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별에 새겨진 공녀, 얼음 공작의 손을 잡다

5화

이 사본은 황실이 아니라 북부에서 먼저 써야 한다.

한밤의 서고에서 에드릭은 탁본지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별빛이 종이 위 인장의 홈을 따라 천천히 식어 갔다. 검은 왕관. 그 아래 오래 끊긴 곁가지. 지난 사흘 사이 확보한 광석 경로 기록에서 본 운송 구간 표기와 겹친다.

수정판은 더 보여 주지 않았다. 에드릭은 탁본지를 두 겹으로 접어 안쪽 주머니에 넣고 장갑을 다시 꼈다.

“사서.”

등입석 뒤에서 기다리던 사서가 고개를 숙였다.

“이 서고의 열람 기록은 내일 아침까지 유지하십시오. 내가 다시 올 일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명하신 대로.”

사서의 음성이 벽을 타고 번졌다. 에드릭은 서고를 나서며 계단을 내려갔다. 황궁의 밤 공기는 차고 건조했다. 회랑 기둥 뒤에서 대기하던 전령이 그림자에서 반 걸음 나왔다.

검은 짧은 망토 차림이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전하.”

“북부 광산 쪽에 띄울 암호를 받아 두었느냐.”

“받아 두었습니다.”

에드릭은 손가락으로 목덜미를 한 번 쓸었다. 광석 경로의 가운데에 찍힌 인장. 그 인장이 가리키는 길은 지금 북부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제7수송로가 열린다. 그러면 북부와 황실 사이에 남은 여지는 없어진다.

“제7수송로.”

말이 계단보다 먼저 굴렀다.

“그 구간에서 사고가 나야 한다. 다만 사고는 자연스러워야 한다. 관리인이 책임질 수 있을 만큼만.”

“수위는.”

“붕괴가 나기 전에 짐수레를 세울 수 없을 정도. 사람은 죽이지 말아야 한다.”

전령이 잠깐 멈칫했다.

“현장 관리인에게 직접 닿습니까.”

에드릭은 걸음을 멈추고 전령을 돌아보았다. 황태자의 얼굴이 별빛을 받아 반으로 갈렸다. 왼쪽 볼 보조개가 깊게 패어 있었다. 웃는 것 같았고, 아니었다.

“하우젠이라는 자가 있습니까.”

“확인된 명단에 있습니다.”

“그자에게. 사고 위장 말고는 누구도 알지 못하게.”

에드릭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부드러웠다. 어음처럼 마지막 한 글자에 힘이 실렸다.

“이 지시가 새 선에서 나간 것으로 기록되면, 그 기록을 내가 직접 찢겠습니다.”

전령의 숨소리가 한 번 얕아졌다.

“명심하십시오.”

“예.”

뒤꿈치가 돌아가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짧게 났다. 에드릭은 서 있던 자리에 남았다. 손안의 탁본이 눌린 자리마다 땀에 젖고 있었다.

이것이 두 번째 미래 단편이 보여 준 길을 먼저 끊는 일이었다. 아직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 선제가 독살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지금의 황태자에게 그보다 긴요한 보험은 없다.

먼저 움직여야 한다. 아버지가 황제의 눈으로 이 길을 읽기 전에.

달의 눈물 광산 제7수송로에서는 새벽 안개가 땅에 낮게 깔렸다.

에레디아는 칼릭스보다 반 보 앞서서 길을 살폈다. 수레바퀴가 굳은 진흙을 찧은 자국이 안개 속으로 이어졌다. 카이텔은 두 사람의 뒤에서 짐수레와 광부 둘의 간격을 두고 걷고 있었다.

“마지막 짐수레는 어디에 세워 두었습니까.”

광부 하나가 손을 들었다.

“저 앞입니다. 아침 출하 전이라 열어 보지는 못했습니다.”

“열어 봅니다.”

에레디아의 대답이 안개보다 먼저 앞으로 갔다. 짐수레는 수송로 끝 돌출 바위 아래, 검은 방수포를 덮은 채였다. 광부가 포를 걷어 내자 나무 상자들이 가지런히 실려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다.

“아침 점화 전에 점화석을 분리해 두던가요.”

“예. 원래는 점화 전에 맨 뒤 칸에서 꺼냅니다.”

“그러면 점화석이 아직 실려 있다는 말이군요.”

에레디아가 수레 뒤쪽으로 걸었다. 칼릭스가 그녀의 팔 앞에 손을 얹었다.

“쉽게 열지 마라. 내가 본다.”

“공작께서 여기서 손대면, 사고가 났을 때 책임이 공작가로 바로 넘어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뒤로.”

칼릭스가 짧게 끊었다. 에레디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계약에 공작가 호위가 저를 지킨다고는 써도, 제 손을 대신 맨다는 조항은 없었습니다.”

둘 사이의 안개가 잠깐 갈라졌다. 칼릭스의 눈이 좁아졌다.

“그 조항은 지금 만들면 되겠군.”

“그건 나중에.”

에레디아가 장갑을 높이 끌어 올렸다. 그리고 광부 둘이 열지 못한 마지막 칸의 잠금틈에 쇠막대를 넣어 위로 밀어 올렸다. 뚜껑이 들리고 방수포가 바람에 한 번 펄럭였다.

안쪽에서 회갈색 가루가 담긴 주머니가 보였다. 점화석이었다. 벽에 닿으면 불꽃이 튀는 성질이 있어 제7수송로 같은 돌길에서는 항상 분리해 옮겼다. 그런데 마지막 짐수레 점화석 주머니는 다른 칸의 광석 상자 위에 얹혀 있었다.

“옮깁니다.”

에레디아가 주머니 끈을 두 손으로 집어 들었다. 칼릭스가 그녀의 옆에 바짝 붙어 섰다. 손목을 잡지는 않았다. 대신 수레 받침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떨어뜨리지 마라.”

“떨어뜨릴 일 없게 손을 씻어 둔 사람이 들고 있습니다.”

에레디아는 점화석 주머니를 수레에서 내려 수로 옆 물웅덩이까지 걸어갔다. 물이 검게 얼어 있었다. 주머니를 그 안에 천천히 눕히자 흰 김이 올랐다. 점화석이 물을 만나면서 소리가 났다. 작은 금속이 식는 소리였다.

칼릭스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광부들에게 말했다.

“이 수레는 점화석을 빼고 다시 결박한 뒤 움직여라.”

광부 둘이 재빨리 움직였다. 에레디아는 수로 옆에 쭈그려 앉아 점화석 주머니가 가라앉는 것을 확인했다. 그때였다.

마지막 짐수레 잠금틈 쪽에서 천 조각 하나가 나왔다. 방수포에 눌려 있던 것이 틈을 따라 반쯤 삐져나온 상태였다. 에레디아가 손을 뻗어 그것을 집었다.

흰 리본 초커 조각이었다. 기존 목장식과는 다른 폭의 리본이었다. 그녀가 지금 품에 지닌 흰 리본 초커보다 폭이 넓고, 안쪽에 어머니의 것이 아니라는 듯 다른 치수의 자국이 남아 있었다. 가장자리는 불에 그슬려 있었지만 재가 되지는 않았다. 잠금틈에 의도적으로 눌러 넣은 듯 구겨져 있었다.

“에레디아 벨리언.”

칼릭스가 그녀의 이름을 낮게 불렀다.

“뭘 찾았지.”

에레디아는 대답 대신 조각을 들어 그에게 보였다. 손끝에 작은 떨림이 있었지만, 목소리는 반듯했다.

“수레가 이 길을 떠나기 전에, 누군가 이걸 끼워 넣었습니다. 제 어머니 물건과는 다른 초커예요.”

“확신하나.”

“바늘이 지나간 자리가 그 저택의 방식과는 다릅니다. 어머니는 흰 리본을 안쪽으로 접어 박았어요. 이건 밖으로 박혀 있습니다.”

칼릭스가 조각을 받아 보지 않고 그녀의 손을 그대로 내려다보았다.

“가져라. 이동 중에는 품에 넣어 둬라.”

에레디아가 조각을 접어 검은 레이스 장갑 안쪽에 넣었다. 그때 수송로 입구 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관리인입니다.”

카이텔이 칼릭스의 팔꿈치를 건드리지 않을 만큼 가까이 와서 말했다. 칼릭스는 수레가 있는 쪽에서 몸을 돌렸다.

“하우젠.”

안개를 뚫고 하우젠 크로이츠가 다섯 명의 광산 직원을 데려왔다. 얼굴엔 밤새 제대로 자지 못한 기색이 그대로였다.

“공작 전하. 새벽 점검은 산소 부족 위험이 있어 제게 먼저 알려 주셔야 합니다.”

“지금 알렸으면 됐군.”

칼릭스의 말에 하우젠이 말에서 내렸다. 광산 안내 때와 달리 예를 갖추는 시간이 짧았다. 곧 시선이 짐수레와 물웅덩이로 쏠렸다.

“점화석을 왜 수로에.”

“분리 조치를 했습니다. 아침 출하 전에 점검하면서.”

에레디아가 장갑 끝에 묻은 물을 장막으로 닦았다.

“지난번 갱도 점검 이후 제7수송로에 대한 보고가 하나도 올라오지 않았으니까요.”

하우젠의 안색이 조금 굳었다.

“붕괴 통제로 행정 보고가 늦었습니다. 지금 확인했으니 그만하면 되지 않습니까.”

“확인하기 전에 이미 밤 사이 누군가 이 수로에 점화석을 붙여 두었습니다. 수레가 조금만 더 이 길을 간 뒤였으면, 사고가 났을 겁니다.”

“증거가 있으십니까.”

하우젠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에레디아는 허리에 낀 장부 원본을 만지작거리지 않았다. 그 대신 하우젠의 부하 중 하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광부가 아닙니다. 손이 수레 기름에 절어 있고, 어제 외곽 갱도에서 본 광부 둘 중 누구와도 다릅니다.”

부하가 고개를 들었다. 하우젠이 곧바로 가로막았다.

“새로 배치한 직원입니다.”

“오늘 아침 일찍.”

“그렇습니다.”

“그 직원이 수레를 점검했다는 기록이 있습니까.”

하우젠은 잠깐 멈칫했다. 그 짧은 틈에 칼릭스가 손을 올렸다. 수로 옆에 대기하던 호위 셋이 수레 뒤쪽에서 나왔다.

“더 묻지.”

칼릭스의 지시는 짧았다. 호위들이 하우젠이 데려온 직원들과 그 직원으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하우젠의 얼굴이 흔들렸다.

“이것은 광산 관리인의 권한을 침해합니다. 이 구간은 제 행정 구역입니다.”

“지금 이 수레에서 점화석과 리본 조각이 나왔다. 광산 행정이 조사할 권한은 없다.”

칼릭스가 하우젠 쪽으로 두 걸음 걸었다. 새벽 바람에 칼릭스의 검은 제복 자락이 안쪽으로 쓸렸다.

“너는 오늘 아침까지 이 구역을 닫고 있어야 했다. 붕괴 통제 중이라는 네 보고대로라면.”

하우젠이 입을 열려다 망설였다. 그 순간 수송로 입구 쪽에서 누군가 이어 달려왔다. 하우젠의 부하 하나였다. 숨을 몰아쉬며 알렸다.

“관리인님. 갱도 입구 막바지에서 사고가… 시신 한 구를 찾았습니다.”

“누구?”

“아직 확인이 안 됩니다. 모래와 돌에 깔려서 얼굴을 못 봅니다.”

하우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내 에레디아를 돌아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보신 그대로입니다. 어젯밤 붕괴는 자연 사고였습니다. 이것까지 조사로 몬다면 광산이 멎습니다.”

“멎는 건 아침 출하뿐입니다.”

에레디아가 말했다.

“그리고 지금, 제7수송로는 공작가가 통제합니다.”

“공녀님이 무슨 권한으로.”

“혼약 문서에 따라, 공작가에 대한 독배 사건의 공동 대응 범위에는 광산 경로와 제 수송 안전이 들어갑니다. 조문으로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

그 말에 하우젠이 움찔했다. 에레디아가 칼릭스를 보았다.

“구금 절차는 공작께 맡기겠습니다. 저는 이 직원과 광부 둘을 분리해 우선 증언을 받겠습니다.”

“카이텔.”

칼릭스가 부르자 카이텔이 곧바로 곁에 섰다.

“광산 실무진을 전원 소집해라. 명단과 얼굴을 대조하고, 오늘 새벽 수송로 출입자를 색출해라.”

“예.”

하우젠은 그 자리에서 한 발 물러나며 뭔가 말하려 했다. 칼릭스가 더 가깝게 다가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저항하면 현장 구금.”

그 말이 떨어진 뒤로 하우젠은 팔짱을 풀었다. 얼굴은 새벽빛 아래 잿빛이었다.

“이것은 사고입니다.”

“곧 드러난다.”

칼릭스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호위 셋이 하우젠을 에워쌌다.

“현장 권한은 내가 거둔다. 이의는 감사관이 온 뒤 하게.”

하우젠이 끌려가듯 수레 곁에 있던 조립식 사무소로 옮겨졌다. 에레디아는 제7수송로 입구까지 걸어 나가며 카이텔을 향해 말했다.

“광부들은 아침 출하 전에 이 길을 답사했다고 했습니다. 그 진술과 대조할 시간을 벌어 주세요.”

“공녀님은 어디로.”

“탈리 장부가 묻혔을 만한 구간을 다시 봅니다. 리본 조각이 나온 잠금틈 근처부터.”

카이텔이 주저했지만 칼릭스가 손을 들어 그를 물렸다.

“움직여.”

에레디아는 뒤돌아 수송로 서쪽으로 향했다. 안개가 점차 걷히고 빛이 길 위에 눕기 시작했다. 리본 조각이 품에 닿은 자리가 차가웠다.

어머니의 것이 아닌 목장식. 이 길 위에서 누군가 의도적으로 남긴 물건. 그게 지금 하우젠을 가두고 광산 전체를 색출하는 일의 첫 단서가 된다.

잠시 뒤, 칼릭스는 호위 하나를 끌어 세우고 낮게 말했다.

“광산 사무소에서 하우젠의 출장 기록과 인장 사용 대장만 먼저 가져와라. 다른 문서는 옮기지 말라.”

“예.”

칼릭스는 에레디아가 걸어간 서쪽 수송로를 한 번 바라보았다. 그녀의 발자국이 진흙에 가볍게 남았다. 멀리서 광부 하나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이 왔다.

이내 칼릭스는 말에 올라 북부 신전을 향했다. 갈 곳이 한 군데 더 있었다. 손에 든 광석-서고 왜곡 고문서 사본, 그 원본을 확인할 곳.

신전 지하 고문서고는 계단 아래로 공기가 무거웠다. 아르보 렉투스가 등불을 든 채 입구에 서 있었다. 칼릭스가 내려가는 발소리가 돌벽에 부딪혀 올라왔다.

“공작 전하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르보. 고문서 원본을 봐야겠다.”

“달의 눈물이 별의 서고에 주는 영향에 관한 것이지요.”

칼릭스가 멈칫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보는 그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밀초 냄새가 옷에 배었다. 그가 긴 탁자 위에서 낡은 가죽 두루마리함을 꺼냈다.

“로엔 가문을 지키기 위해, 저도 이것을 보여 드려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아르보가 첫 장을 펼쳤다. 해묵은 글씨 사이로 달의 눈물 광석이 별의 서고에 남기는 왜곡의 자취가 그려져 있었다. 신전 사제만 남긴 기록이었다.

“광석이 일정량 이상 한곳에 모이면, 서고의 기록은 실제 미래와 다르게 비칠 수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칼릭스는 페이지를 넘기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아르보가 한 장을 더 펼치자, 광석 경로가 지나는 구간이 언급되는 대목이 드러났다. 칼릭스의 시선이 그 위에 오래 머물렀다.

“이 지도는 언제 그린 것이지.”

“기록 뒷장에 복원본이 있습니다. 경로가 지금과 한 구간 다릅니다. 오래전 북부 수송로가 신전 쪽으로 우회했을 때의 지도입니다.”

“그러면 지금 제7수송로는.”

“나중에 뚫린 길입니다. 기록의 경로와 겹치는지는 더 대조해 봐야 합니다.”

칼릭스는 사본을 품에서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두 문서를 나란히 두고 굳은 표정으로 비교했다. 손가락으로 고문서의 광석 경로를 짚었다.

달의 눈물이 서고의 미래를 왜곡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별의 서고에서 누군가가 본 미래도 왜곡된 것일 수 있었다. 이 광석이 지금 어디에, 얼마나 모여 있는지 모른다면 확인할 수 없다.

칼릭스는 문서를 접었다. 아르보가 그 손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공작 전하.”

“이 길을 다시 조사해야 한다. 제7수송로부터.”

정확히 그 지점에서 칼릭스의 말이 멎었다. 접힌 고문서 위로 칼릭스의 손이 단단히 내려와 있었다.

별에 새겨진 공녀, 얼음 공작의 손을 잡다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