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형된 공녀는 집행관과 계약 결혼한다
3화
복도 끝에서 구두 소리가 끊기자 벨리시아는 기록지 옆에 둔 검은 리본을 집었다. 손가락에 두 바퀴 감았다 풀었다. 감촉이 차가웠다.
서고 안은 흑연꽃 봉인병을 잠가 넣은 뒤라 공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유리 파편이 치워진 자리마다 바닥 장판이 눅눅하게 자국을 남겼다.
“테오도르는 언제부터 저랬습니까.”
카르엘이 서고 잠금장 앞에서 돌아보았다. 새벽빛이라기엔 푸르스름한 어둠이 창밖에 남아 있었다.
“오늘 처음 안 것처럼 묻지 마라.” 카르엘이 말했다. “어제 보았을 거다.”
“본 것은 모서리뿐입니다.” 벨리시아가 말했다. “내용을 봤는지 묻는 겁니다.”
카르엘은 대답하지 않고 벽 쪽 등잔을 낮추었다. 심지가 타는 냄새가 얇게 퍼졌다. 벨리시아는 그가 왼손 손등을 한 번 폈다 오므리는 걸 보았다.
“아직 모른다.” 카르엘이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확인해야 합니다.”
“내가 확인한다. 넌 서고에 남아 있어라.”
벨리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 걸음 문 쪽으로 옮겼다.
“테오도르가 돌아올 겁니다. 전날 감춘 것을 회수하러요. 그때 두 분이 마주치면 심판관님 혼자보다 제가 있는 편이 낫습니다.”
“증거 인멸 장면을 목격하게 하겠다는 거냐.”
“이미 목격했습니다.”
카르엘이 벨리시아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등잔 불빛이 그의 턱선을 한쪽만 데웠다.
“따라와라. 소리 내지 마라.”
복도로 나서자 새벽 공기가 벨리시아의 소매 안으로 스며들었다. 두 사람은 별관 1층 서쪽 난방용 화로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문이 닫힌 화로방 앞에서 카르엘이 손을 들어 멈추게 했다. 안쪽에서 불씨를 헤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누가 왔나.” 카르엘이 문을 열며 말했다.
화로 앞에 웅크린 테오도르가 흠칫 돌아보았다. 오른손에 가죽 공책을 들고 있었고, 공책 모서리 한쪽이 화로 테두리에 닿아 있었다. 불길이 공책 표지를 향해 혀를 뻗는 게 보였다.
카르엘이 세 걸음 만에 좁혀 테오도르의 오른손을 누르고 공책을 빼냈다. 테오도르가 반항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심판관님.” 테오도르가 말했다. 손을 화로 앞에 내린 채였다.
“여기서 뭘 태우려 했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테오도르가 재빨리 말했다. “업무 기록이 오래되어서 정리하려고 했습니다.”
“업무 기록이면 왜 아르덴 별관 화로에서 태우나.” 카르엘이 물었다.
테오도르가 안경을 고쳐 쓰려다 손톱이 테에 걸렸다. 화롯불이 등 뒤에서 그의 얼굴 흐린 쪽을 붉게 떠올렸다.
벨리시아는 문 안쪽에 서서 테오도르가 한 발도 출입구 쪽으로 옮기지 못하게 서 있었다.
“제게 주시면 확인하겠습니다.” 벨리시아가 말했다.
카르엘이 잠시 공책을 손에서 뒤집어 살피더니 벨리시아에게 건넸다. 표지가 열기에 데어 가장자리가 조금 오그라들어 있었다. 벨리시아는 공책을 펼쳤다.
첫 장 상단에 황실 인장을 눌러 찍은 밀명 표지가 보였다. 함무늬 안에 칼을 든 사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아래로 조밀한 필적이 촘촘히 적혀 있었다.
“황제 직속 밀명이군요.” 벨리시아가 말했다.
카르엘이 벨리시아의 손바닥 위 공책을 함께 내려다보았다.
“읽어라. 첫 장부터.” 카르엘이 말했다. “테오도르, 너는 물러난다. 문에서 멀어져라.”
테오도르가 화로와 벽 사이로 두 걸음 뒷걸음질 쳤다.
벨리시아는 공책을 높이 들고 첫 장 필적을 따라 눈을 움직였다. 관찰 대상은 ‘아르덴 가문 장녀, 벨리시아 아르덴’으로 시작했다.
“관찰 개시일은 제가 서재에서 밀사를 마주하기 사흘 전으로 적혀 있습니다.” 벨리시아가 말했다.
“사흘 전이면 혼인 제안보다도 앞서군.” 카르엘이 말했다.
“네. 황제가 저를 감시하라고 내린 밀명입니다.” 벨리시아의 손끝이 공책 모서리에서 뜨거워졌다.
테오도르가 고개를 숙인 채 숨을 내쉬었다.
“맞습니다.” 테오도르가 말했다.
카르엘이 테오도르를 향해 돌아섰다.
“언제부터 보고했지.”
“공국 소속이 된 직후부터입니다.” 테오도르의 말이 빨라졌다. “다만 처음에는 통상적인 관찰이었습니다. 혼인 발표를 전후해서는 보고 주기가 짧아졌지요.”
“이중 보고의 목적은.” 카르엘이 물었다.
테오도르가 손끝으로 자신의 왼쪽 소매를 한 번 죄었다.
“심판관님이 아르덴 영애와 어떤 거래를 하시는지, 계약이 실제 이행되는지 황제께서 미리 확인하고자 하셨습니다.”
“즉, 이 계약은 장려된 것이지 방해받을 일이 아니었다는 거냐.” 카르엘이 한 단계 더 좁혔다.
테오도르가 고개를 들었다. 눈알이 새벽빛에 젖어 번들거렸다.
“처음부터 황제의 포괄적 고려 안에 있던 결합입니다. 심판관님도 그 안에 계셨습니다.”
카르엘의 표정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그의 손이 공책을 받기 위해 내밀었을 때 테오도르가 그 손을 피했다.
“네가 확보한 기록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카르엘이 빼앗듯 공책을 거두며 말했다. “황제에게 보고한 다른 사본이 있을 거다.”
테오도르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화로의 불 소리보다 컸다.
“없습니다. 오늘 폐기 직전의 원본이 전부입니다.”
“사본은 남겼겠지.” 벨리시아가 말했다.
테오도르가 그녀를 보았다.
“어제 외투 안에서 공책을 눌러 넣을 때, 오른쪽 품이 무거워 보였습니다.” 벨리시아가 말했다. “그때 전부 피하려 한 게 분명해요.”
카르엘이 화구 쪽으로 공책을 비스듬히 기울여 불빛 아래 펼쳤다.
“좋다. 몸을 확인한다.” 카르엘이 테오도르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문서는 제가 맡고, 이 사람은 인계 대기입니다.”
테오도르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벨리시아는 그 자세가 곧 진술에 동의한 모양임을 안다는 듯 공책의 첫 장에 다시 시선을 주었다. 황실 인장의 금박 조각이 손끝에 닿은 공기보다 뜨거웠다.
밤이 조금 걷히고 난 뒤, 아직 햇빛이 회랑 바닥을 끊어 데우지 못한 시각에 카르엘은 집무실로 돌아왔다. 테오도르가 반 보 뒤에서 가죽 공책을 오른손으로 눌러 쥔 채 따라왔다. 별관은 경비대가 두 겹으로 둘러섰다.
벨리시아는 문 앞에 서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밤이 조금 걷히고 난 뒤, 아직 햇빛이 회랑 바닥을 끊어 데우지 못한 시각에 카르엘은 집무실로 돌아왔다. 테오도르가 반 보 뒤에서 가죽 공책을 오른손으로 눌러 쥔 채 따라왔다. 별관은 경비대가 두 겹으로 둘러섰다.
벨리시아는 문 앞에 서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벨리시아 아르덴은 자신이 이 건물에 들어올 이유를 만들지 않는 쪽이 낫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카르엘이 내려다보며 말했다. “여기서 내려라.”
“집무실 앞까지 가겠습니다. 오늘 아침의 별관 수색이 끝나기 전에는 당신 곁을 벗어나지 않겠습니다.”
카르엘은 잠시 그녀를 보다가 돌아섰다. 벨리시아는 테오도르가 공책을 건네기 위해 집무실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았다.
남색 눈이 그 뒤통수에 멈췄다. ‘저 공책은 별관에서부터 여기까지, 손이 닿는 곳에서 떨어진 적이 없다.’
벨리시아도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닫기 전, 카르엘이 테오도르에게 외투를 벗지 말고 그대로 있으라고 했다. “테오도르. 가죽 공책.”
테오도르의 손이 잠시 공책 위에서 미끄러졌다. 그는 대답 대신 허리를 굽히고 집무실 오른쪽 서랍 쪽으로 반 걸음 갔다.
“여기 있습니다. 별관 출입 기록을 옮기는 과정에서 제가 보관했습니다.”
카르엘은 공책을 받지 않고 탁자 위에 올려두게 했다. 갈색 가죽 표지에 눌린 손자국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원본 보관 증명을 집무록에 남긴다.” 카르엘이 두꺼운 집무록을 펼쳤다. “이 공책을 밀명 기록물로 등록하고, 부본을 만든다. 그 시간 동안 벨리시아 아르덴은 저쪽 의자에 앉아 있어라.”
벨리시아는 바닥에 붙은 의자를 끌지 않았다. 얇은 소매 안으로 양손을 겹친 채 다가가 앉았다. 창밖으로 아침 바람이 불 때마다 건물 앞 회랑의 푸른 덧장이 떨어질 것처럼 흔들렸다.
“부본은 내가 들고 있겠습니다.” 벨리시아가 말했다.
“이유는.”
“원본은 가장 안전한 금고에 있어야 한다고 판단하실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부본 한 장은, 계약 배우자가 보관하는 편이 황실 쪽 설명에 유리합니다.”
카르엘이 집무록에서 눈을 들었다. “황실 쪽 설명.”
“사절단은 원본 열람을 권한 문제로 미뤘을 뿐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부본이 제게 있다고 하면 그들은 원본부터 공격하지 못합니다. 심판관님이 저에게 부본을 남겨줬다는 것부터 설명해야 하니까요.”
“네 계획은 언제나 다음에 올 공세를 미리 세워두는군.”
“계약이 저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그런 것도 세우지 못할 겁니다.”
카르엘이 펜을 내려놓았다. 거리가 조금 줄었다. 검은 코트의 옷깃이 반들이 아니라 한 뼘 앞에서 기울었다.
“왼손 손등이 시리다. 네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벨리시아는 숨을 짧게 삼켰다. 소매 속 손이 달아나려는 것처럼 차가워졌지만 손가락을 풀지 않았다.
“그건 심판관님의 낡은 상처가 반응하는 것일 뿐입니다. 저는 설명할 근거가 없습니다.”
“근거가 없다고 해서 이유가 없는 건 아니다.”
“차도의 시간을 두어도 제 답은 같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카르엘은 다시 집무록을 집어 들었다. 왼손 손등을 표면에 문지르는 대신 펜을 고쳐 쥐었다. “벨리시아 아르덴.
집무록에 하나 기록하겠다. 너에게 증상을 물었고, 너는 답하지 않았다. 이 의심은 내가 검증한다.”
벨리시아는 가만히 앉아 카르엘의 옆모습을 보았다. 닿지도 않았는데 목덜미의 왼쪽이 뜨거워졌다가 식었다. 그가 써 내려가는 글자 소리가 방 안에서 유일하게 밝았다.
테오도르가 부본 작성이 끝난 종이를 바싹 말려서 벨리시아 쪽으로 밀었다. 벨리시아가 손을 내밀자, 테오도르는 반 박자 늦게 종이를 놓았다. 종이 모서리가 의자 팔걸이에 한 번 부딪혔다.
“이 부본은 봉인합니다.” 테오도르가 말했다.
카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봉인한 부본은 벨리시아 아르덴이 보관한다. 원본은 금고로 옮긴다.”
집무실 벽에 붙은 작은 제국 낭독용 촛대가 바람 한 점 없는 방 안에서 똑바로 타고 있었다. 카르엘이 금고 문을 여는 소리가 났다. 그가 공책을 밀어 넣고 무거운 문을 닫을 때, 벨리시아는 부본을 접어 소매 안쪽에 눌러 넣지 않고 손에 쥐었다. 지금은 감추는 것보다 보이는 편이 더 강했다.
“여기까지가 보고 지연을 해명할 자리가 아닌 것 같군요.”
문이 열리기 전에 목소리가 먼저 들어왔다. 오르시노가 집무실 밖에 서 있었다.
“들어오십시오.” 벨리시아가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심판관님이 집무록을 닫기 전이라 조용한 시간은 아닙니다.”
오르시노는 코트 단추를 풀지 않은 채 들어왔다. 황실 사절치고 지나치게 발뒤꿈치가 얇은 구두 소리를 냈다. 그는 테오도르를 흘겨보고 나서 탁자 앞에 섰다.
“정기 보고가 정해진 시각을 넘겼습니다. 황제께서 심판관의 보고 지연을 지적하셨습니다.” 오르시노가 가슴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것을 전달하라는 지시와 함께.”
벨리시아는 부본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팔을 내렸다. 오르시노가 노란 봉투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황제 친서의 인장이 얇은 밀랍 테두리를 남기고 눌려 있었다.
“단독 기소권을 회수합니다. 그리고 심판관과 아르덴 공녀의 계약 파기를 절차대로 청구하라는 소환장입니다.”
카르엘이 금고 앞에서 몸을 돌렸다. 얼굴은 평소와 같았다. 다만 오른쪽 어깨가 코트 아래로 아주 조금 낮게 떨어져 있었다.
“심판관님은 계약 당사자로서 먼저 이 부본을 보셔야 합니다.” 벨리시아가 오르시노와 카르엘 사이에 서며 말했다. “소환장보다 앞서 확보된 계약의 사본을요.”
오르시노가 황제 친서 위를 그대로 내려다봤다.
“그걸 지금 꺼내, 제 앞에 펼치지 마십시오. 그 행위 자체가 기소권 회수 절차에 대한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벨리시아는 아주 짧게 웃지 않았다. 실톱 모양 흉터가 있는 검지가 소매 밖에서 부본의 접힌 끝에 닿았다. 주저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엄지가 종이 귀를 훑었다.
“그렇다면 소환장의 수신인이 어디까지인지 확인하게 해주십시오.” 벨리시아가 말했다.
“심판관 카르엘 레벤하르트와 공녀 벨리시아 아르덴. 두 분 모두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이 자리에서 한 가지를 요청하겠습니다. 심판관님은 이 봉투에서 손을 떼십시오. 행정 절차의 대상이 된 분이 직접 밀랍을 뜯으면 귀관의 전달 기록이 불명확해집니다.”
오르시노의 시선이 벨리시아의 손에 멈췄다. 부본의 종이 귀가 그녀의 쥔 손아귀 위로 뾰족하게 나와 있었다.
“전령이 뜯기 전에, 수신인이 이의 신청서를 제출한다면 절차가 멈춥니다.” 벨리시아가 낮게 말했다.
“내용도 모른 채 말입니까.”
“소환장의 효력은 확인되지 않았고, 저는 이 집무실에서 계약 사본을 보관 중입니다. 증인도 있습니다.”
카르엘이 천천히 다가왔다. 벨리시아의 오른쪽에 멈추고 오르시노를 내려다봤다. “전달한 전령은 물러가라. 이의 신청은 공식 문서로 한다.”
“물러가라니요.” 오르시노가 봉투에 손을 올렸다. “보고 지연의 책임은 심판관실에 있고, 이 소환장은 지금 집행되어야 합니다.”
카르엘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집무록은 아직 열려 있다. 친서 수령 시각은 오늘이 아니다. 내일 아침 첫 보고에 기록한다.”
오르시노가 탁자 위로 몸을 약간 숙였다. 인장이 그의 손바닥 아래서 살짝 눌렸다.
“아침이면 단독 기소권 회수가 황실 공문으로 공표됩니다. 그전에 계약을 정리하십시오. 그래야 아르덴 가문도 남습니다.”
벨리시아는 부본을 드는 쪽 손이 목덜미까지 이어지는 긴장을 몰고 오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종이를 내려놓지 않았다.
“계약을 정리한다면, 심판관님이 저를 보호할 법적 근거도 사라집니다.” 벨리시아가 말했다. “황실이 정말로 가문을 남기려는 거라면, 계약을 먼저 무너뜨릴 이유가 보이지 않습니다.”
“황실은 공녀의 충심을 증명하라고 하는 겁니다.”
“그 충심은 제 시신으로 증명되었던 적이 한 번 있습니다. 이번에는 문서로 듣겠습니다.”
오르시노가 봉투를 들었다. 그는 벨리시아와 카르엘 앞에서 한 번 더 인장을 손등에 받치듯 올렸다.
“이것은 황제 폐하의 친서입니다. 그리고 저는 정기 보고 지연이라는 사유로 이 집무실까지 왔습니다. 이제 그 지연이 두 분을 관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