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별에 새겨진 공녀, 얼음 공작의 손을 잡다

9화

“이 사본이 몇 장인지 아는 사람은 손을 드십시오.”

에레디아는 포위 진지 한가운데 섰다. 흙이 굳은 바닥을 장화가 밟아 팬 자국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사방에서 말 냄새와 가죽 끈 냄새가 밀려왔다.

새벽이었지만 진지에는 횃불이 켜져 있었다. 불빛에 장교단의 금속 계급장이 번쩍였다.

“벨리언 공녀께서 여기 오신 명분을 먼저 밝히십시오.”

좌측에서 델마르 아우렐리온이 걸어 나왔다. 중장노인으로, 제국군 어깨 덮개에 별 세 개가 달려 있었다.

에레디아는 들고 있던 서류 뭉치를 품에서 높이 치켜들었다.

“백야초 테러의 급수 기록 사본과 사절단 부식 납품 표식 대조입니다.”

한 장을 꺼내 가장 가까운 상단 대표에게 내밀었다.

“황실 사절단 수행단장 명의로 받은 독병 인수 기록이 포함돼 있습니다.”

“그것이 반역 선포를 뒤집을 근거라고 보십니까.”

델마르가 목소리를 낮췄다.

에레디아는 대답 대신 서류 뭉치를 반으로 갈랐다. 절반을 왼쪽 장교단 쪽으로 걸으며 한 장씩 건넸고, 나머지 절반은 상단 대표들 앞에 놓인 좌판 위에 놓았다.

“반역 선포의 근거가 혈통이라면, 혈통을 반역으로 몰기 전에 같은 황실 자문 사건이 왜 은폐됐는지부터 검증해야 합니다.”

한 장교가 문서를 펴다 말고 물었다.

“황실 자문 사건이라니요.”

“공작성 급수대에 백야초를 푼 시종이 사절단 소속이었습니다.”

에레디아의 손끝이 문서 한 귀퉁이를 가리켰다.

“그 시종의 배정 시각과 사절단 복무 기록이 같은 기장으로 표기돼 있습니다.”

델마르가 손을 들어 장교 한 명을 막았다.

“그 기록의 원본은 어디 있습니까.”

“제가 보관합니다.”

에레디아는 마지막 한 장을 품에 남기고 손을 내렸다.

“사본은 드렸습니다. 원본은 증거 검증 자리에서 제출하겠습니다.”

“검증 자리를 정할 권한은 공녀께 없습니다.”

“그럼 여기서 하시지요.”

에레디아는 한 걸음 물러나지 않았다. 진지의 불빛이 은백금발을 붉게 덧칠했다.

“백야초는 무미무취입니다. 맛으로 구분할 수 없지요. 그런 독을 정확히 급수통에 넣으려면 누군가 물을 옮기는 순서와 시간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문서에는 그 순서가 남아 있습니다.”

주변에서 문서 넘기는 소리가 빠르게 퍼졌다.

“이건 광산 테러와 별개의 사안입니다.”

뒤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제복 차림의 장년 장교였다.

“그래서 더 봐야 합니다.”

에레디아가 그를 돌아보았다.

“반역 영지로 선포된 곳에서 하루 사이에 일어난 일이, 황실 사절단의 물자 경로와 겹친다면 우연이라도 기록으로 남겨야 합니다.”

일부 병사들이 무기를 든 손을 늦추었다. 장교단 사이로 낮은 웅성거림이 퍼졌고, 델마르가 칼자루를 짧게 두드렸다.

에레디아는 움직이지 않았다. 원본이 품 안에서 단단하게 눌렸다.

그때 북쪽 초소에서 나팔 소리가 길게 끊어졌다.

“친위대 선봉이 진입로로 붙었습니다.”

전령이 숨을 몰아쉬며 달려왔다. 델마르가 몸을 돌렸다.

“밀고 들어오라는 명령은 없었다.”

“선봉 기병이 제어선을 넘었습니다. 그쪽 지휘관은 황제 친서의 봉인을 근거로 든다 합니다.”

에레디아는 문서를 움켜쥐었다. 진입로 쪽은 이미 새벽 안개에 가려 형체가 흐릿했다.

공개 재판장으로 만든 빈 훈련장 서쪽에서 칼릭스가 걸어 나왔다. 검은 제복 주위로 먼지가 얇게 일었다. 그는 전령의 방향은 보지 않고 진입로를 향해 손을 들었다.

“봉쇄 신호를 올려라.”

호위 둘이 뛰었다. 진입로 양옆으로 세워진 기둥 끝에서 푸른 광점이 번졌다.

이내 산비탈 쪽에서부터 낮은 진동이 일었다. 광산 갱도 쪽에 쌓아 둔 달의 눈물 광석 더미가 어둠 속에서 푸르게 빛났고, 빛이 만든 벽이 진입로를 가로막았다. 말발굽이 멈추는 소리가 뒤늦게 밀려왔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델마르가 칼릭스에게 다가섰다.

“선봉 지휘관이 봉인을 내세워 밀고 들어오면, 나도 광석 봉인으로 맞을 뿐이다.”

칼릭스의 시선이 여전히 진입로에 꽂혀 있었다.

“공작가의 광석은 황실의 허가 없이 국경에서 꺼낼 수 없습니다.”

“이미 반역 영지로 선포됐다. 허가의 효력은 죽었다.”

“황제 폐하의 친서를 그렇게 받아들이십니까.”

“제거 명분이 혈통이라면, 그 혈통을 공개한 황실이 먼저 광석 경로를 밝혀야 할 것이다.”

말이 오가는 사이 에레디아는 장교단 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몇몇 지휘관이 문서를 접어 상의에 꽂았다. 사본은 이미 손을 떠났다.

에드릭이 진지 안쪽 막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흰 황실 예복이 횃불에 어두워져 있었다. 오른손에는 검은 천에 싼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벨리언 공녀의 서류는 어디까지나 사건 사본일 뿐입니다. 지금 이 포위의 근거는 따로 있습니다.”

그는 천을 걷어냈다. 탁본지가 바람에 퍼덕였다. 그 위로 검은 왕관 인장이 번졌고, 가운데 홈이 있고, 그 주위로 곁가지 문양이 잘려 나간 자리가 남아 있었다.

“별의 서고가 보여준 미래입니다. 로엔 공작이 검은 왕관 아래 앉는 모습입니다.”

병사들의 시선이 탁본지로 쏠렸다.

칼릭스는 진입로를 등지고 돌았다.

“그 탁본지가 어느 서고 기록에서 나왔지.”

“황태자께서 별의 서고에서 절차에 따라 인장을 배어 내셨습니다.”

에드릭의 목소리가 정확했다.

“그래서 그 미래가 로엔의 반역을 예고했다는 것이 폐하의 명분입니다.”

칼릭스가 손을 뻗었다. 호위가 품에서 문서 사본을 건넸다. 종이 묶음은 군데군데 그을린 자국이 있었다.

“북부 고문서.”

그가 첫 장을 펼쳐 에드릭 쪽으로 돌려 보였다.

“달의 눈물 광석이 일정량 이상 한곳에 쌓이면 별의 서고 기록이 찌그러진 형태로 보인다. 황실이 관리하는 광석 경로와 서고의 미래 시선이 맞물리는 지점이다.”

“그게 지금 무슨 상관입니까.”

“최근 광석 반출과 황실 상납 사이 운송 공백이 두 달 전 이틀에서 지난달 닷새로 늘었다.”

칼릭스가 탁본지를 가리켰다.

“그 공백 구간은 검은 왕관 인장 가운데 홈이 겹치는 운송 표기와 일치한다.”

에레디아는 숨을 들이켰다. 칼릭스의 손가락이 탁본지 위를 지나갈 때마다 불빛이 홈을 타고 갈라졌다.

“황실은 광석을 한곳에 모아 서고의 시선을 흐려 놓고, 찌그러진 미래를 근거로 나를 제거한다.”

에드릭의 얼굴에서 미소가 걸히듯 사라졌다. 탁본지를 거두어 쥔 손등에 힘줄이 섰다.

“그 주장은 신전 검증 없이는 말장난입니다.”

“말장난을 심판할 자리를 만들어라.”

칼릭스가 고문서 사본을 접었다.

“공작성엔 이미 신전 검증서가 있다. 달의 눈물 광석 앞에서 검은 문양이 반응해 봉인했다고 기록돼 있다.”

에드릭이 반 박자 늦게 웃었다.

“그 검증서가 얼마나 중립적일지 저는 압니다.”

“중립이 궁금하면 지금 그 광석 벽이 서 있는 곳에 가 보아라.”

잠시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친위대 선봉이 광석 벽 앞에서 말을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델마르가 칼집 아래로 반쯤 뽑았던 검을 내리치듯 집어넣었다.

“좋습니다. 반역 재판은 이 진지에서 소집합니다.”

그가 에레디아를 가리켰다.

“그에 앞서 문서 원본을 압수하고 공작과 공녀의 신병을 확보하겠습니다.”

“안 됩니다.”

왼쪽 장교단에서 목소리가 먼저 뛰쳐나왔다. 아까 문서를 제복에 꽂은 장년 장교였다.

“증거 검증 전 인신구속은 반역 재판이라도 절차를 벗어납니다.”

“명령을 거부한다는 것입니까.”

“검증이 먼저입니다. 저희 부대는 공녀가 나눠 준 사본을 봤습니다. 이게 조작이면 그 자리에서 검증해도 늦지 않습니다.”

델마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지금 이 진지를 누가 지휘하는지 아는가.”

“델마르 장군이십니다. 그런데 명분이 무너진 포위는 지휘권만으로 안 서는 부대도 있습니다.”

병사들이 움직였다. 총검이 땅을 향한 채 두 갈래로 나뉘었다.

에레디아는 숨을 골랐다. 품에 남은 원본이 땀으로 눅눅해졌다.

칼릭스가 고문서 사본을 허리띠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증거 검증을 요구한다.”

델마르가 재차 명령하듯 손을 올렸다.

“신병 확보를 지시한다. 이의 제기자는 병영 질서 위반으로 기록된다.”

장년 장교는 물러서지 않았다.

“기록하십시오. 그 뒤에 제 부대부터 문서 원본 대조를 요청합니다.”

무장을 낮춘 병사들이 그 뒤로 모여드는 게 에레디아에게 보였다. 새벽 안개가 걷히고 광석 벽의 푸른 빛이 진입로에 길게 드리워졌다.

별에 새겨진 공녀, 얼음 공작의 손을 잡다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