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버려진 공녀는 잊힌 신전의 마지막 사제와 계약 결혼한다

4화

가문 회의에서 이 기록을 꺼내면 알릭은 물러설 수 없을 것이다. 리에나는 차창 밖으로 지나치는 벨테인 저택의 회색 담을 보며 그렇게 판단했다. 오전의 햇빛이 마차 천장 틈으로 한 줄기씩 내려앉았다. 그녀의 무릎 위에는 접힌 어머니 조제 기록이, 품 안에는 서약서 원본이 있었다.

“표정이 너무 굳었어요.”

헤이즐이 맞은편에서 작게 말했다. 손에는 약초 가방을 꼭 쥐고 있었다.

“오늘은 웃어야 할 자리가 아니야.”

“그래도…… 가기 전에 한 번만 웃어요. 저 같은 시녀가 드릴 말은 아니지만, 굳은 얼굴로 들어가면 그쪽이 먼저 기를 펴요.”

리에나가 입꼬리를 아주 짧게 올렸다가 멈췄다. 마차가 저택 정문 앞 바닥에 멈추자 이드리스가 먼저 내려 손을 내밀었다. 검은 장갑 끝이 낡아 있었지만 손은 흔들리지 않았다.

“서약서는 품속이죠.”

“요. 서류는 제가 직접 들게요.”

이드리스는 더 묻지 않고 뒤로 반 걸음 물러섰다. 리에나가 먼저 걸었다. 문장의 방으로 향하는 복도 바닥은 아침부터 광을 낸 듯 윤이 났고, 창틀마다 벨테인 푸른 금장 휘장이 묶여 있었다. 저택은 어제와 똑같이 고요했다. 그 고요가 오늘은 더 깊게 가슴을 눌렀다.

문장의 방 문이 열려 있었다. 카시우스가 알릭 옆에 서 있었고, 긴 탁자에는 서류 두 묶음이 놓여 있었다. 알릭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리에나가 들어서는 것을 보았는지, 시선은 여전히 탁자 아래 손에 머물렀다.

“회의를 시작하지요.”

카시우스가 말했다. 예의는 있었지만 리에나가 자리에 닿기도 전에 서류 쪽으로 손을 뻗었다.

“누이의 가문 복귀 청원 건은 오늘로 기각한다. 동시에, 누이가 불법적으로 반출한 벨테인 가문의 인장을 가문에 반납할 것을 명한다.”

리에나는 앉으며 천천히 장갑을 벗었다. 손끝이 차가웠지만 목소리는 반듯하게 가라앉혔다.

“이 자리는 가문 회의예요. 기각을 말씀하시려면 그 근거를 먼저 제출하셔야 해요.”

“여기 있다.”

카시우스가 첫 번째 서류를 폈다. 복귀 무효 확인서와, 하단에 벨테인 가문 인장 대용 필적이 찍혀 있었다.

“혼인 증표가 있다 해도, 인장을 서고 밖으로 옮긴 행위는 서고 봉인 절차를 위반한 재산 침해야. 이 확인서는 복귀 청원 이전에 그 권리가 소멸했음을 명시한다. 아버님께서 확인해 주셨지요.”

알릭이 손을 한 번 폈다 쥐었다. 리에나가 그를 똑바로 보았다.

“아버지. 이 문서 한 장으로 제 청원을 기각하실 건가요?”

알릭은 대답하지 않았다. 카시우스가 대신 웃었다.

“아버님이 말씀 안 하셔도, 가문 인장부터 반납하는 게 순서라는 것쯤은 누이도 알지.”

리에나가 품에서 어머니 기록을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종이 모서리가 닳아 있었지만 필적은 선명했다.

“그럼 이건 어디에 둬야 할지, 먼저 밝혀 주세요.”

카시우스의 눈이 종이 위에서 잠깐 멈췄다.

“그게 뭐지.”

“어머니가 남기신 조제 기록이에요.”

“약재 목록이 인장 반납과 무슨 상관이지?”

리에나는 기록의 맨 아래 두 줄을 짚었다. 손끝이 조금 떨렸지만 종이는 눌리지 않게 했다.

“수선화 뿌리와 사리풀. 이 두 가지를 함께 쓰면 벨라돈나 계열 독약에 반응해서 잿빛으로 변해요. 치료 성분이 아니라, 독약을 추적하는 방식이에요.”

카시우스가 팔짱을 풀었다.

“그게 어머니 기록이라는 증거가 있나.”

“이 필적을 벨테인 가문 회의록의 어머니 결재 기록과 대조하면 돼요. 그리고 이 조합이 단순 처방이 아니란 건, 가문 약제실의 조제 장부와도 교차할 수 있어요.”

리에나가 이드리스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이 기록은 치료 기록이 아니에요. 누군가 독약을 조제하는지 감시하려고 남기신 물증 구조예요. 어머니가 왜 이런 기록을 남기셨는지, 이 회의에서 법적 근거로 삼지 않고 치워야 할지 따져 주세요.”

카시우스의 턱선이 한 번 굳었다. 그러나 웃음은 바로 돌아왔다.

“누이가 제정신인지 모르겠군. 죽은 분 기록을 들고 와서 가문 회의를 무당판으로 만들 셈이야?”

리에나가 천천히 그를 보았다.

“오라버니.”

목소리에 존칭이 실렸다.

“어머니가 남기신 이 기록이, 오라버니께 그렇게 부담스러우신가요?”

카시우스가 서류를 탁자에 탁 내려놓았다.

“아버님, 보셨지요? 누이가 이제 집안 회의를 모독하고 있습니다.”

알릭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아내의 기록을 보려는 듯 시선이 움직였으나, 종이에 닿기 전에 다시 떨어졌다.

“회의다. 감정을 섞지 마라.”

리에나가 일어나 기록을 탁자 중앙으로 밀었다.

“회의니까 여쭙는 거예요. 어머니 기록을 감시 물증으로 다루면, 그 감시 대상이 가문 안에 있었다는 뜻이에요. 그게 누구인지 이 자리에서 가리지 않고 기각부터 하시렵니까.”

카시우스가 알릭 앞으로 반 걸음 나섰다.

“아버님, 이딴 문서를 회의록에 첨부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누이는 가문 인장을 빼돌리고도 이 자리를 음모론으로 덮으려는 겁니다.”

리에나는 서 있던 자리에서 헤이즐을 보았다. 헤이즐은 한 번 숨을 깊게 들이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어……”

목소리가 갈라졌다. 헤이즐은 앞치마 주름을 힘껏 쥐고 한 걸음 나섰다.

“발언을…… 청해도 될지 여쭙니다.”

카시우스가 웃지 않고 내려다봤다.

“시녀가 무슨 자격으로.”

“기록의 조합이 어디에 쓰였는지, 그걸 확인해 보신 분이라면 자격이 있겠지요.”

리에나가 말했다. 알릭의 손이 멈췄다.

“물어봐야겠군.”

알릭이 헤이즐에게 말했다. 헤이즐은 고개를 조금 들었다.

“마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 저는 별관 약제실 근처에서 카시우스 대공자님의 심부름꾼을 봤습니다.”

카시우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알릭이 손을 들어 올렸다.

“멈춰라. 시녀의 말을 회의에……”

“전 여기서 진술할게요.”

헤이즐이 떨리는 목소리로 잘랐다. 예의 없이 나온 말에 방 안의 공기가 순간 멎었다.

“심부름꾼은 밤에 약제실 문을 닫고, 왼손에 작은 통을 들고 있었어요. 저는 그냥 지나갔는데, 그분이 저를 보더니 등을 돌려 숨기는 것 같았어요. 전 마님 시중만 들던 터라, 약제실에 발을 들이지도 않았고요.”

“왜 그때 그걸 말하지 않았지.”

알릭이 물었다. 헤이즐은 잠시 숨을 골랐다.

“시녀 하나가 대공자님을 두고 하는 말을, 그때 누가 들어주었겠습니까.”

카시우스가 낮게 웃었다.

“역겹군. 죽은 사람 약제실 이야기를 이제 와서.”

리에나가 즉시 그 앞에 섰다. 카시우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튀었다.

“오라버니가 시키지 않은 일이라면, 그날 밤 심부름꾼이 별관에 갔는지만 확인하면 돼요. 지금 화내실 일이 아니에요.”

“누이 무슨 말을.”

“회의록에 남기시는 편이 안전하실 거란 말이에요.”

카시우스의 왼손이 반쯤 접힌 서류 위에서 멈췄다. 반지 낀 손가락이 서류 모서리를 참고 견디는 듯 눌렀다.

알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팡이를 짚지 않은 손으로 탁자 끝을 한 번 두드렸다.

“증언은 회의록에 남긴다. 다만 시녀의 신분을 감안해 기록관에게 별도 확인을 시키겠다.”

그가 리에나 쪽은 보지 않고 말했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다.”

“잠깐요, 아버지.”

리에나가 서류 한 면을 눌렀다. 알릭은 출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 멈췄다. 등을 보인 채였다.

“어머니 기록은 회의록에 첨부해 주세요. 그래야 헤이즐의 증언이 근거 없는 발언이 아니게 돼요.”

잠시 뒤 알릭이 말했다.

“가문 금고에 모친의 결재 기록이 있었지. 대조는 네가 해라.”

그 말을 남기고 알릭은 문장의 방을 나갔다. 출입구 바깥으로 휘장이 살짝 흔들렸다. 카시우스는 한 번 헛웃음을 뱉고 서류를 챙겼다.

“잘해 봐라. 이것들이 모이면 도리어 누이한테 묻을 일이 많아질 테니까.”

그는 리에나의 눈을 마주 보지 않고 방을 나갔다.

이드리스가 서가 쪽으로 걸어갔다. 방 안 책장 한 칸이 반쯤 열려 있었고, 봉인은 헐거웠다. 그는 안쪽 검은 문서함을 열어 등본 하나를 꺼냈다. 표지에 테미르 서약 증인의 이름이 등 위로 눕혀 적혀 있었다.

“이건.”

리에나가 옆에서 문서를 받아 보았다.

“같은 방 서가에 봉인되지 않은 채 있었어요. 가문 회의용으로 넘어온 신전 서약 등본이라, 열람 자격은 저한테 있습니다.”

이드리스가 페이지 한가운데를 짚었다.

“마지막 거래 증인 기록에, 증인이 왼손 장갑을 벗지 않았다는 관찰이 있습니다. 증인 신원은 가려져 있지만, 약제 거래 서약 때 서명은 오른손으로 했다고 남아 있군요.”

“왼손 장갑.”

리에나가 카시우스가 나간 문을 보았다. 이드리스는 문서를 조심히 접어 리에나에게 건넸다.

“반지와 연결 지어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이 등본은 오늘 헤이즐의 증언과 묶어 귀족회 제출용으로 봉인하는 게 낫습니다.”

밖에서 마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리에나는 등본을 받아 어머니 기록과 나란히 자신 앞에 놓았다.

“카시우스가 마지막에 남긴 소환장은 어떻게 할 거요.”

이드리스가 탁자 위 남겨진 서류를 가리켰다. 리에나는 겉장을 펼쳤다. 대심의장 소환장이었다. 인장 반납과 혼인 서약 무효 확인을 위한 공개 소환이라는 문구가 찍혀 있었다.

“이걸 남기고 나갔네요.”

“압박용입니다. 오늘 회의를 통해 카시우스는 자기쪽 위조 서류가 곤란해지면 공개 회의로 밀어서 결판을 보려는 거예요.”

리에나가 소환장을 반으로 접어 이드리스에게 내밀었다.

“접수해 두세요. 이건 반격의 순서로 끌고 갈 수 있어요.”

이드리스가 소환장 사본을 받아 등본과 함께 접었다.

“원본은 귀족회 서기 보관분과 대조하죠. 사본은 제가 갖고 있겠습니다.”

리에나는 어머니 기록을 다시 품에 넣었다. 쇄골 아래 문양이 옷 안에서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채 피부에 붙어 있었다. 그 위로 서약서 원본 모서리가 닿았다.

“가문 금고.”

헤이즐이 낮게 되뇌었다. 리에나가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굳은 얼굴로 약초 가방을 고쳐 멨다.

“공작님께서 결재 기록을 대조하라고 하신 거, 저도 금고 바깥에서 기다릴게요.”

“응.”

리에나가 짧게 답했다.

“그래줘.”

회의장 밖 복도는 조용했다. 알릭이 남기고 간 지팡이 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리에나가 몸을 돌리자 이드리스가 한 걸음 가까이 왔다.

“카시우스는 오늘 증언을 막지 못했어요. 다음 장소에선 더 거칠게 나올 겁니다.”

“알아요.”

리에나가 소환장 사본을 든 이드리스의 손을 보았다. 오른쪽 팔소매 아래로 흰 붕대 끝이 차분히 올라와 있었다.

“그래서 귀족회 대심의장이 반격의 장이 될 거예요. 내가 웃어서 줄 자리가 아니라면, 이번엔 그들이 얼굴을 들지 못하게 만들게요.”

이드리스는 대답 대신 그녀보다 반 발 앞서 복도로 나섰다. 등 뒤에서 낡은 장갑 끝이 조용히 움직였고, 리에나는 어머니 기록을 품에 넣은 손을 그대로 둔 채 걸음을 맞췄다.

벨테인 저택 정문 쪽에서 마차 바퀴가 다시 한 번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낮이었지만 복도는 어두웠다. 리에나는 서늘한 공기 속에서 가문 금고로 향하는 길을 다시 떠올렸다.

버려진 공녀는 잊힌 신전의 마지막 사제와 계약 결혼한다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