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공녀의 재계약
11화
서재 벽난로에는 장작 두 개만 남아 있었다. 리아나는 칼렌이 문을 닫고 돌아서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앞선 사건 때였습니다. 공작님께서 말씀하셨죠. 연회장 박수 치는 자들 중 반은 내일 나를 조사할 거라고.”
칼렌의 손이 의자 등받이에 닿았다 쥐어졌다.
“그 말을 듣고도 저는 공작님을 의심했습니다. 전생에…… 저를 버린 사람 중 하나라고.”
“버렸다.”
칼렌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낮아졌다. 질문도 부정도 아니었다. 처음 듣는 단어를 입안에서 굴리는 듯한 발음이었다.
“그렇게 생각할 근거가 있었다.”
“네.” 리아나는 손끝으로 책상 모서리를 짚었다. “프리드리히가 독을 보냈을 때, 공작님의 기사단은 벨루아 저택에 없었습니다. 사흘 내내. 죽을 때까지.”
칼렌이 벽난로 앞으로 한 걸음 옮겼다. 불빛이 왼쪽 턱의 흉터를 비스듬히 가로질렀다.
“그 사흘, 나는 북부 변경에 있었다. 세르반테스의 밀수 경로를 추적 중이었다. 네 가문의 독 조제법이 그 경로에서 유출됐다는 정보를 입수한 직후였다.”
리아나의 왼손이 책상에서 떨어졌다.
“그러니까…… 공작님은 알고 계셨던 겁니까. 독이 벨루아 가문의 것과 같은 계열이라는 걸. 삼 년 전에 이미.”
“늦었다.”
칼렌의 오른손이 허리춤의 검자루에 닿지도 않은 채 멈췄다. 주먹을 쥔 손가락 마디가 차례로 하얘졌다.
“정보를 따라 북부에 도착했을 때 세르반테스는 이미 자취를 감췄다. 내가 수도로 돌아온 날, 네 죽음이 공표됐다.”
리아나의 호흡이 한 번 멎었다가 다시 이어졌다. 그날의 신문 기사. 벨루아 공녀 사망.
독살 추정. 공작가의 공식 애도 성명. 머릿속을 스친 조각들을 밀어내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세르반테스 자작은…… 공작님이 직접 처단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전 재산과 지위를 건 재판을 신청한 바로 그날 밤, 엘레나에게서 그 기록을 받았습니다. 삼 년 전 공작님께서 이미 제 원수를 베셨다는 걸. 어젯밤까지 저는 몰랐습니다.”
칼렌의 어깨가 미세하게 굳어졌다. 평소라면 눈치채지 못했을 변화였다. 하지만 지금은 벽난로 앞, 두 걸음 거리였다.
“당신에게 알릴 생각은 없었다. 복수를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럼 무엇이었습니까.”
“죄책감이다.”
칼렌이 벽난로 선반 위의 촛대를 밀어냈다. 놋쇠가 돌 위에 부딪혀 짧은 금속음을 냈다.
“네가 죽은 뒤에야 밀수 경로의 최종 목적지가 프리드리히의 저택 지하라는 걸 확인했다. 세르반테스는 그 연결고리의 유일한 증인이었다. 내 정보가 하루만 빨랐어도, 네 저택에 기사단을 배치했어도.”
그가 고개를 돌렸다. 코발트 블루 눈동자에 벽난로의 불꽃이 점 하나로 맺혀 흔들리고 있었다.
“지키지 못한 자의 몫이다.”
리아나는 손끝으로 자신의 오른쪽 손목을 감싸쥐었다. 붉은 띠의 천이 손가락 사이로 밀려났다. 그 아래 흉터는 이미 그가 보았다. 이번 생에서 가장 먼저 확인한 진실이었다.
“그럼 저는요.”
그녀의 목소리에서 존대의 끝이 살짝 닳아 있었다.
“전생에 저를 지키지 못한 사람이 바로 그날 밤 제 원수를 벴다는 게, 왜 진작 말하지 않은 겁니까.”
“네가 나를 방조자로 봐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다. 오판이었다.”
칼렌의 오른손이 선반에서 떨어졌다. 놋쇠 촛대가 멈춘 자리에 장작 타는 소리만 남았다.
“이번 생에서는 그 오판을 반복하지 않겠다. 네 방패가 되겠다고 한 건,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고 이미 말했다.”
리아나가 손목에서 손을 뗐다. 붉은 띠가 다시 흉터를 덮었다.
“압니다.”
두 걸음이 좁혀졌다.
“어젯밤 그 말을 듣고도 방 안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습니다. 공작님이 삼 년 전에 이미 시작한 일과, 어제 제 앞에서 맺은 약속이…… 같은 손에서 나왔다는 걸 확인하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녀의 왼손이 천천히 올라갔다. 칼렌의 왼쪽 가슴, 공작 가문의 휘장 바로 위에 손바닥이 닿았다. 갑옷을 벗은 군복 위로 심장 박동이 전해졌다.
“내일 재판에서 살아서 증명해 주십시오.”
칼렌이 그녀의 손등 위로 자신의 왼손을 포갰다. 스톰블루 반지가 촛불을 받아 파란 빛을 흘렸다. 손이 겹쳐진 순간 그의 호흡이 한 번에 멎었고, 다시 이어질 때는 더 깊었다.
“증명하겠다. 네가 옳았다는 것도. 내가 이번 생에서는 달라졌다는 것도.”
리아나의 손가락이 그의 손 아래에서 살짝 구부러졌다. 심장 박동과 같은 속도였다.
“계약합시다. 누가 먼저 죽어도, 남은 쪽이 증명을 끝내는 걸로.”
칼렌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받아들인다.”
벽난로의 장작 하나가 꺼지며 재로 무너졌다. 남은 불빛이 두 사람의 손이 겹쳐진 자리에 마지막으로 머물렀다.
칼렌의 호출을 받은 엘레나와 세르지오가 서재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엘레나의 밀짚색 머리칼이 촛불에 흔들렸고, 세르지오의 왼손이 바지 옆에서 짧게 떨렸다. 두 사람은 나란히 책상 앞에 서서 칼렌과 리아나를 번갈아 보았다.
칼렌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일 재판 전에, 네놈들도 알아야 할 일이다.”
짧았다. 리아나가 그 뒤를 이었다.
“제가 겪은 전생의 일을 전부 말할 생각입니다. 엘레나도, 세르지오 경도 들을 자격이 있어요.”
엘레나의 눈이 커졌다. 입술이 달싹였지만 말을 삼켰다. 세르지오가 목덜미를 긁적였다.
“……전생이요. 아가씨.”
“전생에 저는 프리드리히의 손에 독살당했습니다. 연회장도 아니었고, 증인도 없었고, 칼렌 공작은 방관자라고 믿었습니다.”
리아나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마지막 문장에서 잠시 숨이 꺾였다.
“그게 아니었다는 걸 오늘 알았습니다.”
엘레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아가씨, 그럼 저는…… 전생의 저는 어디에.”
“내 시신을 지키려다, 복도 앞에서.”
말을 끝맺지 않았다. 엘레나의 어깨가 움찔 올라갔다. 그녀의 오른손이 자신의 옆구리를 더듬었다. 마치 거기에 어떤 상처가 있었던 것처럼.
“거기…… 칼 맞았네요.”
엘레나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전에, 그녀가 고개를 휙 돌렸다.
“망할. 그 인간들. 도망도 못 가게 막아놓고.”
리듬이 깨진 목소리였다. 리아나는 그녀의 손을 잡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세르지오에게 옮겼다.
“세르지오 경은.”
세르지오의 허리가 곧게 펴졌다. 입술을 한 번 깨물고서,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저는 어떻게 됐습니까.”
“칼렌 공작을 따라 프리드리히 저택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안에서.”
리아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에메랄드 눈이 세르지오의 얼굴에 고정됐다.
“독을 뒤집어쓰고, 계단 아래로 쓰러졌다고 합니다.”
세르지오의 왼손이 멎었다. 그 짧은 순간, 떨림이 사라졌다. 그가 천천히 칼렌을 향해 돌아섰다. 칼렌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날 밤, 한 번도 제대로 말한 적 없지만.”
칼렌의 코발트 블루 눈빛이 짙어졌다.
“너는 마지막까지 내 뒤에 있었다. 그걸 이번 생에서는 다르게 쓰겠다.”
세르지오가 고개를 숙였다. 깊게, 그리고 빠르게. 다시 들었을 때 그는 엘레나를 향했다. 엘레나가 코를 훌쩍이며 세르지오를 흘겨보았다.
“……너도 죽었네. 그것도 계단 아래서.”
“네가 먼저 죽었잖아. 복도 앞에서.”
엘레나의 입꼬리가 실룩였다. 웃음도 울음도 아니었다. 그녀가 두 걸음 물러나서 리아나의 오른쪽에 섰다.
“이번 생에서는 달라요. 계단도, 복도도, 독도 전부.”
말투가 갈라졌다가 다시 예의 바른 존대 끝으로 붙들렸다. 엘레나가 턱을 치켜들었다.
“내일 재판이든 뭐든, 전 그냥 아가씨 뒤에 있을게요. 살아서.”
세르지오가 그녀 옆으로 천천히 다가섰다. 떨리는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싸며, 칼렌과 리아나를 나란히 바라보았다.
“저도 이번에야말로, 끝까지.”
네 사람의 그림자가 촛불 아래서 한 덩어리로 붙었다.
서재의 촛불은 세 개만 남아 있었다. 밤이 깊을수록 심지가 짧아졌고, 그림자는 벽을 따라 길게 늘어졌다.
문이 열리고 엘레나가 들어왔다. 밤공기에 젖은 옷자락에서 싸늘한 기운이 번졌다. 오른손에는 접힌 양피지 두 장을 쥐고 있었다.
“연락책이 방금 건넸습니다. 프리드리히 후작의 사신이에요.”
칼렌이 탁자 건너편에서 고개를 들었다. 세르지오는 벽 쪽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있었다. 리아나는 탁자 앞에 앉은 채였다.
엘레나가 양피지를 폈다. 첫 장은 후작의 직인이 찍힌 공식 서한처럼 보였으나, 수신인은 적혀 있지 않았다. 그녀가 읽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 박자 빨랐다.
“‘그 여자는 내다보는 자다. 지난 연회에서 내가 배치한 독을 사전에 꿰뚫었을 뿐 아니라, 내가 사흘 전 누구와 만났는지까지 정확히 지목했다. 정보 유출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녀는 이미 한 번 이 시간을 살았다. 회귀자임이 틀림없다.’”
리나아의 호흡이 한 번 끊겼다. 엘레나가 두 번째 장으로 넘겼다.
“‘이런 존재를 이단심문에 넘기지 않고 내버려두면, 조만간 내 모든 계획이 탄로날 것이다. 나는 그녀가 두렵다.’”
마지막 세 글자에서 엘레나의 목소리가 얇아졌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정치적 술책이 아니에요. 진짜 무서워하는 거예요.”
세르지오가 벽에서 등을 뗐다. “공포가 전략을 왜곡시킨 경우는 위험합니다. 후작은 이성을 잃은 자의 무모함으로 나올 겁니다.”
칼렌은 양피지를 리아나 쪽으로 밀었다. 그녀가 첫 장을 집어 들었다. 두 번째 문장에서 눈이 멈췄다. 이미 한 번 이 시간을 살았다. 전생에 그녀를 죽인 독을 올린 손이, 같은 글씨로 그녀의 기적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의 약점은 이거다.”
칼렌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그러나 마지막 음절에서 숨이 미세하게 갈렸다.
“법정에서 논리를 무너뜨리는 것만으론 부족해. 후작은 이성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니까. 공포를 이용해야 한다.”
리아나가 양피지를 내려놓았다. 손가락이 종이 모서리를 한 번 쓸었다.
“그의 공포가 진심이라면, 재판에서도 가장 통제할 수 없는 순간에 실수를 할 겁니다. 우리는 그 지점을 기다리면 됩니다.”
“어느 지점입니까.”
엘레나의 질문에 리아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전생의 기억이 아니었다. 이번 생에서 처음 세우는 전략이었다.
“후작이 나를 회귀자라고 부를 때마다, 나는 그가 두려워하는 자가 됩니다. 그의 공포를 법정에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방청석은 그를 의심할 거예요.”
세르지오가 목덜미를 한 번 긁었다. 손끝이 떨렸지만, 곧 주먹을 쥐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러서지 않아야 합니다.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칼렌이 일어섰다. 탁자 위로 스톰블루 반지가 촛불을 받아 푸르게 빛났다.
“재판은 결투로 끝난다. 내가 증명한다. 리아나 벨루아는 마녀가 아니라, 신에게 선택받은 자라고.”
엘레나가 한 걸음 다가섰다. 리아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르지오는 탁자 반대편으로 걸어와 섰다. 네 사람의 그림자가 바닥에서 하나로 합쳐졌다.
칼렌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리아나가 그 위에 손을 얹었다. 엘레나가 그 위에, 세르지오가 마지막으로 손을 포갰다.
“내일,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칼렌이 말했다. 그 순간 촛불 셋이 일제히 흔들렸다. 그러나 꺼지지는 않았다. 심지가 다시 바로 서고 불꽃은 전보다 밝아졌다.
리아나는 손등에 전해지는 세 사람의 체온을 느꼈다. 차갑던 손가락 끝이 데워지는 속도가 달랐다. 칼렌의 손은 단단했고, 엘레나의 손은 얇고 따뜻했으며, 세르지오의 손은 거칠었지만 떨리지 않았다.
“새벽까지 각자 휴식을 취한다.”
칼렌이 손을 거두며 말했다. 그의 발걸음이 먼저 문을 향했다. 세르지오가 뒤따랐다. 경비 구역 순찰이 남아 있다는 듯, 오른손으로 검자루를 한 번 확인했다.
엘레나는 리아나의 옆에 잠시 서 있었다. 입을 열려다 말고, 고개만 한 번 깊이 숙였다. 그녀가 나간 뒤에도 리아나는 잠시 서재에 남아 촛불을 바라보았다. 하나를 불었다. 두 번째를 불기 직전, 문 밖 복도에서 칼렌의 군화 소리가 사무실 방향으로 멀어졌다.
리아나는 마지막 촛불을 불었다. 어둠이 서재를 덮었지만, 손등 위의 온기는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