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힌 신전의 계약 결혼
3화
새벽이 채 걷히기 전, 왕실 상속 심사장 밖 복도에는 이미 사람들이 가득했다. 리에타는 굳은 손으로 품속의 서약석 등본을 한 번 짚었다. 종이가 체온에 눅눅해져 있었다.
“아씨, 저기 심사 위원회가 들어섭니다.”
넬라가 그녀보다 한 걸음 뒤에서 낮게 말했다. 혈인장 보관함을 두 팔로 안고 있었다. 리에타는 대답하지 않았다.
심사장 문이 열리고, 상속 자리에 칼로스가 먼저 들어가 앉아 있었다. 포마드가 번질거리는 올백 위로 벽등 불빛이 얹혔다. 그가 리에타를 보며 입술 끝을 올렸다.
“늦었네. 납골당 도둑질만큼 늦진 않으려나 했지.”
리에타는 심사대 앞에 섰다. 테오도르가 그 오른쪽에 붙어 섰다. 검은 사제 로브가 새벽보다 한 톤 더 무거운 그늘이었다.
심사장 위원석에는 세 명이 앉았다. 중앙 위원이 말했다.
“벨루스 가문 상속 심사를 연다. 상속 후보는 등록된 순서대로 출석하라.”
리에타가 서약석 등본을 꺼내 심사대 위에 올렸다.
“리에타 벨루스. 배우자 서명 원본이 여기 있소.”
칼로스가 몸을 앞으로 숙였다.
“서명이 위조다. 그건 혼인 서명이 아니라 신전 구석탱이 돌에 피 묻힌 것뿐이야. 정식 혼인 서류도 없는 걸 배우자 서명이라 부르면 안 되지.”
그가 심사 위원을 향해 손짓했다.
“혈인장도 함께 배제해 주십시오. 절도품은 심사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심사장 방청석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리에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넬라가 앞으로 나와 보관함을 심사대에 내려놓았다. 뚜껑을 열자 검푸른 돌이 낡은 벨벳 위에 놓여 있었다. 혈인장 본체는 납골당에서 가져온 것과 같은 문장이었지만, 돌은 방청석 불빛을 받아 안쪽으로 붉은 선을 띠었다.
“이건 벨루스 가문 정통 상속의 증표입니다. 제가 직접 저택 납골당 셋째 감실에서 옮겨 왔습니다.”
넬라가 허리를 곧게 세우고 말했다.
칼로스가 낮게 웃었다.
“하녀가 손댄 증거물. 보관 경로도 더럽지.”
중앙 위원이 손을 들었다. 방청석의 소리가 잦아들었다.
“보관함 봉인을 뜯지 않고 열었는가.”
“보관함 봉인은 없었습니다. 다만 납골당 감실 봉인은 가문 인장으로 되어 있어, 정통 혈통의 공녀만이 열 수 있었습니다.”
넬라가 말했다. 칼로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옆 수행원에게 막혔다.
테오도르가 반 걸음 나섰다.
“서약 증서 원본은 신전 기록이며, 법정 혼인 서류보다 우선한다.”
그가 품에서 말아 둔 서약 증서 원본을 펼쳐 심사대 위에 올렸다. 은빛 잉크가 문양 아래로 얇게 스몄다.
“신성력을 본 증인이 있다. 칼로스 벨루스가 데려간 토벌대까지 포함이다.”
테오도르가 덧붙였다.
칼로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거 다 내가 매수했다고 하면 끝이지.”
“서약석은 매수를 밀어낸다. 네가 겪었잖아.”
리에타가 말했다. 칼로스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심사 위원들이 고개를 모았다. 중앙 위원이 혈인장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칼로스가 그 순간 뒤에 선 사환에게 손짓했다. 사환이 작은 쟁반을 들고 리에타 쪽으로 움직였다. 쟁반에는 유리관과 얇은 침이 놓여 있었다.
“혈인장 진위는 피로 검증한다. 채혈하겠다.”
칼로스가 말했다.
사환이 두 걸음 다가왔다. 넬라가 리에타 앞을 막아 섰다.
테오도르가 심사대 앞으로 팔을 뻗어 쟁반을 막았다. 소매가 걷히며 오른손등 문양이 번쩍 드러났다.
“정통 상속인이 원본 제시에 동의했으면, 심사 위원회가 정한 경로 밖의 채혈은 불법이다.”
테오도르가 말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심사장 맨 끝까지 미끄러졌다.
“서약 증거가 채택되면, 채혈은 가문 규정의 증표 행사에서만 열린다.”
칼로스가 사환을 손으로 밀어냈다.
“배우자 서명이 위조라니까! 그게 인정되기 전까진 정통 상속인도 아니야.”
중앙 위원이 손을 들었다.
“배우자 서명과 서약 증서 원본을 대조한다. 채혈 요구는 기각한다.”
리에는 심사 위원들이 서약 증서를 펼쳐 신전 등록 문양과 대조하는 소리를 들으며 숨을 내쉬었다. 옆에서 테오도르가 소매를 내렸다. 리에타는 그가 소매로 감춘 손등을 보았다.
심사 위원이 서약 증서를 테오도르에게 돌려주었다.
“서명은 유효하다. 혼인 서약은 신전 기록으로 인정된다.”
심사장 방청석이 웅성거렸다. 칼로스가 손으로 심사대 모서리를 쳤다. 소리가 심사장에 울렸다.
“인정된다고? 피 한 방울로 만든 계약을?”
그가 일어섰다.
“벨루스 정통 혈통 같은 건 처음부터 필요 없었어. 혈인장 진위를 확인하는 데 필요한 건 피잖아. 그 피를 가진 년이 숨어서 안 나오면, 강제로 뽑으면 그만이야.”
칼로스가 혈인장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내뱉었다.
“정통 혈통을 제거하면 혈인장은 후견인 서명으로 내 것이 된다. 그걸 막으려고 납골당에서 도둑질까지 한 거지.”
심사장 방청석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속기사 두 명이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리에타가 혈인장이 놓인 심사대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지금 말로 ‘정통 혈통 제거’라고 했소. 방청객들이 모두 들었고, 속기도 남을 거요.”
칼로스가 속기사들을 향해 비웃었다.
“적어도 뒀지. 상속 규정을 유리하게 해석하면 살아남는 건 후견인이야.”
중앙 위원이 종을 두 번 쳤다.
“칼로스 벨루스. 방청석이 있는 심사에서 상속인 위해 발언은 피의자 진술로 기록한다.”
위원이 수행원들에게 고개를 움직였다.
“분리 조치하라.”
칼로스가 팔을 뿌리쳤다. 수행원 두 명이 그를 붙들어 심사장 옆문으로 밀고 갔다.
“피의자 대기실로 모셔라.”
칼로스가 문턱에서 리에타를 돌아보았다. 포마드가 무너지기 시작한 이마가 흘러내렸다.
“네 피가 혈인장을 울리게 해 봐. 법정의 밤이 길어질 거다.”
문이 닫혔다. 방청석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리에타는 심사 위원들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칼로스 벨루스가 혈인장 탈취 의도를 공개적으로 밝혔소. 서약 증서와 이 진술을 근거로, 벨루스 상속 심사의 재개를 요구하오.”
중앙 위원이 두 명의 위원을 돌아봤다. 두 위원이 각각 손을 올렸다.
“정통 혈통의 증표 진위와 가문 서열을 재심사한다. 서약 증서 원본은 반환, 혈인장은 본인 보관으로 돌아간다.”
위원이 문서를 적어 리에타에게 건넸다.
“상속 심사 재개 결정문이오. 다음 심리 일정은 신전 기록 대조가 끝난 뒤 통지한다.”
리에타가 결정문을 받아 품에 넣었다. 넬라가 혈인장 보관함을 닫아 다시 안았다. 두 손이 보관함을 꼭 감싸 쥐었다.
심사장이 비워질 때, 방청객들이 복도로 떠밀려 나갔다. 리에타는 신전으로 돌아가기 전, 기록대 옆으로 잠시 물러났다. 그 뒤를 테오도르가 따랐다.
기록대 옆에는 왕실 심사장 유물 진열대가 놓여 있었다. 오래된 도장, 약식 혼인 증서, 깨진 검 조각들이 열을 지어 있었다.
테오도르가 진열대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리에타는 처음엔 그가 서약 증서를 다시 확인하려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의 시선이 진열대 세 번째 칸에 꽂혀 있었다.
손바닥만 한 돌 조각이었다. 신전 문양과 비슷한 원호가 옅게 새겨져 있었다. 신탁문 조각이었다.
테오도르가 오른손등을 말아 쥐었다. 소매가 문양을 가렸다. 그는 조각에서 리에타에게로 시선을 옮기지 못했다. 목 끝이 한 번 움직였다.
리에타는 서약석 뒤 벽감을 닫던 그 손을 다시 떠올렸다. 테오도르가 고개를 돌리자, 그 손은 이제 더 깊이 소매 안에 감춰져 있었다.
“그 조각, 신전 서약 기록과 닮았소.”
리에타가 낮게 말했다.
테오도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진열대 유리를 짚은 손끝이 잠시 그곳에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리에타는 그의 발이 여전히 진열대 앞에서 떨어지지 못한 것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