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공녀의 재계약
6화
새벽녘, 리아나의 집무실 탁자 위에 작은 종이 한 장이 놓였다. 봉인이 없는 단순 접기. 펼치자 세 줄의 짧은 부호가 드러났다.
베일-베일-중단.
엘레나의 암호였다. 전날 밤 구출된 직후, 둘이서만 정한 비상 신호다. 중단. 강제된 중단.
리아나는 종이를 촛불에 갖다 댔다. 회귀 전, 베일 상회는 프리드리히의 사설 정보망이었다. 민트가 거기 소속이라면 이 메시지는 엘레나가 쓴 게 아니다. 누군가 암호 체계를 알아내 쓰게 한 것이다.
재가 떨어지기 전에 그녀는 종을 울렸다.
“공작님을 뵙겠습니다. 지금.”
몇 분 안 돼 문이 열렸다. 칼렌은 겉옷도 걸치지 않았고, 흰 셔츠 소매가 팔꿈치까지 걷혀 있었다.
“무슨 일이지.”
그녀가 탁자 위의 재를 가리켰다.
“엘레나에게서 암호가 도착했습니다. 베일 상회에서 왔다는 표식과 함께, 모든 접촉이 강제 중단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엘레나 본인이 보낸 건가.”
“확인할 방법은 없습니다. 암호 체계는 저와 그녀만 아는 것이지만, 알고 있었다면 강제로 쓰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칼렌의 시선이 재 위에 멈췄다가 그녀의 오른쪽 손목으로 옮겨붙었다.
“베일 상회 위치를 알고 있나.”
“압니다. 조사한 결과입니다. 공작님께서 암시장 접근을 허락하신 이후로.”
칼렌은 더 묻지 않았다.
“몇 명이 필요하지.”
“최소한으로. 공작님과 저, 입구 경비 한 명이면 충분합니다.”
“내 부관을 배치하지.”
“안 됩니다. 베일 상회는 공식적인 공작 가문의 개입을 감지하면 증거를 소각하고 잠적합니다. 세르지오 경은 직속 부관이니, 정보원이 그를 보는 즉시 모든 걸 지울 겁니다.”
잠시 후 칼렌이 입을 열었다.
“좋다. 경비 한 명만 대동한다. 진입 방식과 주도권은 네게 맡기지.”
“감사합니다.”
리아나가 허리 숙여 예를 표하는 동안 칼렌의 손이 탁자 위 재 그릇을 옆으로 밀며 그녀의 손목 옆을 스쳐 지나갔다. 접촉은 없었다. 칼렌은 이미 등을 돌리고 있었다.
“30분 후 정문에서 만나지.”
문이 닫혔다. 리아나는 손목을 내려다보지 않았다.
베일 상회는 구시가지 지하에 있었다. 약제상 간판이 걸린 좁은 가게를 지나, 벽면 거울 뒤 계단을 내려가자 축축한 벽돌 터널이 이어졌다. 칼렌은 망토 깃을 올린 채 그녀보다 한 걸음 뒤에서 걸었다.
하급 기사 한 명을 터널 입구에 남겨두고 철문 앞에 섰다. 리아나는 구리판을 세 번 두드렸다. 이어 손바닥 전체로 한 번, 손가락 관절로 두 번.
투시창이 열렸다.
“소개장.”
“없습니다. 하지만 그림자에게서 온 하녀로부터 전갈을 받았습니다.”
투시창 너머 눈이 가늘어졌다. 창이 닫히고 철문이 열렸다. 민트가 서 있었다. 사교 모임의 하인 복장 대신 검은 튜닉 차림이었다.
“리아나 벨루아 영애. 이런 곳까지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내 시녀가 여기 있다고 들었습니다.”
민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정보 거래를 하러 오셨군요. 안으로 드시지요.”
방은 벽면을 따라 문서함이 줄지어 있고 중앙에 협상용 탁자가 놓여 있었다. 민트가 탁자 건너편에서 손을 내저었다.
“차라도 내올까요.”
“필요 없습니다. 엘레나 로벤의 소재를 알고 싶습니다.”
“대가는 무엇으로 하실 겁니까.”
칼렌이 리아나 뒤에서 움직이려 했다. 그녀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대가는 당신의 현재 안전입니다.”
민트의 미소가 희미해졌다.
“베일 상회는 작년 겨울, 제국 동부 무역로 지도 한 장을 이단심문소에 제공했습니다. 그 지도에는 공작가의 비공식 물자 이동 경로가 포함되어 있었고요.”
민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걸 어떻게.”
“나는 알 필요가 있고, 당신은 살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단심문소가 정보 제공자를 보호해준 적은 없으니까요. 특히 그 정보가 공작가를 건드리는 내용이라면.”
민트의 손가락이 탁자 모서리를 움켜잡았다.
“그 지도 건은 상회 내부에서도 극소수만 아는……”
“그래서 당신이 책임자라는 걸 알고 왔습니다.”
리아나가 한 걸음 다가섰다.
“엘레나 로벤의 소재와, 프리드리히 후작에게 올릴 오늘의 보고 내용. 그 두 가지를 내게 주십시오. 그럼 내 입에서 이 이야기가 나오는 일은 없을 겁니다.”
민트가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보고는 이미 올렸습니다. 엘레나 로벤의 신원은 삼 년 전 이곳에서 활동하던 중개상 ‘그림자 엘레나’임을 확인했으며, 현재 그녀를 베일 상회 지하 구금실에 확보 중이라고.”
“수정 보고를 올리십시오. 엘레나 로벤은 탈출했고, 추적에 실패했다고.”
민트가 고개를 저었다.
“후작님이 속아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이 어떻게 쓰느냐에 달렸습니다. 나를 속이는 데 성공했다고 보고하면 모순은 없습니다. 엘레나는 도주했으나 정보는 충분히 확보했고, 리아나 벨루아는 베일 상회의 거짓 정보에 속아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쓰면 됩니다.”
민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보고서를 그렇게 쓴다 한들, 후작님은 결국 알게 됩니다.”
“그때쯤이면 당신은 이미 공작가 쪽에 발을 걸치고 있을 겁니다. 오늘의 거짓 보고가 그 시작입니다.”
“협력자로 삼겠다는 겁니까.”
“살 길을 드리는 겁니다.”
민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천천히 서랍에서 새 보고서 용지를 꺼냈다.
“구금실은 이 복도 끝 왼쪽입니다. 열쇠는 여기 있습니다.”
열쇠를 받아 쥔 리아나의 손은 여전히 차분했다.
“공작님, 부탁드립니다.”
칼렌이 민트 앞으로 걸어가 멈춰 섰다.
“한 글자라도 장난치면, 그 잉크가 마르기 전에 네 손목이 먼저 부러진다.”
민트의 펜촉이 종이 위에서 멈칫했다.
리아나는 이미 복도를 걷고 있었다. 구금실 문 앞에서 열쇠를 돌리자 축축한 냄새가 밀려 나왔다. 벽에 기댄 채 앉아 있던 엘레나가 고개를 들었다. 왼쪽 광대뼈 위로 얕은 찰과상이 나 있었다.
“공녀님……”
“일어날 수 있어?”
엘레나가 벽을 짚고 일어났다. 리아나가 그녀의 팔을 잡아 부축하며 걸었다.
“민트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중 거래자로 살려뒀어. 쓸모가 생겼으니까.”
엘레나의 발걸음이 잠시 멈칫했다.
“그 녀석. 제 과거를 알고 있었습니다. 삼 년 전 이곳에서 ‘그림자’로 불리던 시절의 기록부까지 꺼내 보여줬어요.”
리아나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엘레나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공녀님께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
“나중에. 일단 여길 나가자.”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민트는 막 보고서를 접고 있었다. 칼렌이 종이를 낚아채 훑어본 뒤 리아나에게 건넸다. 내용은 지시한 대로였다.
민트가 말했다.
“매주 수요일 밤, 구시가지 서쪽 약제상 우편함에 후작 저택 보고서 사본을 넣겠습니다.”
“그걸 내가 확인할 거야.”
엘레나가 대신 답했다. 목소리는 평소의 단단한 톤을 되찾고 있었다.
칼렌이 먼저 계단을 올랐다. 엘레나가 그 뒤를 따랐다. 리아나는 계단에 발을 디디기 전 어깨 너머로 민트를 돌아보았다.
“보고서 원본이 아직 하나 남아 있군요.”
“어디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 왼쪽 부츠 안.”
민트의 얼굴이 굳었다. 리아나는 계단을 올랐다.
공작 저택의 비공개 회의실은 창문이 없었다. 벽을 따라 늘어선 촛불 넷이 유일한 빛이었다.
칼렌이 마지막 시종을 내보내고 문을 닫았다. 엘레나는 긴 탁자 앞에 서 있었다. 오른쪽 소매가 찢어져 어깨가 드러났고, 팔뚝에는 붉은 멍이 올라와 있었다. 리아나는 한 걸음 물러서서 섰다.
“이름.”
“엘레나 로벤입니다, 공작님.”
“그건 가명이다. 베일 상회 소속이었지. ‘그림자 엘레나’.”
엘레나의 숨이 멎었다. 어깨의 근육이 수축하는 모습이 찢어진 소매 위로 드러났다. 리아나는 개입하지 않았다.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엘레나의 옆얼굴에 고정됐다.
“삼 년 전까지는…… 맞습니다.”
“어째서 공작 저택의 하녀로 위장했나.”
“위장이 아니었습니다. 삼 년 전 거래 중 의뢰인이 배신해서 동료 둘이 죽었어요. 살 길을 찾다가 신분증을 새로 사서 하녀로 들어온 겁니다. 여긴 살 곳이었어요.”
칼렌이 팔짱을 풀고 탁자 위 손가락을 두드렸다.
“리아나 벨루아 영애와는 어떤 관계인가.”
“제 주인…… 아니. 그 이상이에요. 과거를 아직 전부 말씀드리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영애를 속인 적은 없어요. 한 번도.”
“증명할 수 있나.”
“못 합니다. 전직 정보상이라는 말에 증명 같은 건 애초에……”
“그 점은 알고 있다.”
칼렌의 시선이 리아나에게로 옮겨갔다. 코발트 빛이 붉은 띠 위에 잠시 닿았다.
“공녀는 아는가. 이 자의 과거를.”
리아나가 한 걸음 나서며 엘레나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오늘 알게 됐습니다만, 이미 눈치는 채고 있었습니다. 암시장 동향을 전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정확해서요.”
“알면서도 곁에 둔 이유는.”
“엘레나는 제 지시 없이도 저를 지키려고 움직였고, 오늘 그 일로 적에게 정체가 드러났습니다. 이런 자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엘레나의 어깨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떨림이 멎는 게 리아나의 손끝에 전해졌다.
칼렌은 두 사람을 발치에서 얼굴까지 천천히 훑었다.
“알겠다. 엘레나 로벤. 네 신변은 리아나 벨루아 공녀의 감독 하에 둔다. 저택 밖 외부 접촉은 사전 보고. 암시장 루트도 마찬가지다. 어길 시 반역죄로 간주한다.”
“……감사합니다, 공작님.”
엘레나의 무릎이 반쯤 꺾였다가 리아나의 손에 붙잡혔다. 찢어진 소매가 흔들렸다.
칼렌은 이미 문 쪽으로 돌아서 있었다.
“내일 아침 집무실로 와라, 공녀.”
복도의 발자국 소리가 열 걸음쯤 가서 멀어졌다.
엘레나는 한참 숨을 고르지 못하다가 마른 침을 삼켰다.
“저…… 정말 괜찮겠습니까. 영애의 입장이 더 어려워질 텐데.”
“괜찮다. 네가 숨기고 있던 말을 들을 준비도 됐다.”
엘레나의 눈이 커졌다. 리아나는 그 눈 속에서 전생의 기억과 겹치는 것을 보았다. 목덜미 아래로 차가운 감각이 짧게 지나갔다.
“네가 예전에 잠적하기 전 마지막으로 맡았던 의뢰.”
엘레나가 숨을 들이켰다.
“그게…… 그걸 어떻게……”
“기억나면 말해줘.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
엘레나가 찢긴 소매를 움켜쥐었다. 붉은 멍 아래 오래된 굳은살이 떨렸다. 입술이 열릴 듯 멈췄다가 다물렸다.
“내일이면 정리되겠지. 지금은 네 팔부터 돌봐.”
리아나가 회의실 문을 열었다.
깊은 밤. 모든 촛불이 꺼진 시간. 칼렌의 침실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고, 창밖 달빛조차 희미했다.
그는 꿈속에서 검을 휘둘렀다.
낡은 지하실. 축축한 돌바닥. 누군가 무릎 꿇고 고개를 들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검을 쥔 자신의 손이 움직이는 게 또렷했다. 칼날이 공기를 가르고 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저항, 뼈에 닿기 직전의 떨림. 피가 손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한 번도 휘두른 적 없는 검의 무게가 오른손에 익숙하게 박혀 있었다. 상대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숨이 귀에 닿았다. 피비린내가 코끝에 감돌았다.
발밑에 피가 퍼진 뒤, 시체의 소매가 밀렸다. 손목에 감긴 붉은 천. 리아나의 붉은 띠와 같은 쪽, 같은 색이었다.
칼렌이 잠에서 깨어났다.
등이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손가락 사이로 어둠만 흘렀다. 피는 없었다. 그러나 검을 쥐었던 감각이 마디마디에 남아 손을 펴는 동작마저 느리게 만들었다.
이건 꿈이 아니다.
의식보다 몸이 먼저 알았다. 검 끝이 뼈에 닿을 때의 진동까지 기억하는 것은 꿈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그는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손가락을 허벅지 위에 내려놓고 꿈속 검의 움직임을 더듬었다.
경사 각도, 힘을 뺀 손목. 훈련으로 체득한 패턴이 아니었다. 실제로 누군가를 베었을 때만 몸에 새겨지는 궤적이었다.
한 번도 기억나지 않는다. 저 여자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일어나 책상으로 걸어갔다. 빈 양피지에 펜을 찍어 검의 궤적, 상대가 무릎 꿇었던 방향, 공간의 구조를 기호로 그렸다. 마지막에 한 글자를 더 적었다.
붉은 띠. 잉크가 마르기 전에 두 손을 책상 위에 짚었다. 등 근육이 굳어 있다가 숨을 뱉자 천천히 풀렸다.
다음 날 아침. 칼렌의 집무실.
햇살이 아직 창문을 통과하기 전이었다. 서재와 집무실 사이 통로에는 평소보다 적은 경비만 서 있었다. 리아나는 호출 때부터 준비가 돼 있었다. 진한 청색 드레스에 허리 띠를 조이고, 약도를 눌러 고정한 뒤 집무실 문 앞에 섰다.
“들어오라.”
칼렌은 책상 뒤에 서 있었다. 등 뒤로 제국 지도가 걸려 있었고, 책상 위에는 간밤에 적은 메모 한 장이 반쯤 접혀 있었다.
“상태는 어떤가. 엘레나 로벤의 부상은.”
“가볍습니다. 이틀이면 낫겠더군요.”
“그쪽 공녀는.”
“본래 피로가 많지 않은 체질이라 괜찮습니다.”
칼렌이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보기보다 질긴 편이군.”
“그게 칭찬입니까.”
“기술이다.”
그가 탁자 앞으로 걸어왔다. 두 사람 사이의 긴 탁자에는 차가 식은 찻잔 하나가 놓여 있었다.
“어젯밤 정리한 결론이다. 듣겠나.”
“공식적 제안이라면 기꺼이.”
칼렌의 집무실은 서재보다 두 배는 넓었지만, 그가 말을 꺼내기 위해 들인 간격은 대화 거리보다 가까웠다. 등 뒤 지도의 북부 변경 지역이 어깨 위로 걸쳐 있었다.
“제국 다섯 공작 가문의 집무실에도 이런 정보전은 드물다. 지금껏 공녀가 이 저택에서 확보한 건 공개 임무뿐. 앞으로 내가 제안하는 건 비공식 파트너십이다. 암시장 접촉도, 이 저택 안에서 처리하지 못한 적도, 이제 혼자 맡지 않는다.”
리아나는 문서 끝 조건을 빠르게 훑었다. 문서 상단에는 ‘정보 공조 잠정 합의’라고 적혀 있었다.
“구체적이군요. 매주 정보 출처 일부를 보고하고, 공작님은 감찰 범위를 확대해 저를 보호한다.”
“보호조로 읽었나. 아니다. 공세다.”
칼렌의 시선이 리아나의 오른쪽 손목으로 내려갔다. 탁자 위로 손을 내밀었다.
“먼저 이단심문소에 대한 선제 견제를 시작하겠다. 이것은 계약 결혼 바깥의 협정이다. 그러니까…… 대가는 따로 지불한다.”
“대가를 제시해주십시오.”
“내가 가진 정보 자산 절반.”
리아나의 손가락이 멈췄다.
“절반을 넘기면 저보다 약한 위치에 섭니다.”
“알고 있다. 어젯밤, 확신했다. 공녀를 그냥 두면 내가 손에 넣지 못할 진실이 있다는 걸. 그걸 지키려면 정보가 아니라 위치가 필요하다.”
리아나는 그 말 뒤에 깔린 것을 감지했다. 회귀 전 기억 속에서도 칼렌은 이런 어조를 쓴 적이 없었다. 권력의 계산이 아니라, 증명되지 않은 기억에 대한 확신이었다.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공작님이 어젯밤 확신한 진실이라는 것이…… 혹시 과거의 기억과 관련된 것입니까.”
칼렌이 메모지를 집어 반으로 접힌 종이를 펼쳤다. 붉은 띠에 대한 문장만 남기고 나머지를 찢어 촛불에 갖다 댔다. 검은 연기가 올라왔다.
“그래. 그리고 그 과거는 아직 내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리아나의 목덜미에 긴장이 실렸다가 풀렸다. 붉은 띠 아래 맥박이 뛰었다. 문서를 끌어당기자 칼렌의 시선이 손목을 스쳤다.
그 순간, 문이 세 번 두드려졌다. 평소 세르지오의 완력으로 내는 노크였다.
“들어오라.”
세르지오가 양팔에 서류 더미를 안고 들어와 탁자 위로 밀어 올렸다. 숨결이 거칠었다.
“공작님…… 프리드리히 후작 저택에 심어둔 감시조에게서 급보입니다.”
칼렌이 찢어진 메모지를 구석에 내려놓았다.
“말하라.”
“후작님의 저택 지하, 버려진 저장고에서 독극물 잔여물이 발견됐습니다. 성분이…… 벨루아 가문에서 과거에 기록된 희귀 독극물과 유사합니다. 복합 성분표가 첨부돼 있습니다.”
리아나의 눈이 종이 위를 빠르게 움직였다. 손끝이 서류 가장자리를 짚었다. 전생에 자신을 죽였던 독과 같은 계열이었다.
붉은 띠 아래 흉터가 조이는 듯한 착각이 지나갔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손가락이 서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