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공녀의 재계약
7화
서재의 촛불이 반쯤 줄어들었을 무렵이었다.
리아나는 독극물 성분표가 첨부된 서류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이 물질, 제 가문의 기록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벨루아 가문이 이 독을 문서화한 것은 사실이지만, 조제법 자체는 북부 변경의 밀수 경로에서 유래했어요. 리처드 세르반테스 자작이 관리하던 그 경로 말입니다.”
탁자 위의 찻잔은 엘레나가 조금 전 내려놓고 간 것으로, 완전히 식어 쓰디쓴 맛만 남아 있었다. 칼렌이 서류 더미를 밀쳐내고 일어났다.
“세르반테스의 비공개 구좌와 이 독이 같은 뿌리라면, 프리드리히는 연회 전부터 이미……”
“후작님은 세르반테스가 실패할 것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따로 움직인 거죠.”
칼렌은 창가로 걸어갔다. 동트기 전 어둠이 유리창 너머로 짙게 깔려 있었다. 그의 왼손이 검지의 스톰블루 반지를 한 바퀴 돌렸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프리드리히가 독극물을 보관했다는 증거만으로는 부족해. 후작은 이걸 역으로 이용할 것이다. 벨루아 가문의 희귀 독을 공작가에서 발견했다고. 공녀를 겨냥한 함정이다.”
리아나는 접은 서류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찻잔 옆에는 엘레나가 가져온 두 번째 봉투, 아직 뜯지 않은 것이 놓여 있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봉투를 열자 얇은 종이가 한 장 나왔다. 엘레나가 새벽녘에 건넨 보고서였다. 암시장과 사교계 양쪽에 동시에 퍼진 소문의 요약본. ‘리아나 공작부인, 미래를 보는 마녀.’
칼렌이 종이를 낚아채듯 집었다. 읽는 동안 그의 턱선이 굳어졌다.
“언제부터.”
“어젯밤 자정 무렵입니다. 베일 상회에서 시작돼 사교계 하인망으로 번졌어요. 오늘 아침이면 귀족들의 조찬 테이블에 오를 겁니다.”
칼렌이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 찢지는 않았다.
“이단심문을 유도하는 거다.”
“알고 있습니다. 독극물 발견과 소문 유포가 같은 날 같은 시각에 겹치는 건 우연이 아닙니다. 제 예측 능력을 입증할 물적 증거와 증언을 동시에 쌓는 전략이에요.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니까.”
“둘을 묶으면 이단심문소가 움직일 명분이 된다.”
“예. 그리고 한 번 소환되면, 제가 풀려나더라도 공작가와의 계약 결혼은 정치적 부채가 됩니다. 후작님이 노리는 건 제 제거가 아니라 공작 가문 전체의 발목입니다.”
칼렌의 목소리에서 온도가 빠졌다. 그가 탁자로 돌아와 손가락으로 서류를 두 번 두드렸다.
“정보를 내놔라. 공녀가 알고 있는 프리드리히의 다음 수.”
“제가 가진 건 후작의 사고 패턴과 정보 흐름에 대한 추정뿐입니다. 확증은 없어요.”
“그걸로 충분하다.”
리아나는 잠시 그를 바라봤다. 회귀 전 기억 속 칼렌은 증거 없는 추정을 ‘충분하다’고 받아들일 사람이 아니었다.
“공작님께서 제안하신 파트너십. 답을 드리겠습니다. 받아들입니다. 조건부로.”
칼렌의 손가락이 멈췄다.
“조건.”
“제 정보 출처에 대한 불필요한 추궁을 중단해주십시오. 그리고 엘레나의 신변을 제 권한으로 보호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녀는 이제 암시장 정보망을 가동할 유일한 접점입니다. 신분은 하녀로 두되, 정보 활동에 관해서는 제 독자적 판단을 인정해주십시오.”
칼렌의 눈이 가늘어졌다. 손가락이 다시 반지를 한 바퀴 돌렸다.
“승인한다. 대신 내 조건도 듣겠다. 이단심문소의 움직임에 관한 모든 보고는 나와 공유한다. 은폐는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공녀에게 위협이 되는 정보는, 그것이 무엇이든 내게 먼저 알린다.”
리아나는 고개를 들었다. 에메랄드 그린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 위협이 설령 공작님 자신과 관련된 것이라도 말입니까.”
한 박자.
“그래.”
리아나는 손을 내밀었다. 계약서도, 잉크도 없는 빈 탁자 위에서였다.
“동의합니다.”
칼렌이 그 손을 잡았다. 악수라기보다 확인이었다. 그의 손바닥은 예상보다 건조했고, 힘은 필요 이상으로 들어가 있었다.
두 사람의 손이 떨어지자, 리아나는 엘레나의 보고서를 집어 촛불 가까이 가져갔다. 종이 모서리가 불길에 닿자 검은 연기가 실처럼 올라왔다.
“첫 번째 공유입니다. 프리드리히 후작은 오늘 중으로 이단심문소에 예비 조사 청원을 제출할 겁니다. 독극물 발견 보고서를 첨부해서. 우리가 증거를 분석하는 시간을 주지 않을 거예요. 먼저 움직여야 합니다.”
칼렌이 벽 쪽으로 걸어가 벨을 한 번 울렸다. 낮고 짧은 소리가 복도로 퍼져나갔다.
“내 정보망을 열겠다. 공작 가문이 확보한 이단심문소 내부 동향을 비롯해, 프리드리히 저택 감시조 보고서 전부. 공녀는 엘레나를 통해 암시장 쪽 대응책을 마련해라.”
“소문의 출처를 추적하는 것부터 시작하지요.”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세르지오가 들어왔다.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멈칫했다.
“공작님.”
“이단심문소 내부 동향 보고서 전부를 서재로 옮겨라. 그리고 프리드리히 저택 감시조 교대 주기를 여섯 시간으로 단축한다.”
세르지오의 눈이 리아나에게서 보고서가 타고 남은 재로, 다시 칼렌에게로 움직였다. 그의 손이 옆구리에서 잠시 떨렸다.
“알겠습니다.”
그가 물러가자 칼렌이 리아나를 돌아봤다.
“질문 하나. 공녀는 이 소문이 퍼질 걸 알고 있었나.”
“예측은 했습니다. 확신은 없었어요. 하지만 후작님이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몰랐습니다.”
칼렌은 더 묻지 않았다. 창밖이 서서히 짙푸른 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동이 튼다.”
리아나는 고개를 돌렸다. 유리창 너머로 지평선이 옅은 보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새벽과 아침 사이, 모든 것이 잠시 멈춰 있는 시간이었다.
서재의 문이 닫히자, 칼렌은 세르지오에게 손짓했다. 서류를 펼치라는 명령이었다. 세르지오는 탁자 위로 올린 서류 더미에서 상단 세 묶음을 내려놓았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감시조의 보고부터 읽으십시오.”
칼렌은 첫 묶음을 집어 들었다. 프리드리히 저택 지하 저장고의 독극물 성분표였다. 벨루아 가문의 문헌에 기록된 ‘월계독’과 일곱 가지 성분이 일치했다.
두 번째 묶음은 감시조의 동향 보고. 후작 저택을 드나든 인물들의 명단이었다. 베일 상회의 얼굴 셋, 이단심문소 하급 서기 한 명.
세 번째 묶음을 펼친 순간, 칼렌의 손이 멈췄다. 벨루아 가문 몰락 당시의 재산 목록 사본이었다. 칼렌이 직접 열람했던 원본과 다른 점이 보였다. 리아나 벨루아의 개인 재산 항목이 통째로 삭제돼 있었고, 그 자리에 ‘압수 면제—가문 간 계약에 따름’이라는 문구가 삽입돼 있었다. 서명 란에는 세르지오 바르트의 필체가 남아 있었다.
칼렌이 고개를 들었다. 손에 쥔 종이가 구겨질 듯 접혔다.
“세르지오. 이 서류의 서명을 봤다. 네가 조작한 건가.”
세르지오의 왼손이 움찔했다. 신경 마비 후유증으로 떨리기 시작한 손을 오른손으로 감쌌다.
“……그렇습니다.”
“이유를 말하라. 단 한 번이다.”
세르지오의 왼손이 바지 옆에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삼 년 전, 공작님께서 리처드 세르반테스 자작을 직접 처단하신 날 밤입니다. 공작님께서 나가신 뒤에 시신을 수습하러 들어갔습니다. 그 자리에 세르반테스 말고도 한 명이 더 있었습니다. 그 자의 손목에 붉은 천이 감겨 있었습니다. 리아나 공녀님께서 지금 차고 계신 그 띠와 똑같은 무늬였습니다.”
세르지오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며칠 뒤, 벨루아 가문의 재산 목록을 검토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때 리아나 영애의 이름이 목록에 있었습니다. 공녀님이 살아 계시면, 언젠가 공작님께서 그날 밤을 다시 마주하게 될 거라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그래서 제 판단으로 기록을 지웠습니다. 세르반테스와 공녀님 사이의 연결 고리를 끊어내려고.”
“그 현장에서 내가 한 명을 더 베었다는 건가.”
“확실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미 끝난 뒤에 들어갔으니까요. 하지만 그 붉은 천은 똑똑히 보았습니다.”
칼렌은 말없이 세르지오를 내려다보았다. 코발트 블루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어젯밤 꿈속에서 낡은 지하실 바닥에 고인 피, 검을 휘두르는 자신의 손, 그리고 그 상대의 손목에 감긴 붉은 천.
꿈이 아니었다. 기억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자신의 손은 그 감촉을 알고 있었다.
“묻지 않았다.”
칼렌의 손이 탁자 모서리를 짚었다. 힘이 들어간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렸다.
“오늘부로 네 직위는 유지한다. 단, 모든 업무에 부관을 붙인다. 네가 작성하는 서류는 내 앞에서만 펼친다.”
세르지오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송구합니다, 공작님.”
“나가서 대기실에 있으라.”
세르지오가 물러난 서재에는 칼렌만 남았다. 구겨졌던 종이를 펴서 난롯가로 가져갔다. 불에 넣으려던 손이 멈췄다.
세르지오가 지우려 했던 것은 연결 고리만이 아니었다. 그날 밤 사건과, 리아나 벨루아라는 존재 자체를 칼렌의 시야에서 제거하려 한 것이다. 칼렌은 종이를 접어 서랍 안쪽에 밀어 넣었다. 불태우기에는 너무 많은 질문이 남아 있었다.
리아나의 방에서는 엘레나가 긴장한 얼굴로 문을 닫았다. 어깨에 멍이 든 자리가 드레스 위로도 살짝 부풀어 있었다.
“공녀님, 베일 상회에서 연락이 왔어요. 민트 경로 말고 다른 쪽이에요.”
리아나는 창가 쪽 탁자로 걸어가 촛대를 밀어 공간을 만들었다.
“무엇을 보냈습니까.”
엘레나는 앞치마 안쪽 주머니에서 접힌 양피지 두 장을 꺼냈다. 한 장은 암호문이 빽빽했고, 다른 한 장은 복호화된 초록이었다.
“상회의 하급 정보상 하나가 프리드리히 후작 저택의 하인을 매수해서 빼낸 기록이에요. 지하 응접실 출입 명단, 그리고 대화 요약 일부.”
리아나의 눈이 복호문을 빠르게 훑었다. 프리드리히 벨몬트. 베일 상회 중개인 둘. 이단심문소 예비 조사관 한 명. 대화 요약의 첫 줄에 손끝이 멎었다.
‘리애나 벨루아—회귀자 여부 검증. 이단심문 청원 준비 중.’
전생에 프리드리히가 보였던 집요함이 떠올랐다. 그는 당시에도 리아나를 ‘예측 불가능한 변수’로 분류했었다. 이번 생에는 그 불확실성에 정확한 이름을 붙이려 하고 있었다.
“회귀자라.”
리아나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두려움보다 차가운 확인에 가까웠다.
엘레나가 다가서며 목소리를 낮췄다. “공녀님, 이건 엄청 위험한 소문이에요. 이단심문소가 저걸 진짜라고 믿으면……”
“알고 있습니다. 프리드리히 후작은 그걸 노리고 움직이는 중이에요.”
리아나는 종이를 접어 허리띠 안쪽에 밀어 넣었다. 붉은 띠를 살짝 건드린 손이 잠시 멈췄다. 전생에 이 손목이 잘렸을 때의 감각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흉터 자리가 조이는 듯한 느낌만 남아 있었다.
“공작님께 이걸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엘레나, 당분간 베일 상회와의 접촉은 민트 하나로만 제한하세요. 다른 정보상은 신뢰할 수 없어요.”
엘레나가 문고리를 잡으며 망설였다. 뒤돌아보는 눈빛에 걱정이 가득했다.
“공녀님…… 그런데 진짜로 그 이단심문소에서 말하는 ‘회귀자’라는 게……”
리아나는 짧게 웃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보다 지금은 프리드리히가 움직이기 전에 대응하는 게 먼저입니다.”
엘레나가 나간 뒤, 리아나는 탁자 위에 굳은 촛농을 손톱으로 떼어내 창밖으로 던졌다. 프리드리히가 ‘회귀자’라는 단어를 쓴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서 들었거나, 자신이 직접 추론한 것이다.
어느 쪽이든 위험한 도박이었다. 이단심문소가 그 말에 귀를 기울이면, 증명 여부와 상관없이 조사는 시작된다. 한 번 시작된 이단 조사는 무죄로 끝나도 상대를 정치적으로 매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서재로 돌아온 리아나는 칼렌의 표정에서 무언가 변했음을 읽었다. 탁자 위에는 서류 몇 장이 흩어져 있었고, 난롯가에는 종이를 넣으려다 만 흔적이 남아 있었다. 칼렌은 의자에 앉지 않고 창가에 서 있었다.
“늦었군. 한 시진이 지났다.”
“죄송합니다. 확인해야 할 내용이 예상보다 많았습니다.”
리아나는 허리띠에서 접은 양피지를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베일 상회에서 입수한 첩보입니다. 프리드리히 후작의 지하 응접실 출입 명단과 대화 요약이에요. 이단심문소 예비 조사관이 이미 접촉을 마친 상태입니다. 후작님은 저를 ‘회귀자’로 지목해서 이단심문을 청원할 계획이에요.”
칼렌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종이가 바스락 소리를 냈다.
“회귀자라.”
그 단어를 입에 올리자마자, 방금 전 세르지오의 고백이 떠올랐다. 붉은 천. 자신이 벤 누군가.
“미친 소리다.”
“후작님은 진심입니다. 그리고 이단심문소도 이걸 정치적으로 이용할 가능성이 커요. 대화 요약에 ‘증거 불문, 청원 접수만으로 조사 개시 가능’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칼렌은 종이를 내려놓았다. 시선이 리아나의 손목으로 향했다. 붉은 띠 아래 감춰진 흉터. 그 위치가 꿈속에서 자른 부위와 정확히 일치했다.
“묻겠다. 공녀는 자신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
리아나의 손이 붉은 띠 위로 올라갔다. 한 번 쓸어내리는 동작이었다. 흉터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를 확인하는 손길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말하라.”
“말로 증명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다만 저는 이미 한 번 이 모든 것을 겪었습니다.”
칼렌의 눈이 커졌다. 턱 근육이 단단히 조여들었다. 손가락이 탁자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공작님이 어젯밤 꿈에서 보신 것들은 아마 제가 겪은 그 시간의 파편일 겁니다.”
탁자 위의 촛불이 바람에 흔들렸다. 불꽃이 칼렌의 왼쪽 흉터를 스치는 순간, 그림자가 한층 짙어졌다. 칼렌은 말을 잇지 못했다. 증명되지 않은 기억, 실제 살인 경험으로만 새겨지는 감각, 그리고 지금 눈앞에서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이 여자.
문이 두드려졌다. 절제된 노크였다.
“공작님, 급한 전갈입니다.”
칼렌이 겨우 시선을 거두었다. “들어오라.”
문이 열렸다. 집사는 두 사람의 굳은 표정을 한 번에 읽고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이단심문소의 예비 조사관께서 응접실에 도착하셨습니다. 즉시 면담을 요청하십니다. 동행한 서기 한 명도 함께 왔습니다.”
칼렌의 손이 허리춤의 대검 손잡이를 스쳤다. 검을 뽑지 않았다. 손가락만 금속 장식 위에서 한 번 굳었다가 떨어졌다.
리아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펼쳐진 복호문을 천천히 접기 시작했다.
“공작님, 이건 제가 보관하겠습니다. 응접실에 가시는 동안 서재에 남겠습니다.”
“함께 간다.”
칼렌이 한 걸음 문 쪽으로 향하며 집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조사관에게 5분만 기다리라고 전하라. 공작 부인이 동행할 것이다.”
집사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칼렌이 돌아서서 리아나를 바라보았다. 코발트 블루 눈동자에는 아직 사그라지지 않은 충격이 남아 있었지만, 그보다 앞서 실전을 앞둔 자의 냉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
“가자. 이단심문소와의 첫 대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