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힌 신전의 계약 결혼
4화
리에타는 저 조각이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심사장 복도는 거의 비어 있었고, 진열대 유리 너머로 낮의 햇살이 비스듬히 얹혔다.
“신전의 원본과 같은 문양이오.”
리에타가 한 걸음 다가섰다. 테오도르는 여전히 오른손등을 소매 안에 두고 있었다.
“법정에서 서약을 증명할 때도 손을 숨기지 않았소. 왜 지금 그걸 가리시오.”
테오도르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시선은 리에타의 이마를 지나 진열대 반대편 벽에 닿았다.
“숨긴 게 아니라 소매가 내려갔을 뿐이다.”
“그 조각을 보기 전까지는 아니었소.”
리에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넬라가 두 사람 뒤에서 혈인장 보관함을 다시 품에 끌어안았다. 가죽 끈이 옷에 스치는 소리가 났다.
테오도르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더 묻는다면 답은 신전 기록이 아니라 네 추측뿐이다.”
“그럼 추측이 틀렸다는 근거를 대시오.”
테오도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굽 낮은 신발이 돌바닥에서 반 보쯤 물러났다.
“원본을 확인해라. 잊힌 신전에 신탁문이 있다. 네 눈으로 읽고 판단하면 된다.”
리에타가 그를 똑바로 보았다. “지금껏 그곳을 언급한 적 없소. 왜 이제야.”
“질문이 쌓일수록 법정 밖에서 쓸 시간이 줄어든다.”
테오도르가 복도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리에타가 넬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혈인장 원본을 주오. 신전으로 간다.”
넬라가 잠깐 망설였다. 굳은살이 박인 손으로 보관함 끈을 리에타의 손에 건넸다. 보관함 겉면에는 아직 심사대의 찬 기운이 남아 있었다.
“아씨, 혼자 가시렵니까.”
리에타는 이미 테오도르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잊힌 신전은 심사장에서 반나절 거리였다. 수레를 얻어 탄 뒤에는 길이 좁아져 걸어야 했다. 오후의 햇살이 부서진 석주 사이로 길게 누웠고, 바람이 불 때마다 마른 덩굴이 돌에 긁혔다.
신탁문은 신전 가장 안쪽 벽에 반쯤 묻혀 있었다. 균열 난 면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리에타가 다가가자 그을린 자국들 사이로 문장이 드러났다.
벨루스의 핏인장이 잠긴 축복을 열고, 계약한 배우자의 서약이 침묵을 끝낸다.
리에타는 문장을 두 번 읽었다. 보관함을 든 팔에 힘이 들어갔다. 혈인장의 검푸른 돌이 천 안쪽에서 체온을 빼앗는 것 같았다.
“이 문장을 알고 있었소.”
테오도르가 신탁문에서 열 걸음쯤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 손등이 신탁문 조각 앞에서 움직이지 못했소.”
리에타가 몸을 돌렸다. 목 끝이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다. 뜨거워야 할 분노가 오히려 손끝을 차갑게 식혔다.
“계약은 혈인장 때문이었소. 당신이 처음부터 원한 건 벨루스의 축복이오.”
테오도르가 소매 속에서 오른손등을 감싼 손을 풀었다. 그는 손을 들어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 손을 몸 뒤로 돌려 거리를 만들었다.
“그 목적을 부정하지 않는다. 묻는다면.”
리에타의 호흡이 짧아졌다. “방금 전까지는 부정하지도 않았소. 이제 와서 그 정도로 무슨 답이 되오.”
테오도르의 대답은 한 박자 늦었다. “나는 너를 도구로 쓸 생각이 없다.”
“그 말이 행동과 맞지 않소. 도구로 쓸 이유가 없었다면 신탁문을 숨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넬라가 두 사람 사이로 들어서며 낮게 말했다.
“아씨, 목소리를 낮추십시오. 이곳엔 폐허가 많아 소리가 깊이 닿습니다.”
리에타는 넬라를 보지 않았다. 테오도르도 넬라를 보지 않았다. 서로의 눈은 정면으로 붙들고 있었다.
“신탁문을 읽었으니 계약 조건을 다시 따지겠소. 혈인장이 목적이라면 서약도 같은 목적으로 묶였을 것이다.”
테오도르가 한 걸음 더 물러났다. 발밑의 돌조각이 굴러 신탁문 쪽으로 떨어졌다.
“그 판단은 네 몫이다. 나는 여기서 더 조건을 보태지 않는다.”
“계약 당사자가 조건을 보태지 않는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오.”
리에타가 한 걸음 다가갔다. 손에 든 보관함의 모서리가 손바닥을 눌렀다.
테오도르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로브 끝이 마른 지면을 쓸었다.
“나는 네게서 필요한 만큼 거리를 두겠다. 그게 지금 내가 낼 수 있는 유일한 답이다.”
그는 등을 돌렸다. 리에타의 신발이 그를 따라 반 보쯤 나아가다 멈췄다. 넬라가 그 팔을 잡았다.
“아씨, 따라가면 안 됩니다.”
테오도르의 걸음이 신전 바깥 출입구를 지나 잡목 사이로 사라졌다. 리에타는 잡힌 팔을 빼지 못했다. 보관함을 품에 안자 안쪽 천이 달궈진 듯 따뜻했다. 아니, 열은 보관함이 아니라 자신의 손바닥에서 올라오는 것이었다.
“제가 보기에 사제님은 도망친 게 아닙니다.”
넬라가 리에타의 손에서 보관함을 받아 조심스럽게 안았다. 리에타는 신탁문 앞에 그대로 섰다. 저 문장만이 남았다.
피로 열리는 축복. 서약으로 끝나는 침묵. 그리고 그 계약을 처음 제안한 자는 지금 문장 앞에서 등을 돌렸다.
리에타는 테오도르가 걸어간 자리의 먼지가 잦아들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오후 햇살이 잊힌 신전 회랑을 비스듬히 갈랐다. 리에타는 결정문을 품에 눌러 넣은 채 돌기둥 그림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테오도르는 심사장에서 나와 반대편 복도로 빠졌고, 뒤에는 넬라만 보관함을 안고 따랐다.
회랑 입구 쪽에서 흙먼지가 일었다. 사병 둘이 먼저 들어섰다. 가죽 갑옷을 입고 손도끼를 허리에 찬 자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그 뒤로 칼로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찾았다, 리에타.”
칼로스가 손을 올리자 사병들이 회랑 돌기둥 사이를 막았다.
“상속 심사에서 나온 길이네. 여긴 사유지도 아니고, 신전 입구잖아.”
“심사는 끝났소. 위원회의 결정문도 받았고.”
리에타가 품을 가리켰다. 칼로스는 웃지 않았다.
“결정문 받았다고 끝인 줄 알았나. 서약 무효 청구서를 가져왔어.”
그가 품에서 접힌 서류를 꺼내 흔들었다. 종이 위에는 왕실 문양과 붉은 인영이 눌려 있었다. 리에타는 서류를 읽기 전에 넬라를 뒤로 밀었다.
“피가 모자란 방계가 무슨 근거로 서약을 무효라 하시오.”
“혈인장이 위조품이라면 그 서약도 무효지. 정통 혈통이 아니면 피가 반응도 안 하잖아.”
칼로스가 사병 한 명에게 고개짓했다. 사병이 낡은 채혈 천과 짧은 칼날을 꺼냈다. 진정제 냄새가 회랑 안으로 번졌다. 리에타는 몸을 낮추고 돌기둥 옆으로 비껴섰다.
“강제 채혈은 심사장에서 이미 금지됐소.”
“여긴 심사장이 아니야. 그리고 심사장에서 결정한 건 ‘심사 절차 중’ 금지지.”
사병 하나가 왼쪽에서 달려들었다. 리에타는 팔을 당겨 피하려 했지만, 두 번째 사병이 뒤에서 그녀의 오른팔을 눌렀다. 칼날이 손바닥 아래를 갈랐다. 가는 선이 벌어지고 피가 번졌다.
“아가씨!”
넬라가 보관함을 끌어안은 채 소리쳤다. 리에타가 허리춤으로 손을 내렸다. 손끝이 혈인장 원본에 닿는 것을 막으려 움켜쥐었지만, 피는 옷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검푸른 돌 표면에 붉은 선이 번지더니 문양이 안쪽으로 일그러졌다.
칼로스가 걸음을 멈췄다. 그의 눈이 리에타의 품 언저리에 꽂혔다.
“봐. 반응이 더럽잖아.”
사병이 리에타의 손목을 풀었다. 리에타는 몸을 세우며 숨을 고르지 않았다. 일그러진 문양은 옷 안에서 붉은 빛을 옅게 남겼다.
“강제로 뽑은 피에 반응했다고 위조라 부르는가. 벨루스 심사는 후견인의 입맛대로 굴러가지 않소.”
칼로스가 서류를 반쯤 접어 손바닥에 쳤다.
“강제고 뭐고 피는 피야. 저 반응은 정통이 아니라는 증거로 충분해. 청구서에 서명만 받으면 끝나.”
“내 피를 증명하려면 내가 직접 올려야 하오. 칼로스 벨루스, 당신이 정한 법정이 아니라 혈인장 앞에서.”
리에타가 품에서 혈인장을 꺼냈다. 상처 난 손바닥이 아닌 왼손 끝으로 돌을 받치고, 오른손 검지에 맺힌 피를 문양 가운데 눌렀다.
처음에는 반응이 없었다. 칼로스가 사병에게 다가서라는 손짓을 하려던 순간, 돌 안쪽에서 푸른 선이 되살아났다. 문양이 붉은 핏줄을 따라 또렷해지더니 벨루스 문장이 밖으로 떠오르듯 드러났다. 회랑 바닥까지 옅게 비쳤다.
칼로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가 서류를 다시 펼치기 전에 회랑 바깥 쪽에서 발소리가 났다. 테오도르가 돌아왔다. 손에는 계약 혼인 서약 증서 원본이 말려 있었다.
“그 청구서, 지금 접으십시오.”
테오도르가 칼로스와 사병 사이로 걸어 들어왔다.
“배우자 신분인 사제가 이의를 제기하면 위원회가 아니라 이 자리에서도 서명 절차를 막을 수 있지.”
“사제가 세속 상속에 끼어들어?”
“공녀님의 배우자입니다. 세속 상속에 끼어드는 게 아니라 서약을 지킵니다.”
테오도르가 증서 원본을 펼쳐 들었다. 서약석에 남긴 문양과 같은 은빛 잉크가 종이 아래로 드러났다.
“혈인장의 정통 반응은 방금 직접 확인됐소. 무효 청구서의 근거는 성립하지 않아요.”
칼로스가 서류를 허공에서 비틀었다. 사병들을 보았지만 두 자루의 손도끼는 더 나아가지 못했다. 테오도르가 반 걸음 칼로스의 앞을 막았고, 리에타는 혈인장을 품에 넣었다.
“청구서 조항이 위조건 적법이건, 배우자의 이의 제기는 신전 기록 앞에서 우선이오.”
칼로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서류가 그의 손아귀에서 구겨졌다.
“좋아. 여기선 물러나지.”
그가 한 걸음 뒤로 갔다. 그러나 사병들은 회랑 바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칼로스는 고개를 오른쪽 복도로 돌렸다.
“다만, 그 청구서가 한 장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
순간 회랑 서쪽 돌문이 움직였다. 넬라가 보관함을 한 팔로 끌어안았다. 그녀가 벽 쪽 등잔대 아래쪽을 짚자 돌문이 안쪽으로 밀렸다.
“아가씨, 이쪽입니다. 집사님이 알려주신 통로예요.”
넬라가 리에타의 팔을 잡아 끌었다. 테오도르가 그 뒤를 따르려는데 사병 하나가 회랑 입구를 가로질러 섰다. 다른 하나는 리에타와 넬라 쪽으로 달려들었다.
“제단 쪽으로 몰아.”
칼로스가 소리쳤다. 사병의 손도끼가 통로 입구 석재를 쳤다. 리에타는 넬라와 함께 좁은 돌문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길은 어두웠고 계단이 아래로 휘어졌다. 한 번 불빛이 들어왔다가 돌문이 다시 닫히며 차단됐다.
통로 끝은 밀폐 제단이었다. 네모난 돌방에 오래된 제단이 놓였고, 서약석은 방 깊숙한 벽감에 잠겨 있었다. 벽 촛대가 두 개만 타고 있었다.
뒤에서 칼로스의 구두 소리가 계단을 울렸다. 그는 봉인실 입구까지 혼자 따라 들어왔다. 사병들은 통로 밖에 남아 있었다.
“여기 근처에 비밀 통로가 있을 줄 알았어. 벨루스 집사가 하녀한테 이런 걸 남긴 것도 집안 망조지.”
칼로스가 구겨진 청구서를 손아귀에서 꺼내 매만졌다. 이제 그것은 위조 서류처럼 보이지 않았다. 종이에서 인영이 뭉개져 있었지만, 그는 다시 똑바로 접었다.
“피를 직접 올린 건 잘했어. 덕분에 혈인장은 확실해졌지만, 서약은 여기서 끝내면 되지.”
테오도르의 목소리가 돌문 너머에서 들렸다.
“그 문을 여십시오.”
무거운 칼질 소리가 돌문을 두드렸다. 사병 하나가 신음하며 몸을 막는 소리와 함께 넬라가 소리쳤다.
“이쪽은 막혔습니다. 제가 문을 다시 열어볼게요.”
칼로스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칼을 빼지 않고 서약석 가까이 걸었다. 서약석 앞에 서자 바람이 방 안을 한 번 쓸었다. 칼로스가 위조 서류를 펼쳐 서약석 윗면에 밀어 넣듯 꽂았다. 종이 모서리가 돌 틈에 눌려 떨렸다.
“가문 자산 귀속 조항까지 갈 것도 없이, 이 서약은 무효 청구가 개시된 상태야. 배우자 서명이고 서약이고, 서약석에 대고 기각된 청구서가 하나 더 있을 뿐이지.”
그가 인장 반지를 종이 위에 올렸다. 서약석이 낮은 진동을 내며 먼지를 일으켰다.
리에타는 넬라의 부름을 들으며 뒤로 가지 않았다. 그녀는 품에서 혈인장을 다시 끌어안았다. 일그러졌던 문양이 손끝의 체온에 닿아 옅게 붉은 선을 되살렸다.
“서약은 당신 혼자 끝낼 수 없소.”
칼로스가 위조 서류를 돌 틈에 더 깊이 눌렀다.
“이건 개시야. 증명은 네 피로 벌써 끝났고.”
혈인장을 품에 안은 손이 봉인실 어둠 속에서 떨렸다. 손끝이 아니라 어깨와 목덜미가 먼저 굳었다. 리에타는 서약석 앞까지 걸어갔다. 칼로스의 서류와 벨루스 인장 반지는 그대로 돌 위에 올려져 있었다.
“후견인 자격으로 강제 서약 파기를 개시하는 것도 상속 심사 위반이오.”
칼로스가 낮게 웃었다.
“여기서는 네 말이 법이 아니야.”
그가 손을 들어 서약석 위 서류를 겹쳐 쥐었다. 봉인실 안의 촛불이 그의 팔꿈치에 눌려 기울었다. 통로 밖에서 테오도르와 사병의 몸싸움 소리가 이어졌다. 넬라의 손이 돌문 아래로 들어와 문틈을 붙잡았다.
리에타는 물러서지 않았다. 혈인장을 품에 안은 채 서약석과 칼로스 사이에 섰다. 인영 뭉개진 서류가 그녀의 치맛자락을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