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별에 새겨진 공녀, 얼음 공작의 손을 잡다

2화

봉인된 유리병이 대리석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신전 밀랍이 굳기 시작해 표면이 연회장 쪽 불빛을 흐릿하게 반사했다. 서측 대기실의 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복도 하객들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에레디아는 입회 진행관을 기다리지 않았다.

“증인 명단은 지금 작성하십시오. 이 자리에 있던 시종과 호위 전원입니다.”

“호위까지 전원은 절차상 다소——”

“이미 절차는 벗어났습니다. 공개된 자리에서 독이 확인됐으니, 이 방에 발을 들인 사람이 적을수록 좋겠지요.”

에드릭이 문가에서 받았다.

“공녀께서 신전 절차까지 지휘하실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지휘가 아닙니다. 보관과 증인의 범위를 분명히 하는 중입니다.”

검독관이 고개를 들었다.

“잔은 이 상태로 신전 감찰실에 넣겠습니다. 다만 옮긴 시종의 진술은 어디서 받습니까.”

“이 방에서 받으십시오.”

“그것은 황실의——”

에드릭이 한 걸음 들어왔다. 장식 검 끝이 문틀에 스쳤다.

“수사에 가까운 절차는 황실 예의국과 조율해야 합니다. 밤이 깊었고, 시종도 지쳐 있습니다.”

에레디아가 몸을 돌렸다.

“시종이 지금 지쳤다면, 이동 중 진술이 바뀔 가능성만 남습니다. 이 방에서 첫 진술을 받으십시오.”

그녀의 시선이 칼릭스의 호위에게 닿았다.

“공작가에서도 한 사람을 증인으로 세우겠습니다. 잔이 이 방에서 어떤 손길을 거쳤는지 기록하는 데 필요합니다.”

칼릭스가 반대편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검은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을 내려뜨린 채였다.

“수행 기사에게 그 자리를 맡기겠다.”

에드릭이 칼릭스를 돌아보았다.

“공작께서 직접 호위를 증인으로 세우시면, 오히려 공정성에 의심을 사지 않겠습니까.”

“의심은 이미 황실 연회장에서 피어났다. 이제 필요한 것은 절차가 아니다. 같은 실수를 막는 일이다.”

칼릭스가 문가의 수행 기사에게 손짓했다. 검은 제복의 기사가 대기실 안으로 들어와 탁자 왼편에 섰다. 에드릭은 입술을 다물었다. 왼손이 검 손잡이 근처에 닿아 있다 떨어졌다.

검독관이 봉인된 병을 납작한 나무 상자에 눕히고 덮개를 닫았다. 자물쇠가 채워질 때마다 금속음이 방 안에 남았다.

“시종의 진술은 제가 받겠습니다. 공작가 증인도 입회합니다.”

에드릭이 더는 반론을 잇지 않았다. 대기실 문을 나서기 전, 그가 에레디아에게 속삭이듯 덧붙였다.

“공녀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오늘 멈추실 때 그 말을 다시 생각해 보시지요.”

“전하께서도요.”

에드릭의 보조개가 희미하게 패었다. 문이 닫히고 복도 발소리가 멀어졌다.

검독관이 시종을 방 북쪽 칸막이 뒤로 데려갔다. 호위 둘이 문 앞을 지켰다. 진술이 시작되자 말소리는 칸막이에 부딪혀 낮게 깔렸다. 에레디아는 탁자에서 두 걸음 물러섰다.

칼릭스가 벽에서 등을 뗐다.

“이제 묻겠다.”

회청색 눈이 촛불을 받아 얕게 빛났다.

“왜 나를 살렸지.”

“공작가의 이름을 이 사건에서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공작께서 그 잔을 드셨다면, 오늘 사건은 북부와 황실 사이의 문제로 남지 않았을 겁니다. 사고로 덮였겠지요.”

“그것은 이유가 된다. 네가 얻는 것도 말해라.”

“신변 보호입니다. 어느 가문도 오늘의 기록을 없었던 일로 되돌릴 수 없게 됐지만, 제 집으로 돌아가면 저는 기록 속의 말 한 사람일 뿐입니다.”

에레디아가 장갑을 끼운 손을 앞으로 모았다.

“공작가의 호위를 공개적으로 붙여 주십시오. 그리고 북부가 황실과 벨리언 가문을 견제할 자리를 저와 함께 지켜 주십시오.”

“다 말해라. 그 자리가 무엇이냐.”

“계약 혼약입니다.”

칸막이 너머 시종의 목소리가 끊겼다. 에레디아는 숨을 들이쉬었다.

“정식 혼인은 아닙니다. 신전의 피의 서약 없이 서로의 지위와 안전을 담보하는 혼약. 파혼과 이행 조건은 저와 공작께서 각각 문서로 나눠 갖는 방식입니다.”

“혼약 파기에 걸리는 대가는 알고 있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조건을 만들었습니다. 공작가가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게.”

칼릭스가 탁자 쪽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그 조건을 들어 보겠다.”

“혼약 공표 전까지, 공작께서는 북부 출입광석 거래에서 황실에 유리한 조정안을 수용하시면 안 됩니다. 저는 공작가의 기존 이권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벨리언 가문쪽 제안을 한 차례 차단하겠습니다.”

“돌려 말하지 마라. 네가 벨리언 제안을 아는 이유는 덮어 두겠다.”

칼릭스가 허리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담보는 무엇으로 두지.”

“제가 지금 가진 것 중에 담보라 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담보를 주시면, 그 조건에 따라 움직이는 제 태도를 믿으십시오.”

“약속을 믿으라는 말이냐.”

“믿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저는 오늘 밤, 제 편을 만든 것뿐입니다.”

칼릭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검은 인장 반지를 빼서 탁자 끝에 내려놓았다. 금속이 대리석에 닿자 또각 하는 소리가 퍼졌다. 칸막이 뒤 진술이 다시 끊겼다.

“이것으로 공작가의 인장을 한 번 쓸 수 있다. 혼약 공표까지 네가 가져라.”

“과한 담보입니다.”

“네가 지금 꺼낼 담보가 없으니, 내가 꺼낸다.”

그는 반지에서 손을 뗀 채 말했다.

“반지의 행방은 호위 둘이 증언한다. 잃어버리면 우리 사이도 거기까지다.”

에레디아가 반지를 집었다. 검은 레이스 장갑 너머로 차가운 무게가 손바닥에 남았다.

“카이텔을 붙인다. 내일부터 공식 호위로 벨리언 저택에 들인다.”

“수락하겠습니다.”

“혼약 문서는 사흘 안에 별관 중립 서기가 세울 것이다. 서명 전에 담보 효력은 멈춘다.”

“좋습니다. 다만 저는 이 혼약의 목적을 서류에 ‘공작가에 대한 독배 사건의 공동 대응’으로 남기겠습니다.”

“그래라.”

칼릭스가 문 쪽을 흘깃 보았다. 검독관이 칸막이 밖으로 걸어나왔다.

“진술서를 확보했습니다. 시종은 신전 감찰원 숙소에 두고 아침에 귀가시키겠습니다.”

“증인 명단도 봉인 상자와 같은 호위에게 맡기십시오. 보관과 이동이 갈라지면 안 됩니다.”

검독관이 나무 상자와 명단을 챙겨 나갔다. 칼릭스의 수행 기사가 뒤를 따랐다.

대기실이 조용해졌다. 칼릭스가 에레디아의 손을 보았다.

“반지는 숨기지 마라. 그것은 네가 지금 사건의 한복판에 있다는 표시다.”

“숨길 생각이었다면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에레디아가 반지를 왼쪽 새끼손가락에 끼웠다. 크기가 남아 관절 위에서 얕게 돌아갔다.

“카이텔이 호위로 들어온 뒤에, 봉인된 진술서 사본이 제게 오도록 해 주셔야 합니다.”

“벨리언 저택에 사본을 들이는 것이 문제가 되겠지. 별도로 두고 필요하면 검독관에게 말을 맞춰라.”

“그리 하지요.”

칼릭스가 마지막으로 다가왔다. 손을 뻗지 않은 채 목소리를 낮췄다.

“그 잔을 어떻게 알았는지, 아직 묻지 않겠다.”

에레디아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묻지 않으신다면 저도 서두르지 않겠습니다.”

“혼약이 서명되는 날, 답을 들어야겠다.”

“조건은 같습니다. 공작가의 이권은 제가 먼저 지킵니다.”

칼릭스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문을 열자 복도의 공기가 밀려들었다. 수행 기사들의 발소리가 앞에서 끊기고, 칼릭스는 그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가 계단 앞에서 돌아보지 않았다. 다만 한 마디가 어둠을 넘어왔다.

“코치처럼 돌아가지 마라. 카이텔이 문 앞까지 붙을 것이다.”

에레디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왼손에서 낯선 반지의 무게가 걸음을 늦췄다. 회랑의 바람이 장갑 위로 스치자, 눈밑은 아무것도 아프지 않았다.

신전 서약실의 대리석 바닥이 아침 빛에 차갑게 깔려 있었다. 에레디아는 검은 반지를 손끝에 낀 채 중앙 제단 앞에 섰다. 반지는 약간 컸다.

칼릭스가 반대편 기둥 옆에서 서류를 건네받고 있었다. 서약실 문이 열리며 세라핀과 에드릭이 들어섰다. 세라핀은 흰 리본 초커를 한 번 쓸어 올렸다.

에드릭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공증 절차를 잠시 멈춰 주셔야겠습니다. 벨리언 가문의 후견 동의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후견 동의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성년입니다. 서약서의 당사자 확인만으로 충분합니다.”

세라핀이 에드릭의 팔 뒤에서 고개를 갸웃했다.

“언니, 그래도 가문의 이름을 쓰는 일이에요. 아버님께 한 마디도 없이 공증을 받으면 얼마나 서운해하시겠어요.”

“아버님께서는 이 혼약을 아직 모르십니다. 모르셔도 효력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에드릭이 한 걸음 안으로 들어섰다. 황실 예복의 금박이 제단 촛불에 번득였다.

“신전의 공증은 신의 이름으로 집행됩니다. 가문 간 분쟁이 예견되는 서약을 오늘 바로 공증할 이유가 있는지, 공녀께서 증명하셔야 합니다.”

칼릭스가 서류를 접던 손을 멈췄다.

“증명은 어젯밤에 끝났다. 신전 기록이 남아 있고, 잔은 봉인됐다. 독배 사건의 피해 당사자가 서두르는 이유를 더 요구할 자리가 아니다.”

“공작께서는 피해자이십니다. 하지만 공녀께서 서약 당사자가 될 자격까지 기록으로 증명된 것은 아닙니다.”

“자격은 오늘 서약할 사람이 묻는 것이지, 황태자 전하께서 결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에드릭의 옅은 회색 눈이 가늘어졌다.

“저는 황실의 위치에서 절차의 흠결을 막고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절차의 흠결이라면 이미 황실의 연회장에서 봉인된 잔이 있습니다.”

에레디아는 뒤돌아 신전 검독관을 찾았다. 검독관은 봉인 용기를 받쳐 들고 있었다. 밀랍에 찍힌 북부 문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잔의 봉인 상태를 확인해 주십시오. 공개 증인의 서명이 함께 있습니까.”

검독관이 용기를 올려 보였다. 투명한 유리 안에 은색 핀으로 긁힌 잔 가장자리가 보였다.

“봉인은 온전합니다. 증인 명단도 첨부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공증과 무슨 상관입니까.”

“황실 연회에서 칼릭스 로엔 공작을 해하려 한 시도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시도가 반복될 경우 가문의 후견 없이도 보호받을 명분이 필요합니다.”

에레디아의 시선이 세라핀에게 닿았다. 흰 리본 초커가 목젖 위에서 움직였다.

“오늘 공증은 제가 가문을 떠나기 전에 반드시 끝내야 할 일입니다.”

“가문을 떠나시겠다? 언니, 그건 가문 회의 없이 혼자 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지금 말씀은 좀 지나치신 것 같아요.”

“지나친 쪽은 독이 담긴 잔을 연회장에 올린 사람입니다.”

에레디아는 검독관에게 고개를 돌렸다.

“서약서를 펼쳐 주십시오.”

“공녀. 황실의 이름으로 한 번 더 권합니다. 오늘 공증은 보류하십시오.”

“전하께서 공증 보류를 명하실 법적 권한은 없습니다. 그러니 저는 권고로 듣겠습니다.”

촛불 두 개가 문틈 바람에 함께 기울었다. 세라핀이 에드릭의 옆으로 다가서며 목의 흰 리본을 고치는 체하며 손끝을 목 중앙에 오래 머물렀다. 에레디아는 순간 어머니의 목을 떠올렸다.

사고 현장에서 옅은 압박 자국을 확인했을 때, 하녀가 목 장식을 풀지 못한 채로 시신을 닦던 모습이 겹쳤다. 같은 종류의 결박은 아니었다. 다만 흰 천이 목을 감싼 방식이 조금 닮아 보였을 뿐이다. 에레디아는 의미를 붙이지 않고 시선을 서약서로 옮겼다.

검독관이 양피지 두 장을 제단 위에 올렸다. 에드릭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서명하시면 가문 간 마찰은 피할 수 없습니다.”

칼릭스가 서약실 중앙으로 걸어왔다.

“피할 생각도 없었다.”

그는 펜을 들어 두 장에 연이어 서명하고, 인장 대신 왼손 문양이 새겨진 손등을 밀랍 가까이 가져갔다. 에레디아는 그 옆에서 펜을 받아 서명했다.

“공증합니다.”

검독관이 종을 한 번 울렸다. 서약실 문이 바깥으로 열렸다. 사본이 세 벌로 나뉘어 신전 보관함, 로엔 공작가 쪽, 벨리언 저택 쪽으로 전달되었다.

세라핀이 먼저 밖으로 나갔다. 목의 흰 리본을 한 번 더 매만지며 회랑으로 들어섰다. 에드릭이 그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같은 날 오후, 벨리언 저택 정문 앞. 해는 서쪽 담장 위로 기울어 있었다. 에레디아는 계단 위에 서 있었고, 카이텔은 세 발짝 아래에서 주변을 훑었다. 칼릭스가 마차에서 내려 계단 아래에 섰다.

“카이텔.”

“예, 공작님.”

“오늘부터 에레디아 벨리언 공녀의 공개 호위다. 저택 정문에서 움직이지 마라. 지시는 공녀에게 직접 받고, 의심 인원은 즉시 나에게 보고한다.”

카이텔이 오른손을 가슴에 댔다.

“명 받들겠습니다.”

칼릭스의 시선이 정문 안쪽으로 향했다. 저택 안 응접실 창가로 하인 하나가 지나가고 있었다.

“이튿날 북부로 출발한다. 시각은 내일 아침에 통지만 받으면 된다.”

에레디아가 답했다.

“그때까지 이 저택에 머무는 것이 전제입니까.”

“아니다. 오늘 밤은 내 호위가 정문과 서문에 남는다. 벽 안쪽 문제는 벨리언 가문이 책임질 일이다.”

“공작께서 오늘밤을 정문 밖에서 보내신다면, 제 이동은 공작의 인력과 겹치지 않아야 합니다.”

“겹치게 하지 않을 것이다. 북부 출발 전까지 모든 지시는 카이텔을 통해 전달한다.”

칼릭스가 한 걸음 물러서며 마차를 향했다. 검은 제복 뒷자락이 늦은 오후 바람에 조금 들렸다. 에레디아는 그 움직임을 똑바로 보았다. 손가락에 낀 반지가 미세하게 차가워졌다가, 손아래로 내려보내는 칼릭스의 시선과 함께 다시 뜨거워졌다.

“내일 출발할 때까지.”

칼릭스가 마차에 오르기 전에 짧게 던졌다.

에레디아는 고개를 약간 숙였다. 마차가 모퉁이를 돌자, 그녀는 반지를 뺐다. 손가락 안쪽에 얕은 압박 자국이 남았다. 반지를 다시 끼우고, 검은 레이스 장갑을 그 위로 내렸다. 카이텔은 양손을 등 뒤로 모으고 정문 앞에 잔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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