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공녀는 잊힌 신전의 마지막 사제와 계약 결혼한다
1화
“손대지 마.”
리에나의 목소리는 서고의 먼지를 가르며 낮게 깔렸다. 벨테인 저택 서고는 한밤의 냉기를 벽마다 서리처럼 끼워 두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 아래 가문 인장 보관함이 열려 있었고, 안쪽 칸마다 붉은 인장이 촘촘히 놓여 있었다.
카시우스가 인장 보관함 반대편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짙은 파란 눈이 촛불을 받아 차갑게 빛났다.
“그건 지금 내가 관리하는 물건이야, 누나.”
“관리라는 게 위조품을 섞어 두는 거라면.”
리에나는 보관함 가장 안쪽에서 검푸른 벨벳 주머니를 들어 올렸다. 그 안에서 무거운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주머니 끈을 풀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그 표면을 눌러 보았다. 홈이 깊게 파인 벨테인 인장의 문양이 천 너머로 잡혔다.
“하나만 있는 게 아니지.”
카시우스가 왼손 검지의 반지를 어루만졌다. 독약 반지. 그는 손끝으로 반지 안쪽을 한 번 돌리며 웃었다.
“그 주머니가 진짜라고 확신해?”
“네가 가짜를 먼저 만지게 하려는 덫이라면, 진짜는 반대쪽에 있어야 정상이지. 그런데 이 보관함은 가운데 칸만 열쇠 흔적이 덜해.”
리에나가 시선으로 보관함 중앙 칸을 가리켰다. 경첩 주변의 긁힘이 바깥쪽보다 옅었다. 카시우스의 표정이 반듯하게 굳어졌다.
“열쇠 없이 어떻게 열었지.”
“어머니가 남긴 서고 청소부의 수선 기록에 보관함 걸쇠 여는 법이 있어.”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만 그 기록은 수선법이 아니라 조제 기록 속 빈줄 사이에 눌려 적힌 것이었다. 리에나는 품을 한 번 짚었다.
손가락 끝에 접힌 종이 묶음이 닿았다. 어머니의 조제 기록. 서고에 오기 전 쪽방 바닥 아래에서 꺼낸 것이다.
카시우스가 손을 뻗었다.
“그거 내려놔.”
“내가 이 인장으로 뭘 하려는지 알아?”
“가문 복귀 청원권이지. 정식 혈통이라면 계승 인장과 신전 서약만 갖추면 된다는, 그 빌어먹을 왕국 계승법.”
리에나는 인장 주머니를 들고 보관함 앞에서 물러섰다. 카시우스는 그 움직임을 보며 작게 혀를 찼다. 그가 왼손 약지를 만졌다. 평소 끼는 반지들 사이, 독약 반지가 촛불에 번뜩였다.
“누나가 가져봤자 그건 쇳덩이야. 혼인 서약 없이는 아무 효력도 없어. 그리고 지금 누나한테 혼인을 허락할 집안이 어디 있지? 상가는커녕 아버지조차 없는 집 문턱에서 계약서 한 장 쓸 수는 없을 텐데.”
“그건 내가 정한다.”
리에나는 빛을 받아 인장 주머니를 품 깊숙이 넣었다. 어머니의 조제 기록이 그 위에 겹쳐 눌렸다.
카시우스가 촛대에 걸린 종 하나를 잡아당겼다. 서고 복도 쪽에서 쇠가 맞물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봉쇄를 걸었어. 가문 인장을 그냥 들고 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면 실수네.”
그의 목소리가 한층 낮게 가라앉았다.
“사람을 부르기 전에 돌려줘. 아버지가 아끼는 서고 유리창을 누가 깼는지까지 알려지기 싫으면.”
리에나는 서고 깊은 벽면으로 걸음을 옮겼다. 봉쇄는 복도뿐이다. 그리고 이 벽 뒤에는 어머니가 남긴 서가 이동 경로가 있다.
“네가 고른 인장이 진짜인 줄 알았냐.”
카시우스가 따라붙으며 말했다. 리에나는 벽의 촛대를 아래로 당겼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가 웃었다.
“그길도 봉인 지시는 내려간 지 오래야.”
리에나는 촛대 옆 벽돌의 균열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얕은 홈이 세로로 나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비스듬히 밀었다. 벽의 일부가 안쪽으로 꺼지며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날 만한 틈이 열렸다.
“이건 기록에 없던데.”
카시우스의 웃음이 사라졌다.
“저기로 가면 돼.”
리에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그 순간, 서고 밖에서 발소리가 났다. 경비대가 복도를 밟는 소리였다. 카시우스가 그쪽을 돌아보며 손을 들었다.
“여기야! 서고로…”
그의 외침이 채 끝나기 전에 리에나는 몸을 비틀어 틈새로 들어갔다. 손바닥이 벽의 안쪽 벽돌을 짚었다. 뒤에서 벽이 다시 닫히며 카시우스가 다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품을 눌렀다. 인장 주머니가 그대로였다. 어머니의 종이 묶음은 온기로 눅눅해져 있었다.
통로는 동굴처럼 습했다. 아래로 난 계단은 오래전 막혔다가 누가 뚫어 둔 듯 흙냄새가 났다. 리에나는 어깨 너비 두 배쯤 되는 좁은 길을 팔을 뻗어 가며 내려갔다.
앞쪽에서 바람이 불었다. 신전 쪽 지하실로 이어진다는 말을 어머니가 숨 넘어가는 목소리로 하던 기억이 겹쳤다. 정확한 것은 이제 발밑의 바람뿐이었다.
한참을 걸었을까. 통로가 끝나고, 무너진 돌계단 위로 올라서자 잊힌 테미르 신전의 성소가 어둠 속에 드러났다.
넓은 돌바닥은 반쯤 무너진 기둥 그림자를 덮고 있었다. 중앙 제단은 먼지만 하얗게 앉았고, 벽의 신전 문양은 금박이 벗겨진 채였다. 그리고 제단 옆에 그가 서 있었다.
검은 사제복. 은색 신관 휘장. 뒤로 넘긴 검은 머리 아래로 옅은 금색 눈이 어둠을 밝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드리스 레반.
그는 리에나를 보자마자 눈을 가늘게 떴다.
“벨테인.”
“신관님이 여기 계실 줄은 몰랐네요.”
“공녀가 이 신전에 올 사람이 아니에요.”
가문의 몰락 이후 이곳에 남은 마지막 신관에게서 나온 말치고는 담담했다. 그는 손에 든 촛대를 들어 올리지도 않고 리에나의 옷자락을 훑었다. 그 욕망 없는 시선이 오래 머문 곳은 그녀의 품이었다.
“가문 인장을 지녔군요.”
“알아보시는 이유가 있나요.”
“인장 봉인의 잔향이 남아 있어서요. 서고에서부터 따라왔을 테지만, 인장을 품에 넣은 건 여기 들어오기 전이네요.”
리에나는 숨을 멈추지 않기 위해 애썼다. 이드리스는 그녀의 말을 자르지 않고 기다렸다.
“신전 서약이 필요합니다.”
“무엇을 위한.”
“벨테인 가문 복귀 청원이에요.”
그녀가 직접 말했다. 이드리스는 성소의 어둠 속에서 낡은 장갑을 벗지 않은 채 제단 쪽으로 걸어갔다. 검은 천이 움직일 때마다 마른 공기가 스쳤다.
“정식 혈통의 혼인 서약을 원하는 거군요.”
“빨리 알아들으셔서 좋네요.”
“그 서약은 신전 증표와 서약서, 그리고 집행할 사제가 필요해요.”
“지금 이 신전에 사제는 한 분이잖아요.”
이드리스가 멈춰 서서 돌아보았다. 빛 없는 눈이었지만 그 안에 불꽃 같은 것이 어렸다.
“왜 저예요.”
“살아 있는 테미르 신관이 당신뿐이니까요.”
“아니요.”
그가 제단 앞에서 낮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인간이 저라서가 아니고, 공녀가 지금 여기서 제가 집행할 서약을 원하는 이유를 묻는 거예요.”
리에나는 품속의 종이 묶음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팔꿈치로 눌렀다. 숨이 차올라 그녀는 한 박자를 삼켰다.
“가문 복귀권을 행사하려면 신전 서약이 있어야 해요. 그리고 저를 받아 줄 귀족은 없고, 제안할 시간도 없어요.”
“계약 결혼을 하자는 말이군요.”
“네.”
그녀는 제단 쪽으로 세 걸음 걸어갔다. 그가 팔을 올려 거리를 가늠했다.
“계약 조건을 먼저 확인하겠어요.”
“가문 복귀 청원이 목적이니까, 목적이 달성되면 합의 해지로 서약을 끝내는 조건이면 됩니다. 배우자 간 의무는 최소한으로요.”
이드리스가 눈을 내리깔았다.
“저는 죽은 신전을 지키려고 남은 사람이에요.”
그는 고쳐 말했다.
“속죄를 위해요. 제 집행으로 성립되는 서약이 공녀에게서 무엇을 빼앗을지 알 수 없어요.”
“빼앗길 게 없어요.”
리에나가 말했다.
“이미 버려진 거나 다름없으니까.”
이드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손끝이 제단의 먼지를 쓸었다. 긴 검은 장갑 위로 먼지가 줄을 그었다.
“서약은 진심이 있어야 축복이 서요. 가문 복귀만을 위한 거짓엔 아무 힘도 생기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법적 효력은 있는 거죠?”
그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서약해요. 진심이 없어도 되는 건 결혼이고, 있으면 되는 건 축복이잖아요.”
이드리스의 금안이 천천히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그는 제단 뒤의 나무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서 서약서와 신전 증표를 꺼냈다. 증표는 신전 문양이 새겨진 얇은 금속판이었다.
“조건을 기록할게요. 목적 달성 시 합의 해지. 배우자 의무는 상호 동의 범위. 재산 요구 없음. 이 정도가 공녀가 원하는 최소 조건인가요.”
“네.”
“계약은 양쪽 서명과 핏자국으로 성립돼요. 공녀가 원한다면 되돌릴 수 없어요.”
“원해요.”
이드리스가 서약서를 제단 위에 펼쳤다. 그는 손가락으로 서약 문구를 짚으며 짧게 읊조렸다. 낡은 테미르 어가 성소의 공기를 미세하게 울렸다.
“손을.”
리에나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이드리스는 자신의 장갑을 입으로 물어 벗겨 냈다. 그가 품에서 가는 의식용 단검을 꺼냈다. 손끝은 절제되어 있었지만 칼날이 리에나의 검지에 닿을 때 그녀의 손목이 살짝 떨렸다.
이드리스가 그녀의 손가락에서 나온 피를 서약서에 찍었다. 이어 자신의 손끝을 단검에 대고 피를 내어 나란히 찍었다. 리에나는 피가 스민 자리에서 칼날보다 뜨거운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서약을 집행합니다.”
그의 말투가 이 순간에만 격식 존대로 바뀌었다.
“테미르의 잊힌 이름 아래, 두 사람의 서약을 받아들이소서.”
제단이 희미하게 밝아왔다. 먼지 낀 신전 문양에 옅은 빛이 번졌다. 신전의 무너진 기둥들 위로 어둠이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숨어 있던 빛이 스미는 것처럼 보였다.
리에나의 오른쪽 쇄골 아래가 따끔했다. 그녀는 옷섶을 조금 당겨 확인했다. 피부에 은빛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수호 축복. 서약이 성립하면서 각인되는 신전의 흔적이었다.
이드리스가 그 문양을 보지 않으려는 듯 눈을 돌렸다. 그의 손은 이미 장갑을 다시 끼우고 있었다.
“서약서 원본은 제가 보관할게요. 증표도 신전 절차상 제게 있어야 해요.”
“빛이 밖으로 샜어요.”
리에나는 제단 밖을 보지 않고 말했다. 신전 입구 쪽의 어둠이 밀려들었다. 발소리도 없이 그림자 하나가 성소의 문턱을 넘고 있었다.
“누나가 이딴 폐허에서 혼인 서약을 다 하다니.”
카시우스였다. 화려한 금발에 푸른 눈, 손에는 검이 아닌 촛대를 들고 있었다. 그는 이드리스와 리에나 사이를 번갈아 보며 웃었다.
“아버지가 알면 기겁하시겠네. 계승 인장을 훔쳐 가서 망한 신전 사제한테 계약 결혼이라니.”
“훔친 게 아니야.”
리에나가 말했다. 카시우스는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그걸 증명할 수 있나? 계승 인장은 내 관리 아래 있었고, 누나는 봉쇄된 서고에서 유리창도 안 깨고 나간 도둑이야.”
“따라온 이유부터 말해.”
이드리스가 그녀 앞에 반쯤 섰다. 카시우스가 그 움직임에 눈썹을 올렸다.
“신관께서 말씀을 좀 섞으시네. 뭐, 간단해. 그 서약은 무효가 될 거야. 테미르 신전의 마지막 사제가 집행한 결혼이 법적 효력이 있다는 건 알아. 하지만 이 집행자가 가문 몰락에 얽힌 집안 출신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이드리스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카시우스가 비웃음을 삼키며 손을 내밀었다.
“서약서 원본을 넘겨. 그게 누나를 구속해.”
“서약은 완료됐어요. 원본을 넘길 이유는 없어요.”
“무효 심리를 열면 제일 먼저 제출할 게 그 원본이야. 미리 보관해 주면 좋잖아?”
카시우스가 손바닥을 뒤집어 보였다. 이드리스가 답하기 전에 리에나가 그 앞으로 나섰다.
“네가 원본을 가져갈 일은 없어.”
그녀의 말에 카시우스의 눈이 좁아졌다.
“그럼 나는 여기서 반대 심리를 준비하면 되는 거네.”
그가 반지 낀 왼손 검지를 천천히 들었다.
“누나, 어머니가 남긴 그 종이 뭉치. 그거 품에 넣고 온 것도 나는 알아.”
리에나는 표정을 끌어올렸다. 카시우스가 서약서 원본이 든 제단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드리스가 팔을 뻗어 제단 위의 서약서를 거둬 품 안에 넣었다.
“그 손, 위험해요.”
이드리스가 조용히 말했다. 카시우스가 씩 웃었다.
“신관님이 뭘 안다고.”
“독약 반지라는 것 정도는.”
카시우스의 웃음이 반쯤 굳었다.
“원본은 내가 지킵니다.”
이드리스가 리에나를 제단에서 뒤로 물러서게 하며 말했다.
“공녀, 저와 조금 더 뒤로.”
카시우스가 촛대를 옆 기둥에 부딪쳤다. 쇠 소리가 성소를 울렸다.
“그 보호가 언제까지 갈지 보자고.”
세 사람은 잊힌 테미르 신전의 입구, 마지막 성소 빛이 꺼져 가는 문턱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이드리스의 품속에 서약서 원본이 있었다. 리에나의 품속에는 가문 인장과 어머니의 기록이 있었다. 그리고 카시우스의 손끝에는 독약 반지가 신전 안으로 들어온 바람을 타고 어둡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