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 새겨진 공녀, 얼음 공작의 손을 잡다
1화
“전하, 이쪽입니다.”
에레디아는 이미 걸음을 멈춘 뒤였다. 황실 연회장 서쪽 회랑, 야자수 화분 뒤로 칼릭스 로엔이 보였다. 검은 제복 차림 그대로 하객들과는 반대 방향을 향해 서 있었다. 손에는 아직 비워지지 않은 잔.
바로 그 잔이었다.
향은 나지 않았다. 백야초는 무미무취다. 다만 전생에 그녀는 같은 잔이 비워지는 장면을 보았다. 와인 속 칼릭스의 손끝이 잠시 멎는 것, 세라핀이 구석에서 숨을 죽이던 것까지.
이번 생은 다르다.
에레디아는 걸음을 돌렸다. 검은 레이스 장갑이 치맛자락에 닿았다. 칼릭스가 잔을 들고 입가까이 가져가기 직전, 그녀는 하객 두 사람의 대화 사이를 가로질러 손을 뻗었다.
잔이 날아갔다.
와인이 대리석 바닥에 쏟아졌다. 붉은 물이 금박 장식의 모서리를 타고 퍼졌다.
“뭐 하는 짓이지.”
칼릭스의 눈이 에레디아를 향했다. 회청색 눈동자에 놀람은 없었다. 다만 시선이 한 뼘쯤 무거워졌다. 그가 방금 전보다 반 걸음 가깝게 다가섰다. 주변 하객들이 술잔을 든 채 몸을 돌렸다.
“공녀께서.”
느리고, 낮은 목소리였다.
“그 잔에 무엇이 있습니까.”
에레디아는 대답 대신 바닥의 잔을 내려다보았다. 쏟아진 와인에서 김이 올랐다. 눈에 보일 리는 없었다. 냄새도 없다. 그런데도 왼쪽 눈밑이 따끔거렸다.
“확인이 먼저입니다.”
말하면서 그녀는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연회장의 시선이 하나둘 이쪽으로 모였다. 현악기 소리가 멎었다.
저쪽에서 금발이 움직였다. 에드릭 라셀이 회중시계를 손에 쥔 채 다가오고 있었다. 세라핀도 그 뒤로 두 걸음쯤 따라오고 있었다. 연미색 레이스가 흔들렸다.
“에레디아 벨리언 공녀.”
에드릭이 상냥한 목소리로 불렀다. 미소가 왼쪽 볼에 얕게 패였다.
“황실의 연회에서 그리 난폭하실 일입니까.”
그는 칼릭스보다 먼저 에레디아의 옆에 섰다. 양손을 모아 잡은 자세가 예의 바르고, 그만큼 의도적이었다.
“제가 쳐낸 것은 난폭이 아닙니다. 폐하의 연회장에서 흘려서는 안 될 것이 그 잔에 있었습니다.”
에드릭이 잠시 그녀를 굽어보았다.
“취흥이 지나치신 것 같군요. 시종을 불러 정리하게 하시지요.”
그의 손이 시종 쪽을 향했다. 에레디아가 반 박자 늦게 대꾸했다.
“정리하면 안 됩니다.”
“네?”
“검증해야 합니다. 지금 여기서.”
에드릭의 미소가 한 꺼풀 얕아졌다.
“공녀께선 그 잔이 어디서 왔는지 알고 계십니까.”
“칼릭스 공작께 배정된 잔입니다. 남쪽 급수대에서 시종이 받아 대기실을 거쳐 이쪽으로 옮긴 잔이지요.”
“긴 말씀은 아닙니다.”
칼릭스가 끼어들었다. 목소리는 짧았지만 멀리까지 닿았다.
“신전 시종을 불러라.”
주변 하객들이 웅성였다. 에드릭은 눈썹을 조금 올렸다.
“공작께서도 공녀의 흥을 함께하시는 겁니까.”
“흥으로 잔을 쳐낸 게 아니다.”
칼릭스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신전 쪽 시종을 지목했다. 흰 겉옷에 은색 끈을 두른 여자가 걸어 나왔다.
“잔과 바닥의 액체를 보존해라.”
에드릭이 자세를 바꿨다.
“제가 보기에 이것은 연회장의 사소한 실수입니다. 귀빈을 모신 자리에서 신전 시종을 세우면 황실의 체통이 먼저 다칩니다. 제게 맡기십시오.”
그가 손을 내밀었다. 엄지로 황실 인장 반지를 만지고 있었다.
“전하께서는 바닥에 쏟아진 잔이 못마땅하신 모양입니다.”
에레디아가 또 한 번 늦게 말했다. 에드릭의 손끝이 멎었다.
“그보다 빠르게 처리할 방법이 있으니 말씀해 보십시오.”
“방법이 아니라 순서 문제입니다.”
“저는 황실의 질서를 묻는 중입니다.”
“전하의 질서는 잔을 치우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 잔에 백야초가 있었다면, 지우는 순간 이 안의 모두가 위험합니다.”
에드릭의 표정이 변했다. 입꼬리는 그대로였지만 눈가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백야초라니.”
“무미무취의 독입니다. 이 와인에서는 소량이어도 성인 남성을 끝내기에 충분합니다.”
하객 중 누군가가 숨을 들이켰다. 세라핀이 두 손을 가슴께로 모았다. 그녀의 흰 리본 초커가 목에 밀착돼 있었다.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습니까.”
에드릭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확인하면 압니다. 신전 시종이 잔류물을 채취해 즉석 시약에 떨어뜨리면 됩니다.”
“그건 신전의 권한입니다.”
“지금 신전 시종이 와 있습니다.”
에레디아는 시종을 똑바로 보았다.
“이 잔의 잔류물과 바닥의 와인을 각각 채취해 기록하십시오.”
에드릭이 몸을 약간 숙였다.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공녀께서 명하실 자리가 아닙니다.”
칼릭스가 그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제복 소매가 에레디아의 시야를 스쳤다.
“내가 명했다. 보존해라.”
에드릭이 칼릭스를 보았다. 두 남자의 시선이 공기 중에서 부딪혔다. 에레디아는 그 사이로 한 걸음 더 들어갔다.
“전하께서 검증을 막으실 이유가 있으십니까.”
“막는 게 아닙니다. 절차를 지키자는 것입니다.”
“그럼 절차대로 묻겠습니다.”
에레디아는 고개를 들었다.
“이 잔을 옮긴 시종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에드릭의 턱선이 조금 굳었다.
“그건 제가 알 턱이 없습니다.”
“연회 시종의 배치는 황실 예의관 소관입니다. 전하께서 한 마디만 하시면 곧장 밝혀질 일이지요.”
“공녀는 지금 저를 몰아가시려는 겁니까.”
“검증에 협조하시는지 묻는 중입니다.”
주변의 웅성임이 커졌다. 세라핀이 에드릭에게서 한 걸음 떨어졌다. 그 눈이 재빨리 바닥의 잔을 훑었다.
“이 일은 황실의 사안이 맞습니다.”
에드릭이 허리를 폈다.
“그러니 황실에서 수습하겠습니다. 신전 시종이 채취만 하고, 결과는 황실 기록원이 맡지요.”
“안 됩니다.”
에레디아는 이미 말하고 있었다.
“이 잔은 칼릭스 로엔 공작께 향한 것입니다. 북부의 공작이 황실 연회장에서 독배를 받았습니다. 황실의 사안이기 전에 공작가에 대한 범죄입니다. 신전 기록이 남아야 공작가가 이 문제를 법적으로 다룰 수 있습니다.”
칼릭스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시선이 길게 머물렀다.
“맞다.”
그가 한 단어를 던졌다. 에드릭이 입술을 다물었다.
신전 시종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바닥에 앉았다. 흰 천 위에 와인을 스며들게 하고, 깨지지 않은 잔 가장자리를 은색 핀으로 긁어 시약 병에 옮겼다.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시약이 옅은 푸른빛으로 번졌다.
“양성입니다.”
시종의 목소리가 연회장에 퍼졌다.
정적이 왔다.
“백야초입니다.”
그 한 마디에 하객들이 일제히 물러났다. 기사들이 연회장 입구에서 자세를 고쳤다. 세라핀이 입가를 가린 채 에드릭의 어깨 뒤로 반쯤 숨었다.
“이상하지 않아요, 언니.”
세라핀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에레디아는 돌아보지 않았다.
“언니가 어떻게 그 잔을 알고 있었는지…… 듣고 나니 저는 조금 무서워요.”
“네가 무서워할 일은 없다.”
에레디아가 비로소 그녀를 보았다.
“잔을 옮긴 시종은 남쪽 급수대에서 곧장 오지 않았다. 대기실에서 잔을 어루만지던 다른 손이 있었다. 그 시간을 우리는 진술로 채울 것이다.”
세라핀의 표정이 굳어졌다.
“저한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아직 정확한 진술은 없으니, 말은 아끼겠어.”
에레디아는 고개를 돌려 신전 시종에게 말했다.
“기록하십시오. 잔은 칼릭스 로엔 공작에게 배정된 것이고, 경로는 남쪽 급수대에서 대기실을 거쳐 공작에게 도달 예정이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잔을 쳐냈다는 것까지요.”
“기록은 신전 보관 절차에 따라 진행됩니다.”
“좋습니다.”
에레디아가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하객들은 서로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미 문 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었다.
왼쪽 눈밑이 다시 따끔거렸다. 이번에는 더 깊었다. 통증이라기보다, 피부 아래에서 무언가가 새겨지는 감각. 그녀는 손을 올리지 않았다. 아무도 모르게 눈을 한 번 깜빡였을 뿐이다.
칼릭스가 그녀의 왼쪽에 섰다. 어깨가 닿지 않을 만큼의 거리.
“이건 이제 신전 기록에 남는다.”
그가 하객들을 향해 말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연회장의 낮은 소음을 모두 눌렀다.
“이 사건은 북부 공작가가 공식으로 제기한다. 황실이든 벨리언 가문이든, 잔의 경로에 이름이 오르면 더 이상 조용히 넘어가지 않는다.”
에드릭이 옅게 숨을 내쉬었다. 황실 예복의 금사가 불빛에 반사됐다.
“공작께서 과도한 말씀을 하십니다.”
“과도해도 늦지 않았다.”
칼릭스가 에드릭을 보지 않은 채 말했다.
“에레디아 공녀가 이 잔을 쳐내지 않았다면, 지금쯤 나는 이 연회장 바닥에 쓰러져 있었을 겁니다. 그 사실을 신전 기록이 증명할 것입니다.”
에레디아는 다시 신전 시종을 보았다.
“잔의 잔류물은 두 번 채취하십시오. 하나는 신전 봉인, 하나는 공작가 인장으로 봉인해 주십시오.”
“공작가 인장은 제가 찍지.”
칼릭스가 장갑을 벗기 시작했다. 검은 가죽 아래로 왼손등의 북부 서약 문양이 드러났다. 그는 시종이 건넨 봉인 밀랍에 왼손을 가져갔다.
“공작가의 이름으로 보관한다.”
봉인된 유리병이 하나는 신전 시종의 손에, 하나는 칼릭스의 수행 기사 손에 들렸다. 에드릭은 그 광경을 잠자코 보았다. 세라핀은 입술을 여미고 있었다.
“전하.”
에레디아가 그를 불렀다.
“이제 저는 이 연회에서 더 머물 이유를 찾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이 사건의 경과는 제게도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공녀께서 불만이 크신 모양입니다.”
“불만을 말할 자리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신전 기록이 남았으면 충분합니다.”
에레디아는 고개를 깊이 숙이지 않았다. 어깨를 편 채로 시선을 내리고, 연회장의 중심에서 물러났다.
발소리가 여럿 겹쳤다. 문을 나서기 직전,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등 뒤로 칼릭스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에레디아 벨리언 공녀.”
그녀가 돌아보았다.
“그 잔을 어떻게 알았는지, 다음에 묻겠다.”
에레디아는 잠시 그를 보았다. 대답하지 않았다. 칼릭스가 문가까지 따라와 말했다.
“내 호위 하나를 붙일 것이다. 거절하지 마라.”
그의 시선이 그녀의 왼쪽 눈밑에 닿아 있었다. 따끔거림이 사라진 자리를, 그는 보지 못했을 것이다.
“받겠습니다.”
에레디아가 짧게 답했다.
밤공기가 문틈으로 스며들었다. 연회장 안에서는 신전 시종의 기록용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가 여전히 독이 묻은 와인 자국을 피해 걷고 있었다.
“독배 사건은 이제 공개 사안입니다.”
에레디아의 목소리가 문 앞의 하인 한 명에게까지 닿았다.
“어느 가문도 이 기록 앞에서 잔을 없었던 일로 되돌릴 수 없을 겁니다.”
칼릭스가 그 말을 들으며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회청색 눈이 움직이지 않았다.
문이 닫히지 않은 채로, 밤이 그들의 뒤로 길게 드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