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공녀의 이번 생은 약혼자의 형과

3화

리에나가 이번 생에서 반드시 살아남아야 할 증거조차, 마음만으로는 보호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가 다시 탁자 앞으로 몸을 돌리자, 카이우스가 금고 손잡이를 놓고 서류 뭉치에서 납작한 칸을 열었다. 방금 넣었던 것을 다시 꺼내는 동작이 아니라, 별도의 얇은 봉투를 덧대는 동작이었다. 봉투 위로 검은 밀랍이 눌려 있었다.

“디온 몰래 가로챈 거라더니, 꺼낸 걸 제가 본 것도 괜찮은 겁니까.”

“이미 봤다.”

카이우스가 봉투 모서리를 매만졌다. 밀랍이 눌린 자리에 작은 인영이 떠 있었다.

“법정에서 위조 의심은 없습니까?”

“봉인 원본과 전달자 증인이 있다.”

“전달자는 안전합니까?”

카이우스가 봉투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손가락이 봉투 한쪽을 눌렀다.

“오늘 밤 왕실 보관소로 옮긴다. 전달자는 내가 붙인 사람이다.”

그 말은 짧았고, 더는 묻지 말라는 어조였다. 리에나는 들여다보았다. 봉투 겉에는 아무 표기가 없었다.

“사본 없이 법정에서 원본만으로 답하면, 저희가 더 불리할 수 있습니다.”

“사본은 만든다. 여기서.”

책상 한쪽에 빈 종이와 필기구가 놓였다.

“제가 직접 써도 되겠습니까?”

“법정에서 공개할 부분만.”

카이우스가 봉투를 열었다. 안쪽에서 접힌 서류와 더불어 남부 특유의 얇은 참조 노트가 나왔다. 그가 서류를 펴는 손길은 느렸다. 종이가 오래된 탓에 가장자리가 말려 있었고, 한쪽 귀퉁이가 바다의 습기를 먹어 굽어 있었다.

리에나는 서류를 눈으로 훑었다. 밀서 안에는 중계인을 표시하는 기호와 출하 날짜 흔적이 섞여 있었는데, 절반은 알아보기 어려운 약어였다.

“특정 가문이란 표시는 없어요. 대신 기호들이 남부 무역 조합의 출하 표기와 닮았습니다.”

“그래서 아까 항구 기록소로 가자 한 거다.”

“법정 전에 확인이 필요합니다. …사흘 뒤가 기한이라는 것도, 오늘이 첫날이라는 점도.”

카이우스가 서류를 반으로 접으려다 멈추고, 빈 종이를 리에나 앞으로 밀었다.

“사본은 여기서 만들고, 원본은 보관소로 가기 전에 지금 봉인해 둔다.”

“왕실 보관소에 맡기면 열람 절차가 복잡하지 않습니까?”

“오늘 밤에는 그래야 안전하다.”

리에나는 종이에 서류의 필요한 구절을 옮겨 썼다. 문자 일부가 지워진 부분에는 그 사실을 별도로 표시했다. 카이우스가 그 옆에서 밀서를 접고, 새 밀랍을 녹여 원본 위에 다시 봉인하는 동작이 이어졌다. 녹은 밀랍 냄새가 서재에 얇게 퍼졌다.

“이제 보관소로 보내겠습니까?”

“먼저 디온부터 부른다.”

카이우스가 벨을 당겼다. 곧 대기실 쪽에서 하급 시종 한 명이 얼굴을 보였다. 카이우스가 말했다.

“둘째 공자를 서재로.”

시종이 고개 숙이고 물러났다. 리에나는 완성한 사본을 들어 마르기를 기다렸다. 잉크가 축축하게 번진 구석이 있었다.

“저는 이 자리에 있어도 됩니까.”

“있어라. 네가 봐야 한다.”

봉인된 밀서는 금고 안이 아니라 책상 위 납작한 서류함에 놓였다. 열쇠는 카이우스의 상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복도 쪽에서 두 번 가벼운 발소리가 울렸다. 문이 열리고 디온이 들어왔다. 연회용 프록코트를 벗은 그는 얇은 실내복 차림이었다. 목의 비단 스카프만 여전히 매고 있었다.

“형님, 이 시간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디온이 상냥하게 시작했지만, 리에나를 보자 미소가 반 박자 늦었다.

“앉아라.”

카이우스가 손가락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디온은 곧바로 앉지 않고 서류함 위를 흘낏 보았다.

“먼저 하나 묻지요.”

“질문은 내가 한다.”

카이우스가 서류함을 열어 봉인된 밀서를 탁자 위로 올렸다. 밀랍은 아직 윤기 있었다.

“이 편지를 네가 안다면, 후계 재가는 스스로 포기해라.”

디온이 천천히 고개를 갸웃했다. 눈동자가 밝은 녹색으로 반짝였으나 이내 입가가 굳었다.

“처음 보는 겁니다.”

“그래.”

“정말이다, 형님. 이건 제가 쓴 게 아닙니다.”

디온의 어미가 빨라졌다.

“답은 그거냐.”

“아, 편지를 쓴 적조차 없다니까요. 누가 제게 뒤집어씌우는….”

카이우스가 서류를 들어 디온의 눈앞에 기울였다. 남부식 검은 밀랍의 인영이 디온의 시선을 받았다.

“내가 쓴 게 아니라면, 왜 네 사람이 이걸 손에 넣으려 했지.”

디온이 손을 내밀다가 제지당했다.

“확인할 수라도 있게 해주셔야, 반박도 하겠습니다.”

“안 된다. 원본은 오늘 밤 보관소로 간다.”

디온이 들숨을 한 번 깊게 들이켰다. 스카프 아래 목울대가 움직였다.

“그럼 저는 여기서 할 말이 없네요.”

그가 의자 뒤로 반 발 물러섰다.

“포기서를 쓸 생각은.”

“없습니다.”

“내일이면 법정 준비 때문에 네가 직접 불려 간다. 그때도 그렇게 말해 봐.”

디온이 입술을 열려다 말았다. 리에나는 그의 손이 왼쪽 소매를 짧게 쥐는 것을 보았다.

“저, 가도 되겠습니까.”

카이우스가 손을 들어 뒤쪽 문을 가리켰다. 디온은 인사도 제대로 마치지 않고 서재를 나갔다. 문이 닫히자, 발소리가 복도에서 한 차례 멈추었다가 빨라졌다.

카이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 뒤편의 작은 경대를 열었다. 그 안에서 금속 호루라기를 꺼내 짧게 불었다. 부관으로 보이는 기사가 곧 안으로 들어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둘째 공자의 동선을 기록한다. 밤새.”

“저택 밖까지입니까?”

“배후 접촉까지 보게. 특정 인물이 오면 막지는 말고, 시간과 장소를 즉시 알린다.”

부관이 밀서를 힐끗 봤다.

“이 서류는 오늘 밤 왕실 보관소로 직접 옮겨라. 도착 기록을 나에게 가져와.”

카이우스가 낮은 톤으로 지시했다. 부관이 일어나자 그는 말했다.

“봉인을 뜯으면 알 수 있다.”

부관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부관마저 나가자 리에나는 마른 사본을 집어 들었다. 종이 아래쪽이 아직 덜 굳은 잉크 때문에 손가락에 옅게 눌러붙었다.

“저는 이걸 밤새 다시 보고, 내일 항구 기록소에서 어떤 출하 기록과 맞는지 확인하겠습니다.”

“내가 먼저 본다.”

카이우스가 그녀 앞의 사본을 가져갔다. 사본 위쪽 모서리가 그의 손에서 조금 휘었다.

“원본은 보관소로 갔으니, 이게 남는 유일한 사본이군요.”

“아니다. 네가 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두 번째다.”

그 말에 리에나는 서늘해진 사본을 그에게 맡기고, 탁자에 놓인 빈 잉크병 하나를 정리했다. 잉크병 밑에 깔린 남부 밀서의 포장지가 작게 접혀 있었다.

“에스텔라 영애는 조용히 있지 않겠죠.”

“그쪽 접촉을 감시하는 이유다.”

카이우스가 사본을 등잔 아래로 가져갔다. 불빛에 비친 필기가 일그러졌다.

“법정 전에, 배후가 먼저 움직이도록 둡니다.”

“포기하지도, 먼저 자백하지도 않게.”

“그래.”

두 사람의 대화는 거기서 끊겼고, 서재 밖 복도에서는 부관이 디온의 뒤를 밟는 소리가 사라져 갔다.

하인 복도는 촛불이 반쯤 줄어든 채였다. 디온이 서재를 나간 뒤, 리에나는 곧장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복도 끝에서 헬레나가 물동이를 든 하녀와 어깨를 스치고 돌아서다 멈췄다.

“공녀님.”

“방에서 다시 봐요.”

리에나가 낮게 말했다. 헬레나는 대답 대신 물동이를 옆 하녀에게 건넸다. 두 사람은 헬레나의 방으로 함께 걸었다.

문을 닫자 헬레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날 밤 디온과 에스텔라 영애를 봤을 때.”

리에나가 침대 기둥 앞에 서서 말했다. 헬레나의 손이 앞치마 끈을 고쳐 쥐었다.

“에스텔라 영애 손목에 진주 팔찌가 있었어요?”

헬레나의 시선이 잠깐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는 방 한구석의 옷장 위에 놓인 촛대를 바라보며 답했다.

“있었습니다. 남부산 진주였어요.”

“그 뒤로 본 적 있나요.”

헬레나가 고개를 저었다. 손이 앞치마 끈에서 떨어졌다.

“그날 이후로 보지 못했습니다. 저녁 내내 차림이 바뀐 분이 아니라서, 팔찌가 사라진 건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리에나는 옷장 위 촛대에서 헬레나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헬레나는 말을 이었다.

“법정에서 이 말을 하게 된다면, 저는 선서할 수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리에나가 답했다. 헬레나가 반 박자 머뭇거렸다.

“하지만 본 것만 말해야 해요. 그 이상은 우리에게도 독이 됩니다.”

헬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에나는 그녀의 손을 보지 않고 목소리만 낮췄다.

“증인 서약서는 제가 준비합니다. 내일 아침 전에 서명하고, 사본은 여기에 두세요.”

“공녀님이 직접요?”

“내가 하는 게 안전해요.”

헬레나가 입술을 열다 다물었다. 그녀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접힌 천을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렸다. 무슨 말을 고르는 듯 잠깐 그것을 내려다봤다.

“법정에 서기 전에, 에스텔라 영애와 다시 마주칠 일이 있습니까.”

“없도록 할 거예요.”

“저는, 그 팔찌가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헬레나가 접힌 천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소매 아래 손끝이 살짝 떨렸지만 이내 가라앉았다.

“팔찌만으로는 부족해요. 남부 신항에서 그 팔찌가 어디로 들어왔는지가 먼저예요.”

“기록이 남아 있겠습니까.”

“확인해요.”

리에나가 짧게 답했다. 그녀는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서약서는 아침에.”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헬레나가 문까지 따라나와 인사를 했다. 리에나는 하인 복도를 되짚어 계단을 올랐다. 발소리가 돌바닥에 한 번씩 끊겼다.

*

새벽이었다. 카이우스의 서재 창가에 놓인 등잔은 다 타서 심지만 남아 있었다. 리에나가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카이우스는 책상 앞에 서 있었다. 검은 군복 위로 옅은 회색 눈이 움직였다.

“헬레나 증언은 정리했다.”

그가 서류 한 묶음을 밀었다. 리에나는 맞은편에 서서 서류를 끌어당겼다. 증인 서약서 사본이 맨 위에 있었다.

“팔찌는 그날 밤 이후 보이지 않았답니다.”

“진주와 자수품 단가를 뽑았다.”

카이우스가 말했다. 리에나는 서류 아래쪽에서 남부 신항 출항 기록과 단가표가 적힌 장부를 발견했다. 그녀는 장부를 넘기지 않고 멈췄다.

“출항 명단에는 빠져 있어요.”

“닻줄을 푼 배가 명단 없이 남부를 떠날 수는 없다.”

“그러니까.”

리에나가 장부의 한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진주 장식 단가가 다른 행보다 높게 적혀 있었다.

“기록에서 팔찌가 빠졌다는 뜻입니다. 명단 없는 선적분이 따로 있다는 거죠.”

카이우스가 그녀가 짚은 줄을 내려다봤다. 이내 책상 위의 다른 서류를 뽑아 리에나 앞으로 밀었다. 남부 선적 대조 목록이었다.

“에스텔라가 사들인 진주는 이 단가로는 정상 거래가 아니다. 그걸 목록으로 만들었다.”

카이우스가 말했다. 리에나는 목록을 접어 손에 쥐었다. 그리고 밀서 사본을 그 위에 포갰다.

“이의신청을 하죠.”

“오르한이 다시 온다.”

그가 창밖을 보지 않고 말했다. 리에나는 목록과 사본을 든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르한 루벤은 해가 뜨기 전 서재 문을 두드렸다. 입회 진행관이 뒤따르지 않았다. 그는 전날과 같은 무표정으로 들어와 문가에 섰다.

“이의신청 자료를 접수하러 왔습니다.”

카이우스가 책상 위에 봉인된 밀서 원본과 증인 서약서 사본, 남부 선적 대조 목록을 가지런히 놓았다. 오르한은 그것들을 하나씩 넘겨보고 서류 봉투에 넣었다.

“원본은 어떻게 됩니까.”

리에나가 물었다. 오르한의 손이 봉투 입구에서 잠시 멎었다.

“법정 전까지 원본 보관 주체는 가주 대리, 카이우스 벨티르 후계자 어른으로 못박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법정 개시 전에 원본이 벨티르 저택 밖으로 나갈 일은 없도록 하십시오.”

카이우스가 답했다.

“그렇게 접수합니다.”

오르한이 짧게 고개를 숙였다. 그는 이의신청서 사본을 품에 넣고 서재를 나갔다. 정문 밖으로 나가는 발소리가 복도를 한 번 울렸다.

리에나는 목록과 밀서 사본을 서류 봉투에 다시 넣어 자신의 가방에 밀어 넣었다.

“내일 법정 전정 출두예요.”

“그 전에.”

카이우스가 등잔 옆 벽에 걸린 시간표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증거 제출 마감을 확인한다.”

리에나가 그 옆으로 가 섰다. 시간표에는 법정 기일과 전정 출두 시각이 기입되어 있었다.

“증거 제출은 오늘 새벽까지지 않아요?”

“오르한이 접수했다. 법정 전까지 추가 제출은 없을 거다.”

카이우스가 낮게 말했다. 리에나는 손에 든 문고리를 놓고 시간표 아래 적힌 절차를 소리 내어 읽는 대신 눈으로만 훑었다. 그 뒤 그녀가 말했다.

“내일 아침, 함께 전정에 서는 거로 확인하죠.”

“그렇게 하지.”

카이우스가 말했다. 그는 시간표 가장자리에 손가락을 대고 왕실 법정 기일을 한 번 짚었다. 리에나는 그 손가락이 시간표에서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재 밖 마당에서는 기사 두 명이 정문을 향해 걷고 있었다. 오르한이 이의신청서 사본을 든 채 종을 넘어가는 모습이 창가로 잠깐 보였다.

리에나는 서재에 남은 차가운 공기 속에서 목록이 든 가방을 집어 들었다. 카이우스는 시간표 앞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아직 마르지 않은 잉크 냄새가 얇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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