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 새겨진 공녀, 얼음 공작의 손을 잡다
10화
증거는 하나씩 까야 한다. 한꺼번에 쏟아내면 조작으로 몰린다.
에레디아는 품에 눅눅해진 원본을 그대로 둔 채 재판장 가운데로 걸음을 옮겼다. 새벽 안개가 완전히 걷힌 자리에는 광석 벽의 푸른 빛이 길게 남아 있었다.
“델마르 장군. 신병 확보보다 먼저 들으실 증언이 있습니다.”
그녀가 멈추자 칼릭스가 오른쪽 한 걸음 뒤에서 따라 섰다. 검은 제복 자락이 바람 없이 가라앉았다.
“벨리언 공녀가 이 자리에서 새 증거를 제출하겠다는 것입니까.”
델마르가 목소리만 앞세워 되물었다.
“예. 다만 오늘 이 재판장의 명분은 반역입니다. 제가 여는 증거는 그 반역 선포가 어떤 가문의 은폐 위에 세워졌는지 보여줄 뿐입니다.”
에레디아는 손을 들어 신전 관찰단 쪽을 가리켰다. 관찰단은 재판장 왼쪽, 포위군 깃발 아래 좁은 탁자에 앉아 있었다.
“신전 검증서와 별개로, 벨리언 저택에서 압수한 기록이 관찰단의 봉인을 받은 상태로 여기 있습니다.”
그녀가 테온에게 고개를 돌렸다. 테온은 관찰대 뒤에서 검은 망토를 걷고 앞으로 나왔다. 가슴에 두 개의 나무 상자를 눌러 안고 있었다.
에드릭이 그를 지나친 자리에 끼어들었다.
“공녀. 새 증거라는 말이 그 출처조차 불분명한 문서라면, 저는 이 자리에서 다시 항의하겠습니다.”
“출처는 벨리언 저택입니다. 그 저택에서 세라핀 공녀가 관리하던 서랍과 가계 기록실이었습니다.”
상자 뚜껑이 열렸다. 첫 번째 상자에서 에레디아가 흰 리본 초커 조각을 꺼냈다. 불에 그슬린 결대로 반쯤 접힌 상태였다.
“이 초커는 제 어머니의 것이라고 벨리언이 주장했습니다. 어머니의 목에서 사후에 빼냈다는 기록과 함께요.”
에레디아가 초커를 관찰단 탁자 앞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같은 반짇고름으로 만든 초커가 세라핀 공녀의 옛 하녀 진술에 나옵니다. 초커를 벗긴 날, 시신의 목에는 이런 리본이 없었다고요.”
“무슨 말을 하시는 건가요.”
세라핀이 낮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진주 머리핀이 빗겨 있었다.
“그 하녀는 저택을 떠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의 말을 지금 와서 증거라 부르시면 곤란하죠.”
에레디아는 두 번째 상자를 열었다. 여러 장의 벨리언 은폐 기록이 테두리에 눌려 있었다.
“하녀가 직접 진술한 서약서와, 세라핀 공녀가 하녀에게 지급한 이주 비용 장부가 함께 있습니다. 금액을 말씀드릴까요?”
“됐어요.”
세라핀의 목소리가 반음 올랐다. 그녀가 에드릭 쪽으로 반 걸음 붙었다.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 있죠? 시신의 목에 리본이 없었다는 말은 저도 처음 듣습니다.”
“그럼 이건 왜 공녀의 서랍에서 나왔는지 설명해 주십시오.”
에레디아가 기록 밑에 깔린 작은 상자를 밀었다. 낡은 은장 단추와 함께 타다 남은 흰 리본 조각이 들어 있었다. 보관 상태는 시료병처럼 유리덮개로 밀봉되어 있었다.
세라핀의 손가락이 치맛자락을 한 번 움켜쥐었다. 에드릭이 그 앞에 서려는 듯 몸을 기울였다.
“이건 가문 내부의 사사로운 물건일 수 있습니다. 공녀가 지금 공개할 권한이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가 차분한 어조를 잃지 않았다.
“황태자 전하.”
에레디아는 에드릭을 똑바로 보았다.
“지금 이 재판장에서 신병 확보를 명령받은 사람은 저와 로엔 공작입니다. 그 명분이 황실 혈통과 반역이라면, 그 명분을 세운 벨리언 가문의 기록은 이미 공개 대상입니다.”
“절차를 무시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절차를 가장 뒤늦게 요구하시는 건 전하 쪽입니다.”
칼릭스가 말을 잘랐다. 에드릭의 목울대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핏줄 문제가 반역 재판의 명분이라면, 벨리언의 가계 기록부터 대조하는 게 옳지. 그걸 왜 막나.”
칼릭스가 상자 하나를 관찰단 탁자 위에 올렸다. 상단이 눌리며 신전 인장이 찍힌 봉인지가 흔들렸다.
“이건 별건 아닌, 벨리언 저택 압수 목록의 사본이다.”
에드릭의 시선이 상자에 닿았다.
“로엔 공작께서 제출하실 물건입니까.”
“내가 제출하는 게 아니라 공개를 보증하는 거다. 신전 인장 아래 있던 걸 밖에서 뜯으면 안 되니까.”
관찰단 세 사람이 동시에 일어났다. 가운데 앉은 검은 예복의 사제가 기록 용지에 손을 얹었다.
“공작께서 관찰단에 직접 제출하시는 겁니까.”
“신전 봉인을 유지한 채 대조해 달라는 거다.”
사제가 상자를 받아 봉인지를 확인했다.
“접수하겠습니다. 열람 기록을 남기고 대조 결과는 신전 인장과 함께 재판장에 공개합니다.”
델마르가 한 걸음 나섰다.
“잠깐. 이 재판장의 지휘권은 내게 있다. 관찰단에 직접 제출하는 것은 절차를 뛰어넘는 행위다.”
“지휘권은 반역 재판을 소집하는 데 있지, 증거 검증을 막는 데 없습니다.”
장년 장교가 다시 나섰다. 제복에 꽂아 둔 문서 사본이 가슴께에서 구겨져 있었다.
“이의 제기자가 둘이 됐군.”
델마르의 입술이 얇게 당겨졌다. 그가 칼집을 한 번 두드렸다.
에레디아는 상자에서 옛 하녀의 진술서를 펼쳤다. 종이의 모서리가 눅눅했다. 그녀는 그걸 포위군 장교단이 잘 보이도록 들어 올렸다.
“공작부인 시신의 목에 초커가 없었다는 진술입니다. 벨리언은 어머니의 목에서 초커를 뺐다고 기록했지만, 목에는 이미 어떠한 리본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죽은 뒤에 흐트러졌을 수도 있잖아요.”
세라핀이 빠르게 말했다.
“지금 그걸 왜 저한테 뒤집어씌우려고 하시는 거예요? 언니는 반역 재판을 피하려고 가족을 더럽히는군요.”
“공녀가 어머니라 부른 사람의 죽음에 관한 기록입니다.”
에레디아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세라핀 공녀의 친모는 낙상 사고로 숨졌다고 가문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고가 난 날, 저택에서 리본을 태우라고 지시한 사람이 기록되어 있군요.”
“뭘 자꾸 그 사람, 그 사람 하세요. 제 어머니 장례에 관해서라면 제가 더 잘 압니다.”
“장례가 아니라 사고 전날의 행적입니다.”
에레디아가 기록 한 장을 뒤집었다. 낮게 적힌 명령 문구는 시녀장의 서명으로 끝나 있었다.
세라핀은 웃으려다 말았다. 그녀의 손이 목의 흰 리본 초커를 스쳤다.
“언니가 가져온 그 기록, 전부 조작이에요. 벨리언 저택에 있을 때부터 저를 몰아내려고 모아 둔 거잖아요.”
“몰아낼 이유가 내게는 없습니다.”
“거짓말.”
세라핀이 에드릭을 보지 않고 한 발 더 다가섰다.
“언니는 처음부터 저를 싫어했잖아요. 어머니 핑계로 공작가에 붙은 것도, 지금 이 자리도 다 저한테 뭐라도 씌우려는 거고.”
“세라핀 공녀.”
칼릭스가 반 걸음 앞으로 섰다. 세라핀이 아닌 에드릭을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이 재판장에선 공인된 기록으로 말해라. 아닌 건 그 자리에서 봉인을 뜯고 대조하면 끝난다.”
“로엔 공작. 제게 그런 태도를 보이실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에드릭이 대꾸했다.
“자격이 아니라 증거다.”
칼릭스가 허리띠에서 고문서 사본을 꺼냈다.
“이게 무엇인지 아나.”
“고문서 사본이군요. 그런데 그 문서가 지금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달의 눈물 광석이 서고의 미래를 찌그러뜨린다. 서고의 기록이 두 가지 미래만 보여주는 건 황실 직계의 권한 때문이고.”
칼릭스가 사본을 펼쳤다. 오래된 지도 위에 광석 운송 경로가 점선으로 찍혀 있었다.
“검은 왕관 인장의 가운데 홈이 최근 광석 경로의 운송 구간 표기와 겹친다. 그 인장을 미래의 근거라고 내세운 것은, 그 미래가 광석으로 왜곡됐을 가능성부터 열어둬야 한다.”
“그것은 억측입니다.”
에드릭이 손을 들어 탁본지를 가리켰다.
“이 탁본은 별의 서고에서 허락된 절차에 따라 뜬 것입니다. 광석과 겹친 것도 우연일 수 있습니다.”
“우연이라면 이 지도 전체가 같은 우연을 반복하고 있군.”
칼릭스가 고문서 사본을 관찰단 쪽으로 뻗었다.
“대조를 요구한다.”
에드릭의 입가가 굳어졌다.
“공작과 공녀가 오늘 이 재판장을 신전 관찰단에 넘기려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반역 명분이 조작됐다면 그걸 최종 판별할 곳은 신전이다. 너도 안다.”
칼릭스가 탁본지를 보았다.
“네가 내세운 미래가 조작됐을 가능성을 관찰단이 검증하는 걸 두려워할 이유가 어디 있지?”
에드릭은 곧바로 답하지 못했다. 그의 왼쪽 약지 인장 반지가 빛에 반사됐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재판장은 황실의 친위대가 지켜야 할 자리입니다. 신전이 나서는 것은 제 관할을 넘어가는 일입니다.”
“그럼 이 자리에서 군대를 움직이기 전에 답해라.”
칼릭스가 한 걸음 더 가까이 섰다.
“백야초 독살 지시 기록. 황태자 인장이 찍힌 대조본을 왜 공녀가 들고 있냐는 말에는 아직 답이 없었다.”
공기가 가라앉았다. 에드릭의 손끝이 예복 위로 올라갔다.
“저는 그런 기록을 지시한 적이 없습니다. 인장 대조본이라면 위조 여부부터 밝혀야 할 물건이고요.”
“그럼 여기서 밝히자고.”
에레디아가 품에서 접힌 사본을 꺼냈다. 손때가 밴 종이 중앙에 황태자 인장 대조본이 검게 찍혀 있었다.
“전하. 이 인장이 언제 어디서 쓰였는지, 서고의 열람 시간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관찰단 앞에서 대조해 주십시오.”
“공녀가 황실 인장의 사용 기록을 운운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그 위치는 기록이 만들었습니다.”
에레디아가 사본을 관찰단 탁자 위에 펼쳤다.
“황태자 전하의 독살 미래가 별의 서고에 있었다는 것은 이미 드러났습니다. 그 미래를 감추기 위해 이 기록이 나왔는지, 아니면 정말로 전하가 지시했는지. 그것을 가릴 증거가 여기 있습니다.”
“저는 모르는 문서입니다.”
에드릭이 말했다.
“모르는 문서가 대조를 거부할 이유는 더더욱 없군요.”
칼릭스가 어깨 너머로 친위대들과 광석 벽을 한 번씩 훑었다.
“이건 지금 내 말을 증명하자는 게 아니다. 너의 반역 선포가 잘못된 조각 위에 올라갔는지를 보자는 거다.”
침묵이 지나갔다. 관찰단 사제가 기록지를 넘기는 소리가 났다.
“저는 신전 관찰단의 대조를 받겠습니다.”
에드릭이 천천히 말했다.
“다만 백야초 독살 지시라는 것은 이 재판장의 토대가 돌아가는 순간까지 잠정 보류되어야 합니다. 황실에 대한 모독이 될 테니까요.”
“보류는 검증 뒤의 일입니다.”
에레디아가 즉시 받았다.
“검증 전에 보류를 요구하시는 것은 유리한 쪽으로만 시간을 쓰시려는 뜻으로 들립니다.”
“공녀는 참 날카로우십니다.”
에드릭이 짧게 웃었다.
그때 테온이 두 상자를 다 비우고 맨 아래에 있던 유리관 하나를 관찰대 앞에 내려놓았다. 탁자 위의 봉인 인장이 움찔 떨렸다. 그가 재판장 중앙으로 나왔다.
“벨리언 가계 기록을 보겠습니다.”
테온이 직접 입을 열었다.
“거기 내 이름이 어디 끼어 있는지 이 자리에서 바로 댈 수 있습니다.”
세라핀이 돌아보았다.
“테온 경이 왜 거기서 나오세요. 당신은 언니의 호위 기사일 뿐이잖아요.”
테온은 그녀를 보지 않았다. 관찰단 사제와 장교단이 모두 듣도록 말했다.
“벨리언 은폐 가계 기록. 그 안에 세라핀 공녀의 친모가 낳은 사생아가 한 명 더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저 요람에 남은 혈흔이 봉인돼 있었고요.”
그가 유리관을 손끝으로 살짝 밀었다. 짙은 흔적이 봉인 필름 아래 납작하게 붙어 있었다.
세라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지금.”
“내가 벨리언 후작의 사생아라는 기록입니다. 세라핀 공녀와는 이복 남매라는 뜻이에요.”
“거짓말.”
세라핀이 젖은 목소리로 되받았다.
“당신은 하인리히 가의 기사라고 들었어요. 언니가 시켰나요?”
“아가씨가 싫어하셔도 기록은 남습니다. 이 유리관의 혈흔과 가계 기록을 대조하면 끝나는 문제예요.”
테온의 어투가 평평해졌다.
“공식 석상이니 고발 형식으로 접수하겠습니다. 저와 세라핀 공녀의 혈통 대조를 신전 관찰단에 요청합니다.”
“안 돼요.”
세라핀이 외쳤다.
“그딴 대조 받을 일 없어요. 저는 그런 사람과 피가 섞인 적도 없고, 테온 경은 그냥 벨리언에 붙어서 출세하려는 것뿐이에요.”
“출세라면 내가 왜 이런 기록을 꺼내겠나.”
테온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에레디아는 그 모습을 보며 손끝을 오므렸다.
델마르가 검을 칼집에 넣은 채 천천히 손을 들었다.
“재판장의 질서를 바로잡겠습니다. 지금부터 모든 증거는 신전 관찰단이 아닌 이 지휘부에 먼저 인계하십시오.”
“안 됩니다.”
칼릭스가 막아섰다.
“반역 재판의 증거를 친위대 지휘부에 넘기면 검증 자체가 황실의 손에 들어간다. 그건 재판이 아니라 포로 심문이다.”
“공작이 계속 절차를 거부한다면 강제 진압의 명분이 됩니다.”
“그래.”
칼릭스가 북부 지휘봉을 뽑아 허리춤에 겹쳐 쥐었다.
“다만 짐작해라. 광석 벽이 막고 있는 곳은 진입로뿐이 아니다. 지금 여기 병사 절반은 네 명령을 듣기 전에 이미 갈라졌다.”
델마르의 턱이 굳었다. 장교단 뒤쪽에서 낮은 웅성이 일었다.
칼릭스가 에레디아 쪽으로 상체를 돌렸다.
“재판의 주도권은 네게 넘기겠다.”
에레디아가 숨을 멈췄다.
“내가 아니라도, 신전 관찰단이 증거 검증을 맡는 게 옳습니다. 그런데 왜 저입니까.”
“네가 가져온 증거가 이 재판장의 명분을 무너뜨리고 있다. 그다음 절차는 사건의 당사자가 직접 정리하는 게 맞아.”
칼릭스의 회청색 눈이 처음으로 오래 머물렀다. 에레디아는 그 속에서 의심과 다른 무언가를 읽었다. 확인 같은 것이었다.
“나는 지금 네 증거 제출을 신뢰한다. 이 자리의 지휘부에 그렇게 선언해 둔다.”
“세상에.”
에드릭이 낮게 비웃었다.
“반역 혐의를 받는 공작이 공녀에게 재판을 넘긴다고요? 이건 희극입니다.”
“희극을 곧 비극으로 만들려는 건 그쪽이지.”
칼릭스가 지휘봉을 들어 장교단 쪽으로 들어 보였다.
“북부 공작으로서 에레디아 벨리언 공녀를 재판장 전면에 세운다. 증거 검증은 신전 관찰단이 한다. 증거 보호를 위해 공작 호위를 기록 탁자 주위에 세운다.”
“그게 무슨 권한입니까.”
델마르가 물었다.
“반역 영지로 선포된 날부터 북부는 내가 지휘한다. 친위대가 들어오려면 광석 벽을 넘어야 하는데, 그 문은 내가 잠근다.”
그가 손을 한 번 올렸다. 진입로 쪽 광석 벽의 빛이 한 겹 짙어졌다.
에레디아는 관찰단 사제에게로 몸을 돌렸다.
“신전 관찰단에 증거 열람과 봉인 인계를 위임하겠습니다. 원본과 사본을 분리해 목록을 작성해 주십시오.”
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제출된 검은 왕관 탁본과 고문서 사본, 백야초 독살 지시 기록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안 됩니다.”
에드릭이 한 걸음 나서며 말을 끊었다.
“황실과 관련된 기록을 이 자리에서 봉인하는 것은 황제 폐하의 허가 없이는 할 수 없습니다.”
“허가를 받을 시간은 지났습니다.”
에레디아가 목록 용지에 직접 첫 물품을 적었다.
“이 재판장에서 전하의 인장 대조가 먼저라는 요구는 이미 나왔습니다. 봉인 목록을 거부하시면 그 자체로 기록에 남을 뿐입니다.”
“공녀는 저를 협박하는 겁니까.”
“요청합니다.”
그녀가 시선을 들었다.
“말로는 지쳤습니다. 기록으로 답해 주십시오.”
에드릭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그가 탁본지를 관찰단에게 밀었다.
“좋습니다. 대조를 맡기겠습니다.”
사제가 탁본지를 받아 봉인지 아래에 올렸다. 곧이어 에레디아가 낸 사본과 실제 인장이 평행으로 놓였다. 기록을 쓰는 손이 빨라졌다.
봉인 목록이 한 장, 두 장 늘어나자 포위군 사이에서 몸을 돌리는 소리가 커졌다. 광석 벽 밖으로는 안개보다 짙은 이동의 기척이 새어 들어왔다.
그때 진입로에서 전령이 뛰어 들어왔다. 손에 황실 봉인이 찍힌 두루마리가 들려 있었다.
델마르가 받아 풀었다. 그의 눈이 문서의 첫 줄을 긁었다.
“황제 폐하의 서신이다.”
델마르가 포위군 전체가 들리도록 외쳤다.
“북부 징발군은 공작의 반역에 동조한 것으로 보고 즉시 무장을 풀라. 이에 따르지 않는 진지에 대해서는 친위대가 강제 진압을 개시한다.”
장년 장교가 땅을 박차며 소리쳤다.
“검증도 안 끝났는데 진압부터 열다니, 그게 황실 겁니까!”
그의 대열에서 총검이 땅을 스치며 곧게 섰다. 반대편에 서 있던 징발군 사이에서 북부 쪽으로 쏠린 함성이 번졌다.
에레디아는 봉인 목록 위에 손을 얹었다. 종이가 손바닥의 땀으로 젖어들었다.
“봉인을 계속하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무너지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검증이 필요한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