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회귀한 공녀의 재계약

4화

서재 문이 열렸다. 칼렌의 군화가 문턱을 넘자 리아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손끝의 냉기는 가시지 않았지만 얼굴은 이미 정돈되어 있었다.

칼렌이 책상 앞으로 와 왼손의 서류 묶음을 내려놓았다.

“내부 조사 문서다. 네가 요청했던 항목 전부.”

리아나의 시선이 서류에서 칼렌의 얼굴로 옮겨갔다. 코발트 블루의 눈동자가 평소보다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공작님께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칼렌이 턱을 약간 들었다.

“리처드 세르반테스 자작을 아십니까.”

자신의 목소리가 필요 이상으로 건조하게 튀어나왔다. 칼렌의 왼손 검지, 스톰블루 반지가 서류 위에서 빛을 반사했다.

“안다.”

“그 자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칼렌이 책상 모서리에 기대 팔짱을 꼈다. 입가에 옅은 냉소 비슷한 것이 스쳤다.

“죽었다. 지난겨울, 북부 변경에서.”

리아나의 호흡이 반 박자 늦었다. 칼렌은 내일의 날씨를 말하듯 덧붙였다.

“제국 사법부 명의의 처단 기록이 있을 거다.”

“그 처단을 공작님께서 직접 주도하셨습니까.”

“가문의 판단과 나의 결정이었다.”

질문을 정면으로 받지 않았다.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는 것이 오히려 의도적인 회피를 분명히 했다. 리아나는 손끝의 차가움을 의식하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물을 수도, 물어서도 안 되는 질문들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대신 시선을 서류로 내렸다. 그 틈을 칼렌이 메웠다.

“오늘 연회에서 한 일. 능숙했다.”

평가에 가까운 어조였다.

“과찬이십니다.”

“아니다. 독을 식별하고 하인의 동선을 미리 끊고 귀족들 앞에서 발언권을 확보한 순서, 사전에 계산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움직임이었다.”

그가 한 걸음 다가섰다. 평소보다 가까운 거리였다.

“그 능력을 내부 감찰로만 소모시키기엔 아깝군.”

“무슨 뜻이신지.”

“공작 가문 내 배신자 색출에 네 힘을 빌리겠다. 정식으로.”

리아나는 칼렌의 표정에서 망설임의 흔적을 찾으려 했지만 얼굴은 읽을 수 없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대답이 너무 빨랐다. 칼렌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덧붙여 요구할 것이 있습니다.”

칼렌이 팔짱을 풀고 똑바로 섰다.

“배신자 색출 진행 상황을 제게 정기적으로 보고해 주십시오. 그리고 암시장 정보에 접근할 권한을 요청합니다. 제국 귀족 사회의 정보망만으로는 음지의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칼렌의 입가에 분명한 냉소가 떠올랐다.

“대담하군. 공작 가문의 허가 없이 암시장에 발을 들이는 자는 반역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공작님의 승인을 구하는 것입니다.”

칼렌이 책상을 손끝으로 두 번 두드렸다. 반지가 나무에 닿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좋다. 암시장 접촉에 한해 허가한다. 단, 조건이 있다. 세르지오를 감시역으로 붙인다. 네 접촉과 수집 정보는 전부 그를 통해 보고된다.”

동시에 노크 소리가 났다. 대답도 전에 문이 열리고 세르지오가 들어섰다. 이미 준비된 등장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세르지오의 눈이 리아나를 향했다가 곧 칼렌에게로 돌아갔다.

“오늘부로 리아나의 암시장 접촉 임무를 보좌한다. 모든 접촉 기록과 취득 정보는 나에게 직접 보고하라.”

세르지오의 얼굴에 짧은 당혹이 스쳤으나 곧 고개를 숙였다.

“명령을 접수합니다.”

칼렌이 리아나에게 몸을 돌렸다.

“세르지오는 암시장 정보망에 어두운 편이 아니다. 네가 필요로 하는 접촉을 방해하지는 않을 거다.”

감시를 잊지 말라는 경고였다. 리아나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공작님.”

칼렌이 서류를 건넸다. 오른손이 잠시 멈췄다. 붉은 띠를 감은 리아나의 손목 위로 시선이 닿았다가 바로 떨어졌다.

“늦었으니 오늘은 이만 물러나라. 문서는 내일 아침까지 검토하면 된다.”

리아나가 돌아서자 세르지오가 따라붙었다. 문을 나서기 직전, 칼렌이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세르지오. 그녀의 정보 출처에 관해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나에게만 보고하라. 공식 기록에는 남기지 말고.”

세르지오의 목덜미 근육이 굳었다.

“……알겠습니다.”

문이 닫혔다. 복도의 촛불이 리아나의 붉은 머리칼을 스치며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손에 쥔 서류 묶음이 무겁게 느껴졌다. 계산된 양보였다. 그가 내 정보 출처를 끝까지 의심하고 있다는 신호.

세르지오가 반 발짝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고 있었다. 리아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복도 끝으로 시선을 보냈다. 그 너머 지하 서고로 이어지는 계단이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덫이든 미끼든, 발을 들일 구멍은 생겼다.

다음 날 아침, 리아나의 침실로 들어선 엘레나는 아침 차를 쟁반에 받쳐 들고 있었다. 찻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는 손끝이 평소보다 조금 느렸다.

“차는 됐어. 문부터 잠가줘.”

엘레나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녀는 쟁반을 내려놓고 문고리를 돌렸다. 빗장이 걸리는 소리가 났다.

“세르지오 경이 복도에 있어요. 아침 일찍부터 서 계시더라고요.”

“알아.”

리아나는 침대 가장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커튼 사이로 스며든 햇살이 손등에 닿았다.

“전에 네가 말했지. 제국 연회 전에 하인들 동향을 미리 파악해뒀다고.”

“네, 아가씨.”

“그 정보 경로는 어디서 났어?”

엘레나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찻잔에서 올라오는 김이 그녀의 얼굴 앞에서 가늘게 흔들렸다.

“그건…….”

“아직 살아 있어?”

엘레나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의 손이 앞치마 주름을 접었다 폈다.

“끊은 지 오래예요. 이 저택에 들어오면서 전부 정리했어요.”

“다시 연결할 수 있어?”

엘레나가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누굴 찾으시려는 거죠?”

“프리드리히 벨몬트 후작. 최근 움직임 전부. 만난 사람, 오간 서신, 자금 이동.”

엘레나가 한 걸음 다가섰다.

“아가씨, 그건…… 보통 일이 아니에요. 후작가를 건드리는 건.”

“그래서 묻는 거야. 가능하냐고.”

리아나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는 탁자 위로 손을 뻗어 식은 찻잔을 한 모금 마셨다.

엘레나는 잠시 리아나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러더니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전에…… 이 저택에 들어오기 전에요. 저는 귀족 사회의 그늘에서 자랐어요. 정보를 사고파는 사람들 사이에서요.”

“정보상.”

엘레나의 눈이 커졌다.

“……아셨어요?”

“짐작했어. 네 수첩의 약품 배합 기록만 봐도 독물 지식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었고.”

엘레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평소의 다정함과는 다른, 어딘가 날카로운 웃음이었다.

“역시 아가씨는…… 보통 내기가 아니네요.”

“할 수 있어?”

“연락책 하나는 아직 살아 있어요. 그쪽도 제가 끊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연락 방법은 남아 있어요.”

엘레나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작은 쪽지를 꺼냈다. 접힌 종이의 가장자리가 닳아 있었다.

“오늘 오후에 하녀 숙소 뒷문으로 빠질게요. 저녁까지는 첫 보고를 올릴 수 있어요.”

“세르지오의 눈을 피할 수 있겠어?”

“그쪽은 제 전문이에요.”

엘레나가 쪽지를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윙크했다. 그녀는 빗장을 풀고 문을 열었다. 복도에 선 세르지오가 무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리아나는 엘레나의 뒷모습을 보며 손가락으로 찻잔 가장자리를 한 번 쓸었다.

오후의 집무실은 고요했다. 리아나는 탁자 위에 칼렌에게서 받은 감찰 기록과 연회 사건 관련 문서 사본을 나란히 펼쳐 놓았다. 하인들의 근무 이동 기록, 식료품 반입 일지, 약품 창고 출입 명부.

세르지오는 문 옆에 서서 창밖을 보고 있었다.

“앉으셔도 됩니다, 세르지오 경.”

“임무 중이라 괜찮습니다.”

리아나는 대답 대신 문서 더미에서 네 번째 묶음을 집어 들었다. 연회 당일 주방 보조 하인의 이동 동선이었다. 오전 열 시쯤, 이 하인이 지하 식품 저장고에서 나온 뒤 후문 쪽으로 세 분간 사라졌다는 기록이 있었다.

그녀는 이 동선을 이미 알고 있었다. 엘레나가 확보한 정보와 일치했다. 문제는 그 너머였다. 이 하인의 급여 계좌로 최근 석 달간 소액이 입금된 내역. 그 입금처가 가명 구좌라는 점까지는 엘레나도 파악하지 못했다.

리아나는 가문의 금융 기록부를 넘겼다. 입금일과 금액을 메모지에 차례로 옮겨 적었다. 세 번째 입금일이 연회 일주일 전이었다. 그 날짜로 다른 문서를 뒤지려던 손이 멈췄다.

가문의 외부 거래처 목록에서, 같은 날짜에 프리드리히 후작가의 소규모 하청 업체가 공작가의 식자재 납품업체에 거래 대금을 지급한 기록이 있었다. 거래 명목은 ‘와인 샘플 비용’.

리아나의 손끝이 메모지 위에서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와인 샘플. 연회장에서 독은 와인 잔에 들어 있었다.

그녀는 두 문서를 나란히 정렬하고 세부 내역을 대조했다. 금액의 흐름은 작았지만 방향은 분명했다. 프리드리히 후작가 쪽에서 공작가의 식자재 업체로, 그리고 그 업체의 말단 직원이 연회 당일 주방 하인의 구좌로 송금한 흔적.

“뭔가 찾으셨습니까.”

세르지오의 목소리였다. 그는 여전히 문 옆에 서 있었지만 시선은 탁자 위를 향하고 있었다.

“자금 흐름이 좀 특이해서요.”

리아나는 메모지를 접어 문서 사이에 끼웠다. 모든 걸 보여줄 필요는 없었다.

프리드리히 후작 저택 서재는 캔들라이트가 드리운 어두운 공간이었다. 마호가니 책상 뒤에 앉은 프리드리히 벨몬트는 부관이 올려놓은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 검지가 책상 모서리를 느리게 두드렸다.

“연회장에서…… 술잔을 가로챈 여자.”

“예. 클라우스 하인겔 공작의 새로운 계약 배우자라고 합니다. 리아나 벨루아.”

“벨루아.”

후작은 눈을 가늘게 떴다. 벨루아 가문은 들은 적이 있었다. 몰락한 변경 백작가. 그 집안 여식이 연회 한복판에서 세르반테스의 독을 식별해냈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그 여자의 이력을 추적해. 어디서 무엇을 배웠는지, 누구와 접촉했는지 전부.”

“공작가에서 감시가 붙어 있습니다. 세르지오 바르트 경이 직접.”

“그럼 그 감시의 바깥쪽을 추적해. 하녀, 마부, 정원사. 여자와 접촉한 모든 하층민을 색출해.”

부관이 고개를 숙였다.

“연회장에서 그 여자가 보인…… 선견지명 같은 통찰. 그게 단순한 재능인지, 아니면 우리 쪽에서 정보가 샜는지 확인해야 해.”

프리드리히는 보고서를 접어 촛불 가까이 가져갔다. 종이의 모서리가 열기에 그을렸다.

“만약 샌 거라면, 그 경로를 뿌리째 뽑아.”

저녁 식당에 촛불이 켜져 있었다. 긴 식탁에는 세 사람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칼렌은 상석에 앉아 있었고, 리아나는 그의 오른편에 자리를 잡았다.

방금 도착한 엘레나의 쪽지가 그녀의 소매 안에 접혀 있었다. 프리드리히 후작가에서 지난 이틀간 동부 상단과 세 차례 접촉. 그중 한 번은 심야.

세르지오가 식당 입구 쪽에 서서 두 사람을 관찰하고 있었다.

리아나는 수프 스푼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공작님, 오늘 문서 분석 중에 특이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칼렌의 포크가 잠시 멈췄다.

“말해.”

“연회 당일 주방 하인의 급여 계좌로 입금된 소액 자금의 출처를 추적해봤어요. 프리드리히 후작가의 하청 업체에서 납품업체로, 그리고 그쪽에서 개인 구좌로 흐른 자금이었습니다.”

칼렌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금속이 접시에 닿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금액은.”

“와인 한 병 값을 넘지 않습니다. 하지만 명목이 ‘와인 샘플 비용’이었어요.”

칼렌의 시선이 리아나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프리드리히를 의심하는 건가.”

“송금 시기가 연회 일주일 전입니다. 그리고 연회장의 독은 와인에 들어 있었어요.”

잠깐의 멈춤이 있었다. 칼렌이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팔짱을 꼈다.

“자금 흐름만으로 후작을 직접 연관짓기엔 증거가 부족해.”

“그래서 제안이 있습니다.”

리아나는 소매에서 접은 쪽지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식탁 위로 손을 올렸다. 손가락이 식탁보의 문양을 따라 한 번 쓸렸다.

“후작을 소규모 사교 모임으로 초청하는 겁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가 어떤 행동을 보이는지 직접 확인할 기회를 만들어 주십시오.”

칼렌의 왼손 검지가 테이블을 한 번 두드렸다.

“네 정보 출처가 궁금하군. 문서 분석만으로 이 정도 결론에 도달했다고?”

“문서의 교차 대조와…… 직감입니다.”

“직감.”

칼렌의 입가에 옅은 냉소가 스쳤다.

“연회장에서도 그 직감으로 술잔을 막았나.”

“그때는 술잔을 든 하인의 손목 각도가 평소와 달랐어요.”

“지금은?”

“지금은 자금이 흐르는 방향이 평소 거래 관행과 다릅니다. 그것만으로도 확인할 가치는 있어요.”

칼렌이 팔짱을 풀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한 뼘 가까워졌다.

“네가 제안하는 사교 모임의 목적을 말해봐.”

“후작에게 정보를 흘리는 겁니다. 연회 사건의 조사가 예상보다 빨리 진행 중이며, 자금 추적까지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문을요. 만약 그가 연관되어 있다면, 허점을 드러낼 겁니다.”

“함정 수사군.”

“네. 그리고 미끼는…… 제가 되겠습니다. 연회장의 ‘기이한 통찰력을 가진 여인’ 말이에요.”

칼렌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몇 초간 말 없이 리아나를 응시했다. 촛불이 일렁이며 두 사람의 그림자를 벽면에 어른거리게 했다.

“위험한 선택이야.”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습니다. 이 자금의 흔적만으로는 부족하지만, 후작이 움직이면 그때부터는 실물 증거가 생깁니다.”

“네 정보의 정확성은?”

“문서에 기록된 사실들입니다. 공작님께서 직접 열람을 허락하신.”

칼렌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이 세르지오에게로 향했다.

“세르지오, 내일 소규모 사교 모임을 긴급 편성할 수 있겠나.”

세르지오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려던 그때, 복도에서 빠른 발소리가 들렸다. 식당 문이 노크도 없이 열렸다.

하급 전령관 한 명이 숨을 가쁘게 들이쉬며 봉투를 들어 올렸다.

“공작님, 긴급 서신입니다. 프리드리히 벨몬트 후작께서…… 내일 오전 사교 모임에 공작님과 리아나 벨루아 영애를 공식 초청하셨습니다.”

칼렌이 일어서서 봉투를 받아들었다. 봉인을 뜯어 서신을 펼치는 그의 손끝이 잠시 멈췄다.

“후작이 먼저 움직였다.”

리아나는 소매 안의 쪽지를 손가락으로 한 번 눌렀다. 엘레나가 보낸 첫 제보의 내용과, 서신 타이밍이 정확히 겹쳤다.

칼렌의 시선이 서신에서 리아나에게로 옮겨졌다.

“네 예상보다 빨라.”

“오히려 좋아요. 그가 서두르고 있다는 증거니까.”

회귀한 공녀의 재계약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