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녀의 이번 생은 약혼자의 형과
4화
대심리원 중앙홀의 석제 바닥이 낮게 울렸다. 리에나는 발을 한 번 더 디디며 그 울림이 천장까지 닿기를 기다렸다. 아침 햇살이 높은 창을 따라 재판석까지 비껴 들었고, 서기관 두 명이 이미 원탁 앞에 앉아 있었다.
“증거 제출과 이의신청 접수 확인 차 출두하셨군요.”
테오도르 린드 재판장이 중앙석에 앉은 채 말했다. 그는 흰 수염을 한 번 쓰다듬고 원탁 위의 봉인 상자를 가리켰다.
“올리십시오.”
카이우스가 반 걸음 앞으로 나섰다. 손에 든 서류 봉투를 원탁 위에 놓자 종이가 돌에 닿는 소리가 작게 났다.
“밀서 원본과 이의신청 기록입니다.”
“봉인 상태는.”
“어젯밤 제 서재에서 봉인을 확인했고, 새벽에 부관이 왕실 보관소로 옮겨 도착 기록을 가져왔습니다.”
테오도르가 서류 봉투를 열어 봉인 상자와 나란히 놓았다. 밀서 원본은 짙은 남색 끈으로 묶여 있었고, 그 위로 벨티르 가주의 인장이 눌려 있었다.
“출처를 묻겠습니다.”
카이우스가 품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남부 신항에서 수도로 넘어온 밀사가 운반하던 물품입니다. 가로챈 경위는 이 사본에 적어 뒀습니다.”
“증인은.”
“부관이 전달을 확인했습니다. 선서는 법정에서 받으실 수 있습니다.”
테오도르가 침묵 속에서 사본의 첫 장을 넘겼다. 종이 넘어가는 소리만이 대심리원의 공기를 갈랐다. 리에나는 카이우스의 손을 보지 않았다. 재판장의 눈썹이 움직이는 것만 보았다.
“이의신청 자료는 접수됐습니다. 이 밀서도 본안 전에 봉인 증거로 넣겠습니다.”
테오도르가 서기관에게 손짓했다. 서기관이 봉인 상자를 열고 밀서 원본을 안에 눕혔다. 뚜껑이 닫히고, 법정 직인이 찍히는 소리가 두 번 이어졌다.
“한 가지 통고합니다.”
카이우스가 고개를 들었다.
“벨티르 가문 후계 계승 재가는 이 사건 판결이 나기 전까지 보류됩니다. 오늘부터 법정 결정으로 유지되며, 왕명은 법정 폐정 후 별도 전달될 겁니다.”
리에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 통고가 이제 종이 위가 아니라 재판장의 입에서 나왔다.
“기록을 받고 싶습니다.”
리에나가 말했다.
“보존 조건과 재가 보류 통고 문구를 서면으로 떼어 주십시오.”
테오도르가 그녀를 처음으로 정면에서 보았다.
“공녀께서 직접 요구하십니까.”
“네. 제 신병과 계약의 효력이 연결되어 있으니, 사본 한 부는 저도 보관하겠습니다.”
“허가합니다.”
테오도르가 짧게 말했다. 서기관이 재가 보류 문구를 필사하기 시작했다. 붓이 닿는 소리가 이따금 멎었다가 다시 이어졌다.
카이우스가 리에나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 동작만으로도 갑옷 밖의 온기가 그녀의 어깨 쪽으로 닿았다.
“나가자.”
그가 낮게 말했다.
대심리원 밖으로 나오자 복도는 한층 조용했다. 아직 이른 시각이라 법정 관계자 몇 명과 입회 진행관 한 명만이 통로 끝을 오갔다. 리에나는 손에 받은 기록지 한 부를 접어 품에 넣었다.
서편 대기실 문 앞에 디온 벨티르가 기대고 있었다. 리에나보다 먼저 그를 알아본 것은 카이우스였다.
“형님.”
디온이 몸을 세웠다. 머리칼이 이마를 덮었고, 겉옷 단추 하나가 열려 있었다. 그가 리에나를 보다가 카이우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젯밤 서재에서 그 편지, 제가 쓴 게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왜 왕실 보관소로 넣으셨습니까.”
“말했잖아.”
카이우스가 한 걸음 더 걸었다.
“가문이 반역 혐의를 받는 판국이다. 개인의 문장보다 먼저 보존될 물건이 있다.”
“가문 문제를 법정에 내보내면 북부 영지가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후계 재가 보류까지 나왔습니다.”
“네가 그걸 걱정하는 줄은 처음 안다.”
디온의 손끝이 벽을 짧게 눌렀다. 그의 목소리가 반 박자 높아졌다.
“그 편지가 어떤 경로로 형님 손에 들어왔는지, 법정에선 출처부터 물을 겁니다. 남부 상단과 얽혔다는 소문만으로 가문이 궁지에 몰리는 건 저도 모르지 않아요.”
카이우스가 품에서 밀서 사본 한 장을 꺼내 접힌 부분만 편 뒤, 한 줄을 소리 내어 읽었다.
“남부 신항 출하 표기, 하역자 미기재. 여기까지다.”
그는 사본을 다시 접어 품에 넣었다.
“나머지는 법정에서 밝혀진다. 궁금하면 재판장에게 물어.”
디온이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리에나는 그가 무슨 말을 삼켰는지 듣지 못했고, 그 대신 그가 벽에서 등을 뗄 때 문고리가 덜컥거린 소리를 들었다.
“…”
디온이 한숨을 섞어 말했다.
“알겠습니다. 다만 형님, 저는 오늘 아무것도 제출하지 않았습니다. 기억해 두십시오.”
그가 통로 반대쪽으로 걸어 나갔다. 발소리가 한동안 복도에 남았다가, 서쪽 출입문이 닫히면서 끊겼다.
대기실 앞은 다시 조용해졌다. 리에나는 그 자리에서 나가는 디온을 보지 않았다. 카이우스의 품에 사본이 들어간 그 손동작만을 곁눈으로 쫓았다.
“에스텔라 마르샤 영애입니다.”
대기실 쪽에서 입회 진행관이 다가와 낮게 알렸다.
“증인 준비 때문에 서쪽 출입구를 쓰신다는데, 지금 이 복도를 지나가야 합니다.”
리에나가 고개를 돌렸다. 복도 저편에서 에스텔라가 두 명의 시녀를 데리고 걸어오고 있었다. 옅은 살구빛 드레스 위로 햇빛이 떨어졌고, 그녀의 오른쪽 손목에는 남부산 진주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리에나는 그 팔찌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전생의 법정에서 이 팔찌가 증거로 제출되던 순간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진주만 세었다. 팔찌 안쪽 금속 마감에 새겨진 남부 유리 문양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에스텔라가 가까워졌다.
“공녀 어른. 벨티르 후계자 어른.”
그녀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른 아침부터 법정일이 많으시군요. 저는 증인 좌석 확인차 한 번 들렀을 뿐입니다.”
“팔찌가 아름답군요.”
리에나가 말했다. 에스텔라가 웃었다.
“남부에서 들인 거예요. 마음에 드실 줄은 몰랐네요.”
리에나는 한 호흡 뒤에 입을 열었다.
“팔찌 안쪽 문양도 남부 유리 공방의 것과 같아 보입니다.”
에스텔라의 손목이 살짝 뒤로 움츠러들었다. 리에나는 그 움직임이 드레스 주름에 가려지기 전에 재판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팔찌, 증거로 봉인해 주십시오.”
카이우스가 그 말을 받았다.
“남부 선적 대조 목록과 관련한 물증입니다.”
입회 진행관이 에스텔라에게 다가갔다.
“영애, 팔찌를 채워 두신 채 법정 관리에게 인계해 주시겠습니까.”
에스텔라가 세상없이 온화한 얼굴로 물었다.
“제 물건인데요. 무슨 근거로요.”
“근거는 제가 냅니다.”
리에나가 대답했다.
“남부산 진주와 무색 유리, 그리고 그 안쪽 문양. 법정에서 출처를 가릴 일이면 지금 봉인 인계되는 편이 영애께도 유리하실 겁니다.”
에스텔라가 잠시 리에나를 보았다. 그녀의 입가에 있던 웃음기가 한 겹 얇아졌다.
“그럼 확인받는 게 나으려나요.”
그녀가 손목에서 팔찌를 풀었다. 법정 관리가 납작한 봉인함을 열자, 에스텔라가 거기에 팔찌를 내려놓았다.
“인계합니다. 보관소 이송 기록을 저도 한 부 받고 싶네요.”
“작성되면 대기실로 보내겠습니다.”
입회 진행관이 말했다.
봉인함 뚜껑이 닫혔다. 법정 직인이 두 번 찍히고, 관리가 봉인함을 들어 보관소 쪽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리에나는 그 봉인함이 태양빛에 한 번 반짝이다가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보았다.
저녁 등불이 서재 창가에 번질 무렵, 헬레나가 증언서 초안을 리에나 앞으로 밀었다.
“그날 밤 자정 무렵입니다. 디온 공자께서 에스텔라 님과 서쪽 별관 회랑에서 만나시는 걸 봤습니다.”
헬레나의 목소리는 낮고 또박했다.
“에스텔라 님이 손목에서 팔찌를 풀어 디온 공자께 보여주셨고, 그 뒤로 그 팔찌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보여준 것만 확실합니까.”
리에나가 펜을 든 채 물었다.
“말소리가 들리지 않아 건넸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보여주신 동작까지만 사십시오.”
헬레나가 대답했다.
리에나는 그대로 적었다. 증언서에는 밀회 시간과 장소, 두 사람의 위치, 목격 뒤 팔찌 미발견만 남겼다.
“여기까지면 됩니다.”
리에나가 펜을 놓았다. 잉크가 아직 마르지 않은 문장 위로 손이 스치지 않게 하려는 듯 그녀가 종이 한쪽을 살짝 들었다.
“헬레나, 증언할 때 절대 짐작을 덧붙이지 마십시오. 보신 것만 말하세요.”
“명심합니다.”
헬레나가 답했다. 그녀가 리에나의 오른손을 보더니 조용히 덧붙였다.
“아가씨, 펜 굳은살이 다시 벌어졌습니다.”
“아직 아무것도 아닙니다.”
“법정 전에 연고라도 바르십시오. 서명할 때 손이 떨리지 않도록요.”
헬레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리에나는 자기 손을 거두고 진술서 초안을 집어 들었다.
자신이 연회에서 왜 잔을 받지 않았는지, 공개 검수를 누구에게 요청했는지, 남부 선적 대조 목록을 어떻게 확보했는지를 다섯 문장으로 나눠 적었다.
“한 번 소리 내어 읽어보십시오.”
리에나가 헬레나에게 말했다.
“…공녀께서는 축배 직전 공개 검수를 요청하셨고, 시험지 변색이 확인된 뒤 연회장 봉쇄를 요구하셨습니다.”
헬레나가 또렷하게 읽었다.
“이대로면 충분합니까.”
“피고는 아가씨가 아니라 디온 공자입니다. 이 진술서가 오히려 날이 되어야 합니다.”
헬레나가 답했다.
문이 열렸다. 카이우스였다. 옷소매에 밤공기 냄새가 배어 있었다.
“팔찌가 말했습니까.”
리에나가 물었다.
“팔찌는 말이 없다.”
카이우스가 등잔 앞으로 왔다.
“이송 접수증만 왔다.”
그가 검지로 접수증을 책상에 짚으며 짤막하게 말했다.
“내일 아침 전정 출두, 나도 간다.”
리에나가 그를 똑바로 보았다.
“확실히 하십시오. 공개석상에서 후계자 어른이 저와 함께 서는 일이에요.”
“그걸 먼저 말했어야지.”
카이우스가 책상 모서리를 등 뒤로 돌린 오른손으로 건너지르며 답했다.
리에나가 대꾸하지 않자 그가 검지의 흑요석 반지를 한 번 돌렸다.
“지는 않는다. 이제 보관소로 가지.”
밤이 내린 왕실 증거 보관소는 돌계단 아래 등불 두 개만 켜져 있었다. 리에나가 소매 안에서 증거 목록 필사본을 꺼내 들고, 카이우스가 이송 접수증을 내밀었다.
“팔찌 비파괴 검사를 요청합니다.”
리에나가 말했다.
“이송 접수증에 적힌 봉인 물품인가요.”
관리가 창구 쪽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렇소.”
카이우스가 답했다. 관리가 기록부를 넘기고 봉인 궤짝 하나를 조심스레 꺼내 탁자 가운데 놓았다.
“검사 항목을 말씀하십시오.”
“중량과 내부 공간 여부만 기록으로 남기면 됩니다. 개봉은 하지 마십시오.”
리에나가 말했다.
관리가 팔찌가 든 반투명 봉인 관을 들어 수평으로 기울였다. 팔찌가 미끄러지지 않게 고정한 채, 안쪽으로 빛을 비추어 실루엣을 종이에 옮겼다. 작은 빈틈이 손톱만 하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봉인 표면 손상 없음. 내부에 미세한 빈 공간으로 보이는 그림자가 있습니다. 실물 확인은 개봉을 요하니 오늘은 기록까지만 하겠습니다.”
관리가 종이에 ‘기울임 검사, 봉인 온전, 내부 공간 의심 소견’이라고 적었다. 리에나가 그 종이를 받아 사본을 한 장 덧대고는 가방에 넣었다.
카이우스가 검지로 봉인관의 밀랍 라인을 따라 손끝을 움직이다가 말했다.
“법정까지 이대로다.”
관리가 봉인관을 푸른 천으로 감싸 궤짝에 도로 넣고 자물쇠를 걸었다. 쇠가 한 번 물리며 가볍게 울렸다.
리에나는 창문 없는 복도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밤안개가 돌계단 아래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이 빈 공간이 뭔지는, 이제 법정에서 열립니다.”
그녀가 관리에게서 받은 기록지를 가방 겉주머니에 꽂으며 말했다.
카이우스가 그녀 옆으로 한 발 옮겨 섰다. 그 오른손 검지가 기록지 모서리를 짧게 짚고 떨어졌다.
“재봉인 기록을 남기시오.”
그가 낮은 톤으로 명령했다.
관리가 봉인 궤짝에 다시 밀랍을 녹여 눌렀다. 봉인관 안 쪽의 빈 공간은 그대로였고, 법정이 열리기 전에는 아무도 열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