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 새겨진 공녀, 얼음 공작의 손을 잡다
11화
봉인 목록 위에 얹힌 손가락이 아직 젖어 있었다. 마지막 항목을 적던 펜촉이 종이를 조금 찢어 놓았고, 그 흠집은 재판장 밖으로 옮겨진 뒤에도 촛불 아래에서 선명했다.
북부 국경 포위 진지, 지휘 막사. 밤은 어느새 반쯤 지나 있었다.
에레디아는 좁은 탁자 앞에 서서 손을 내려다보았다. 목록 작성 때보다는 나아졌다. 그래도 검지 옆 화상 흉터가 평소보다 붉게 보였다.
칼릭스가 천막 입구를 닫고 안쪽으로 들어왔다. 겉옷에는 바깥의 서리가 묻어 있었다.
“왜 부른 건지 아는가.”
그가 물었다. 에레디아는 한 번 숨을 들이쉬었다.
“이제는 말해야 합니다.”
“무엇을.”
“제가 전하의 독배를 쳐낼 수 있었던 이유를요.”
칼릭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대답 대신 탁자 반대편에 섰다. 촛불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막사 천에 겹쳐 비췄다.
“일에 치일 때가 아니다. 내일 재판장이 열린다면 너는 첫 진술부터 다시 서야 한다.”
“그래도 지금입니다.”
에레디아가 그를 똑바로 보았다.
“이 일은 증거와 절차가 아닙니다. 제가 언제까지고 설명하지 않으면, 당신은 저를 절반만 믿고 움직여야 합니다. 그 절반은 재판에서 죽습니다.”
칼릭스는 천천히 장갑을 벗었다. 그가 탁자 끝에 손을 얹자 얼룩진 봉인 용지가 살짝 밀렸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네가 그 잔을 쳐낸 건 우연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하셨죠.”
“짐작이다.”
칼릭스가 한 걸음 다가왔다.
“네가 사전에 안다는 걸 나는 증거 없이도 믿었고, 그 믿음으로 병력을 돌렸다. 이제 와서 그걸 입증하겠다는 건가.”
“회귀입니다.”
에레디아의 목소리가 막사 안을 갈랐다.
“저는 이 삶을 두 번째 살고 있습니다.”
칼릭스가 멈췄다. 손이 탁자 위에서 그대로 굳었다.
“첫 번째 삶에서 그 자리, 그 와인을 봤습니다. 어떤 잔에 백야초가 탔는지도요. 해독으로 월백초 뿌리를 지목한 것도 전생의 지식이었습니다.”
그녀는 일부러 말을 끊지 않았다. 숨이 차도 끝까지 문장을 밀었다.
“당신은 그 전생에서 숨졌습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저는 그 사실을 당신에게 발설한 대가를 안고 움직여야 합니다.”
칼릭스의 눈빛이 처음으로 흐트러졌다. 입술이 열릴 듯하다 다시 닫혔다.
“죽음의 별 카르테.”
그가 낮게 말했다.
“같은 사람이 두 번 회귀할 수 없다. 네가 그걸 감수하고도 말한 거냐.”
“네.”
그 짧은 대답 직후였다. 왼쪽 눈밑이 뜨거워졌다. 살갗이 부풀어 오르는 감각이 눈물점 주변으로 번졌다.
에레디아는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오늘 밤 정리해 둔 반격 진술의 마지막 순서가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있던 자리를 알 수 없게 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 부분만 비어 있었다.
“에레디아.”
칼릭스가 탁자를 돌아왔다. 그의 손이 그녀의 턱 아래에 닿으려다 멈췄다.
“뭘 잃었나.”
“진술 순서입니다. 마지막 반격의 한 부분이…….”
에레디아는 손을 들어 왼쪽 눈밑을 문질렀다. 부어오른 자리가 만져질 만큼 뜨거웠다.
“이게 각인의 흔적입니까.”
그가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보여라.”
칼릭스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에레디아가 손을 내렸다. 검은 레이스 장갑이 탁자 위에 닿는 소리가 났다.
남보라색 눈 아래, 옅은 붉은 선이 눈물점 모양으로 남아 있었다. 칼릭스가 가까이 다가가 그 자리를 들여다보았다. 밖에서 바람이 막사 천을 한 번 때렸다.
“카르테다.”
그가 한참 만에 말했다.
“별의 서고 밀서에 남아 있다. 회귀자의 각인이 약해질 때 눈물점 자리만 남아 부어오른다. 네 어머니가 가르쳐 준 고문서에 있었다.”
에레디아가 숨을 삼켰다.
“확실합니까.”
“거의.”
칼릭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증거 확정 없이도 나는 네 편이다. 하지만 네가 잃은 기억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 빈자리부터 다시 짠다.”
에레디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가의 열이 목까지 내려가는 것 같았다.
“한 가지만 되묻겠습니다.”
칼릭스가 말했다.
“처음 독배를 주문한 자는 누구였나.”
“에드릭 전하입니다. 세라핀의 밀명이 실행된 것으로 알았지만, 황태자의 인장이 최초 지시에 있었어요.”
“해독의 출처는.”
“북부 로엔에서 첫 번째 삶을 탈출하다가 만난 약제사의 지식이었습니다. 이번 삶에서는 그 명칭을 먼저 말해 의심을 산 셈이고요.”
칼릭스가 탁자 위의 검은 반지에 시선을 보냈다. 에레디아는 그것을 이미 끼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작게 떨리자 반지가 촛불을 받아 어둡게 빛났다.
“이 반지.”
칼릭스가 손가락 하나로 탁자를 짚었다.
“원래 신전 피의 서약용이다. 네게 준 뒤로 나는 계속 이 밤이 두려웠다. 고백을 증거로 만들라고 준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할 방법이 없어서.”
“증명하지 마십시오.”
에레디아가 끊었다.
“지금 필요한 건 그 증명이 아니라, 내일 아침까지 남은 증거를 제 순서 밖에서 다시 배열하는 겁니다.”
칼릭스는 곧바로 밖을 향해 소리를 내었다.
“테온.”
얼마 지나지 않아 천막이 들리고 테온이 들어왔다. 가죽 갑옷에는 진눈깨비가 붙어 있었다. 그의 눈이 먼저 에레디아의 부은 눈가에 닿았다.
“무슨 일이야.”
“말 못 한다.”
칼릭스가 잘랐다.
“지금부터 네가 들은 건 진영 내부 일로만 남는다. 남에게 알리면 내가 직접 처분한다.”
테온은 어깨를 올렸다 내리며 대답 대신 탁자 곁으로 왔다.
“증거 뭉치는 어디 있나.”
“안쪽 궤짝에 있습니다.”
에레디아가 몸을 돌려 궤짝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칼릭스가 그녀의 팔 앞을 막았다.
“너는 여기서 기록을 확인해라. 꺼내는 건 테온에게 시킨다.”
에레디아가 그를 보았다.
“왜죠.”
“네가 지금 놓친 순서를 억지로 기억하려 할 테니까.”
칼릭스가 낮게 말했다.
“기억을 재현하지 마라. 사본과 포로 증언으로 자리를 바꿔라.”
테온이 궤짝에서 증거 사본 묶음을 꺼냈다. 낡은 끈으로 묶인 문서 더미와 유리관 두 개, 포로 증언서 한 장이 탁자 위에 올라왔다. 이어서 칼릭스가 벽면의 포위 진지 병력 배치도를 펼쳤다.
“잊은 순서가 정확히 뭐냐.”
테온이 물었다.
“세라핀 친모 살인 증언과 백야초 지시 기록 중 무엇을 먼저 내는가입니다. 그 다음, 광석-서고 왜곡 고문서를 재판장에서 펼치기 전에 포로 증언으로 황실 개입을 받아야 하는지였어요.”
에레디아가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나 지워진 조각은 여전히 빈자리였다.
“그 두 가지를 뒤집으면 된다.”
칼릭스가 배치도에 손가락을 대었다.
“포로 증언을 처음에 두고 그 다음 살인 증언, 그 다음 독살 지시, 고문서는 마지막에.”
“그럼 병력은.”
테온이 배치도를 가로질러 한 곳을 짚었다.
“재판장 남쪽 진입로까지 친위대가 붙으면 막을 승산이 없어. 광석 벽을 옮길 수는 없으니, 오늘 밤 철조망 대신 제7수송로 쪽 잔도를 막아야 해.”
그는 병력 재배치 명령 초안을 꺼내 탁자에 펼쳤다. 두 장 위에는 좁은 글씨로 병사들의 재배치 경로가 적혀 있었다.
“돌격로를 잠그는 것보다 빼는 게 낫다. 공작이 제7수송로에 광산 인원을 옮겨 두라고 했지.”
칼릭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징발군 일부가 아직 대열에 남아 있나.”
“절반은 남아 있다. 나머지는 광석 벽 뒤로 빠졌어.”
에레디아는 증거 사본 묶음에서 포로 증언서를 뽑았다. 손끝이 아직 저렸지만, 종이를 쥐는 힘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 증언이 첫 순서가 되면, 전하는 기록보다 먼저 행동에 대한 진술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저쪽이 끊을 수 없다.”
칼릭스가 말했다.
“참고로 저쪽은 이미 끊으러 올 것이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휘 막사 입구 폭에서 장화 소리가 났다.
“로엔 공작께서 직접 문을 막으셔야겠습니다.”
밖에서 에드릭의 목소리가 낮게 깔려 들어왔다.
“황제 폐하의 기소문입니다.”
천막 사이로 황실 봉인이 번뜩였다. 칼릭스는 배치도를 탁자에 놓고 몸을 일으켰다.
“들이지 마라.”
테온이 검자루에 손을 얹었다.
“문서를 가진 황태자다. 말리면 내일 아침 우리가 적이 된다.”
칼릭스가 낮고 느리게 답했다. 그가 에레디아 앞에 섰다. 제복 어깨가 그녀를 가로막았다.
“여기서 기다려라.”
“막히면 저를 지휘 막사 안쪽에 가둔 꼴이 됩니다.”
에레디아가 반 걸음 나가려 했다. 칼릭스가 팔을 옆으로 뻗어 그녀를 저지했다.
“너는 어디까지.”
“입구까지입니다. 이번 변론은 제가 서야 합니다.”
잠시 서로를 보았다. 그러고도 칼릭스는 팔을 거두지 않았다. 다만 어깨가 반쯤 기울었다.
“뒤에 있어라.”
그가 먼저 입구 쪽으로 걸었다. 테온이 칼집에서 검을 반쯤 뽑은 채 에레디아의 왼쪽에 붙었다. 셋이 움직이자 막사 안의 촛불이 순서대로 요동쳤다.
지휘 막사 입구. 밖에는 에드릭이 흰 황실 외투를 입고 서 있었다. 오른손에는 기소문 두루마리, 뒤로는 횃불을 든 친위대 두 줄이 보였다.
“늦은 밤에 무거운 종이 한 장입니다.”
에드릭이 완곡하게 말했다.
“조금 더 일찍 왔어야 했는데, 황태자로서 서명을 받아 오느라 지체됐습니다.”
칼릭스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여긴 포위 진군 중인 공작의 지휘 막사다. 황태자도 함부로 못 들어온다.”
“공작의 말씀은 옳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문 밖에서 기다리지 않았습니까.”
에드릭이 기소문을 조금 들어 올렸다.
“황제 폐하께서는 내일 아침 공개 재판장에서 반역죄를 선고하라 하셨습니다. 공작께서 직접 출두하시고, 공녀께서는 증거와 함께 동행하시라는 뜻입니다.”
칼릭스의 시선이 기소문을 스쳤다.
“내가 거부하면.”
“그 경우 친위대가 공작과 공녀를 지휘 막사에서 곧바로 분리합니다.”
“처형까지 미리 정해 놓고 재판을 열자는 거냐.”
칼릭스의 발소리가 없다. 그가 한 걸음 앞으로 나가자 에드릭의 뒤 횃불이 조금 흔들렸다.
“역모죄엔 형이 정해져 있습니다. 저는 형 집행을 바라는 자리일 뿐입니다.”
에드릭이 미소를 지었다. 왼쪽 볼의 보조개가 어둠 속에 깊게 패었다.
“공녀께도 직접 말씀을 올리고 싶습니다.”
“여기서 하십시오.”
에레디아가 칼릭스의 어깨 너머로 말했다. 남보라색 눈이 횃불 아래에서 검게 가라앉았다.
“전하의 목소리는 어디서 미루었는지 이미 익숙합니다. 재판장에서의 출두 요구와 지금의 그것이 같은 종이에서 왔다고 들려 주십시오. 단, 저는 기소문에 앞서, 오늘 밤 봉인된 증거와 포로 증언을 공개 재판장에서 가장 먼저 열람하겠습니다.”
에드릭의 얼굴에서 미소가 반쯤 걷혔다.
“그건 재판장의 순서가 아닙니다.”
“순서라면 더 좋습니다.”
에레디아가 한 발 내디뎠다.
“전하께서 아실 첫 순서가 있지 않습니까. 황제 폐하의 기소문보다 먼저 황태자 인장의 대조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
에드릭이 기소문을 가슴께로 내렸다.
“공녀는 황실의 재판 절차를 흔들고 있습니다. 그 책임은 내일 본인 앞으로 돌아옵니다.”
그가 칼릭스에게 시선을 옮겼다.
“공작. 출두를 거부하신다면, 반역죄가 확정됩니다.”
칼릭스는 답하지 않았다. 단지 에레디아 앞으로 온전히 몸을 돌렸다. 그의 등이 에드릭과 친위대 쪽을 향했다.
“들어간다.”
그가 에레디아에게만 짧게 말했다.
“문서는 밖에 두고 와라. 여기선 아직 황제의 것이 아니다.”
“공작.”
에드릭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한 톤 벗어났다.
“지금 그 말은 공개 재판장 출두 명령에 대한 거부입니까.”
칼릭스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에레디아의 팔을 감싼 손이 아니라, 그는 그녀가 먼저 막사 안으로 들어가도록 옆으로 비켜 섰다. 그 사이 테온이 입구를 가로질렀다.
“답은 내일 재판장에서 받는다.”
칼릭스가 문 앞에서 어깨 너머로 말했다.
“황태자가 그 자리에 있다면.”
에드릭의 손이 기소문을 쥔 채 멈췄다.
“좋습니다. 내일 첫 의제는 반역죄 선고가 될 겁니다.”
그가 기소문을 들어 횃불 아래 펼쳤다. 종이 끝에 황금 인장이 무겁게 매달려 있었다.
“공개 재판장 출두를 명합니다. 응하지 않으면 기소문은 집행 허가로 바뀝니다.”
칼릭스는 더 듣지 않았다. 그가 에레디아 곁으로 들어와 천막 끈을 당겼다. 천이 무겁게 내려오며 에드릭의 마지막 시선이 잘렸다.
막사 안으로 횃불의 붉은 기운이 한 뼘쯤 스며들었다. 에레디아는 그 앞에 서서 오므렸던 손을 풀었다. 검은 반지가 탁자 쪽에서 온 촛불을 한 번 더 받았다.
“이제 저쪽은 못 물러섭니다.”
그녀가 칼릭스를 보았다.
“내일 아침, 저는 막사 문을 열고 공개 재판장으로 갑니다. 당신과 함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