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버려진 공녀는 잊힌 신전의 마지막 사제와 계약 결혼한다

2화

신전 입구의 공기는 새벽의 차가운 돌내를 머금고 있었다. 이드리스가 한 걸음 더 나아갔고, 카시우스의 손이 촛대를 감싸 쥔 채 멈췄다.

“그 손, 제단에서 치워요.”

카시우스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신관님은 남의 손부터 잡으시네.”

“서약서는 이미 봉인됐어요. 무효 심리를 열어도 제출 순서는 귀족회가 정해요.”

“그 원본을 누가 들고 가느냐가 문제지.”

카시우스의 검지가 촛대 기둥을 한 번 훑었다. 이드리스가 그 앞을 따라 움직였다. 리에나는 두 사람 사이로 난 틈을 보며 품 안을 짚었다. 인장의 눌림은 그대로였고, 기록 뭉치 끝이 접혀 옷 안쪽에 닿아 있었다.

“누나.”

카시우스가 그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거, 꺼내 보여 봐. 어머니 물건은 가문 서류로 돌아가야지.”

“네가 가문 서류를 운운할 자리야?”

리에나의 목덜미가 바짝 조였다. 카시우스의 눈빛이 그 아래로 내려가는 것 같아 어깨를 세웠다.

“나는 벨테인의 후계자야. 누나는 가문에서 내쳐졌고.”

“후계자는 인장과 서약이 있어야 성립해. 네겐 지금 어느 것도 없어.”

카시우스의 웃음이 반쯤 걷혔다. 손가락이 촛대를 놓고 반지 쪽으로 가려다가 이드리스의 움직임에 멎었다. 신관이 리에나 앞을 완전히 가로섰다.

“공녀.”

이드리스가 품에서 서약서 원본을 꺼내 리에나에게 내밀었다. 말린 양피지에 핏자국이 눌어붙은 가장자리가 촛불을 받아 거뭇하게 보였다.

“잡고 있어요.”

“뭐 하는 짓이야?”

카시우스가 반 걸음 다가왔다. 이드리스가 다른 손을 들어 제지했다.

“원본은 공녀가 이미 계약 당사자예요. 심리장에 가져갈 사람을 정할 권리는 공녀에게 있어요.”

“그 권리는 가문이 정한다고.”

“귀족회에 직접 제출하겠다면 막을 수 없어요.”

카시우스는 낮게 숨을 내뱉고 코트 자락을 탁 쳤다. 리에나가 원본을 받아 품 안쪽, 기록 뭉치와 인장 사이에 세로로 밀어 넣었다.

“귀족회 소집을 요구할게요. 카시우스, 네가 그 자리에서 그따위 제보를 꺼낼 자신이 있으면 해.”

“계속 그래 봐.”

카시우스가 문턱을 돌아섰다. 등을 먼저 보이며 신전 밖 흐린 새벽 속으로 걸어가다가, 입구의 부서진 기둥 옆에서 멈췄다.

“심리장에서 봐요, 신관님. 그때는 가문의 기록을 정식으로 증거로 낼 테니.”

발소리가 신전 돌계단을 따라 멀어졌다. 바람이 한 번 들이쳤다. 리에나는 서약서를 품에 대고 손바닥의 온기를 눌렀다.

“저도 갑니다.”

이드리스가 제단을 마지막으로 훑었다. 촛대 하나가 아직 타고 있었다. 그가 불을 끄기 직전, 리에나가 말했다.

“귀족회에 먼저 갈게요. 헤이즐을 만나야 해요.”

“헤이즐?”

“내 시녀. 서고를 나올 때 떨어졌어요.”

이드리스는 잠시 그녀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전 밖은 새벽빛이 돌바닥에 엷게 깔리고 있었다.

“심리장 입구에서 다시 보죠.”

귀족회 회의장은 오전의 빛이 높은 창을 통해 길게 떨어졌다. 리에나가 들어섰을 때 카시우스는 이미 상석 반대편 귀빈석에 앉아 있었다. 알릭 벨테인이 그보다 한 단 아래쪽 자리에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리에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턱을 당기고 서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헤이즐이 방청석 끝에서 일어나 손을 작게 흔들었다. 리에나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몸은 어때?”

“괜찮아. 서고 잠긴 뒤에 뒤꼍으로 돌아갔어. 밤새 여기서 대기했어.”

헤이즐의 손이 리에나의 소매를 한 번 훑었다가 떨어졌다.

“회의가 오늘 걸린다길래.”

리에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드리스가 회의장 문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왔다. 귀족회 서기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집 사유를 읽었다.

“벨테인 공작가의 계승 서약과 관련하여, 테미르 신전 사제 이드리스 레반이 집행한 혼인 서약의 효력을 심사한다.”

카시우스가 곧바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신관님, 말씀드려도 될까요.”

“하십시오.”

“이 혼인 서약은 처음부터 사제 자격이 문제였어요. 테미르 신전 몰락에 레반 가문이 관계됐다는 제보를 귀족회가 확인만 하면, 집행 자체가 성립되지 않아요.”

그는 손가락으로 자릴 두 번 두드렸다.

“가문 인장은 둘째 문제고.”

리에나는 입술을 닫은 채 이드리스의 뒤통수를 보았다. 이드리스는 서기에게 몸을 돌렸다.

“제 사제 권한은 신전 폐쇄 이후에도 박탈된 기록이 없어요.”

“기록이 없어서 문제지. 신전이 무너진 날 밤, 레반 가문 사람들이 증빙을 챙겨서 나갔거든요.”

카시우스의 얼굴이 반만 돋을새김 속에 있었다. 알릭이 인상을 썼다.

“그 제보는 어디서 나왔나.”

“가주님도 알고 계셨던 일 아닙니까. 시중의 소문이 아니라 저택 장부에 남은 기록이에요.”

카시우스가 서기에게 종이 뭉치를 건넸다. 낡은 표지에 벨테인 저택 도장이 찍혀 있었다. 리에나는 숨을 들이켰다. 저택 서고에서 본 적 없는 서류였지만 장부 번호가 어머니 기록을 묶어 두던 것과 같은 해였다.

“이건 서고 장부의 이동 기록입니다. 레반 가문이 신전 물품을 옮긴 날짜와 무게가 나와요.”

“그런 기록을 지금 왜 꺼내나.”

알릭이 무겁게 물었다. 카시우스는 낮게 웃었다.

“가문의 명예를 지키려는 겁니다. 무효라면 무효대로 빨리 정리해야지.”

리에나는 카시우스가 내민 서류를 보는 대신 알릭을 똑바로 올려다봤다.

“가주께서는 이 서류를 보셨습니까.”

“리에나.”

알릭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는 말끝을 잘랐다. 창문 쪽으로 눈이 갔다. 그는 아무 말도 잇지 않았다.

회의장의 사람들이 숙였다. 서기가 조용히 기록을 썼다. 리에나는 등의 근육이 쓸쓸히 당기는 걸 느꼈다.

“귀족회는 가문 장부가 사적 기록이라는 이유로 증거 채택을 보류하고, 양측의 원본 대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서기석의 진행관이 절차를 알렸다. 이드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서기에게 다가갔다. 그가 품에서 꺼낸 것은 신전 증표뿐이었다.

“서약서 원본은 공녀가 갖고 있습니다.”

리에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품 안에서 원본을 꺼냈다. 서기가 두 팔을 내밀어 받았다. 그는 원본을 펴 램프 불빛 아래 비추고 핏자국 서명과 증표를 번갈아 대조했다.

“신전 증표와 서명 모두 일치합니다. 계약 성립 절차에는 흠이 없습니다.”

카시우스가 손을 들었다.

“절차는 그런가 보네요. 그러면 수호 축복을 보여 보세요. 성립과 동시에 배우자에게 축복이 내려졌다면, 이 자리에서 증명이 쉽잖아요?”

“축복은 진심에 비례해 발현합니다.”

이드리스가 담담히 답했다.

“계약 이행만으로는, 공개 자리에서 형태가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럼 계약 자체는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네요.”

“아닙니다. 법적 효력은 절차에 따라 성립해요. 축복 발현은 그 다음 문제예요.”

카시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장 중앙으로 한 걸음 나왔다.

“그 말을 증명할 유일한 방법이 뭔지 아세요. 심판석 앞에서 다시 서약을 보이는 거예요. 내일 공개 증명으로 결정합시다.”

그가 특석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그때 축복이 드러나지 않으면, 레반 신관님의 집행은 보호가 아니라 신전 사칭으로 보일 테니까.”

알릭이 눈을 감았다 떴다. 리에나는 이드리스에게 다가가 낮게 말했다.

“일어날 수 있어요?”

“시도는 해요.”

이드리스가 그녀의 팔을 감싸지 않은 채 바로 옆에 섰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그렇게 할 일은 아니에요. 축복이 드러나지 않아도 원본 절차는 이미 유효해요.”

“그래도 저들은 내일을 무효의 날로 쓰겠네요.”

“내일 증명이 열리면 그때 막으면 돼요.”

서기가 두 사람의 대화를 정리하듯 문서를 거두었다. 서약서 원본과 신전 증표를 별도 서랍에 넣고 봉인 천을 덮었다.

“공개 축복 증명은 다음 날 오전, 귀족회 심판석에서 엽니다. 그 전까지 서약서 원본과 증표는 귀족회 서기가 보관합니다.”

카시우스가 고개를 약간 숙여 방청석을 향해 웃었다. 리에나는 헤이즐이 일어서지 않는 걸 확인했다. 헤이즐은 두 손으로 무릎을 감싼 채 회의장 뒤편의 부서진 문살을 보고 있었다.

회의가 끝난 뒤, 알릭이 리에나 쪽으로 걸어오다가 입구의 보좌관에게 불려 멈췄다. 리에나는 그 멈춘 거리를 보다가 몸을 돌렸다. 이드리스가 한 발 옆으로 비켜 서 있으며 복도 쪽을 턱짓했다.

“이동 경로를 바꿔요. 카시우스가 먼저 나갔어요.”

“알아요.”

리에나는 복도로 들어섰다. 등과 어깨가 함께 긴장하는 것이 그녀에게도 느껴졌다. 헤이즐이 몇 걸음 뒤에서 따라왔다. 세 사람은 귀족회 회의장의 회색 복도를 지나 낮은 장외 계단으로 나갔다.

휴정 종이 울리자 사람들이 회의장 문으로 몰려나갔다. 리에나는 복도 벽 쪽으로 비껴 서서 손끝의 피 자국을 문질렀다. 서약서를 서기에게 넘길 때까지도 남아 있던 열이 식는 중이었다.

“여기까지 왔네.”

헤이즐이 옆에 붙어 물끄러미 복도 끝을 봤다. 리에나의 팔꿈치를 살짝 끌어 벽 쪽으로 붙였다.

“회의장 들어가기 전에, 공녀님.”

헤이즐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 눈이 복도 반대편 기둥을 스치고 돌아왔다.

“카시우스 쪽 수행원이 문서함을 들고 다녀요. 이드리스 신관님 집안 것 같다는 얘기가 벌써 돌아요.”

“봤어?”

“멀리서요. 정확히는 못 봤어요.”

헤이즐이 약초 가방 끈을 만졌다. 손가락이 끈을 두 번 감았다 풀었다.

“공녀님한테 함정일 수도 있어요. 괜히 제가 나서서 말하면 신분이 안 맞으니까, 이것만.”

리에나가 헤이즐의 손목을 짧게 잡았다.

“고마워.”

“들어가면 저는 뒤에 있을게요. 부르면 바로 가요.”

헤이즐이 손목을 빼서 앞치마를 고쳐 묶었다. 복도로 바람이 밀려 들어와 회의장 문을 두어 번 부딪쳤다.

회의장 안은 휴정 전보다 조용했다. 귀족들이 자리로 돌아왔고, 서기 한 명이 서약서 원본과 신전 증표를 담은 검은 함을 자기 앞에 두었다. 알릭 벨테인이 중앙석에서 손을 모은 채 앉아 있었다. 리에나가 들어서는 것을 보았는지 시선은 탁자 모서리에 머물렀다.

카시우스가 벽 쪽에서 걸어와 알릭 옆에 섰다.

“속개하지요. 이제 남은 건 두 가지입니다.”

그가 회의장을 둘러봤다.

“첫째, 벨테인 인장의 효력을 확인할 수 있는 분의 증언. 둘째, 집행자 이드리스 레반에게 그 자격이 있는지.”

서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릭 벨테인 공작께 여쭙니다. 저 함 안에 없는 가문 인장에 대해, 공작가의 현 수장으로서 아실 것 아닙니까.”

회의장의 소리가 빠졌다. 알릭이 손가락을 한 번 폈다 쥐었다.

“가문 인장은 오래전에 관리에서 손을 뗐습니다. 내가 지금 증언할 것은 없습니다.”

리에나가 알릭을 똑바로 보았다. 그는 그녀의 시선을 받지 않았다.

“공작께서 모르신다는 겁니까. 가짜와 진짜를 구분할 수단도.”

카시우스가 부드럽게 거들었다.

“아버님은 가문 명예가 우선이십니다. 확인할 수 없는 자리에서 함부로 입을 여는 걸 경계하시는 거죠.”

알릭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리에나의 입술이 마르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가만히 섰다.

“말씀 없으시면 이 증언은 없는 것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진행관이 기록을 두드렸다.

리에나가 반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인장은 제가 직접 서고에서 꺼냈습니다. 진짜 여부를 판별할 절차가 따로 있지 않습니까.”

카시우스가 침착하게 웃었다.

“절차는 신전 서약과 함께일 때만 효력이 있지. 누가 봐도 그건 쇳덩이잖아, 누나.”

그가 이드리스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서약을 집행한 분이 레반 가문 사람이라면, 벨테인 공작가의 계승을 승인해 줄 수 있다고 인정할 명분이 없어요.”

이드리스는 회의장 왼쪽에 서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카시우스를 봤다.

“레반 가문이 테미르 신전 재산을 두고 무슨 일을 했는지, 그 옛 문서가 곧 나올 겁니다.”

카시우스가 손을 가슴께에 얹었다.

“그 전에 공개 축복 증명이 먼저예요. 내일, 이 자리에서.”

서기가 각서를 집어 들었다. 검은 함 위에 도장이 찍히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카시우스가 리에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는 회의장 구석까지 닿았다.

“명심해요. 내일 공개 증명에서 수호 축복이 드러나지 않으면 결혼 서약은 무효가 됩니다. 이드리스 신관님 사제 자격도 박탈될 거고, 누나의 복귀 청원은 기각이에요.”

그가 검은 함을 한 번 내려다봤다.

“누나가 미리 받아 둔 것은 없어요. 내일 이 자리에서 다 드러나겠죠.”

리에나는 답하지 않았다. 서기가 각서를 닫는 소리만 회의장에 남았다.

버려진 공녀는 잊힌 신전의 마지막 사제와 계약 결혼한다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