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공녀의 재계약
8화
[1번 비트] 집사가 전한 조사관 내방 소식에 칼렌이 리아나에게 물었다. “방금 한 말.” 리아나는 복호문을 손바닥 위에 올리며 답했다. “전부 사실입니다.” “증명할 수 없다고 했다.” “말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공작님의 꿈이 증거입니다.” 칼렌의 턱선이 굳어지고, 복도에서 집사의 재촉이 이어졌다. 칼렌이 숨을 들이쉬며 대검 손잡이에서 손을 떼었다. “지금 간다.” 그가 리아나에게 기다리라는 눈짓을 보내며 덧붙였다.
“이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문이 닫히고 군화 소리가 멀어졌다. 리아나는 복호문을 허리띠 안쪽에 넣고 붉은 띠를 쓸었다. 엘레나는 앞치마 주름을 꼬며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이단심문소가 이 시각에 예비 조사관을 보낸 건 청원 접수 뜻입니다. 정식 조사 개시까지 시간이 많지 않아요.” 엘레나가 한 걸음 다가서며 낮췄다. “프리드리히 후작의 진술서가 어젯밤 접수됐고, 독극물 발견 보고서도 첨부됐습니다.” “후작 저택 지하에서 발견된 그것.” 리아나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 독극물 성분이 아가씨께서 말씀하신 벨루아 가문 기록의 희귀 독과 일치한대요. 북부 변경 밀수 경로 유래라고……” “회귀 전 저를 죽였던 독과 같다는 거죠.” 엘레나의 손이 멎었다. “그걸……
아셨어요?” “냄새로 알았습니다. 지하 응접실에 발 들였을 때 그 쓴내를 잊을 수 없더군요.” 엘레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전 아가씨가 그걸 알면서도 들어가셨다는 거예요?” 리아나가 엘레나의 멍든 팔뚝에 손을 얹었다.
“당신도 알았잖아요. 그날 밤 베일 상회에서 구하러 왔을 때, 내가 이미 알고 있다는 걸.” 엘레나의 어깨가 내려가고 눈가가 붉어졌다. 응접실에서 낮은 대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칼렌의 단호한 음색과 낯선 남자의 건조한 어조가 번갈아 이어졌다. “공작님이 예상보다 강하게 나가고 계시는 것 같군요.” “조사관이 후작의 진술서까지 들먹인다면……” 엘레나가 말을 마치지 못하자 리아나가 탁자 쪽으로 돌아섰다. “예상보다 반나절 빠르네요.
공작님이 어떤 조건을 받아낼지 확인해야 해요. 엘레나, 대기실에 계신 세르지오 바르트 씨에게 조사관의 계파 출신을 확인해 달라고 전해주세요.” 엘레나가 문으로 향하다 멈췄다. “칼렌 공작님이 아가씨에게 뭘 물으셨던 거예요?” 리아나는 물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나중에 이야기해요. 지금은 때가 아니에요.” 엘레나가 나가고, 응접실 쪽 대화 간격이 길어지며 협상 막바지 신호가 감지됐다. [2번 비트] 약 5분 뒤 군화 소리가 다가와 서재 문이 열렸다.
칼렌의 코발트 블루 눈동자가 짙어지고 광대뼈 위로 실핏줄이 돋아 있었다. “24시간이다.” “무엇을 위한 유예입니까.” “공작 부인의 공식 소환. 내일 정오까지 자진 출두를 요구했다.
응하지 않으면 강제 소환 절차에 들어간다.” “근거는요.” “프리드리히 벨몬트 후작의 진술서, 그리고 독극물이 벨루아 가문의 희귀 독과 계열이 같다는 분석 보고서.” 칼렌이 탁자 모서리를 움켜쥔 손가락 마디가 하얘졌다. “조사관은 란돌프 파 출신, 강경파다. 프리드리히가 이번 건을 정치 재판으로 끌고 가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24시간 안에 반박해야 하는 거군요.” “반박이 아니다.
24시간 안에 공작 가문의 공식 입장을 정해야 한다. 네가 말한 ‘이미 겪은 시간’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지만, 너를 이단심문소에 넘길 생각은 없다.” 리아나가 시선을 들었다. “이단심문소 소환 거부는 공작 가문 전체를 이단 비호 세력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프리드리히가 노리는 게 바로 그겁니다.” “알고 있다.” “그런데도 절 방어하시겠다 이거죠.” 칼렌이 한 글자씩 끊어 답했다. “그렇다.” 리아나의 손이 붉은 띠 위에서 멈췄다. “그럼 할 일이 세 가지입니다.
프리드리히 진술서의 허위 입증 증거 확보, 지하 응접실 독극물의 출처가 벨루아 가문이 아님을 증명, 그리고 조사관 란돌프의 강경파 약점 발굴.” 칼렌의 눈썹이 올라갔다. “이단심문소 내부 정보를 어떻게 확보할 생각이지.” “베일 상회에 제가 직접 확보한 채널이 있습니다.” “엘레나인가.” 리아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삼 년 전 이 일을 하던 사람입니다.
과거 정보망 일부는 여전히 유효해요.” 밖에서 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칼렌이 말했다. “정보 수집은 네 쪽에서 진행해라.
나는 이단심문소 절차적 허점을 찾겠다. 예비 조사에서 정식 심문으로 넘어가는 단계에 이의 제기 기간이 존재한다. 란돌프가 그걸 무시하고 넘어가려 한 점을 공격할 거다.” “법리적 대응만으로 부족할 수 있습니다.
란돌프 파는 절차를 무시하는 걸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칼렌이 한 걸음 다가서 거리가 한 팔 길이로 줄었다. “네가 이미 겪었다는 그 시간 속에, 이번 이단심문 사건도 포함돼 있나.” 리아나의 호흡이 반 박자 느려졌다. “포함돼 있습니다.
하지만 전생에서는 더 빨리, 더 불리하게 진행됐어요.” “그때 너는 어떻게 했지.” “혼자였습니다. 증거도 부족했고, 결국……” 리아나가 고개를 돌리며 말을 끊었다. “벨루아 가문은 이단 누명을 벗지 못했어요.” 칼렌이 탁자 위 문서 가장자리를 가지런히 모으며 3초쯤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이번엔 다르다. 네 옆에 나와 세르지오와 엘레나가 있다. 불완전하고 의심스러운 놈들이지만 일단 네 편이다.” “의심스러운 놈들이라면 공작님도 포함됩니까.” 칼렌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내가 제일 의심스러울 거다. 네 얘기를 들었으니까.” 리아나는 물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칼렌이 문서를 정리하며 지시했다.
“세르지오에게 이단심문 관련 법령을 색출하게 해라. 너는 엘레나를 통해 베일 상회 정보를 수집하고, 나는 내일 아침까지 란돌프의 개인 이력을 확보하겠다. 24시간이 지나기 전에 다시 이 자리에서 만나자.” “알겠습니다.” 리아나가 허리춤의 복호문을 확인하고 문으로 향했다.
문손잡이를 잡은 순간 칼렌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리아나 벨루아.” 그녀가 멈춰 섰다. “말하지 않은 부분은 네가 결정해라.
하지만 기억해라.” 군화 소리가 한 걸음 가까워졌다. “이제 너는 혼자가 아니다.” 리아나의 어깨가 작게 떨렸다가, 손목에 힘이 들어갔다. 문이 열렸다.
“알고 있습니다, 공작님.” 복도로 나서며 덧붙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질 생각이 없습니다.” 서재 문이 닫히자 칼렌은 자신의 물잔을 비우고 대기실 쪽문을 열었다. “세르지오.
들으셨겠지. 시간이 없다.” 세르지오가 즉시 일어났다. 칼렌이 이단심문소 관련 법전 세 권을 밀어 보냈다.
“예비 조사에서 정식 심문으로 이행하는 조항을 찾아라. 이의 제기 기한과 절차가 명시되어 있을 거다.” 세르지오가 법전을 받아 들며 답했다. “찾겠습니다.” 칼렌은 대기실을 나서기 전 서재를 돌아봤다.
촛불 한 자루가 깜박이고, 탁자 위에는 리아나의 빈 잔과 자신의 빈 잔이 한 뼘 거리로 나란히 놓여 있었다. 서재 문이 닫혔다. 칼렌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무거웠다.
탁자 앞에 멈춰 선 그가 의자 등받이를 짚자 손가락 끝이 닿은 나무에 자국이 생겼다. “24시간이다.” 리아나는 복호문을 허리띠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조사관이 그렇게 말했습니까.” “공식 소환을 미루는 최소한의 유예였다.
그 이상은 이단심문소 규정상 불가능하다고 하더군.” 엘레나가 반 걸음 나왔다. 찢어진 소매 아래로 어깨의 붉은 멍이 드러났다. “내일 정오까지란 말이에요?” 칼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드리히가 증거를 갖췄다. 독극물 발견 보고서, 베일 상회 정보원 증언록, 예지 능력 소문까지 묶어 청원서를 제출했다.” 리아나가 대리석 탁자 모서리를 더듬었다. “어젯밤 자정 무렵 시작된 소문이 오늘 아침 이단심문소 청원서와 같은 탁자 위에 올라 있다면, 사전에 조율된 수순입니다.
평판 훼손이 아니라 사형 판결을 겨냥한 각본이에요.” 칼렌의 턱 근육이 움찔했다. “이단심문 처형까지 노린 건가.” “회귀자로 지목된 자에게 이단심문소가 내리는 결론은 하나뿐입니다. 프리드리히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어요.” 엘레나의 주근깨가 창백해진 피부 위로 도드라졌다.
“아가씨, 제가 지금 베일 상회로——” “안 된다.” 칼렌이 짧게 잘랐다. “함정에 걸린 적 있는 네가 또 발을 들이면 빠져나오지 못한다.” 엘레나가 고개를 저었다. 헤이즐 브라운 눈동자가 단호했다.
“하녀가 지하 약제상에 약초를 사러 가는 건 의심받지 않아요. 지금은 정보 한 조각이 필요한 때 아닙니까.” 리아나가 몸을 돌렸다. “프리드리히가 이단심문소 내 어떤 인물과 접촉했는지 연결고리를 알아야 해요.” “찾아오겠습니다.” 엘레나는 찢어진 소매를 펄럭이며 서재를 나갔다.
칼렌은 탁자 위 서류 조작 증거 원본을 짚었다. 종이가 손의 압력에 구겨졌다. “세르지오를 집무실로 보내 이단심문 선례를 찾아 보고하라고 지시하겠다.” “서류 조작 건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직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일에 쓸 수 있는 건 써야지.” 리아나가 칼렌의 옆얼굴을 보았다. 스톰블루 반지 낀 손가락이 구겨진 종이 위에서 떨리고 있었다. 분노가 아니었다.
“공작님께서 세르지오 기사님을 감시 아래 두신 건 보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미간이 가파르게 모이며 눈꺼풀이 긴장했다. “그걸 어떻게.” “지금 제 옆에 있는 사람을 지키는 방식이 공작님과 닮아서요.” 대답 대신 칼렌은 종이를 탁자에 내려놓고 검 손잡이에서 손을 멀리했다. “가서 세르지오에게 전하겠다.” 리아나는 혼자 남아 구겨진 서류를 펴지 않은 채 서랍 안으로 밀어 넣었다.
--- 집무실. 세르지오가 문서 더미 위에 손을 얹은 채 서 있었다. 왼손이 가볍게 떨렸으나 주먹을 쥐어 감추지 않았다.
칼렌이 들어서자 그가 고개를 숙였다. “공작님.” “24시간이다. 이단심문소가 내일 정오까지 유예를 줬다.
과거 청원이 기각되거나 청원인이 역으로 처벌받은 판례를 우선 조사해라.” 세르지오의 다크 브라운 눈이 커졌다. “청원인을 공격할 법적 논리 말씀이십니까.” “프리드리히가 우리를 공격할 논리가 있다면 우리도 필요하다. 제국 법전과 교회법 선례집을 교차 대조해라.
그리고 네가 조작한 서류 원본은 내가 보관하지만, 이번 임무를 완수하면 그 기록은 이 사건과 별도로 다루겠다.” 세르지오의 손끝 떨림이 멈추었다. “관용의 무게…… 잊지 않겠습니다.” --- 엘레나는 구시가지 지하 약제상 앞에서 구리판을 세 번 두드렸다.
손바닥 전체로 한 번, 손가락 관절로 두 번. 거울이 밀리자 계단 아래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림자 엘레나, 배짱이거나 미쳤거나.” 엘레나는 바구니를 어깨에 걸고 계단을 내려갔다.
“둘 다야.” 안대를 한 하급 정보상이 벽면 약병들 사이 탁자 뒤에 서 있었다. “프리드리히 후작이 이단심문소 누구랑 접촉했는지 알아.” “값이 비싸.” “삼 년 전 네가 빚진 목숨값으로 충분해.” 사내의 안대 낀 눈 쪽 근육이 움찔하더니 작은 봉투를 집어 올렸다. “부소장 레온 하르트 백작.
사흘 전 직접 만났다는 증언이다.” 엘레나는 봉투를 허리띠 안쪽으로 밀어 넣고 뒤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 서재. 촛불이 반쯤 줄었다.
리아나는 창가에 서 있었고, 붉은 띠를 감은 손목 위로 땀에 젖은 옷감이 달라붙어 있었다. 칼렌이 들어와 탁자 모서리를 짚고 섰다. “조금 전 했던 말이다.
이미 한 번 이 모든 것을 겪었다. 그리고 네 옆에 있는 사람을 지키는 방식이 나와 닮았다고 했다.” 리아나의 손이 창틀에서 떨어졌다. “네가 알고 있는 것들.
예지도, 정보력도, 그 이상의 무엇인지 아직 묻지 않겠다. 다만——” 칼렌이 반 걸음 다가왔다. 신발 끝이 리아나의 치마 자락에서 멈추었다.
“그 경험이라는 게…… 너를 찢었나.” 리아나가 천천히 돌아보았다. 심장 박동이 한 번 크게 뛰고 가라앉았다.
“찢어졌고, 다시 꿰매졌습니다.” 칼렌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오른손이 검 손잡이를 스쳤다가 탁자 위로 옮겨갔다. 구겨진 서류를 찾던 손가락이 멈추었다.
“그 꿰맨 자리를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네가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만은 안다.” 문이 두드려졌다. 엘레나가 거친 숨소리와 함께 들어와 봉투를 탁자에 올렸다.
“찾았어요. 부소장 레온 하르트 백작. 프리드리히가 사흘 전 직접 접촉했대요.” 이어 세르지오가 서류 뭉치를 들고 들어왔다.
“14년 전 아스티 백작부인 건, 청원인이 거짓 증거 제출이 발각돼 역으로 이단모독죄 처벌을 받았습니다. 유사 판례 세 건을 추가로 찾았습니다.” 칼렌이 서류 첫 장을 넘기며 말했다. “레온 하르트 부소장.
프리드리히가 그를 움직일 연줄이라면——” “단순한 정보 거래가 아닙니다.” 리아나가 말을 이었다. “부소장 개인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연결되어 있어요. 이제 24시간 안에 그 연결고리를 입증해야 합니다.” 탁자 위 엘레나의 봉투, 세르지오의 판례 보고서, 칼렌의 방어 논리 초안이 촛불 아래 얇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문이 열렸다. “공작님, 이단심문소 예비 조사관께서 다시 면담을 요청하십니다. 응접실에 도착하셨습니다.” 칼렌의 손이 탁자 위에서 멈추었다.
시선이 리아나에게로 옮겨갔다. 테이블 모서리에 올린 손가락 끝이 천천히 접혀 들어왔다. 그는 리아나에게 기다리라는 눈짓을 보내고 검 손잡이를 한 번 짚은 뒤 문 쪽으로 발을 돌렸다. “먼저 만나고 오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