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 새겨진 공녀, 얼음 공작의 손을 잡다
3화
찻잔 받침이 뒤집힌 채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흰 가루가 대리석 틈으로 조금 번져 있었다.
이튿날 저녁, 벨리언 저택 별관 응접실.
에레디아는 찻잔에서 세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손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레이스 장갑 위로 가루가 묻지는 않았다. 카이텔이 응접실 문 옆에서 하녀의 팔을 잡고 있었다.
“손대지 마라.”
에레디아가 말했다. 하녀가 숨을 들이켰다. 작은 떨림이 소매 끝으로 올라왔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에레디아는 서신 정리를 하고 있었다. 칼릭스에게 북부 출발 시각을 알리는 답신이었다. 정문 밖에서 카이텔이 태세를 바꾸는 소리가 창을 타고 들려왔다.
“봉인할 수 있습니까.”
에레디아가 물었다. 카이텔은 하녀의 손목을 놓지 않은 채 답했다.
“공작가 인장이 있으면 됩니다. 제게는 없습니다.”
에레디아는 왼손 검지에서 반지를 조금 비틀었다. 장갑 안쪽으로 금속이 차갑게 붙었다가 손의 온도를 받아들였다. 칼릭스가 남긴 물건이었다. 한 번 쓸 수 있는 공작가 인장.
“봉입할 빈 유리병을 구하십시오. 잔과 받침은 그대로 두고, 이 자리에서 가루가 섞이지 않게 가져가야 합니다.”
“예.”
카이텔이 응접실 밖으로 나가며 하인을 불렀다. 하녀는 그 틈에 벽 쪽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목이 붉어져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네가 먼저 말해.”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세라핀이 응접실 서쪽 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연미색 드레스가 촛불에 살짝 젖은 듯 반짝였다. 목에는 흰 리본 초커가 평소처럼 매여 있었다.
에레디아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네가 초대한 다과회지.”
“네. 언니 몫까지 준비시켰는데, 하녀가 실수라도 했나 봐요.”
세라핀이 한 걸음 다가왔다. 에레디아는 다음 말을 조금 비워두었다가 던졌다.
“받침 밑에 가루를 넣는 주문을 누가 내렸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무슨 가룬지 모르겠네요. 전 찻잔 준비는 하녀한테 맡겼으니까.”
카이텔이 유리병과 밀랍 촛불을 들고 돌아왔다. 에레디아는 턱짓으로 찻잔을 가리켰다.
“받침을 들지 말고, 잔을 세워 담은 뒤 뚜껑을 밀봉하십시오.”
“예.”
카이텔이 장갑 낀 손으로 집게를 써서 찻잔을 살짝 기울였다. 가루가 받침에서 유리병 안으로 미끄러졌다. 밀랍을 녹여 병 입구를 막는 동안 세라핀이 다시 웃었다.
“언니는 맨날 누가 나를 해치려는 것 같나 봐요. 얼마나 사는 게 무서웠으면.”
에레디아는 대꾸하지 않았다. 카이텔이 밀봉된 병을 들고 기다렸다.
“하녀의 진술부터 받겠습니다.”
에레디아가 하녀를 똑바로 보았다. 하녀가 어깨를 움찔했다.
“누가 가루를 찻잔 받침에 넣으라 했지.”
“아, 저는 시키는 대로.”
“누구지.”
“셋째 공녀님이요.”
세라핀이 하녀를 돌아보았다. 입가의 웃음이 조금 굳었다.
“얘가 지금 놀란 상태라서 말이 횡설수설하는 거예요. 제가 그런 걸 시킬 리가.”
“그럼 하녀가 왜 너를 공녀님이라 불렀을까.”
에레디아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목소리만 차갑게 가라앉았다.
“내가 아니라 셋째 공녀님이라고 했어요!”
하녀가 외치듯 말했다. 손가락이 치마를 꽉 쥐고 있었다.
“똑바로 말해. 지시는 어디서, 뭘로 전달받았지.”
“쪽지로요. 별관 복도에서. 셋째 공녀님이 친필로 쓰신 쪽지예요.”
세라핀이 목에 손을 올렸다. 초커 가장자리를 세 개의 손가락으로 눌렀다.
“거짓말. 언니, 이 애가 제 이름을 쓰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에레디아는 하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쪽지가 있느냐.”
“아직 있어요. 버리라고 해서…” 하녀가 목소리를 낮췄다. “불태우기 전에 아랫배 주머니에 넣어뒀어요.”
카이텔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하녀의 앞치마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에레디아는 펼치지 않았다.
“내 손에 직접 주지 말고 펼친 상태로 탁자 위에 올려라.”
종이가 별관 응접실 탁자 위에 놓였다. 초록 잉크가 번진 부분이 있었다. 세라핀 특유의 길고 둥근 필체로, ‘찻잔 받침 밑, 가루, 서쪽 자리’라고 적혀 있었다.
“필적은 신전 조사관이 대조할 것입니다.”
에레디아가 말했다. 세라핀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이건 제가 안 썼어요.”
“그럼 누가 썼지.”
“그야…” 세라핀의 말이 빨라졌다. “언니도 알잖아요. 이 집엔 절 싫어하는 하녀가 얼마나 많은데.”
“이 하녀는 네가 싫어하는 아이다.”
에레디아가 천천히 말했다.
“지시를 받은 하녀가 너를 고발하는 게 더 위험한데도 방금 네 이름을 말했다. 이유가 둘 중 하나다. 지시가 사실이거나, 이 하녀가 감옥에 갈 각오로 너를 모는 거다.”
하녀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거짓말 아니에요. 시종도 같이 들어요. 어젯밤에 셋째 공녀님이 복도에서 시종한테 ‘내일 밤이면 정리될 거야’라고 하셨어요.”
“누구의 시종입니까.”
“별관 청소 일을 하는 저택 시종이요. 이름은 아녜요. 얼굴은 알아요.”
카이텔이 허리를 숙여 하녀에게 낮게 물었다.
“그 시종을 지금 부를 수 있나.”
“밤 근무라 아직 건물 안에 있을 거예요.”
에레디아가 세라핀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세라핀이 먼저 외면했다.
“이 독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느냐.”
목소리가 낮았다. 촛불이 심지에서 짧게 튀었다.
“언니한테 하시는 말투가 그게 뭐예요.”
“서쪽 자리. 이 응접실에서 내가 앉기로 한 자리입니다.”
세라핀의 아랫입술이 떨렸다. 그녀가 다시 초커를 만졌다.
“사람은 마음대로 없는 죄를 만들 수 있나 봐요. 언니가 하녀 한 명 데리고 벌이는 연극에 난 안 놀아요.”
“연극이라면 네가 쓴 쪽지를 포함해 셋 다 신전에 넘긴다.”
에레디아가 탁자 위의 종이를 가리켰다.
“지금 내가 이 자리에서 너에게 묻는 이유는, 네가 이미 한 번 독배 사건을 응접실에서 모른 척했기 때문이다.”
세라핀이 숨을 삼켰다. 목의 리본이 빠르게 오르내렸다.
“그거야 언니가… 아니에요. 전 시키지 않았어요.”
“부인은 됐습니다. 하녀의 서명 증언을 받지.”
에레디아가 지시하자 카이텔이 작은 잉크병과 새 종이를 내놓았다. 하녀는 자신의 이름을 적고 손끝에 먹물이 묻은 채 종이에 지문과 함께 서명했다. 카이텔이 종이를 약간 말려서 셋이 보이게 들었다.
“이 서명 증언은 로엔 공작가 공개 호위를 통해 칼릭스 로엔 공작에게 인계된다.”
“잠깐만요. 그건 벨리언 가문 내부 일이에요. 공작님을 끌어들일 권리가 없잖아요.”
세라핀이 두 손을 저었다.
“독약 사건은 벨리언 가문 내부 일이 아니다. 지난번 잔은 북부 공작가 공작을 노린 것이었고, 오늘 이 잔은 공개 혼약을 맺은 내 몫이다.”
에레디아가 한어로 말을 잇지 않고 세라핀의 목 언저리를 보았다. 흰 리본 초커. 어머니가 사고 현장에서 마지막으로 손에 감고 있던 것과 같은 폭의 봉제였다. 전생이 아니라 이번 생의 기억이었다.
“공작이 이 집 안에 호위를 두고 있으니, 이 사건은 처음부터 그가 알 터전이에요. 내가 아닌 하녀를 의심하는 게 언니를 위한 일이라는 걸 알아주셨으면.”
세라핀이 낮고 부드러운 어조로 바꿨다. 에레디아는 그 말을 자르지 않고 끝까지 들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카이텔.”
“예, 공녀님.”
“밖으로 나가서 하녀와 쪽지, 밀봉한 병을 정문 쪽으로 옮기십시오. 시종의 동의 진술도 받아 셋이 지켜본 자리에서 첨부하고, 칼릭스 공작에게 바로 보고하세요.”
“예.”
카이텔이 하녀를 일으켜 세웠다. 인장 대신 에레디아의 지시서 한 줄을 병에 묶어 봉할 준비를 했다. 그는 찻잔과 밀봉병, 쪽지를 검은 망토 안에 가지런히 나눠 쥐었다.
“정문 앞에서 대기합니다.”
카이텔이 응접실을 나섰다. 세라핀이 문까지 따라가다 걸음을 멈췄다.
“내가 그런 짓을 했다고 집에 소문날 테니, 언니는 가문의 이름을 팔아먹으면서도 성공하시겠네요.”
“묻지 않은 것은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에레디아가 뒤돌아섰다. 별관 응접실을 나와 복도로 들어갔다.
“먼저 가요. 다과는 준비됐으니 혼자 드세요.”
세라핀의 목소리가 뒤에서 따라붙었다. 에레디아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복도 끝에서 테온이 서 있었다. 오래된 경장 차림이었고, 어깨에 비스듬히 검이 얹혀 있었다. 에레디아가 다가가자 그가 낮게 말했다.
“후작님이 저택 후문을 걸어 잠갔다. 내일 아침 전엔 아무도 못 나가게 한다는 명이야.”
“너는 알고 있었나. 아니, 언제 알았지.”
“두 시간 전. 근데 난 네 옆에 없었다.”
테온이 눈을 내리깔았다. 응접실 쪽 복도에 세라핀의 구두 소리가 멀어졌다.
“올라가서 내 손 가방을 찾아주겠느냐.”
“정문으로 나가려는 거지.”
“그렇다. 일단 너부터 왜 아직 저택 안에 있는지 말해.”
“이 집에서 널 지키려고 왔다가 늦었다.” 테온이 짧게 숨을 쉬었다. “내가 벨리언 저택 밖에 있을 때만 널 지킨다는 걸 오늘 또 확인했어.”
에레디아는 그 말의 무게를 받았다. 대답 대신 손에 쥔 장갑을 다시 고쳐 꼈다.
“징계를 받고도 널 못 따라붙었어. 그래서 오늘 낮부터 서용인 구역에 숨어 있었다.”
테온이 어두운 회랑 쪽을 턱짓했다. 그가 몸을 반쯤 틀어 벽의 낡은 등 아래로 걸어갔다. 벽 한쪽에 좁은 문이 있었다. 테온이 품에서 통로 열쇠를 꺼냈다.
“사생아만 쓰는 버려진 길이잖아.”
그가 자조 섞인 어조로 말했다.
“여기서부터 정문 담장 죽은각까지 이어진다. 안쪽 회랑은 후작 눈 띄기 좋으니까.”
“칼릭스는 정문 밖에 있으나.”
“그 호위가 정문 쪽 문을 붙들고 있다고 들었어. 아까 소란이 난 뒤로 움직임은 없었어.”
“그럼 이 길로 간다.”
에레디아가 먼저 움직였다. 테온이 팔을 뻗어 어두운 쪽을 먼저 확인했다.
“내가 앞장선다.”
좁은 통로는 습기가 배어 있었다. 돌벽에선 흙냄새가 났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어긋나게 이어졌다. 통로 끝에서 바람이 불었다. 정문 바깥 횃불 아래 카이텔이 서 있는 것이 갈라진 틈으로 보였다.
테온이 문을 조금 열어 바깥을 살핀 뒤 에레디아를 내보냈다. 그가 통로 입구의 옆 벽에 붙은 채 낮게 말했다.
“난 여기까지야. 이 문은 적당히 지퍼둔다. 오늘 밤 내가 어디 있었는지는 내가 안다.”
에레디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다음에 이 길이 필요하면, 어디로 연락하나.”
“저택 서문 서용인 휴게실. 내 자리 먼지가 없는 날은 밖이라 무단횡단하지 마.”
그가 짧게 웃는 시늉을 했다. 이내 사라졌다.
에레디아가 정문을 향해 걸어가자 카이텔이 빠르게 다가왔다. 그 뒤로 검은 마차 두 대가 정렬해 있었다. 첫 번째 마차 앞에 칼릭스가 서 있었다.
“보고 들었지.”
칼릭스가 말했다. 에레디아는 고개를 약간 숙였다.
제복의 검은 칼라가 밤바람에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손에 혼약 서약서 사본을 들고 있었다. 벨리언 집사가 정문 계단에서 그 서류를 올려다보았다.
“이것은 로엔 공작가에 보관된 혼약 성립 등본이다.”
칼릭스가 말했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런데 계단 아래 하인들이 모두 걸음을 멈췄다.
“집사는 보관본과 지금 대조한다. 어긋나지 않으면 공개 호위 개시 명령을 낭독하고, 에레디아 벨리언 공녀는 이 시간부로 북부 로엔 공작가의 보호 아래 둔다.”
집사가 계단을 내려와 등본을 두 손으로 받았다. 문을 열고 저택 서고 쪽으로 들어갔다. 촛불이 담장 위로 일렁였다.
에레디아는 칼릭스 곁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는 그녀를 눈으로 쓸어 살폈다.
“다친 곳은.”
“없습니다.”
“마차에 올라라. 이 집을 떠나는 게 먼저다.”
“공작께서 낭독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그 뒤에 오르겠습니다.”
칼릭스가 입가를 조금 다물었다. 몇 분 뒤 집사가 서고 문을 열고 돌아왔다. 서류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상본과 일치합니다.”
“좋다.”
칼릭스가 혼약 서약서 사본을 집사에게서 받아들고, 등불 아래로 품에서 명령서를 꺼냈다. 짧은 선언이었다. 보호 기간은 북부행이 마쳐질 때까지, 이동은 공작가 호위가 전담하고, 방해하는 자는 공무 방해로 기록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명령은 오늘부터 유효하다.”
집사가 물러서고 하인들이 길을 열었다. 후작의 구금 명은 그 자리에서 아무도 입에 올리지 못했다.
에레디아가 마차 발판에 발을 올렸다. 칼릭스가 문을 반쯤 잡아 주었다.
“서명 증언과 밀봉한 잔은 카이텔이 별도로 보관한다.”
“그 물건들과 동행합니다.”
“내일 광산에 들르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꺼내지 마라.”
에레디아가 마차에 올랐다. 창가로 별관 응접실이 보였다. 불이 켜져 있었고, 흰 커튼 뒤로 좁은 어깨 선이 반쯤 보였다.
세라핀이었다. 그녀는 목의 흰 리본 초커를 한 손으로 움켜쥔 채 유리창 가까이 서 있었다.
칼릭스가 마부에게 출발을 명했다. 마차가 움직이자, 에레디아는 등을 기대지 않고 커튼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눌렀다. 손가락에 낀 반지가 창가 스치는 불빛에 간헐적으로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