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공녀의 이번 생은 약혼자의 형과

2화

서재 창밖의 회랑엔 아직 철거되지 않은 의자가 한 줄 비스듬했다. 간밤에 누군가 놓고 간 외투가 그 위에 걸려 있었고, 해가 겨우 낮은 담장을 넘는 시각이었다.

리에나는 그 외투를 보지 않았다. 서재 문을 닫는 순간, 탁자 위에 올려둔 계약 초안을 먼저 확인했다.

“밤새 수정하셨습니까.”

카이우스가 책상 반대편에서 물었다. 검은 군복의 소매는 올라가 있었고, 받침대 위에 잉크병이 열려 있었다.

“그쪽이 먼저 보십시오. 서명 전에 이의가 있을 테니.”

리에나가 초안을 밀었다. 카이우스는 서서 두 번째 쪽을 넘겼다. 그의 오른손 검지에 낀 흑요석 반지가 종이를 스칠 때마다 미세한 소리가 났다.

“보호 기한이 짧다.”

그가 말했다.

“법정에 설 때까지로 들었습니다. 조건은 그대로 옮겼을 뿐입니다.”

“그다음은.”

“그다음까지 요구할 권리는 제게 없어요.”

“공녀가 먼저 손을 내밀었으면서.”

카이우스가 천천히 리에나를 보았다. 그 눈빛은 추궁이 아니라 계산에 가까웠다. 그가 종이 한쪽을 짚었다.

“혼인 조건만 있고 혼인 일정이 없다.”

“혼인을 미룬다는 전제를 쓰지 않으면, 제 신병은 벨티르 가문에 묶이기만 합니다. 상대가 형인지 동생인지보다, 저는 오늘 아침까지 약혼자와 갈라선 사람이에요.”

“그걸 누구보다 잘 안다.”

“법정 전에 모든 조항을 확정해야 합니다. 어제 선언만으로는 계약이 성립하지 않으니.”

카이우스가 잠시 서류에서 손을 뗐다.

“보호 범위를 넓혀라. 저택 경계와 법정 이동만으론 부족하다.”

“그 범위가 어디까지입니까.”

“수도 안. 그리고 아르젠트 저택까지 포함한다.”

리에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상대가 먼저 조건을 올렸다. 딱 그만큼 받아 치면 되는 지점이었다.

“그 조항을 넣는 대신, 벨티르 가문은 왕실 법정에서 제 진술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증언은 제가 정한 순서로 합니다.”

“협상 같군.”

“협상입니다.”

카이우스는 대답하지 않고 초안을 들어 탁자 가운데 놓았다.

“헬레나를 들여보내.”

리에나가 한 호흡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두 번 두드리자 헬레나가 들어왔다. 갈색 머리를 낮게 묶은 채, 손에 얇은 서류 뭉치를 쥐고 있었다. 시녀복 허리춤에는 편지칼이 기울어져 있었다.

“증인 선서록은 준비했습니다.”

헬레나가 말했다.

“좋아요. 저와 후계자 어른이 서명하는 동안, 당신은 이 계약을 한 번 더 읽으세요.”

리에나가 지시했다. 헬레나는 시선으로 한 번 물었다. 공녀가 정말 이 계약을 맺으려는 것이냐는 뜻이었다. 리에나는 끝을 보라는 듯 턱을 약간 들었다.

카이우스가 새 잉크로 펜을 찍었다. 그가 계약서 마지막 쪽에 길고 곧게 이름을 써 내려갔다. 받침대가 서명의 마지막 획에서 한 번 가볍게 울렸다.

리에나가 펜을 받았다. 손가락 둘째 마디의 펜 굳은살이 낯설지 않았다. 이름 위에 날짜를 적고, 그 옆에 도장 대신 아르젠트 가문의 작은 인장을 눌렀다.

“증인, 헬레나 그레인.”

헬레나가 규정된 문장을 읽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이 계약이 두 가문의 합의 아래 서명되었음을 확인하고, 오늘의 대면을 성서에 따라 증언합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헬레나가 증인 선서록 사본을 집어 올렸다. 그녀는 계약서 등본과 나란히 접어 리에나에게 건넸다.

“이걸로 성립합니다.”

리에나가 말했다.

“칙령도, 증인도 없던 맹세보다는.”

카이우스가 계약서 원본을 서랍 위에 올려 말렸다. 그가 시선을 들지 않고 덧붙였다.

“법정에 설 때까지가 아니라. 사건이 끝나기까지.”

“조항에 없던 해석이군요.”

“조항에 넣지 않았을 뿐이다.”

리에나는 그 말을 반박하지 않았다. 계약서 등본을 두 손으로 말아 쥐자 종이가 따뜻했다. 그 온기가 증인이 목격한 이 계약의 무게 같았다.

그때 문 밖에서 집사가 낮게 말했다.

“왕실 사절, 오르한 루벤 경이 도착하셨습니다.”

카이우스가 고개를 들었다.

“들이게.”

문이 열리고, 길고 어두운 갈색 관복을 입은 사내가 들어왔다. 오르한 루벤은 손에 납작한 문서함을 들고 있었다. 그는 서재 안을 한 번 훑고는 탁자 앞 정확한 거리에서 멈췄다.

“이른 아침 실례합니다.”

부드럽지만 힘 있는 목소리였다.

“벨티르 후계자 카이우스 님, 아르젠트 공녀 어른.”

그가 문서함을 올려 열었다.

“왕실 법정은 디온 벨티르 공자에 대한 독살 고발을 접수했습니다.”

리에나는 대답하기 전에 심장이 한 번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두렵지는 않았다.

“증거는.”

카이우스가 물었다.

오르한이 문서함에서 세 장의 서류를 꺼냈다. 첫 장은 고발장, 둘째 장은 증거 사진 대신 물품 목록과 봉인 번호가 적힌 확인서, 셋째 장은 매수 증인 선서 목록이었다.

“피의자 문장이 찍힌 약병 한 개. 남부식 무색 유리 재질입니다.”

오르한이 또박또박 말했다.

“그리고 독살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하녀의 선서가 봉인 증거로 등재됐습니다.”

“약병에 아르젠트 문장이 있다?”

리에나가 물었다.

“목록상으로는 그러합니다. 원본은 열람 권한이 제한됩니다.”

오르한은 마지막 왕명을 펼쳤다. 딱딱하게 접힌 종이의 봉인은 이미 뜯겨 있었다.

“아울러, 재가 보류 왕명입니다. 벨티르 가문의 후계 계승 재가는, 금번 사건의 법정 판결 이전까지 보류됩니다.”

카이우스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흑요석 반지가 시계 반대 방향으로 아주 천천히 돌려졌다.

“사흘 뒤, 왕실 법정이 열립니다. 판결 전 도주는 지위와 재산 몰수입니다.”

오르한이 서류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증거 원본은 오늘 오전, 왕실 보관소로 옮겨집니다.”

“고발장 사본만 받는다.”

카이우스가 명령조로 잘랐다.

“물품 목록과 약병 보관 경로도 같이 주십시오.”

리에나가 덧붙였다.

“고발장 사본은 드릴 수 있습니다. 물품 목록은 열람용이므로 필사만 허용됩니다.”

오르한이 말했다.

카이우스가 반 발짝 나서려다 멈췄다.

“증거 사본 요청이 거부당할 만한 사안인가.”

“절차입니다. 법정에서 원본 대질이 예정되어 있으니, 지금 사본을 만들면 오히려 공녀 어른께 불리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은 겉으로는 잘못이 없었다. 법정 대질에서 사본이 유포되면 증거 보존 근거가 흔들릴 수 있었다. 그러나 고발 초기에 증거 사본조차 없다는 건, 변호 준비를 봉쇄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럼 열람용 목록을 여기서 직접 보게 해주시죠.”

리에나가 말했다.

“필사할 시간도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오르한이 물품 목록을 넘겼다. 리에나는 펜을 들어 빈 종이에 약병 보관 경로를 그대로 옮겨 적기 시작했다.

그녀의 글씨는 빨랐다. 남부 유리 공방에서 출하된 약병이 항구 관리소를 거쳐, 수도 잡화 상점으로 들어왔고, 그 뒤 벨티르 저택 별관 창고로 들어왔다고 적혀 있었다. 보관 주체는 저택 하녀로, 언급된 이름은 선서록의 증인과 같았다.

“이 경로가 왕실 조사관이 확인한 것입니까.”

“고발 제출인이 첨부한 진술과 물품 출하 기록을 대조한 것입니다.”

“누군지 여쭤도 됩니까.”

리에나가 손을 멈추지 않고 물었다.

“고발 제출인 정보는 비공개입니다. 다만 법정에서... 들으실 기회가 있을 겁니다.”

카이우스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가십시다.”

리에나가 필사를 마쳤다. 마지막 줄의 '남부 유리 공방'이라는 글자 옆에 작게 점을 찍었다. 그 점은 나중에 눈에 들어오게 되리라는 것을 리에나는 알았다.

오르한이 서류를 다시 문서함에 넣었다.

“이상입니다. 사흘 뒤, 증거의 원본 봉인 상태가 법정에서 먼저 확인될 겁니다.”

그가 목례하고 문 쪽으로 돌아섰다. 묵직한 발걸음이 두 번 떨어지고, 집사가 따라나서는 소리가 들렸다.

“리에나.”

헬레나가 반 걸음 다가왔다. 목소리를 낮췄다.

“어젯밤, 동선을 확인했더니... 디온 공자가 에스텔라 님과 만나는 걸 본 사람도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그 이상은 아직... 말을 아끼겠습니다.”

리에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법정에서 구체적 사실만 말해요. 추측은 득이 아니에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말, 사건이 끝날 때까지 당신 입에서만 직접 나오게 하세요.”

헬레나가 서류 뭉치를 두 손으로 고쳐 잡았다. 불안한 기색이 얼굴에 잠깐 스쳤으나, 그녀는 한 번 입술을 다물고 시선으로 답했다.

“후계자 어른께서 불러 주시기 전까지 대기하겠습니다.”

헬레나가 서재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카이우스가 벽 한쪽으로 걸어가 금고 앞에 섰다. 작은 열쇠를 돌리는 소리가 두 번 났다. 그가 안쪽에서 계약서 원본을 꺼내려다, 먼저 손에 든 밀서를 서류 뭉치와 함께 별도의 납작한 칸에 밀어 넣었다.

리에나는 그 모습을 기억했다.

“그건.”

“아직 증거가 아니다.”

카이우스가 잘랐다. 어미가 짧았다. 그는 계약서 원본을 따로 감싸서 그 위에 올렸다.

“증거가 될지도 모르는 걸, 왜 계약서와 같은 금고에?”

“꺼낼 사람이 이 서재에 둘뿐이다.”

그가 금고 문을 잠그려다 멈추고 리에나를 돌아보았다.

“법정 전에, 그 목록에서 뭘 짚었지.”

그가 물었다.

“남부 유리 공방.”

리에나가 일어서며 필사본을 내려다봤다. 그녀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약병의 출처가 아니라 유통 경로를 먼저 봐야 합니다. 남부 무역로에서 이 공방 물품을 다루는 상인은 거의 정해져 있다고 들었어요.”

“에스텔라.”

카이우스가 조용히 한 단어를 내려놓았다.

“그쪽도 이미 알고 있었군요.”

“의심했다.”

리에나가 그에게 시선을 옮겼다.

“법정 전에 남부 무역 경로부터 추적합니다.”

“누구를.”

“상단 기록을 가진 조합부터. 필요하면 직접 갑니다.”

카이우스가 금고 손잡이를 놓지 않은 채 그녀를 돌아보았다. 창밖의 해가 그의 왼쪽 어깨를 밀었다. 그가 말했다.

“동선 감시를 먼저 붙인다.”

“좋아요. 그래야 저도 움직이기 편합니다.”

“혼자 가지 마라.”

그 말은 명령이었다. 리에나는 흉터 있는 목덜미가 조금 뜨거워지는 것을 무시하고, 필사본을 들어 보이며 답했다.

“함께 가시든지요.”

“어디까지.”

“그 남부 유리 공방의 출하 장부가 있는 항구 기록소까지.”

그녀가 첫걸음을 뗐다. 금고 앞의 그림자가 길게 벌어졌고, 카이우스는 손잡이를 놓지 않았다. 그의 손이 그 위에 단단히 올려진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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