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공녀의 재계약
9화
연회장은 은쟁반과 현악 소리로 가득했다. 손님들 사이로 샴페인 잔이 오가고, 드레스 자락이 마룻바닥을 스쳤다. 리아나는 칼렌의 팔에 손을 얹은 채 입구에서 걸음을 늦추었다.
“사람이 많군.”
칼렌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리아나는 시선을 천천히 움직이며 연회장을 훑었다. 북쪽 기둥 옆, 은발을 뒤로 넘긴 프리드리히가 벌써 그들을 보고 있었다. 입가에 웃음기를 띠고 있었지만 눈은 움직이지 않았다.
“후작님.”
칼렌이 먼저 목례했다. 프리드리히가 손에 든 잔을 근처 하인에게 넘기며 다가왔다.
“공작님, 부인. 오시는 길이 어떠셨습니까.”
“무난했습니다.”
프리드리히의 시선이 리아나에게로 옮겨갔다. 붉은 띠가 감긴 오른쪽 손목에서 잠시 멎었다가 다시 얼굴로 올라왔다.
“부인께선 특히. 요즘 사교계 화제가 온통 당신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리아나의 어조는 평온했다. 프리드리히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근처에 있던 귀족 두엇이 대화를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후작이 목소리를 한 톤 높여 말을 이었다.
“연회장 독주를 단 한 번의 냄새로 가려내셨다지요. 세르반테스 자작의 숨은 자금까지 추적하시고. 보통 분별력으로는 불가능한 통찰 아닙니까.”
리스트의 현이 높게 울렸다. 손님 몇이 더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리아나는 프리드리히의 동공이 살짝 수축하는 것을 보았다. 전생의 서재에서와 같은 표정이었다.
“기이한 선견지명이라고들 합니다. 혹자는 예지를 타고난 마녀가 아니냐 하고.”
목소리가 연회장 한복판에 떨어졌다. 대화 소리가 한 꺼풀 걷혔다. 누군가의 잔이 쟁반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칼렌의 팔이 미세하게 굳었다.
리아나는 프리드리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예지라면, 확인해 보시지요.”
프리드리히의 눈썹이 올라갔다. 리아나는 반 걸음 앞으로 나섰다. 손가락 끝이 차가워졌지만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제가 지금 무엇을 알고 있는지. 후작님께서 사흘 전 누구를 만나셨는지. 그분이 어떤 거래를 제안했는지.”
연회장 구석에서 누군가 숨을 들이켰다. 프리드리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오른손 검지가 바지 옆선을 한 번 쳤다. 전생에서 서류를 읽을 때 보였던 버릇이었다.
“공작 부인.”
어조가 낮아졌다.
“멋대로 입을 놀렸다간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맞이할 겁니다. 이단심문소가 이미 당신의 진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압니다. 부소장 레온 하르트 백작께서 청원을 접수하셨지요.”
주변의 귀족들이 술렁였다. 프리드리히의 턱선이 경직됐다. 하르트 부소장의 이름을 입에 올린 것은 리아나가 공개적으로 한 첫 번째 대응이었다.
“누가 가르쳐 줬지? 엘레나 로벤인가. 그 하녀 말이오.”
프리드리히가 발을 옮겨 리아나의 왼쪽으로 돌았다. 칼렌이 반사적으로 어깨를 틀었지만 리아나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오른쪽 손목의 붉은 띠가 램프 불빛에 드러났다.
“그 띠 말이오.”
프리드리히의 검지가 붉은 천을 가리켰다.
“사교계에 떠도는 말로는 마법적 표식이라고 하더군. 공개하시지요.”
리아나는 칼렌 쪽을 보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프리드리히의 어깨 너머, 연회장 입구로 옮겼다. 하인이 한 명 더 서 있었다. 전생의 그날 밤, 그녀의 잔을 채우던 남자였다. 지금은 공작가 하인으로 옷을 바꿔 입었지만 손가락 관절의 굳은살은 변하지 않았다.
“후작님.”
리아나가 다시 프리드리히를 응시했다.
“베일 상회에서 정보를 사고파는 분을 저택 하인으로 두셨더군요. 그분이 이 자리에 있습니다. 원하시면 이름을 대고 출입 기록을 공개하겠습니다.”
프리드리히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연회장이 조용해졌다. 현악이 한 소절 끝난 뒤 아무도 연주를 이어가지 않았다.
“네가…… 무엇을 안다고.”
존칭이 지워졌다. 프리드리히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리아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시선을 한 번 더 입구 쪽 하인에게 던진 뒤 돌아왔다.
“당신이 나를 죽이려 했던 날. 독을 든 잔을 건네던 그 순간까지.”
공기가 얼어붙었다. 칼렌의 숨소리가 들렸다. 손님이 아닌 증인들 사이에서 누군가 성호를 그었다. 프리드리히가 물러났다. 한 걸음이 아니라 비틀거리듯 물러난 한 걸음이었다.
“미친 소리로군. 증거는.”
“증거라면 지금도 후작님 지하 저장고에 있을 독극물 병. 벨루아 가문의 조제법과 일치하는 희귀 독입니다. 이단심문소 분석 보고서에 첨부하신 그 물질 말입니다.”
프리드리히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뭐라 말을 잇지 못했다. 리아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어조를 한층 낮췄다.
“독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성분을 나열해 드려도 됩니다. 150가지 이상을 외우고 있습니다, 후작님.”
프리드리히가 숨을 몰아쉰 뒤 팔을 휘둘렀다.
“끌고 가라! 즉시 심문실로!”
입구에 있던 하인이 움직였다. 연회장 구석에서 대기하던 다른 경비원도 한 명 다가왔다. 둘 다 저택 소속의 무장 하인이었다.
칼렌이 비로소 움직였다. 한 걸음에 둘 사이를 막아섰다. 왼손은 검 손잡이에, 오른손은 리아나의 어깨 앞으로 뻗었다. 새파란 눈이 프리드리히를 뚫어보았다.
“클라우스 하인겔 공작의 배우자 신병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느렸다. 프리드리히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지금 이 자리에서 마녀라 자백하지 않았습니까! 증인도 있소!”
“마녀라 자처한 말도, 자백도 없었다.”
칼렌의 검지가 손잡이를 한 번 쳤다. 경비원들이 멈추었다.
“더 이상 내 아내에게 접근하는 자는 공작령 침해로 간주한다.”
리스트 의자가 바닥에 긁히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잔을 내려놓았다. 프리드리히의 입술이 떨렸다.
“이것이 외교 문제가 될 줄 아시오. 황실에 정식으로……”
“청원하시라.”
칼렌이 말을 잘랐다. 이어 리아나를 향해 턱짓했다.
“돌아간다.”
리아나는 붉은 띠를 매만지지 않았다. 전생에서는 이 순간 그곳을 움켜쥐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칼렌의 등 뒤에서 프리드리히를 한 번 더 바라보았다.
“내일 정오, 심문실에서 뵙겠습니다. 후작님.”
돌아서는 두 사람 뒤로 연회장이 열렸다. 프리드리히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인들은 여전히 멈춰 섰다. 칼렌의 발걸음이 복도로 이어졌고 리아나는 그 옆에서 같은 속도로 걸었다.
서재의 촛불이 반쯤 줄어든 시각이었다.
리아나는 탁자 앞에 서 있었다. 칼렌이 문을 닫고 돌아서는 발소리가 등 뒤에서 멈추었다. 조사관과의 면담은 길지 않았다. 그의 손에 들린 서류 한 장이 탁자 위로 미끄러졌다.
“내일 정오. 대심판원 비공개 심문이 잡혔다.”
리아나의 시선이 서류를 스쳤다. 이단심문소의 인장이 찍힌 공식 소환장이었다.
“프리드리히가 청원서를 제출했군요.”
“증거로 독극물 분석 보고서를 첨부했다. 네가 연회장에서 식별한 독과 같은 계열이다.”
칼렌의 손가락이 탁자 모서리를 짚었다. 관절이 하얗게 질렸다.
“한 가지만 묻겠다.”
촛불이 가늘게 흔들렸다.
“네가 전에 했던 말. 이미 한 번 겪었다고 한 것. 그 경험이 너를 찢었다고 한 것.”
말이 잠시 끊겼다.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평소보다 길었다.
“그게 무엇인지 지금 말해라.”
리아나는 오른손을 천천히 올렸다. 손목을 감은 붉은 띠 위로 왼손 손가락이 닿았다. 매듭을 푸는 동작은 더디고 정확했다. 천이 풀리며 손목 안쪽이 드러났다.
가로지른 흉터는 오래된 것이었다. 칼날에 베인 자국이 아니라 독이 퍼지며 혈관을 따라 갈라진 듯한, 거미줄처럼 번진 은색 실금이 손목에서 팔꿈치 쪽으로 뻗어 있었다. 칼렌의 호흡이 멎었다.
“이 흉터는 이번 생에서 생긴 게 아닙니다.”
리아나의 목소리는 낮고 고요했다.
“삼 년 전, 전생에서 죽을 때 남은 상처입니다. 독이 섞인 와인을 마셨고, 손목부터 마비가 시작돼 숨이 멎기까지 반 시진이 걸렸습니다.”
칼렌의 눈동자가 흉터에 고정됐다. 왼손이 검 손잡이를 찾다가 허공에서 멈추었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상처는 내 꿈에서 본 것과 같다.”
말은 느리게 떨어졌다. 한 글자씩 무게를 다는 듯했다.
“네가 죽었다면 지금 여기 서 있는 것은 무엇이냐.”
“회귀입니다. 신에게 선택받은 자에게만 허락되는 단 한 번의 기적. 저는 삼 년 전, 이날을 향해 다시 태어났습니다.”
리아나의 손가락이 흉터 위를 짚었다.
“이 흔적은 전생의 기억이 영혼에 각인된 증거입니다. 당신이 꿈에서 본 것도 같은 원리일 거예요. 실제 경험으로만 새겨지는 감각이라면, 당신의 영혼도 그날 그 자리에 있었을 겁니다.”
칼렌이 반 걸음 물러섰다. 등 뒤 책장에 어깨가 닿았다. 책등이 낮게 삐걱거렸다.
“내가…… 거기에 있었다고?”
“그렇습니다.”
리아나가 고개를 들었다.
“당신은 전생에 제 원수를 처형했습니다. 제가 죽기 전, 그 독을 건넨 자를 당신이 직접 베었어요.”
말이 떨어진 뒤 서재가 조용해졌다. 칼렌의 입술이 열렸다 닫혔다. 묻지 않은 질문들이 목젖 아래서 맴도는 기색이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공작님.”
세르지오였다. 평소와 다른 굳은 얼굴로 문턱을 넘었다. 평소처럼 목덜미를 긁적이진 않았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서류 조작 건 말입니다.”
칼렌의 시선이 천천히 그에게로 돌아갔다. 리아나가 손목의 붉은 띠를 다시 감으며 물러섰다.
“말해라.”
세르지오의 숨이 한 번 깊게 들이쉬어졌다.
“리처드 세르반테스를 처단하신 날. 제가 현장에서 봤습니다.”
칼렌의 눈썹이 움직였다.
“그날 공작님의 검에 쓰러진 시신이 두 구였습니다. 한 구는 세르반테스. 다른 한 구의 손목에는 붉은 천이 감겨 있었습니다.”
세르지오의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전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공작님께서 최근 꿈 이야기를 하셨고, 부인께서 붉은 띠를 두르고 계셔서——”
“그래서 네가 재산 목록을 조작했다.”
칼렌의 대사는 차가웠다. 한 단어씩 똑똑 끊어졌다.
“내가 부인의 전생과 연루된 흔적을 지우려고.”
“그 흔적이 이번 생에서 부인을 향한 독이 될까 두려웠습니다.”
세르지오가 고개를 숙였다.
“공작님을 보호하려는 마음이었습니다만, 그 방법이 그릇됐다는 걸 압니다.”
칼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가락이 탁자 위 서류 더미를 짚었다. 구겨진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네가 목격한 그날. 나는 왜 그 자리에 있었지.”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기억나지 않는다.”
짧은 일침이었다. 칼렌의 손이 주먹 쥐어졌다.
“내가 부인의 원수를 베었다. 부인은 독으로 죽었다. 나는 그걸 알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이 한 번 이미——”
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에는 엘레나였다. 외출복 차림에 숨이 차 있었다.
“아가씨! 지금 당장——”
그녀의 손에 작은 유리병이 들려 있었다. 어두운 액체가 반쯤 차 있었다.
“프리드리히 후작 저택 지하 저장고에서 찾았습니다. 벨루아 가문에 기록된 희귀 독극물과 성분이 일치해요. 냄새, 색깔, 점도——전생에 쓰였던 것과 같을 확률이 높습니다.”
엘레나의 말투에는 평소의 느낌표가 없었다. 숨을 고르며 한마디씩 뱉어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후작이 황실에 제출한 이단 심문 청원이 접수됐습니다. 내일 정오 대심판원에서 비공개 심문이 열려요. 부소장 레온 하르트가 직접 주재한대요.”
세르지오가 고개를 들었다.
“레온 하르트 백작. 14년 전 아스티 백작부인 사건의 조사관이었던 인물입니다.”
“그 사건은 거짓 증거 제출로 청원인이 역으로 처벌받았죠.”
리아나가 덧붙였다.
“판례를 알고 있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부소장이 프리드리히와 연결되어 있다면 절차를 무기 삼아 올 겁니다.”
“연결고리를 끊어야 한다.”
칼렌의 목소리가 바닥을 쳤다. 손이 탁자 위로 내려왔다. 스톰블루 반지가 촛불을 받아 짧게 번뜩였다.
“이 재판은 이미 정치적 올가미다. 절차로는 이길 수 없다.”
검지를 편 왼손이 서류를 넘겼다. 황실 이단 심문 청원서 사본이었다. 칼렌이 마지막 장을 펼쳐 탁자 가운데로 밀었다.
“마법적 결투 재판을 신청한다. 공작 지위를 걸고.”
세르지오의 얼굴이 굳었다.
“공작님, 그건——”
“내가 직접 재판장이 된다. 검증할 증거는 네 녀석이 찾은 판례와 엘레나가 가져온 독약병이다.”
칼렌의 시선이 리아나에게 닿았다. 촛불 너머로 눈빛이 한층 짙어졌다.
“내일, 나는 공작으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그대의 결백을 증명하겠소.”
리아나는 손에 쥔 붉은 띠를 내려다보았다. 천의 결이 손바닥에 눌렸다. 전생에서 이 천을 감고 죽었고, 이번 생에서 이 천을 감고 살았다. 그 차이를 증명할 자리가 내일이었다.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