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공녀의 재계약
2화
손님방으로 향하던 리아나의 발걸음이 복도 중간에서 멈췄다. 등 뒤에서 절도 있는 군화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칼렌의 목소리였다. 리아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촛불이 드문 복도에서 그의 실루엣이 검게 솟아 있었다.
“응접실로 와.”
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뒤를 따랐다. 응접실 벽난로에는 불이 피워져 있었고, 타원형 탁자 위에 놋쇠 촛대 세 개가 놓여 있었다. 칼렌은 탁자 건너편 의자를 손짓으로 가리켰다.
“손목.”
그가 앉자마자 짧게 말했다. 리아나의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오른쪽 소매 끝을 스쳤다.
“이미 봤다. 그게 무슨 흔적인지 묻는 거다.”
칼렌의 왼손 검지가 탁자 모서리를 쓸었다. 스톰블루 반지가 촛불을 받아 번뜩였다. 리아나는 소매 속으로 손을 움츠리지 않고 오른손을 탁자 위로 올렸다. 붉은 띠가 촛불 아래 드러났다.
“속박입니다. 3년 전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붉은 띠를 덮은 손가락만이 살짝 경직되어 있었다.
“누구.”
“지금은 고인입니다.”
“죽였나.”
“아닙니다. 저를 가둔 자들은 따로 있습니다. 공작님께서 그분들의 이름을 궁금해하실 거라 생각합니다만——”
그녀가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그건 계약 체결 이후에 말씀드리는 편이 서로에게 유리할 것 같습니다.”
칼렌의 입술이 살짝 비틀렸다. 웃는 것인지 비웃는 것인지 구분되지 않는 각도였다.
“협상 중이라고 봐야 하나.”
“그렇습니다. 공작님께서 제 흉터를 확인하셨다는 건, 제가 단순한 몰락 가문의 딸이 아니라고 판단하셨다는 뜻이겠죠.”
리아나가 시선을 들어 그를 마주했다.
“그렇다면 거래는 더 명확해집니다. 저는 두려움에 떠는 망명자가 아닙니다. 쓸모를 증명할 준비가 된 파트너다.”
“파트너.”
칼렌이 그 말을 천천히 씹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팔짱을 꼈다.
“내 편에 선다. 무엇을 대가로 바치겠나.”
“충성 같은 건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충성은 증명하기까지 시간이 걸리고, 그 시간 동안 공작님은 저를 감시해야 합니다. 비효율적이죠.”
리아나가 상체를 약간 앞으로 숙였다. 촛불이 진홍색 머리카락을 타고 흘렀다.
“대신 가치를 제시합니다. 실시간으로 확인 가능한, 지금 당장 검증할 수 있는 가치를.”
“연회장 독살 계획.”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녀가 왼손 검지를 폈다. 벨루아 가문의 은장 반지가 반짝였다.
“우선, 독물 식별. 제 혀는 오연스무 가지 독을 구분합니다. 둘째, 황실 연회의 배치와 동선. 저는 회장의 모든 출입 경로와 각 귀족 가문의 배정 좌석을 외우고 있습니다. 셋째, 세르반테스 자작의 재정.”
잠시 뜸을 들였다. 그 이름에 칼렌의 손가락이 팔뚝에서 멈췄다.
“자작은 현재 제국 은행에 세 개의 비공개 구좌를 보유 중입니다. 자금 출처는 북부 변경의 밀수 경로. 증빙 서류의 위치도 알고 있습니다.”
열 초쯤 지나 칼렌이 손을 풀었다.
“정보 출처는 묻지 않겠다. 대답하지 않을 테니까.”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벽난로 쪽으로 걸어갔다.
“네 가치는 확인했다. 조건을 들어.”
리아나는 그대로 앉아서 그의 등에 대고 말했다.
“첫 번째, 가문의 명예 회복을 위한 공작님의 전폭적인 지원. 두 번째, 계약 기간은 3년. 세 번째——”
그녀의 손끝이 치맛자락을 짚으며 미세한 힘을 실었다.
“계약 파기 시 모든 조건은 무효가 되며, 공작님께서 받으신 정보는 반환 불가로 간주합니다.”
칼렌이 돌아섰다. 벽난로 불빛이 왼쪽 얼굴만 비추고 오른쪽은 그림자로 남겼다.
“반환 불가라.”
“네. 거짓일 경우 마법 계약의 징표가 제 몸에 나타날 테니, 그땐 공작님 마음대로 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거짓이 아닙니다.”
칼렌은 대답 없이 벽난로 옆의 줄을 당겼다. 집사 호출용 벨이었다. 잠시 뒤 중년의 집사가 문을 열었다.
“변호사 둘을 불러. 한 명은 저택 소속, 한 명은 벨루아 가문에서 쓰던——”
그가 리아나를 돌아봤다.
“누구로 할까.”
“칼리안 페르난데스. 페르난데스 사무소의 대표 변호사입니다.”
“찾아.”
삼십 분이 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흑색 법복에 클라우스 하인겔 가문의 푸른 휘장을 단 중년 남성과, 은발에 얇은 금테 안경을 쓴 육십 대 초반의 노신사였다. 노신사는 리아나를 보자마자 걸음을 멈추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공녀님…… 살아 계셨군요.”
“오랜만입니다, 페르난데스 변호사님.”
그 사이 하인들이 마법 구속 조항이 인쇄된 제국 표준 혼인 계약 용지를 탁자 위에 펼쳐 놓았다. 칼렌이 자기 쪽 변호사에게 턱짓했다.
“기본 틀은 표준 계약으로. 특수 조항을 추가한다.”
페르난데스가 리아나에게 조용히 물었다.
“공녀님께서 원하시는 조항은.”
“가문 명예 회복을 위한 지원 조항이요. 상대측 칼렌 클라우스 하인겔 공작의 무조건적 지원을 명시해 주십시오.”
공작 측 변호사가 펜을 멈추고 칼렌을 올려다봤다. 칼렌은 팔짱을 낀 채 입가에 옅은 냉소를 걸고 있었다.
“무조건적 지원. 벨루아의 딸은 협상이라는 걸 아는 모양이군.”
그가 왼손으로 펜을 집어 서명란으로 내렸다. 검은 잉크가 거칠게 종이를 긋는 소리가 났다.
칼렌 클라우스 하인겔
리아나는 그가 내려놓은 펜을 집었다. 따뜻했다. 손가락이 잠시 멈췄다가 곧 힘을 주어 서명을 이어갔다.
리아나 벨루아
마지막 획을 긋는 순간, 계약서 위로 옅은 빛이 솟아올랐다. 마법 구속 조항의 문자들이 한 글자씩 떠올라 공중에 배열됐다가 사라졌다. 동시에 리아나의 왼쪽 손등으로 작열감이 스쳤다.
불꽃에 닿은 듯한 통증은 일순간이었다. 곧 은빛 실로 수놓은 듯한 두 개의 겹쳐진 원 문양이 피부 위로 스며들듯 나타났다. 계약 성립의 징표였다.
칼렌도 오른손 장갑을 벗자 같은 문양이 손등에 떠올랐다가 피부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가 손등을 한 번 훑어 보고 장갑을 다시 꼈다.
“계약 성립입니다.”
공작 측 변호사가 공식 어조로 선언했다. 리아나는 왼손 손등을 짧게 내려다봤다. 은빛 문양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계약이 유지되는 한 다시는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손을 내리며 칼렌을 향했다.
“파트너로서, 첫 번째 정보를 지금 바로——”
“내일 아침.”
칼렌이 말을 잘랐다. 서명된 계약서를 집어 변호사에게 건넸다.
“오늘 밤은 휴식이다. 손님방으로 돌아가.”
리아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응접실 문을 향했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회귀 전 단 한 번도 넘지 못했던 그 문턱.
넘었다.
손잡이를 돌리며 떠오른 생각은 그것뿐이었다.
직후 칼렌이 먼저 응접실 문을 열었고 두 사람은 나란히 복도를 걸었다. 칼렌의 발걸음이 왼쪽 갈림길에서 멈추며 서재 방향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리아나는 그 손짓을 따라 복도 끝 어두운 참나무 문 앞에 섰고, 칼렌이 안쪽에서 불을 밝히자 등유 램프 불빛이 책장 사이로 길게 늘어졌다.
계약서의 마지막 획이 종이를 긋는 소리가 서재에 가라앉자, 칼렌은 펜을 내려놓고 리아나를 똑바로 보았다.
“한 가지 더. 공작가 내부 감찰 임무를 맡아라. 연회 전까지, 이 저택 안 하인들의 동향을 점검하는 거다.”
“구체적인 의심 대상이 있으십니까.”
칼렌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이 리아나의 오른쪽 손목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붉은 띠가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정보 출처를 묻지 않기로 했지만—— 흉터는 다르다. 그 상처를 어디서 얻었지.”
“이것은 제 개인적인——”
“개인적이지 않은 게 하나 있더군.” 칼렌의 어조가 한 겹 낮아졌다. “네 오른손 검술은 상당한 수준이다. 그런데 손목에 저런 오래된 속박 흔적이 있다. 숙련된 검술사가 무슨 일로 묶여 있었던 거냐.”
리아나의 왼손이 무심한 듯 소매 위로 올라가 붉은 띠를 감쌌다. “공작님께서는 아직 저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으시는 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 상처가 감찰 임무와 무슨 관련이——”
“있다고 보는 거다.” 코발트 블루 눈동자가 촛불을 반사하며 짙게 빛났다. “저택에 드나드는 자들 중에는 전장에서 포로를 다루던 수법에 능한 자들이 있다. 네 손목을 그렇게 만든 것과 같은 부류다. 네가 그들을 알아볼 가능성이 있고, 그들이 너를 알아볼 가능성도 있다.”
리아나의 호흡이 한 번 끊겼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입가에 작은 미소를 걸었다. “공작님께서 제 신변을 걱정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걱정이 아니라 계산이다. 손실은 곤란하니까.” 칼렌이 의자에서 일어서며 책상 위 작은 종이 봉투를 그녀 쪽으로 밀었다. “하녀 배정 명단이다. 오늘 밤 담당 하녀가 네 방으로 올 거다.”
리아나가 봉투를 집어 들었다. 칼렌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한 번 그녀의 손목에 머물렀다. 그가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듯 눈빛이 잠시 흐려졌다가, 곧 평소의 냉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내일부터 시작해라.”
리아나는 서재 문을 나서며 봉투 안의 종이를 반쯤 꺼내 보았다. 배정 하녀: 엘레나 로벤. 그녀의 발걸음이 복도 한가운데서 멈췄다. 살아 있는 이름이었다. 회귀 전, 공작 저택 하녀실에서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뒤로 찾지 못했던 그 이름. 리아나는 종이를 다시 봉투에 넣으며 손가락으로 문지르듯 글자를 한 번 더 쓸어내렸다.
하녀 복도는 복층 구조였다. 리아나는 익숙한 듯 오른쪽 세 번째 방 앞에 섰다. 노크를 하기도 전에 문이 안쪽에서 열렸다.
“아! 공녀—— 아니, 부인. 앗. 아직 적응이……” 밀짚색 단발머리가 앞으로 쏟아질 듯 숙여졌다.
“엘레나.” 리아나는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 목이 메는 것을 눌렀다. “방으로 들어가도 되겠니.”
“네! 당연하죠!”
방 안은 작았다. 침대 하나, 탁자, 약제 냄새를 배출하는 작은 환기구. 탁자 위에는 약병 몇 개와 절구, 그리고 엘레나 특유의 낡은 가죽 수첩이 펼쳐져 있었다.
리아나가 물끄러미 그 수첩을 내려다보았다. 회귀 전에도 저 수첩은 있었다. 독물 식별 기록, 수면제 배합 비율, 진통제——
“저기, 부인. 정말 괜찮으세요? 얼굴색이……”
엘레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리아나의 얼굴을 살폈다.
“너.” 리아나의 목소리에서 예절의 껍질이 한 겹 벗겨졌다. “앞으로 내 차와 음식은 네가 직접 챙겨라. 다른 하인을 거치지 말고.”
엘레나의 눈이 커졌다. “……그럼 그 독버섯 사건 때처럼 또 무슨 일이?”
“사흘 뒤 연회.” 리아나는 탁자 끝을 짚으며 숨을 들이쉬었다. 엘레나가 알아서는 안 될 비밀을 묻는 사람의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회귀 전에도 똑같이 그랬다. 그리고 그때는 아무 말도 해주지 못했다. “누군가 독을 쓸 거야. 연회장에서. 어떤 술잔에, 어떤 타이밍에—— 나는 알고 있어.”
엘레나의 손이 찻잔 손잡이에서 떨어졌다. “부인, 그걸 저한테……”
“네가 필요해. 독물 식별은 네 분야니까.” 리아나는 수첩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페이지 한구석에 엘레나가 갈겨 쓴 초서체가 어렴풋이 보였다. “그리고 나는—— 네가 살아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마지막 문장은 거의 혼잣말에 가까웠다. 엘레나는 한 박자 머뭇거리다가, 무언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