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공녀의 재계약
3화
황실 알레시아 연회장의 샹들리에는 제국력 478년 여섯 번째 달의 밤을 낮처럼 밝히고 있었다. 리아나는 칼렌의 팔에 손을 얹은 채 연회장 중앙 통로를 천천히 걸었다. 오케스트라의 현악기 소리가 흐르고, 벽면을 따라 늘어선 하인들이 은쟁반에 담긴 술잔을 하객들에게 나르고 있었다.
“긴장한 얼굴이 아니군.”
칼렌의 목소리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였다.
“긴장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리아나의 시선은 이미 연회장 왼편을 훑고 있었다. 세르반테스 자작의 좌석. 회귀 전에는 저 자리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던 남자다. 오늘은 아직 멀쩡한 얼굴로 인사를 건네고 있다. 문제는 그에게 술잔을 건넬 하인이었다.
기억 속 하인은 키가 작고 어깨가 좁은 남자였다. 그런데 지금 세르반테스 자작에게 다가가는 하인은 중간 키에 왼손 약지에 은반지를 끼고 있었다. 리아나의 걸음이 미세하게 느려졌다.
칼렌이 그 변화를 감지하고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리아나는 이미 그의 팔에서 손을 떼고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자작님.”
리아나의 목소리는 정중했지만, 주변 하객 서넛의 대화를 멈추게 할 만큼 또렷했다. 세르반테스 자작이 술잔을 받아 들기 직전 멈칫하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 공작 부인. 영광입니다——”
“그 술잔을 받지 마십시오.”
연회장의 소음이 한 템포 줄어들었다. 하인이 든 은쟁반 위에서 술잔 하나가 흔들렸다. 리아나는 하인의 손목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술잔에 든 것은 아마릴리스 뿌리 추출물입니다. 무색무취지만, 혀끝에 닿는 순간 미세한 아린 감각이 있습니다. 드시기 전에 확인하시길 권합니다.”
하인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세르반테스 자작이 천천히 술잔에서 손을 떼며 뒤로 물러섰다.
“무슨 근거로——”
“근거를 원하신다면.” 리아나는 하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저 하인이 오늘 저녁 주방에 들어간 횟수를 확인하십시오. 보통 연회 하인은 지정된 구역에서만 술잔을 나릅니다. 그런데 저 하인의 소매 안쪽에는 아직 주방용 밀가루가 묻어 있군요.”
하인이 본능적으로 오른쪽 소매를 감추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 순간 칼렌이 리아나의 오른쪽 뒤에서 반 걸음 앞으로 나왔다. 손을 들어 근위대를 향해 짧게 신호했다.
근위대원 세 명이 재빨리 다가와 하인의 양팔을 붙잡았다. 은쟁반이 떨어지며 술잔이 대리석 바닥에 부딪혀 굴렀다. 술잔의 내용물은 바닥에 얇게 퍼졌고, 몇 초 뒤 대리석 표면이 미세하게 변색되기 시작했다.
세르반테스 자작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연회장 전체가 웅성거렸다. 황실 의전관이 당황한 얼굴로 뛰어오고, 몇몇 귀족 부인들이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멈칫했다. 하인은 이미 근위대원들 사이에서 고개를 숙인 채 작게 떨고 있었다.
리아나는 돌아서서 하객들을 향했다. 그녀의 등은 곧았고, 두 손은 앞으로 가지런히 모은 자세였다.
“여러분께서 놀라신 점, 사과드립니다.”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하지만 오늘 이 연회는 제국 다섯 가문의 화합을 위한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서 독을 쓰는 행위는 단순한 개인 범죄로 볼 수 없는 성격의 것입니다.”
“그럼 배후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후작의 노란 휘장을 단 중년 귀족이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 물었다.
“그 점은 근위대 조사에서 밝혀질 것입니다.” 리아나의 답변은 빠르고 부드러웠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시도는 오늘 이 연회장에 있는 누군가에게 치명적 피해를 입히려는 의도를 넘어섭니다. 자작님과 공작 가문 사이의 신뢰를 깨뜨리고, 나아가 황실이 주관하는 공식 행사의 안전을 훼손하려는 의도로 읽힙니다.”
귀족들 사이에서 작은 탄식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늘어났다. 의전관이 근위대장에게 빠르게 무언가 지시했고, 하인 한 명이 바닥에 떨어진 술잔을 조심스럽게 수거했다.
세르반테스 자작이 리아나에게 다가왔다. 땀이 맺힌 이마를 손수건으로 닦으며 고개를 숙였다. “공작 부인, 정말로…… 감사합니다. 제가 어떻게 은혜를——”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감사 인사는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 뒤에 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리아나는 그에게 예의 바르게 목례하고 돌아섰다.
칼렌은 근위대에 인계되는 하인을 잠시 바라보다가 리아나의 곁으로 걸어왔다. 그의 걸음은 느렸고, 왼손은 검은 장갑을 낀 채 허리께에 자연스럽게 놓여 있었다.
“아마릴리스 뿌리.” 칼렌의 목소리는 주변에 들리지 않을 만큼 낮았다. “색과 냄새가 없는 독을 저 거리에서 식별했다는 건가.”
“제 능력을 보여드리기엔 과한 무대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리아나의 대답은 담담했다. 칼렌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옆모습을 한 번 더 응시하고는 시선을 근위대가 하인을 끌고 나간 문 쪽으로 옮겼다.
연회장의 분위기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당황한 단원들을 진정시키며 다음 곡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황실 의전관이 마이크를 잡고 짧은 공지로 ‘경미한 소동’을 수습했다. 귀족들은 자리로 돌아갔지만, 몇몇은 여전히 리아나 쪽을 힐끗거렸다.
리적표면이었지만 분명했다. 저 시선들 중 일부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오늘을 기점으로 리아나 벨루아를 추적 대상으로 삼을 것이다.
리아나는 그 시선들을 의식하지 않은 듯 칼렌을 향해 반 걸음 다가섰다. 어깨가 거의 닿을 거리였다. 연회 복도에서는 부부가 보이기에 자연스러운 위치였지만, 그녀의 입가에는 방금 전까진 없던 예리함이 감돌았다.
“이 일로 저를 의심하는 이들이 생길 겁니다. 미리 독을 알아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다. “하지만 그게 오늘 제 의도였습니다.”
칼렌이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다.
“독을 막는 데 그치지 않고, 음모의 성격을 공개적으로 규정했다.” 리아나는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단순한 독살 시도가 아니라 제국 내 파벌 싸움의 신호탄이라고 공개석상에서 못 박은 것은, 이 사건을 은폐하려는 쪽이 움직이기 어렵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밤 근위대가 하인을 심문하는 동안, 누군가는 침묵을 사는 대신 오히려 섣불리 움직여야 하는 처지에 놓일 겁니다.”
“그 움직임을 추적할 생각인가.”
“이미 시작했습니다.”
리아나가 칼렌을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말이 없었다. 칼렌은 그녀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읽으려는 듯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일은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다. 너 없었다면 한 사람은 죽었을 테고, 나머지는 음모론에 휩싸였겠지.”
그는 리아나의 오른쪽 손목을 향해 잠깐 시선을 떨어뜨렸다가 다시 들었다. 손목은 푸른 드레스 소매에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 네게 준비된 칭송은 믿지 마라. 오늘 여기서 널 박수 친 이들 중 반은, 내일이면 네 뒤를 조사할 자들이다.”
“알고 있습니다. 박수는 자리에서 나누는 것.” 리아나가 가볍게 고개를 꺾었다. “저는 오늘 이것만 확인하면 됐습니다. 공작 가문의 적은 연회장 바깥이 아니라 안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적은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요.”
칼렌은 그녀의 어깨 너머로 연회장을 한 번 훑었다. 세르반테스 자작이 황태자와 낮은 목소리로 대화하고 있었고, 프리드리히 후작의 자리에서는 비서관이 무언가 급히 기록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너머로 아직 이름이 확인되지 않은 하급 귀족 두엇이 머리를 맞대고 속삭이고 있었다.
“오늘 밤 서재로 와라.”
칼렌의 짧은 문장은 명령도 약속도 아닌 어딘가 애매한 톤이었다. 리아나가 대답하려는 순간, 황실 의전관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공작님, 부인. 폐하께서 두 분을 잠시 보시겠다고 하십니다.”
리아나는 칼렌의 팔을 다시 잡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검은 양복 소매 위에 놓이는 순간, 미세한 떨림이 전해졌다. 아까까지 없었던 떨림이었다.
칼렌은 그 손을 내려다보지 않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나란히 연회장 중앙을 가로질러 황제의 좌석을 향해 걸어갔다. 뒤에서는 여전히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이어가고 있었고, 귀족들의 시선은 이제 의심과 경의가 뒤섞인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따라붙고 있었다.
황제 접견을 마친 후였다. 연회장 안쪽 방에서 나란히 걸어나오자 칼렌이 곧장 테라스 쪽으로 발을 돌렸고, 리아나는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발코니로 통하는 복도엔 벌써 기사 둘이 양옆에 서 있었고, 칼렌이 손짓 하나로 유리문을 닫게 하자 실내의 왈츠 선율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연회장의 유리문 너머로 왈츠 선율이 다시 흘러들었다. 리아나는 테라스 난간에 손을 얹은 채 뒤에서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구두 굽이 석재를 짚는 간격이 일정했다. 군화처럼.
“공작님께서 먼저 불러내실 줄은 몰랐습니다.”
등 뒤 두 걸음 거리에서 발소리가 멈췄다. 칼렌의 음성이 차가운 밤공기보다 먼저 닿았다.
“오늘 건, 계산된 행동이었나.”
리아나는 몸을 반쯤 돌렸다. 은장 문양이 달린 그의 망토 끝이 바람에 살짝 들렸다.
“독이 든 술잔을 제가 직접 든 것은 우연이었습니다. 다만 그 이후는 계산이었죠.”
“독극물 전문가를 미리 배치한 것도.”
“엘레나는 제 전담 하녀입니다. 연회 전에 지시해 두었어요.”
칼렌이 한 걸음 다가와 난간에 왼손을 올렸다. 검지의 스톰블루 반지가 달빛을 받아 짙푸르게 빛났다. 그의 손과 리아나의 손 사이로 테라스 석재가 얼음처럼 차갑게 놓여 있었다.
“성과를 냈으니 대가를 묻겠다. 원하는 게 뭐지.”
“공작 가문 내 배신자 색출 작업에 저를 공식 개입시켜 주십시오.”
칼렌의 시선이 난간에서 그녀의 얼굴로 천천히 옮겨갔다. 코발트 블루가 어둠 속에서 한 톤 짙어졌다.
“이유는.”
“제 가문을 무너뜨린 자들은 지금 공작님의 가문을 노리고 있습니다. 연회장 독살 건도 그 연결선에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냉기가 섞인 묵음이 잠시 흘렀다. 칼렌이 턱을 약간 당겼다.
“조건이 있다. 네가 열람하는 모든 문서는 사본을 내게 제출한다. 단독 판단으로 움직이지 말고, 의심 정황이 생기면 보고가 먼저다.”
“보고 후 조치까지의 시간을 단축해 주신다면 수용합니다.”
“24시간 이내에 결론을 내리겠다.”
그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장갑을 낀 손이었다.
“저택 도착 즉시 관련 문서 열람 권한을 부여한다.”
리아나는 칼렌의 손을 마주 잡았다. 장갑 너머로 단단한 악력이 전해졌다. 거래의 온도였다.
공작 저택 서재의 벽난로가 심야의 냉기를 밀어내고 있었다. 칼렌은 탁자 위에 봉인된 서류 뭉치를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게 약속한 내부 감찰 기록이다. 먼저 훑어봐라.”
“감사합니다, 공작님.”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 세르지오에게 확인할 게 있어서.”
문이 닫히고 복도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리아나는 의자에 앉아 봉인을 뜯었다. 하인들의 근무 이동 기록, 식료품 반입 일지, 약품 창고 출입 명부. 엘레나가 이미 확보한 정보와 겹치는 항목이 많았다.
세 번째 문서 묶음을 넘기려던 손이 멈췄다.
탁자 옆 서랍이었다. 미세하게 틈이 벌어져 있었다. 칼렌이라면 열쇠를 빼먹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가 떠나기 전 급히 무언가를 꺼냈을 가능성—— 리아나는 그 틈을 손끝으로 밀었다.
서랍 속에는 편지 뭉치가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맨 위 봉투엔 세르반테스 가문의 문장. 그다음은 제국 사법부의 날인이었다.
그녀의 손끝 온도가 급격히 내려갔다.
두 번째 봉투 안의 문서 상단. ‘기밀 처분 보고서 — 세르반테스 자작, 북부 변경 밀수 경로 적발 및 현장 처단 건’. 날짜는 올해 초, 계절이 바뀌기 전이었다.
그녀가 칼렌에게 세르반테스의 정보를 알려주기 훨씬 전.
리처드 세르반테스 자작. 회귀 전 벨루아 가문을 궁지로 몬 주범 중 하나. 그 독설과 위선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칼렌은 이미 그 자를 처단했다. 그녀가 말하기도 전에, 아무런 설명 없이.
리치는 집으로 돌아왔지만 시간이 늦어서 모든 스토어가 닫혔어요.
문서들을 원래 순서대로 정렬해 서랍에 밀어 넣었다. 종이가 미끄러지며 내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리아나는 서랍을 닫고 의자에 앉았다.
손끝이 차가웠다. 아까 칼렌과 악수할 때 느꼈던 장갑의 온도와는 다른 종류의 냉기였다. 그가 왜 세르반테스를 제거했는지,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지, 무엇을 위해 그 일을 감춰 왔는지—— 모든 질문이 한꺼번에 몰려들었지만 답은 하나도 없었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군화 굽이 석재를 짚는 간격, 일정한 리듬.
서재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