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원수의 제자, 멸문의 막내

1화

“뒷문이군.”

공선화가 바람에 실어 보낸 말이 귓가에 남아 있었다. 값은 이미 치렀다. 동선과 시각, 진무영이 문파 심부름을 마치고 나루 폐객잔으로 빠진다는 것까지.

서문린은 객잔 뒤편 버드나무 가지에 몸을 붙였다. 강물 냄새가 끼쳐 왔다. 썩은 닻줄과 갯벌, 오래 비운 술통 냄새. 폐객잔은 지붕 서까래가 반쯤 내려앉아 달빛을 갈라 놓았다.

발소리가 났다. 한 사람. 걸음이 가지런했다. 검푸른 겹도포 자락이 달빛에 스쳤다. 진무영이었다.

서문린은 숨을 죽이지 않았다. 이미 자세를 낮춘 채, 왼손은 칼집에, 오른손은 검자루에 얹었다.

진무영이 뒷문 앞에서 멈췄다. 삐걱, 문짝이 반쯤 열리다 말았다.

“나오지.”

서문린이 버드나무에서 내려섰다. 낙엽도 밟지 않았다.

진무영이 천천히 돌아섰다. 훤한 얼굴에 미소가 먼저 올라왔다. 눈이 좁아졌다.

“밤이 깊었는데, 누구신지.”

서문린은 대답 대신 검집을 왼손 엄지로 밀어 올렸다. 칼날 한 치가 드러났다.

“양진이라면 아는 얼굴이겠군. 청명검문의 마지막 제자다.”

진무영의 미소가 반 박자 늦게 움직였다.

진무영이 허리춤의 단도를 만지작거렸다. 검은 옥 장식이 달빛을 삼켰다.

“재밌는 분이군요. 청명검문은 불탄 지 오래인데.”

서문린이 검을 뽑았다. 날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짧았다. 칼끝이 진무영의 목울대를 가리켰다.

“오래 됐다.”

“보아하니 살기가 대단하신데. 누구를 잘못 보셨다면 돌아가시지요. 전 오늘 몸이 피곤해서.”

“아니다.”

서문린이 한 걸음 더 들이밀었다. 칼끝이 진무영의 도포 깃에 닿을까 말까 한 거리.

“십 년 전, 청명검문의 문을 열어 준 사람을 찾아왔다.”

진무영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었다. 입술이 한 번 다물렸다.

“과하시군요.”

서문린은 더 묻지 않았다. 검을 내리그었다. 칼끝이 진무영의 오른손으로 향했다. 단도를 뽑기도 전에 손등을 노린 횡격이었다.

진무영이 반 보 물러서며 단도를 뽑았다. 짧은 쇳소리가 두 번 부딪혔다. 힘으로 막지 않고 각도로 흘리는 수법이었다. 혈영단의 수법.

“혈영단의 셋째라도 되나.”

진무영이 미소를 되찾았다. 숨은 가빠지지 않았다.

“그건 알 필요 없으시겠네요.”

서문린은 검을 왼쪽 허리께로 접었다. 발뒤꿈치를 축 삼아 돌았다. 청명검문 초식, 잔월회신. 허리와 어깨가 한 번에 꺾이며 칼끝이 반원을 그렸다.

진무영의 단도가 그 반원을 쫓아왔지만 반 치 늦었다. 칼끝이 진무영의 오른팔 소매를 찢었다. 피가 천에 번졌다.

“이 검법.” 진무영의 눈빛이 달라졌다. 미소가 걸린 채였다. 좋은 구경이라도 한 사람처럼. “청명을 아는 모양이군.”

“아는 게 아니라, 그리운 겁니다. 불타 버려서.”

진무영이 한 발 물러서며 단도를 아래로 내렸다.

“이름이 뭡니까.”

서문린이 검을 들어 올렸다. 칼날에 핏방울이 맺혔다.

“서문린.”

강물 소리가 뒤에서 밀려왔다. 진무영의 표정이 처음으로 읽혀졌다. 낯섦, 그리고 미세한 떨림.

“그 이름은 죽은 걸로 압니다.”

“열 살에 죽었어야지.”

서문린이 검을 뻗었다. 진무영이 단도를 들어 막았다. 제법 빨랐다.

그래도 서문린은 이미 그 보법을 알고 있었다. 공선화가 건넨 기록에 진무영의 습관이 있었다. 위기에서 항상 왼쪽으로 반 보, 그 다음 단도를 아래에서 위로 찍는다.

진무영이 왼쪽으로 반 보 물러났다. 서문린은 거기서 기다렸다. 단도가 아래에서 올라오는 순간, 검을 수직으로 세워 밀어 넣었다.

칼끝이 진무영의 어깨 아래로 들어갔다. 겹도포가 붉게 물들었다.

진무영이 잠깐 서문린을 올려다봤다.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이거, 꽤 아프네요.”

“웃는 게 직업인가.”

“사람을 대할 때는요.” 진무영의 숨이 갈라지고 있었다. “혈영단에 말 안 하냐.”

“말할 기회를 주실 것 같지 않아서.”

서문린이 검을 뽑았다. 진무영의 몸이 뒷문 쪽으로 기울었다. 문이 덜컹, 닫히는 소리를 냈다.

“심어진 셋째는 몇이나 남았지.”

진무영이 문에 기대어 웃었다. 입술이 피로 번들거렸다.

“그걸 제가 알려드릴 이유는 없지요.”

“없다.”

서문린은 검을 한 번 더 뻗었다. 이번에는 막음새가 없었다. 칼끝이 진무영의 오른쪽 가슴을 깊이 찔렀다. 진무영의 몸이 뒷문에 부딪혔다. 문짝에 피가 튀었다.

진무영이 문에 기댄 채 무릎이 꺾였다. 떨리는 손이 도포 안쪽을 더듬었다. 뭔가를 꺼내려는 듯했다.

“천천히. 주머니에 뭐가 있지.”

“비밀.”

진무영이 쓴웃음을 남기고 숨을 멈췄다. 고개가 옆으로 꺾였다.

서문린은 검을 거두지 않았다. 잠시 서서 숨을 골랐다. 강풍이 객잔 지붕을 울렸다.

진무영의 손이 문턱에 떨어졌다. 서문린이 손끝으로 진무영의 도포 앞섶을 젖혔다. 안쪽 주머니에서 기름종이에 싼 문파 표지가 나왔다. 혈영단 것이 아닌, 다른 문양의 외부 밀지 증표였다.

서문린은 그것을 걷어 검은 도포 안쪽 품에 넣었다.

그리고 소매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먹물이 번져 있었다. 이름 세 개가 적혀 있었다. 제일 위 진무영의 이름에 손톱으로 줄을 그었다. 종이를 다시 접어 품에 넣었다.

뒤에서 강물 소리가 멀어졌다. 서문린은 몸을 돌려 폐객잔 모퉁이를 감쌌다. 발소리가 마른 흙을 스쳤다.

위소연은 폐객잔 뒤편 나무 아래에 숨어 있었다. 아버지가 밀지에서 '청명검문'을 지우는 걸 본 뒤, 그 유물 출처를 쫓아 나루 쪽으로 온 것이다. 낮에 심부름을 마친 진무영 사형이 인적 없는 길로 빠지는 걸 우연히 보고 따라붙었다.

첫 쇳소리에 몸이 굳었다. 검과 단도가 부딪칠 때마다 바람이 갈라졌다.

저 검법.

그녀는 나무 뒤에서 온몸을 낮췄다. 달빛이 폐객잔 지붕을 비켜 갈 때, 서문린이라 밝힌 남자의 검이 반원을 그렸다. 허리와 어깨가 한 점에서 돌았다.

청명검문의 초식이었다.

아버지가 지운 문서에도 같은 문양이 있었다. 위소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진무영이 문에 부딪혀 미끄러지는 소리가 났다. 더 이상 대화는 없었다. 남자의 발소리가 멀어진 뒤, 폐객잔 쪽에 정적이 다시 내려앉았다. 강물만이 제 할 일을 했다.

위소연은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심장이 약방에서 약초를 찧을 때보다 크게 쳤다.

진무영 사형이 죽었다.

저 남자가 죽였다.

위소연은 신발을 벗었다. 맨발로 흙을 밟자 냉기가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는 계산이었다. 몇 걸음, 폐객잔 뒤쪽으로 다가갔다.

진무영의 몸이 뒷문 문턱에 걸쳐 있었다. 옆으로 꺾인 고개, 젖은 겹도포. 손이 문틈에 끼어 있었다.

그보다, 몸에서 조금 떨어진 흙 위에 물건 하나가 놓여 있었다. 기름종이가 반쯤 벗겨진 탁본 같은 표지였다. 아까 그 남자가 챙긴 것과 비슷한 크기. 주머니에서 떨어진 모양이었다.

위소연은 숨을 가다듬고 그것을 두 손으로 집었다. 달빛을 향해 기울였다.

문양이 보였다.

아버지가 손가락으로 지운 밀지의 그 자리에 남아 있던 것과 같은 윤곽. 칼을 겹친 매화 가지, 청명검문의 표지였다.

손끝이 떨렸다. 위소연은 표지를 기름종이째 접어 옷고름 안쪽에 눌러 넣었다.

누군가 오는 소리는 없었다. 그래도 위소연은 몸을 완전히 숙였다. 폐객잔 앞쪽, 강가 쪽에서 물새가 한 번 날개를 쳤다.

위소연은 뒤를 돌아 약방 샛길로 몸을 들였다. 맨발로 디딘 돌부리가 살을 찔렀다. 아프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걸음은 빨라졌다. 발소리는 끝내 흙에 묻혔다.

폐객잔을 벗어난 뒤로도 위소연은 몇 번인가 어두운 골목에서 걸음을 멈추고 뒤를 살폈다. 약방 샛길이 끝나갈 무렵에야 안개에 젖은 발을 문지방 위로 옮겼다. 등불을 켜기도 전에 약재 냄새가 밀려왔고, 잠긴 약장을 손가락으로 더듬는 동안에도 옷고름 속 표지는 자꾸 배에 닿았다.

새벽안개가 약방 골목까지 밀려들었다. 서문린은 왼쪽 갈비 아래를 눌렀다. 손가락 사이로 옷감이 젖었고, 골목 바닥의 핏방울은 세 걸음마다 방향을 틀었다.

약방 뒷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문지방을 넘자 약초 냄새와 식은 탕약 냄새가 겹쳤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것은 진열장 모서리에 걸린 옥색 의원복 소매였다. 몸이 먼저 기울었다.

뒷문이 열리는 소리에 위소연이 약장에서 몸을 돌렸다. 바닥에 쓰러진 남자의 흑색 도포가 어둠 속에서 번졌다. 그녀는 석유 등불 심지만 두 번 꺾어 불을 가까이 당겼다. 서문린의 옆구리 옷깃이 붉게 눌어붙어 있었고, 피가 마룻바닥으로 얇게 퍼졌다.

위소연은 진단용 작은칼로 상처 주변만 도려냈다. 검상은 갈비를 따라 길게 났고 안쪽에서 열이 올라왔다. 은침으로 상처 가장자리를 짚자 서문린의 손가락이 마룻바닥을 한 번 긁었다.

“의식이 남아 있네요.”

서문린이 초점 없는 눈을 반쯤 떴다. 위소연이 손목을 옆으로 밀자 도포 안쪽에서 종이 모서리가 바스락거렸다. 그녀는 잠시 멈췄다.

남자는 폐객잔 쪽에서 넘어온 자였다. 목격자의 뒷모습을 쫓아 약방까지 온 사람. 그 목격자가 바로 자신이라는 걸 그가 아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살인자라도 지혈은 합니다.”

위소연은 마른 헝겊을 상처에 대고 눌렀다. 피가 헝겊 가장자리를 따라 밀려나와 손가락 사이를 적셨다. 서문린이 짧게 숨을 내뱉었다.

“……따라왔다.”

“무엇을 쫓았습니까?”

“등불.”

“약방에 등불이 있었습니까?”

“안 켰지.”

위소연은 약장 서랍에서 지혈 가루를 꺼냈다. 가루가 상처에 닿자 서문린의 복부 근육이 단단하게 굳었다. 그녀는 그를 마룻바닥에서 바로 처치했다.

“지금 혈영단에 알리면 당신은 붙잡힙니다.”

“그럴 생각 없다.”

“그건 제가 정합니다. 왜 약방까지 왔습니까?”

“흔적. 샛길로 빠진 흔적.”

위소연이 은침을 경혈쯤에 얕게 놓았다. “사람을 죽이고 목격자를 쫓는 것은 무슨 도리입니까?”

서문린은 대답하지 않았고 호흡이 짧아졌다. 맥이 가늘고 빨랐다. 안쪽 출혈은 막히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그녀는 약장 맨 위 칸에서 만주삼 잎 가루를 내렸다. 얼마 남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도 처방을 멈추지 않았다.

“물에 풀어 상처에 넣겠습니다.”

약 가루를 찬물에 갠 뒤 상처 가장자리에 바르자 붉게 부어오른 살이 조금 가라앉았다. 서문린의 손이 마룻바닥을 긁는 동작이 멎었다.

그때 약방 앞문 너머로 인기척이 스쳤다. 두 사람의 발소리와 칼집이 허벅지에 부딪히는 소리였다. 위소연이 숨을 죽였고 서문린의 눈이 떠졌다.

“숨기십시오.”

“누구냐?”

“혈영단 순찰입니다.”

위소연이 그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치게 하려 했다. 서문린이 이를 악물고 상체를 일으켰다. 갈비 아래에서 피가 다시 번졌지만 서 있으려 애썼다. 위소연은 그의 몸을 침상 뒤편 약초 더미 옆, 어두운 벽면 쪽으로 반쯤 눕혔다. 검은 도포가 어둠에 섞였다.

위소연은 손의 피를 약포에 닦고 앞치마를 걸친 뒤 빗장을 뺐다. 순찰대원 둘이 문지방 밖에 서 있었다.

“새벽까지 불을 켜고 뭘 했소?”

“탕약을 달였습니다. 진통제 주문이 밀려 있어서요.”

“피 냄새가 나는데.”

“오늘 오후에 사냥꾼 하나가 짐승한테 찢긴 상처를 꿰맸습니다. 제 앞치마에 아직 냄새가 남아 있을 겁니다.”

위소연이 팔을 들어 앞치마 자락을 보였다. 끝자락에 누런 약 얼룩과 붉은 흔적이 겹쳐 있었다. 순찰대원이 문틀에 손을 대고 안쪽을 훑었다. 침상은 비어 보였고 약초 더미는 움직이지 않았다.

“수상한 사람 못 봤소?”

“아무도.”

뒤쪽 벽에서 서문린의 검지가 약보자기 끈을 감아쥐는 소리가 아주 작게 났다. 위소연이 문을 한 뼘 더 밀었다.

“한 시진 뒤 아버님께 올릴 약챙김이 있습니다. 문을 닫아야 합니다.”

순찰대원이 물러났다. “혼자 있는 밤에 조심하시오.”

문이 닫히고 빗장을 거는 소리가 골목에 퍼졌다. 위소연이 침상 쪽으로 돌아서자 서문린이 반쯤 앉아 있다가 옆으로 쏠렸다. 그녀가 뛰어가 어깨를 붙잡았다. 손이 젖었다.

“이제 이 약방에서 나가려 해도 못 나갑니다.”

서문린의 대답은 없었다.

위소연은 서문린을 안쪽의 좁은 환자용 침상에 옮겨 눕히고 창을 푸른 약포로 내렸다. 도포를 걷어 복부를 지혈하다가 안주머니에서 굳은 종이 조각이 손끝에 걸렸다. 그녀는 손끝을 멈췄다.

안주머니에서 두 가지가 나왔다. 하나는 혈영단 외부 밀지에 쓰는 붉은 인주 증표였다. 다른 하나는 접힌 얇은 종이.

펴자 맨 위에 세로로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진무영. 그 아래로 두 개의 이름이 더.

첫 이름은 반으로 그어져 있었다. 긋는 힘이 세서 종이가 갈라질 뻔했다. 위소연은 숨을 멈췄다.

나루 폐객잔은 강안개에 반쯤 잠겨 있었다. 공선화가 발소리를 낮춰 뒷문을 밀자 객실 쪽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사공이 문틀에 웅크리고 있었다.

“침착해. 나야.”

공선화가 작은 상자 묶음 중 하나를 열어 냄새를 맡게 했다. 사공이 고개를 들었다.

“시신은 어디 있어?”

사공이 턱으로 객실 안을 가리켰다. 공선화는 반쯤 내려진 발을 걷어 올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진무영의 시신은 객실 구석에 비스듬히 세워진 채였다. 가슴께가 갈라져 있었고, 나무기둥에는 검날이 스치며 남긴 금이 한 줄. 핏자국은 누군가 홀로 서서 검을 뽑은 지점을 보여줬다.

“혼자 치고 나갔네. 검흔도 하나로 갈라졌어.”

공선화가 무릎을 굽혀 바닥의 발자국을 살폈다. 목격자가 빠진 샛길 쪽으로 작은 신발 자국이 한 줄. 약방 쪽 방향이었다.

“좋아. 서문린 쪽은 아직 살아 있겠네.”

그녀가 묵지 조각에 무언가를 재빨리 적었다. 사공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이거, 혈영단에 알려야 하지 않소?”

공선화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알리면 내 거래 목록이 사라져. 자네는 여기 남아 시신을 지켜. 움직이면 안 돼.”

그녀는 적은 종이를 허리춤에 넣고, 시신 옆 검흔을 손끝으로 짚어 거래 재료로 표시했다. 그런 다음 샛길 방향의 작은 신발 자국 위에 마른 짚을 반쯤 덮었다.

사공이 한마디 더 물으려 하자 공선화가 웃으며 말했다.

“시신은 자네가 감시해. 감시 비용도 쳐줄게. 대신 이 흔적은 내 몫이야.”

원수의 제자, 멸문의 막내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