 독물 식별 능력, 황실 연회장에서의 내부 정보. 그녀가 제시한 ‘가치’들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무게가 있었다. 문제는 그 출처다.
그는 서랍에서 작은 벨을 꺼내 한 번 울렸다.
십여 초 만에 노크 소리가 났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삼십 대 중반의 남자가 들어섰다. 군복 대신 어두운 색 평복 차림이었지만, 허리춤에 찬 단검의 각도에서 군인 특유의 정렬이 묻어났다.
“부관 세르지오, 부르셨습니까.”
칼렌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
“벨루아 가문의 리아나. 그녀의 최근 3년 행적을 조사해.”
세르지오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벨루아라면…… 3년 전 독살 사건 이후 사실상 몰락한……”
“알고 있다.”
칼렌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탁자 위의 계약서를 한 번 내려다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 3년이 문제다.”
그가 시선을 들어 세르지오를 똑바로 바라봤다. 코발트 블루 눈동자가 촛불 아래서 짙게 가라앉았다.
“몰락한 가문의 딸이 어떻게 황실 연회 독살 계획을 사전에 알고, 어떻게 검술과 독물 지식을 갖췄으며——”
잠시 뜸을 들였다.
“어떻게 저런 흉터를 갖고도 태연한지.”
세르지오는 묻지 않았다. 공작이 세부 사항을 말하지 않을 때는, 그럴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기한은.”
“사흘. 연회 전까지.”
“알겠습니다.”
세르지오가 문을 닫고 나가자 서재는 다시 고요해졌다.
칼렌은 리아나의 계약 제안 초안을 집어 들었다. 마지막 장, 서명란은 비어 있었다. 그의 시선은 종이 위에 멈추지 않고, 방금 전 그녀의 손목을 덮은 붉은 천을 향하고 있었다.
벨루아의 딸. 너는 알고 있다. 네가 알 리 없는 것을.
그가 문서를 접어 서랍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