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녀의 이번 생은 약혼자의 형과
1화
벨티르 대연회장 한쪽 휘장 뒤로 손가락이 스쳤다. 은실로 수놓인 벨티르 문양이 손끝에 걸리며 반짝였다.
리에나는 손을 거두고 목덜미에 손끝을 대었다. 피부는 얇고 따뜻했다. 셋째 손가락이 옅은 자국 위를 천천히 지나갔다.
사형 집행인의 매듭이 남긴 붉은 선이 그대로 있었다. 회귀한 지 반나절. 이 자국만이 아직도 목에 감긴 채다.
“결국 오늘 저녁이군.”
혼잣말이 낮게 깔렸다. 휘장 밖은 아직도 발표 준비로 소란했다. 촛대를 옮기는 하인들, 술병을 검수하는 시종, 활짝 열린 문 너머로 왕실 서기가 걸어 들어오는 소리까지. 리에나는 옷깃을 끌어올렸다. 높은 칼라가 목덜미를 덮자 자국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손끝이 조금 저렸다.
약속된 시간이었다.
“영애, 자리 배치가 바뀌었습니다.”
헬레나였다. 목소리는 낮고 바빴다. 리에나는 휘장을 정리하며 돌아섰다.
“상석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이군요.”
“네. 벨티르 후계자께서 직접 조정을 지시하셨습니다. ‘공녀는 출입구에서 가장 먼 자리에 앉힌다’고요.”
헬레나의 말이 담담했다. 리에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 사람은 아직 날 모르는 척한다.
아니, 전생의 나를 알지 못했을 뿐이지. 그러니 이 배치는 단순한 예의다. 하지만 회귀한 지금은 다르게 읽혔다.
“가장 먼 자리라면, 술에서도 가장 멀겠네요.”
“네, 등장 순서도 마지막으로 잡혔습니다.”
리에나는 헬레나를 보았다. 작은 체구, 곧은 어깨, 허리춤에 편지칼. 이 아인 나중에 시녀복 주머니에 봉인된 잔을 넣을 사람이다. 아직 그걸 모르는 얼굴이 오늘 유일하게 믿을 만했다.
“헬레나, 오늘은 내 곁에서 움직이지 말아요.”
“명받들겠습니다.”
저녁 연회 30분 전. 리에나는 상석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구두 굽이 대리석을 두 번, 세 번 울렸다.
네 번째는 다른 소리가 겹쳤다. 벨티르 가문의 정복 기사가 문 앞에서 창을 세우며 연회장 출입 인원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머리카락 끝이 조명 아래서 푸르게 돌았다.
“리에나 아르젠트 공녀 어른.”
귀에 익은 낮은 톤. 리에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검은 군복, 검은 머리, 흑요석 반지 낀 손이 등 뒤로 넘어갔다. 카이우스 벨티르였다. 표정은 전투 전 지휘관의 그것이었다. 리에나는 예법대로 목례했다.
“벨티르 후계자 어른께서 직접 나오실 자리는 아니라고 들었습니다만.”
“약혼 발표 자리다. 가문의 후계자로서 서야 한다.”
“준비는 잘 되어 있습니까.”
“뒤에서 서류를 정리했다. 네가 상석 왼쪽에 앉으면 된다.”
카이우스가 한 걸음 물러서며 리에나의 진로를 열어 주었다. 그 동작에는 아직 아무 온도가 없었다. 리에나도 온도를 주지 않았다.
“말씀 잘 듣겠습니다.”
그가 말을 잇지 않았다. 리에나는 그 빈틈을 지나 상석 왼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리가 좋다. 출입구가 보이고, 디온의 축배 잔이 놓일 방향이 보이고, 헬레나가 서 있을 기둥 옆 공간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리에나는 자리에 서서 손을 모았다. 사람들이 하나둘 착석하기 시작했다. 귀족들의 인사가 여러 겹으로 겹쳤다.
“리에나.”
디온이었다. 붉은 갈색 머리에 밝은 녹색 눈. 다정한 웃음이 얼굴에 먼저 실려 왔다. 그는 리에나의 손등에 닿으려는 듯 손을 내밀었다가, 리에나가 한 박자 늦게 받자 웃음의 방향을 바꿨다.
“오늘 많이 긴장한 눈빛이야. 별거 아냐, 그냥 우리끼리 잔 올리는 자리잖아.”
“이제 연회 시작인가요.”
“응, 아버님도 곧 축사를 하실 거고. 축배는 우리가 먼저 들면 돼.”
그가 리에나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향이 났다. 남부산 장미 기름이었다. 리에나는 웃지 않고 시선을 잔 쪽으로 던졌다. 디온이 그 시선을 따라 흘깃 돌아봤다.
“축배 잔은 아직 저쪽이네. 내가 가져오게 할까.”
“아니요. 그대로 두십시오. 공개된 자리에서 잔이 오가는 걸 모두가 봐야 하니까.”
디온의 미소가 반 박자 굳었다가 풀렸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네가 조심스러우니 나쁘지 않아.”
리에나는 대답하지 않고 상석을 바라보았다. 카이우스가 이미 귀족들 사이를 지나 상석 오른편에 서 있었다. 그가 시종에게 손짓했다. 시종이 술병이 놓인 쟁반의 위치를 확인하고 물러났다.
연회가 시작됐다. 벨티르 공작의 축사는 짧았다. 가문과 아르젠트 가문의 인연, 북부의 안정, 새 가족을 맞는 예의. 리에나는 그 말을 반쯤 들으며 접시 아래 은수저가 놓인 각도를 조정했다. 초 촛불이 왼쪽에서 흔들렸다.
“축배를 올리시겠습니다.”
하인이 외쳤다. 디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기가 그의 잔을 쟁반에 올렸다. 같은 술병에서 두 번째 잔이 리에나 앞으로 왔다.
“잠시만요.”
리에나가 손을 들어 올렸다. 연회장의 대화가 멈췄다. 카이우스의 턱선이 왼쪽으로 틀어졌다. 디온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리에나를 보았다.
“무슨 일이야?”
“축배 전에, 그 술병을 공개 검수하고 싶습니다.”
리에나는 목소리를 또렷하게 끌어올렸다. 귀족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봤다. 저쪽에서 에스텔라 마르샤가 살짝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리에나가 디온의 잔과 술병을 가리켰다.
“축배라는 것은 모두가 같은 술을 마시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 술이 어느 병에서 왔는지, 잔이 어느 시점에 준비됐는지 지켜본 사람이 한 명도 없네요.”
“리에나, 지금 그게 무슨…”
“벨티르 가문의 독살 사건은 예전에 어떤 식으로 일어났습니까.”
카이우스가 낮게 끼어들었다.
“공녀. 그 정도 발언은 근거가 필요하다.”
리에나는 바로 응수했다.
“그러니 검수하면 됩니다. 근거는 제가 만들지 않습니다. 술이 만들 겁니다.”
디온이 억지로 웃음을 끌어다 붙였다.
“그래, 검수해. 원한다면 우리 술병 전부 가져와서 검수해도 좋아.”
그가 손을 뻗어 자기 잔을 집으려 했다. 리에나가 몸을 돌려 하인에게 말했다.
“저 잔은 그대로 따로 두고, 같은 병에서 한 잔을 더 받아 주세요. 그리고 약품 시험지와 은침을 준비해요.”
“리에나!”
디온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리에나는 뒤돌아 그를 보았다.
“축배 전에 잔을 옮기시겠다면, 그 행동부터 사람들이 기억하겠지요.”
디온이 손을 허공에 멈췄다. 평소처럼 웃지 못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할 것처럼 그런 말을 하네. 너 요즘 좀 이상했어.”
“이상한 사람은 술병을 빼앗는 쪽이 아니라, 술병을 만지지 않는 쪽입니다. 저는 아직 아무것도 만지지 않았어요.”
리에나가 헬레나를 흘끗 보았다. 헬레나가 이미 쟁반에서 술병을 받아 하인에게 건넸다.
“시험지를.”
헬레나가 낮게 읊었다. 하인이 달려 나갔다. 연회장 안에 소란이 일었다. 귀족들이 술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이어졌다. 에스텔라가 옆의 내빈에게 뭐라 속삭였다.
“잔은 여기 있습니다.”
리에나가 디온의 잔을 가리킨 채 말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대로 두세요.”
잠시 후 하인이 은빛 침과 약품 시험지를 가져왔다. 리에나는 시험지를 펼치게 하고, 새 잔에 담긴 포도주를 몇 방울 떨어뜨리게 했다.
“같은 병에서 나온 두 잔, 한 잔은 새 잔에 쏟고 한 잔은 그대로 검사하세요.”
시험이 시작됐다. 은침이 먼저 들어갔다. 새 잔의 포도주에 닿은 은침은 잠깐 반짝이다 색을 잃지 않았다. 하인이 디온의 축배 잔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때 리에나가 명령했다.
“잔은 움직이지 말고 숟가락으로 떠서 시험지에.”
디온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리에나, 네가 지금 무슨 약혼 연회를 무슨 재판장으로…”
카이우스가 한 걸음 물러나며 연회장 문 쪽에 있던 기사들에게 고개를 짧게 까딱였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모두 자리에.”
카이우스의 낮은 목소리에 귀족들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는 디온을 보지 않고 서기에게 말했다.
“검수 결과가 나올 때까지 퇴장은 불가다.”
리에나는 시험지를 들여다보았다. 포도주가 종이에 퍼지면서 붉은빛이 돌았다. 잠깐, 그것이 보랏빛으로 변하고 이내 어두운 푸른빛에 가까워졌다. 은침도 숟가락에 옮긴 잔의 포도주에 닿자 침 끝이 회색으로 흐려졌다.
“변색입니다.”
헬레나가 가장 먼저 말했다. 리에나는 주변을 겨우 한 번 둘러보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디온의 얼굴이 백지처럼 굳어 있었다.
“독입니다.”
리에나가 또박또박 말했다. 술병이 들린 쟁반이 잠시 흔들렸다. 디온이 급히 반박했다.
“이건 아닐 거야. 누군가 바꿔치기한 거야. 나는 몰라. 리에나, 나를 봐. 내가 너한테 독을 탈 사람으로 보여?”
리에나는 그 말을 다 듣고도 대답을 늦췄다. 연회장의 모든 시선이 그 침묵에 매달렸다. 한 호흡 뒤, 그녀는 입을 열었다.
“보이는지 여부는 법정이 다루면 됩니다. 저는 오늘, 이 연회에서 약혼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술잔이 테이블 위로 내려앉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났다. 디온이 소매를 움켜쥐며 리에나에게 다가가려 했다.
“거부를 하더라도 이건 우리끼리 정리할 일이야. 일단 잔부터 나한테 줘.”
“헬레나.”
리에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헬레나가 디온의 축배 잔을 받아 냅킨으로 감싸고 품 가까이 가져갔다. 봉인된 술병은 카이우스의 시종이 별도로 집었다. 디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건 내 잔이야. 내가 확인하지도 못하고…”
“그러게요.”
리에나가 짧게 잘랐다.
“그래서 그 잔은 이제 왕실 법정에서 확인하면 됩니다.”
“리에나!”
디온이 팔을 뻗는 순간, 검은 소매가 냉기처럼 그 앞에 놓였다. 카이우스가 디온의 어깨를 밀지도 잡지도 않고, 그 앞에 서기만 했다.
“물러나.”
“형님!”
“이 연회장은 지금 봉쇄 중이다. 흥분한 널 잔 가까이 둘 이유가 없다.”
디온이 숨을 몰아쉬며 형을 쳐다봤다. 카이우스의 눈빛은 그보다 한참 아래 온도에 가 있었다. 그가 기사에게 명령했다.
“문을 열지 마라. 모든 출입을 기록해라.”
“네, 후계자 어른.”
그때 에스텔라가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웃었다. 얼굴은 하얗게 떠 있었다.
“이런 자리에 제가 끼어 있는 게 폐가 되네요. 저는 아무 정보도 없는 하객이니…”
“자리에 계십시오.”
리에나의 목소리가 에스텔라의 어깨를 잡았다. 에스텔라가 한 손을 손목에 얹은 채 웃음을 지켰다.
“리에나, 나는 그냥 축하하러 왔는데 이러면 섭섭한 마음까지 들어요.”
“그 마음은 법정에서 여쭙겠습니다. 퇴장은 지금 불가하다고 후계자 어른께서 말씀하셨는데요.”
카이우스가 기사가 아닌 리에나를 바로 보았다. 잠깐의 침묵. 그가 입을 열었다.
“벨티르 후계자로서 선언한다. 이 시각부터 대연회장의 출입을 봉쇄하고, 연회에 오른 모든 인원과 물품은 왕실 법정의 1차 증거로 본다.”
귀족들 사이로 굵은 소란이 지나갔다. 리에나는 그 파도를 가만히 받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저 아르젠트는, 그 봉쇄를 받아들입니다.”
디온이 그 말을 가로챘다.
“받아들여? 형님이 뭔데 보호를 해? 약혼자는 나야. 리에나, 지금 형 손을 잡는 건 가문 간 계약을 뒤집자는 뜻이야.”
“약혼은 있었지만, 약혼자의 잔에서 독이 나왔어요. 뒤집은 것은 제가 아니라 잔입니다.”
리에나는 바로 그다음 문장을 준비했다. 심장이 조금 빨리 뛰었다. 두렵지 않았다. 온 연회장이 술을 올리려다 멈추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디온 벨티르 공자가 아니라, 벨티르 후계자 카이우스와 손을 잡겠습니다. 보호와 혼인 동맹으로.”
잠깐, 정말 연회장이 멎은 것 같았다. 촛불만 움직였다. 에스텔라가 손톱을 손바닥에 파고들며 미소를 붙잡았다. 디온이 무슨 말을 하려다 멈췄다. 헬레나는 잔을 품에 안은 채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리에나와 카이우스의 곁을 열어 두었다.
카이우스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가 천천히 리에나 옆으로 섰다. 검은 군복의 어깨선이 그녀의 시야 왼쪽을 채웠다.
“벨티르 가문은 아르젠트 공녀의 신변을 보호한다.”
그가 곧게 말했다. 낮은 톤이 마지막 두 음절을 잘랐다.
“법정에 설 때까지.”
리에나가 목덜미를 손등으로 문지르지 않으려고 손을 옆으로 내렸다. 대신 말했다.
“가 봅시다. 저와 그쪽이 더 앞으로 설 차례니.”
디온이 리에나의 정면으로 움직였다. 형제 사이에 긴장이 선처럼 걸렸다. 디온은 분노로 떨고 있었고, 리에나는 그 앞에서 똑바로 서 있었다. 카이우스가 리에나의 반 보 앞을 막아섰다.
축배는 더는 아무도 입에 대지 않았다. 봉쇄된 연회장은 잔과 병과 사람을 그대로 세워 둔 채, 그렇게 오늘 밤의 증거가 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