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힌 신전의 계약 결혼
1화
“아씨, 무슨 소리예요.”
벨루스 납골당은 지하라서 바깥의 빛이 닿지 않았다. 넬라의 촛대가 벽의 감실마다 어른거렸다. 리에타는 낮고 다부진 하녀의 목소리를 등 뒤로 두고 두 번째 감실 앞에 섰다.
벨루스의 혈인장은 저기, 이름 없는 어머니의 납골함 밑 돌이었다. 손을 넣으려던 리에타가 숨을 멈췄다. 바깥 복도, 그 끝. 장화 밑창이 돌계단을 짚는 소리가 겹쳤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마님.”
넬라의 촛불이 흔들렸다. 리에타는 몸을 돌리지 않고 손만 뒤로 내저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납골함 받침의 틈을 짚었다. 서늘한 돌이 열기를 빼앗았다.
“뒤에 오는 이들, 벨루스 문장을 달았소?”
“예. 칼로스 나리의 토벌대. 숫자가 여덟은 됩니다.”
리에타가 손을 반대편으로 옮겼다. 받침돌 아래 얇은 판석이 약간 물렀다. 그녀는 어깨로 숨을 쉬며 판석을 밀었다.
“아가씨!”
넬라의 손이 리에타의 팔꿈치를 움켜잡았다. 순간 납골함 모서리가 리에타의 손등을 스쳤다. 가느다란 선으로 피가 올랐다. 피가 판석을 넘어 어둠 속으로 든 뭔가에 닿았다.
빛이 번졌다. 짧고 희게, 감실 안에서. 리에타가 손을 뺐다.
그 안에 인장을 끌어안고 있었다. 금빛과 붉은 핏물이 뒤섞인 핏방울이 작은 인장 표면을 타고 흘렀다. 그러자 납골당 바깥 쪽, 멀리서 땅이 한 번 울렸다.
넬라가 성호를 그었다.
“지금…… 이건.”
리에타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른손 검지에 낯선 압박감이 남았다. 촛불에 올려 보니 피가 아니었다.
벨루스 인장 반지 모양 그대로 가느다란 흰 자국이 파여 있었다.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자국은 사라지지 않았다.
“움직여요.”
리에타는 인장을 가슴 쪽으로 넣으며 몸을 일으켰다. 납골당 입구 쪽에서 불빛이 모였다. 칼로스의 앞잡이가 돌계단 위에 섰다.
“거기, 벨루스의 도둑 놈들.”
선두의 남자가 검을 반쯤 빼며 말했다.
“후견인 명의로 저택을 수색한다. 훔친 물건을 내려놔라.”
리가타는 칼을 뽑지 않았다. 검푸른 치맛자락 사이로 손을 넣는다. 빈손으로 물러나는 대신 촛대를 옆으로 걷어찼다. 불빛이 뒤집히며 감실 쪽이 어두워졌다. 그 틈에 넬라가 가까운 기둥 뒤로 끌려갔다.
“저것들, 가운데 것을 노린다.”
리에타가 낮게 말했다.
토벌대가 계단을 내려왔다. 전부 검을 들었지만 아직 날을 완전히 뽑은 자는 셋뿐이었다. 빛이 벽을 쓸었다. 리에타는 입구의 첫 번째 장방형 석판 뒤에 무릎을 세웠다.
손등에 낸 피가 팔목을 타고 흘렀다. 그 피가 품속 인장에 닿을 때마다 바깥의 진동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어둠 속에서 넬라만 그 떨림을 눈치챘다.
“아가씨, 저것들 발소리. 수색보다…… 아가씨 몸을 먼저 노리는 것 같습니다.”
토벌대 하나가 긴 창날로 석판을 두드렸다. 다른 하나가 벽 쪽 감실의 납골함을 하나 꺼내 바닥에 쏟았다. 세 번째가 작은 단검에 천을 감았다. 리에타는 그 천이 약물에 적신 것임을 보았다.
“연막과 진정제. 피를 흘리게 해서라도 가져가겠다는 거요.”
리에타의 목소리가 바닥을 낮게 긁었다.
가까운 자가 창을 뻗었다. 리에타가 석판 뒤에서 몸을 낮추며 지나가면서 떨어진 납골함의 금속 조각을 집어 던졌다. 그것이 등불을 쳤다. 불이 기우는 사이 리에타는 그 옆을 파고들었다.
딱 한 자루, 그 허리춤의 단검을 낚아챘다. 되돌아나오며 칼자루로 무릎을 후렸다. 남자가 비틀거렸다. 동시에 다른 자가 바닥으로 쇠사슬을 던졌다. 리에타의 오른팔이 흔들렸다.
촛불이 반쯤 줄었을 때 납골당 입구에서 바람이 멎었다. 바깥 나뭇가지가 일제히 밖으로 휘는 것처럼 보였다. 그다음, 계단 위에서 연보랏빛 회색 옷자락이 스쳤다.
“그만두지.”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토벌대 전원이 그쪽을 돌아봤다.
테오도르 칼레인이 계단 중간에 서 있었다. 검은 사제 로브의 단추가 은빛으로 흔들렸다. 왼손은 로브 안, 오른손은 허리께에 붙였다. 신전 문장이 손등에 감실처럼 흐릿했다.
토벌대 하나가 웃었다.
“사제는 가문 분쟁에 끼어들 수 없소.”
“끼어든 게 아니다. 성역을 더럽히는 자를 쫓아낸다.”
테오도르가 손바닥을 앞으로 향했다. 그 동작에 토벌대의 등 뒤에서 푸르스름한 막이 밀려들었다. 성소 보호막이 납골당 안쪽의 돌바닥을 쓸며 토벌대를 두 걸음 밀어냈다.
선두 남자가 잠시 검을 높이 들었다. 테오도르가 다시 손을 내렸을 때, 그 검은 납작하게 바닥에 눌렸다. 피를 채취하려던 자가 작은 병째로 나가떨어졌다. 리에타는 그 병이 돌에 부딪혀 깨지는 것을 지긋이 지켜봤다.
보호막이 다시 토벌대를 밀어내는 동안, 테오도르는 리에타 쪽으로 내려왔다. 인장에서 나는 소리는 없었다. 다만 그는 그녀의 품을 한 번 내려다봤다. 리에타가 그 시선을 뚫어지게 보았다.
“무엇으로 알았소?”
“성소의 봉인이 울렸다. 이 집 지하 쪽에서.”
리가타는 더 묻지 않았다. 등 뒤에서 넬라가 나와 촛대를 다시 세웠다. 바깥에서 칼로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제님, 내 집 지하에서 뭘 하고 계신지.”
칼로스가 계단 위 입구에 섰다. 어두운 납골당 불빛에 올백 머리가 젖은 것처럼 반들였다. 그는 리에타와 테오도르 사이를 살피며 비웃었다.
“우리 후견인 수색이야. 절차는 다 마쳤어.”
“무단 침입에 사제를 대동한 수색은 신전법과 안 맞지.”
테오도르가 잘라 말했다. 칼로스는 잠시 검을 쥔 부하들을 향해 턱짓했다. 그들이 겨우 몸을 일으켰다.
“후견인 직권으로 미성년 상속인의 보호를 위해 들어온 거다. 사제는 빠져.”
말만 들으면 그럴듯했다. 리에타는 그가 리에타를 보지 않고, 그녀가 감춘 인장 쪽을 곁눈질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의심이라기보다, 손에 넣고 싶어 하는 집착이 깔렸다.
“저기 있는 것, 가문 물건이면 내놔야 해.”
칼로스가 계단을 내려오며 말했다.
는, 등 뒤로 납골당 벽이 울렸다. 진동이 아직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테오도르가 리에타와 칼로스 사이에 섰다.
“한 발짝 더 오면, 이 성소의 기록으로 네 침입을 법정에 올리지.”
“증거로 하겠다고? 네 말과 사제 램프 하나로?”
“아니다. 서약석 등본으로.”
테오도르가 로브 안에서 두루마리를 꺼냈다. 봉인은 열리지 않았다. 칼로스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서약석 등본?”
“성소 모독을 신전 공식 기록으로 남길 권리. 공녀님이 신원을 밝히고 이 성소의 보호를 청하면 효력이 생긴다.”
칼로스가 리에타를 돌아보며 웃었다. 리에타는 대꾸하지 않았다. 테오도르가 한 발을 옆으로 옮겨 칼로스의 시선을 차단했다.
“내가 이 땅의 말짜로 보이냐? 고아 신부 하나가 감히─”
“내 이름은 테오도르 칼레인. 이 성소를 지키는 사제다.”
보호막이 다시 넓게 퍼졌다. 칼로스의 부하들이 두 겹으로 나가떨어졌다. 칼로스 자신도 균형을 잃고 계단 쪽으로 세 걸음 물러났다.
“좋다. 나가라.”
칼로스가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일부는 돌계단 아래 칼을 버렸다. 그가 내려오며 한 팔을 휘둘러 넬라의 촛대를 쓰러뜨렸다. 불이 한순간에 꺼졌다. 어둠 속에서 목소리만 남았다.
“상속인 납치 혐의로 사제를 불러들이자. 지금부터 이 저택은 폐쇄다. 저자 놈들 잡아라.”
토벌대가 납골당 입구를 나가 횃불을 재정비하는 소리가 들렸다. 리에타는 어둠 속에서 테오도르의 소매를 한 번 짚었다.
“성소 보호막, 얼마나 버텨요?”
“이곳 신성력이면 시간은 번다. 단독으로 돌파할 인원은 막지 못한다.”
“그럼 여기서 끝낼 수 없단 말이군요.”
리에타가 낮게 말했다. 테오도르가 등본을 반쯤 펼쳤다. 성소의 빛이 열린 부분을 따라 은빛으로 일었다.
“계약 결혼을 제안한다.”
잠깐, 장작 타는 소리처럼 시간이 지났다. 넬라가 숨을 참는 소리가 어둠 속에 이어졌다.
리에타가 물었다. “무슨 조건이오.”
“상속 증표 행사에는 배우자 서명이 필요하다. 오늘 밤 그 서명을 신전 서약으로 보증한다.”
“배우자 서명만으로 증표를 행사할 수 있소?”
“아니. 서약석에 두 사람의 피가 올라야 신성력이 깨어난다.”
테오도르의 말은 행동처럼 짧았다. 리에타는 촛불을 다시 켜지 않았다. 어둠 속 목소리만으로는 미세한 어긋남을 읽을 수 없었다.
내가 서명하면 서약이 없으면 무효다. 그렇다면 사제가 서명만 해두고 배신할 여지는 없는지. 반대로 서약을 먼저 세우면 상속 심사에서 무슨 권한을 갖는지.
“진짜 목적이 뭐요?”
“계약 갱신까지 이 성소와 공녀님의 신분을 묶어 두는 것.”
“말로는 일부러 뺀 게 많군요.”
“필요한 것이 다르다. 공녀님은 가문을, 나는 성소를 지킨다.”
’키스‘와 같은 사적 감정이 유일하게 개입할 여지가 없는 문장이었다.
“서약이 무효가 되는 경우는?”
“돌에 금이 갈 때. 서약석은 상호 합의 없이는 깨지 않는다.”
“상속 심사 입회까지 배우자 신분이 보장되는 근거는?”
“이 서약석의 신성력이 법정에서 신분을 증명한다.”
리에타가 몸을 돌렸다. 그때 바깥 복도에서 칼로스의 부하들이 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납골당 입구를 다시 열려는 것인지 문틈으로 쇠갈고리를 들이밀었다.
“좋소.”
리에타가 테오도르의 등본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등본을 벽 감실 위에 펼쳤다. 어둠 속에서 은빛 한 줄이 두루마리 위를 흘렀다.
“조건을 넣겠소. 하나, 서약은 1년 갱신으로 하되, 갱신 거부 시 왕실 귀속 조항은 내가 직접 확인한다. 둘, 상속 심사에서 내 증표 행사에 배우자 자격으로 입회하고 증언한다. 셋, 그 대가가 성소에 과한 것이면 이 계약을 판결 전에 폐기할 수 있다.”
“셋은 서로의 해지 권리를 제한하지.”
“해지가 아니다. 효력 정지를 조건으로 둔다는 말이오.”
테오도르가 잠시 그녀를 보았다. 리에타는 다시 말하지 않았고 그는 요지를 등본 가장자리에 적어나갔다. 짧은 서약 문구가 아니라 계약 합의문 형태로 각 조항이 박혔다.
“피가 검증되면 그때 효력이 시작된다.”
“이미 흘렸소.”
리에타는 인장에 묻은 핏자국을 내보이지 않고 말했다. 테오도르가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그가 등본 아래에 먼저 이름을 적었다. 리에타가 그 아래 서명했다.
“서약석까지 거리가 멀어요.”
넬라가 마침내 어둠 속에서 낮게 말했다.
“뒤쪽, 옛 집사가 쓰던 통로가 있습니다. 납골함 뒤 벽감, 거기 돌을 왼쪽으로 두 번.”
리에타가 자리에서 일어나 벽으로 갔다. 테오도르가 등본을 말아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가 허리춤 인장 곁에 합의문을 넣었다.
벽감이 깊었다. 넬라가 시킨 대로 돌을 밀자, 벽의 한 부분이 소리 없이 안으로 밀렸다. 그 안은 칠흑이었지만 통로의 공기가 밖과 달리 건조했다.
“먼저 들어가요.”
리에타가 넬라를 재촉했다. 넬라가 낮게 읊조렸다.
“이 길은 저택 바깥 숲 신전 방향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때 납골당 입구가 쇠갈고리로 벌어지며 횃불 하나가 날아 들어왔다. 리에타는 테오도르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비밀 통로 안으로 한 발 들이며 말했다.
“서명의 효력, 서약석에서 검증하겠소.”
테오도르가 벽을 막아서며 외부의 횃불을 손등으로 막는지, 로브 안 보호막이 한 번 더 옅은 소리를 냈다. 이어서 그가 뒤따라 들어왔다. 돌문이 닫혔다. 숲 쪽 흙 냄새가 좁은 통로에 섞여 들었다.
칼로스의 수색대는 납골당 바깥에서 횃불을 두르며 폐쇄를 외쳤지만, 넬라가 연 비밀 통로의 방향은 그들과 달랐다. 리에타는 한 손으로 인장을, 다른 손으로 조건부 합의문이 든 품을 눌렀다.
“기억해요. 이 길 중간에 무너진 갈림길이 있소.”
넬라가 앞에서 잠깐 걸음을 멈췄다. 리에타는 대답 없이 더 넓은 어둠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서약석까지, 멈추지 않소.”
테오도르가 뒤에서 통로 벽을 짚으며 말했다. 세 발자국쯤 침묵이 걸었다. 이윽고 리에타가 낮게 뱉었다.
“뒤에 오는 소리, 아직 가까우니 속도를 내요.”
그녀는 다음 굽이를 향해 어깨를 낮췄다. 숨이 불규칙해졌지만 곧 고른 걸음으로 통로를 밀고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