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회귀한 공녀의 재계약

10화

서재의 촛불이 한 자루 꺼졌다. 나머지 하나가 책상 위로 흔들리는 그림자를 던졌다. 엘레나와 세르지오가 물러간 뒤, 방 안에는 둘만 남았다.

칼렌이 먼저 움직였다. 책상 반대편으로 걸어와 리아나의 앞에 섰다. 거리는 한 걸음.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오른쪽 손목.”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명령도 요청도 아닌, 확인이었다.

리아나는 왼손으로 오른쪽 소매를 걷어 올렸다. 붉은 띠가 촛불 빛에 젖은 듯 반짝였다.

“풀겠습니다.”

손가락이 매듭을 당겼다. 천이 풀리며 손목 안쪽으로 미끄러졌다. 드러난 살갗에는 흉터가 있었다.

손목을 가로지르는 검붉은 선이 혈관을 따라 번져 있었다. 독이 퍼진 자리였다. 피부는 그 주변으로 오그라들어 옅은 자줏빛을 띠었다. 전생에서 죽음이 시작된 지점이었다.

칼렌의 시선이 흉터에 멈췄다.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그의 손이 올라왔다. 검지와 중지가 흉터 가장자리에 닿았다. 장갑을 벗지 않은 손끝이 거친 피부 결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언제.”

짧은 한 마디였다.

“삼 년 전 겨울.”

리아나의 목소리는 고요했다. 진술하듯 정확한 어휘를 골랐다.

“저택 지하 응접실. 접대를 가장한 자리에 초청받았습니다. 세 번째 잔에서 독을 마셨고, 한 시간 뒤 손목에서부터 마비가 시작됐습니다.”

칼렌의 손이 멎었다. 손끝이 흉터 한가운데 얹힌 채였다.

“누구.”

“리처드 세르반테스 자작. 프리드리히 벨몬트 후작의 지시로 독을 조제했습니다. 벨루아 가문의 희귀 독극물을 변형한 것이라 해독제가 없었습니다.”

“증상.”

“오른쪽 손목에서 시작해 오른쪽 어깨로, 이후 척추를 타고 왼쪽으로 번졌습니다. 호흡 근육이 마지막으로 멈췄고, 의식은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칼렌의 손이 흉터에서 떨어졌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의 왼손 검지에 낀 스톰블루 반지가 촛불을 받아 파랗게 빛났다.

그가 반 걸음 물러섰다. 시선은 여전히 흉터에 고정되어 있었다.

“검증은 끝나셨습니까.”

칼렌의 턱선이 굳어졌다. 답변 대신 그가 손을 내밀어 리아나의 손목을 감싸던 붉은 띠를 집어 들었다. 천을 반으로 접고, 다시 반으로 접었다.

“끝났다.”

그가 접은 띠를 리아나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손끝이 스치지 않게.

“네 말은 진실이다. 의심하지 않는다.”

리아나는 띠를 받아 쥐었다. 천에는 아직 그의 손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 온기가 낯설었다.

그녀는 붉은 띠를 손목에 다시 감으며 생각했다. 칼렌이 확인한 것은 죽음의 순간뿐이었다. 세르지오가 목격했다던 현장, 그날 지하실에서 칼렌이 무슨 이유로 리처드 세르반테스를 벴는지 묻지 않았다. 묻지 않은 이유는 전생에 그를 방조자로 몰았던 의심과 닮아 있었다.

매듭이 조여졌다. 그녀는 손목을 내렸다.

두 사람의 거리는 여전히 한 걸음이었다. 서재 밖 복도에서 바람이 창문을 한 번 두드렸다. 촛불이 일제히 몸을 숙였다가 다시 일어섰다.

탁자 위의 촛농이 굳을 만큼 시간이 흘렀다. 칼렌이 청원서 사본을 손에 들었을 때, 아까 리아나가 그 앞에 서 있던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녀는 창가로 물러나 팔짱을 끼고 있었다. 손목의 붉은 띠는 이미 풀려 탁자 위에 놓인 뒤였다.

촛불이 세 개 줄어든 서재. 리아나의 손목에 감겼던 붉은 띠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천 끝이 탁자 모서리 밖으로 늘어져 움직이지 않았다.

칼렌은 청원서 사본을 덮지 않은 채 서 있었다. 왼손 검지의 반지가 촛불을 받을 때마다 푸른 빛이 스쳤다.

문이 열렸다. 세르지오였다. 외투 깃에 밤공기가 배어 있었다. 숨을 가다듬으며 두 걸음 안으로 들어왔다.

“공작님. 프리드리히 후작이 정식 청원을 접수시켰습니다.”

손에 든 서류 뭉치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황실 문장이 찍힌 봉인이 뜯겨 있었다.

“이단 심문 청원. 내일 정오 대심판원. 부소장 레온 하르트 주재. 첨부 증거로——”

세르지오의 시선이 리아나에게 닿았다가 돌아왔다.

“벨루아 가문의 희귀 독극물 분석 보고서와 회귀자 소문에 관한 증인 진술서가 들어 있습니다.”

칼렌의 손이 청원서 사본을 집었다. 장을 넘기는 소리만 세 번 났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 종이가 날카롭게 접혔다.

“증인은.”

“베일 상회 소속 정보원. 민트라는 이름으로 추정됩니다.”

리아나가 입을 열었다.

“민트는 프리드리히의 첩자입니다. 이틀 전 제게 접근해 함정을 팠죠.”

세르지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베일 상회에서 이단심문소에 공작가의 비공식 물자 이동 경로를 넘겼습니다. 지도까지 포함해서요.”

칼렌의 눈빛이 한 톤 짙어졌다. 탁자 모서리를 짚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레온 하르트는 14년 전 아스티 백작부인 사건 때 거짓 증거를 조작했다가 청원인이 역처벌된 전력이 있다. 그자가 부소장으로 올라왔다는 건 이번 심문이 절차가 아니라——”

“처형을 전제로 한 무대라는 뜻이지.”

리아나가 말을 받았다. 칼렌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한 박자 늦게 입가가 비틀렸다.

“잘 아는군.”

문이 다시 밀렸다. 엘레나가 들어섰다. 외출복 소매에 먼지가 묻어 있었고, 손에 작은 유리병을 쥐고 있었다. 어두운 액체가 반쯤 차 있었다.

“프리드리히 저택 지하 저장고에서 찾았습니다. 냄새, 색깔, 점도——벨루아 가문 기록과 전생의 것과 똑같습니다.”

세르지오가 병을 받아 들었다. 병 바닥에 새겨진 작은 문양을 확인했다.

“북부 변경 밀수 경로에서만 쓰는 용기입니다. 리처드 세르반테스 자작이 관리하던——”

“세르반테스는 이미 죽었다.”

칼렌의 목소리가 바닥을 쳤다. 탁자 위 서류들이 진동했다.

“죽은 자의 물건이 살아 있는 후작의 지하 저장고에서 나온다는 뜻은 하나다. 프리드리히가 세르반테스의 밀수 경로를 인수했다.”

리아나는 유리병 속 액체를 바라보았다. 전생에 입술에 닿았던 그 맛이 혀끝에 되살아나는 듯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그 독으로 저를 죽이고, 회귀자라고 몰아 이단 심문으로 마무리한다——아주 깔끔한 수순입니다.”

엘레나가 주먹을 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얘졌다.

“증거는 충분해요. 후작 저택 지하 저장고 위치, 출입 경로, 독의 성분까지 다 정리했습니다.”

“증거만으로는 부족하다.”

칼렌이 청원서 사본을 탁자 중앙으로 밀었다. 손가락 끝으로 스톰블루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이 재판은 애초에 증거로 이기라고 만든 게 아니다. 황실의 권위를 빌려 공작가를 흔들고, 정치적 올가미를 씌우는 절차다.”

세르지오가 목덜미를 긁었다. 왼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렇다면 절차 밖에서 대응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단 심문을 거부하면——”

“반역 혐의로 공작 지위 자체가 박탈된다.”

칼렌의 입술이 얇게 당겨졌다. 서가를 등지고 서서 모두를 훑었다.

“마법적 결투 재판을 신청한다.”

세르지오의 숨이 멎었다.

“공작님, 그건 마력 각인이 있는 검으로 직접——”

“안다. 공작 지위와 전 재산을 담보로 건다. 이기면 이단 심문은 자동 취소. 지면——”

칼렌의 왼손이 반지 위로 완전히 내려갔다. 스톰블루가 푸르게 타올랐다.

“공작 지위를 잃는다. 내 목숨도 포함이다.”

엘레나가 반 박자 늦게 숨을 들이켰다. 유리병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미친——”

“엘레나.”

리아나가 손을 들었다. 엘레나의 말이 잘렸다.

“공작님. 결투 재판에서 지면 공작가 자체가 사라집니다. 그걸 아시면서.”

“그렇다.”

칼렌의 코발트 블루가 리아나를 똑바로 보았다.

“내가 증명할 것은 법적 절차가 아니다. 그대가 이단이 아니라는 사실——그리고 프리드리히가 살인자라는 진실이다. 그걸 위해 만들어진 게 마법적 결투 재판이다.”

리아나의 손이 탁자 위 붉은 띠에 닿았다. 천의 결이 손바닥에 밀려났다. 이 천을 감고 죽었던 전생. 이 천을 풀어서 존재를 증명한 이번 생. 그리고 내일, 이 천의 주인이 결백을 걸고 검을 든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세르지오가 한 걸음 나섰다.

“그렇다면 제가 보좌하겠습니다. 아스티 백작부인 사건의 판례를 정리해 두었습니다. 내일 아침, 결투 재판 청원서와 함께 제출하겠습니다.”

칼렌이 끄덕였다.

“엘레나.”

“네.”

“독약병은 네가 직접 보관해라. 대심판원에 들어갈 때까지 네 손을 떠나면 안 된다.”

엘레나가 유리병을 품 안에 넣었다. 옷깃을 여미는 손이 평소보다 느렸다.

“맡겨주세요. 이번에는 절대 안 놓칠 테니까.”

다음 날 이른 아침. 황실 대심판원 신청 접수실은 돌벽으로 둘러싸인 좁은 방이었다. 창은 하나뿐이고, 동쪽에서 들어온 빛이 바닥의 푸른 대리석을 밀어내고 있었다.

칼렌은 흑색 군복 차림이었다. 어깨의 은장 늑대 휘장이 아침 빛을 받아 차갑게 빛났다. 리아나는 그의 왼쪽 반 걸음 뒤에 서 있었다.

접수대 너머로 중년의 사무관이 앉아 있었다. 황실 문장이 수놓아진 제복 깃이 목을 조르는 듯했다. 탁자 위에는 양피지 한 장과 금속 펜, 그리고 붉은 밀랍 봉인함이 놓여 있었다.

“클라우스 하인겔 공작. 마법적 결투 재판 신청을 접수합니다.”

사무관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했다. 양피지를 집어 들었다.

“피청구인: 프리드리히 벨몬트 후작. 건명: 이단 심문 청원에 대한 결투 재판을 통한 진위 판별. 담보——”

사무관의 눈이 한 줄을 읽고 멈췄다.

“공작 지위 일체 및 클라우스 하인겔 가문의 전 재산. 그리고 신청인의 생명.”

칼렌이 양피지를 받아 들었다. 펜을 쥔 오른손이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서명이 끝나자 왼손 검지의 스톰블루 반지를 봉인함 위로 가져갔다. 반지의 푸른 빛이 붉은 밀랍 위로 떨어졌다. 밀랍이 녹으며 가문의 늑대 문장이 새겨졌다.

사무관이 봉인된 양피지를 들어 확인했다. 작은 망치로 접수 도장을 찍었다.

“접수 완료. 정오, 대심판원의 결투장에서 재판이 열립니다. 피청구인 프리드리히 벨몬트 후작에게도 즉시 통보됩니다.”

칼렌이 몸을 돌렸다. 리아나와 눈이 마주쳤다. 말은 없었다. 그냥 서로의 눈을 한 번 보고, 함께 접수실을 나섰다.

복도로 나오자 칼렌의 왼손이 다시 반지로 갔다. 검지로 반지의 푸른 보석면을 밀어 올렸다 내렸다——무의식적인 동작이 분명했다. 빛이 손가락 사이로 짧게 번뜩였다.

리아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 손을 바라보았다. 전생에서는 본 적 없는 동작이었다. 아니, 전생에는 그가 반지를 만지는 모습을 볼 만큼 가까이 있지 못했다.

스톰블루 반지. 가문의 마법적 권능을 상징하는 유물. 재판 신청서에 봉인할 때도, 결투 재판을 선언할 때도 칼렌은 이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단순한 습관일까.

리안나의 손끝이 저릿했다. 붉은 띠를 감았던 자리보다 깊숙한 곳, 뼈와 살이 맞닿은 관절 속에서 어떤 예감이 솟았다. 그 반지는 상징이 아니라 실체였다. 마법적 권능이 깃든 도구——아니, 그 이상일지도 몰랐다.

칼렌이 복도 끝에서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공작 저택으로 돌아간다. 정오까지 준비할 게 있다.”

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왼손이 이미 내려와 있었다. 반지는 다시 조용히 검지에 얹혀 있었다. 빛을 머금은 채.

직접 복귀한 후, 리아나는 저택에 도착해 곧장 계단으로 향했다. 칼렌과의 짧은 대화 내내 손끝에 남아 있던 푸른 보석의 차가움과 저릿한 의문이 지워지지 않았다. 오후가 기울면서 복도에 어둑어둑한 그림자가 길게 번졌다.

공작 저택으로 돌아온 뒤, 엘레나는 복도에서 리아나의 팔을 살짝 잡았다.

“아가씨, 잠깐 제 방으로.”

평소의 느낌표는 여전히 없었다. 리아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끌었다. 칼렌의 스톰블루 반지가 촛불 아래 번뜩이던 장면이 아직 눈앞에 남아 있었다.

엘레나의 방은 복도 끝, 창고로 통하는 좁은 문 옆이었다. 침대 하나와 약제 선반이 전부였지만, 선반 위에는 아무렇게나 꽂힌 유리병들이 스무 개 가까이 늘어서 있었다. 엘레나는 문을 닫고 빗장을 걸었다.

“아까 드리지 못한 게 있습니다.”

엘레나가 침대 매트리스 아래에서 접힌 양피지 뭉치를 꺼냈다. 테두리가 누렇게 바랬고, 접힌 자리는 거의 해어질 지경이었다.

“삼 년 전에 제가 직접 베일 상회 기록 보관소에서 빼낸 거예요. 원래는 협상 카드로 쓸 생각이었는데…… 이걸 쓰는 날은 안 오는 게 낫다고 생각했거든요.”

리아나는 양피지를 받아 폈다. 서로 다른 날짜, 서로 다른 잉크, 서로 다른 손이 써 내려간 내부 거래 기록. 그중 한 줄에 눈이 멎었다.

‘의뢰인 불명. 리처드 세르반테스 자작. 대상의 생사 확인. 대금 완납. 실행자 미상.’

날짜는 전생에서 자신이 죽기 사흘 전이었다.

“칼렌 공작님이셨어요.”

엘레나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세르반테스 자작을 직접 처형한 사람. 전생에서 아가씨가 죽은 바로 그 무렵이에요. 베일 상회가 실행자를 몰랐던 건, 공작님이 단독으로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리아나는 양피지를 쥔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칼렌이 왜 그랬을까. 적어도 자신이 아는 칼렌은, 그때까지 벨루아 가문에 별 관심도 없었다. 묻지도 않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질투였을 수도 있어요. 아니면…… 죄책감이었거나. 전생의 공작님이 어떤 분이셨는지 저는 몰라요.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예요. 공작님은 그때 이미 아가씨 편이셨다는 거.”

리아나의 어깨가 살짝 올라갔다. 그동안 품고 있던 질문 하나가 허물어지는 순간이었다. 전생의 칼렌은 자신을 방치하지 않았다. 그는 침묵 속에서 그녀의 원수를 대신 처단했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은 채.

되려 그게 더 쓰라렸다. 그가 아무 말도 없이 그 일을 묻어 둔 게.

“왜 이걸 지금.”

“내일 재판에서 증거로 쓸 수 있어요. 프리드리히 후작이 공작 부인 혼자서 모든 걸 꾸몄다고 몰아붙이면, 이 기록으로 세르반테스 자작이 따로 움직였다는 걸 증명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아가씨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공작님을 의심하셨던 건 당연한 일이지만, 이제는.”

“그만.”

리아나의 반말이 방 안을 잘랐다. 엘레나가 입을 다물었다. 리아나는 손에 쥔 양피지를 내려다본 채 숨을 골랐다. 목덜미가 굳어 있었다.

“……고마워.”

다시 존대였다. 그러나 엘레나가 들은 적 없는 온도였다.

“이 기록, 내가 보관할게.”

“네. 이제 그 방을 나서면 이 일은 전부 아가씨 몫입니다.”

엘레나가 빗장을 풀고 문을 열었다. 복도로 나가기 전, 돌아보지 않고 덧붙였다.

“그리고 저는…… 이번 생에서는 절대 먼저 안 죽을 거예요. 약속이요.”

문이 닫혔다. 리아나는 접힌 양피지를 왼손에 쥔 채 한동안 서 있었다. 칼렌이 전 재산을 걸었다고 말하던 순간의 눈빛. 그 눈빛 뒤에는 삼 년 전, 아무도 모르게 원수를 벤 손이 있었다. 그 손이 지금은 자신의 방패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이번 생에서는 반드시.

그의 말이 귓가에 다시 들리는 듯했다. 그때는 몰랐다. 그 말이 단순한 결의가 아니라, 이미 한 번 실행된 침묵의 복수 위에 세워진 두 번째 약속이라는 것을.

전생의 칼렌은 방관자가 아니었다. 그 역시 또 다른 복수자였다. 그 깨달음이 리아나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원망과 오해가 허물어진 자리에,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이 차올랐다.

밤이 깊었다. 리아나의 방 앞 복도에 촛불은 하나만 남아 있었다. 발걸음 소리가 복도 끝에서 멈췄고, 세 번의 노크가 이어졌다. 군인 특유의 절제된 간격이었다.

“나다.”

칼렌이었다. 리아나는 책상에 앉아 있었다. 양피지는 서랍 깊숙이 넣어 둔 뒤였다. 문을 열자, 어둠 속에서 칼렌의 코발트 블루 눈빛이 먼저 들어왔다. 그는 복도에 서서 방 안으로 한 걸음도 들어오지 않았다.

“공작님.”

“내일 재판은 도박이 아니다. 네 결백을 믿는다. 네가 본 것도, 네가 겪은 것도.”

칼렌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겹 더 낮았다. 마치 오래 묵은 돌을 들어내는 듯한 느린 박자였다.

“이번 생에서는 반드시 내가 네 방패가 되겠다.”

리아나의 목덜미가 천천히 풀렸다. 삼 년 전 침묵 속에서 원수를 벤 손. 지금 이 순간 약속을 건네는 목소리. 두 개의 칼렌이 처음으로 하나로 겹쳐졌다.

그녀가 끄덕이자, 칼렌은 한 걸음 물러서서 어둠 속으로 돌아갔다.

회귀한 공녀의 재계약1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