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원수의 제자, 멸문의 막내

3화

위소연은 기록지를 약보자기 밑에서 꺼내 옷섶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새벽 공기가 약실 바깥에서부터 발목을 타고 올랐다. 그녀는 서문린 쪽을 보지 않고 낮게 말했다.

“약재를 구하러 나갑니다. 문을 걸어 둘 테니 움직이지 마세요.”

혼수인 몸이라 대답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침상에서 낮은 목소리가 돌아왔다.

“어딜.”

위소연은 손을 멈췄다. 등 뒤에서 거친 숨이 한 번 더 끌려 나왔다. 서문린이 고개를 반쯤 들고 문 쪽을 보고 있었다. 해독 뒤 탈진이 남은 눈이었다.

“약재를 구하러 간다고 했습니다.”

“이 시각에.”

“순찰이 뜸한 때입니다. 아버님 서재 쪽은 새벽에 교대가 있어서 오히려.”

말을 거기까지 해 놓고 위소연은 입술을 다물었다. 서문린의 시선이 옷섶을 훑고 지나갔다. 그가 기록지를 감췄다는 걸 알아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문은 잠급니다.”

서문린이 몸을 눕히는 기색 없이 말했다.

“돌아오면 묻겠소.”

“무엇을요.”

“당신이 감춘 것.”

위소연은 대꾸하지 않았다. 식은 손끝이 도포 안쪽에서 기록지 가장자리를 눌렀다. 그녀는 약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문을 걸었다. 이중으로 빗장을 올린 뒤 약방 바깥문도 잠갔다. 뒤에서 서문린이 더 말을 붙이지 않았다.

약방 밖 골목은 쥐 한 마리 다니지 않았다. 위소연은 걸음을 빨리하지 않고 혈영단 서재 쪽 돌계단으로 붙었다. 담장을 낀 길은 꼭대기 횃불 하나만 남아 있어 그림자가 길었다. 걸을 때마다 옷섶 속 기록지가 갈비뼈에 닿아 따가웠다.

서재 바깥 순찰로는 두 사람이 지나가는 길이었다. 한 사람은 창 왼쪽 끝을 돌아 어깨가 보이는 순간, 다른 사람을 불러 먼 쪽으로 손짓했다. 교대 시각이 반 호흡 정도 늦었다. 위소연은 벽에 붙어 섰다. 순찰 두 사람이 몸을 돌려 담장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손등만 헤아렸다.

발소리가 멀어지자 위소연은 서재 문 앞으로 붙었다. 문은 안쪽 빗장 없이 잠겨 있었다. 그녀는 허리춤에서 가는 놋쇠 조각을 꺼냈다. 어릴 때 아버지가 열쇠 멜빵을 풀어 놓는 틈을 지켜 본 모양이라, 빗장 아래 홈을 눌러 빗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문이 조금 튀어 열리자 찬 공기가 그녀의 얼굴로 밀려 내려왔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자물쇠는 걸지 않았다. 들어온 흔적이 남지 않게 문고리에 손을 갖다 댔다 떼었을 뿐이다.

서재 안은 더 까맣고, 벽 한쪽에만 얇은 불빛이 스며 있었다. 남쪽 창 너머 달이 기울기 전이라 겨우 책장 윤곽이 보였다. 위소연은 아버지의 좌판이 있는 방향으로 낮게 숨을 들이마시며 걸었다. 인비 냄새가 옷깃에 붙을 만큼 진했다.

좌판 위로 손을 뻗어 세 번째 서랍을 빼냈다. 열흘마다 아버지가 먹물을 풀어 무언가를 지우던 자리였다. 서랍 안 서늘한 나무 면이 손끝에 닿았다. 그녀는 장부 한 권을 꺼내 손바닥으로 받쳤다. 다섯 손가락이 식어 쪽이 뒤집힐 때마다 종이가 부푼 결이 만져졌다.

창가로 몸을 틀어 달빛에 장부를 비췄다. 곳곳에 먹물이 덮였다가 마른 어두운 얼룩이 덧나 있었다. 지워진 칸에는 아직도 글자의 외곽이 조금 남았다.

그중에서도 반복해 덧칠된 자리가 있었다. 같은 너비, 같은 길이. 칼을 겹친 매화 가지 문양이던 자리.

위소연은 그 쪽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종이의 그 부위만 유독 마르지 않고 밀랍처럼 미끄러웠다. 인비가 손에 옮아왔다. 그녀는 장부를 닫아 옷섶 반대편에 밀어 넣었다.

발소리가 바깥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돌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아니라 서재 왼쪽 복도 쪽에서 무언가 긁히는 소리였다. 순찰이 한 번 더 교차했다. 위소연은 몸을 낮추어 좌판 앞에 붙었다. 귀가 뜨거워졌지만 손은 차게 가라앉아 있었다.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멀어지고, 이윽고 없어졌다.

그녀는 일어나 아버지가 진무영의 것을 모아 두는 회전 진열장 옆으로 갔다. 아래 칸에 놓인 유품 함이 어둠 속에서 벌겋게 빛났다. 뚜껑을 들어 옆에 밀쳐 두고 손을 넣었다. 상단에 접힌 천, 그 아래로 얇은 기름종이가 만져졌다.

종이를 한 장 뽑았다. 달빛에 펼치자 엷은 먹 선이 먼저 드러났다. 혈영단의 불꽃 무늬였다.

그 아래는 밀지 특유의 닳은 접힘 자국이 칼로 그은 것처럼 번져 있었다. 위소연은 그 접힘을 펴지 않고 그대로 접어 도포 안쪽, 기록지와 함께 넣었다. 두 가지가 같은 옷감 안에서 서로 눌렸다.

유품 함 뚜껑을 덮고 자리를 원래대로 돌렸다. 장부를 빼낸 서랍은 끝까지 밀어 넣고 네 손가락으로 자국의 방향을 확인했다. 서늘해진 나무 면이 손금을 따라 차게 붙었다. 그녀는 문 쪽으로 걸으며 바닥에 남은 발자국을 겉옷 자락으로 살짝 쓸었다.

문을 열고 밖을 보았다. 동쪽 하늘이 아직 검었으나, 돌계단 위 횃불이 바람에 기울어 붉은 불꽃이 골목으로 흘러내렸다. 순찰은 보이지 않았다. 위소연은 문고리를 두 손으로 잡고 반대편에서 걸던 그대로 자물쇠를 밀어 넣었다. 열쇠가 찰칵 물리는 소리가 손바닥으로 겹쳐 가라앉았다.

약방으로 돌아오는 길은 내려가는 계단마다 이슬이 맺혀 신발 끝이 미끄러웠다. 품 안 장부 모서리가 뛸 때마다 그녀의 겨드랑이 아래로 스쳤다. 길을 반쯤 접었을 무렵에야 손이 다시 감각을 돌려받은 것처럼 저려 왔다.

약방 골목 끝에서 위소연은 문 앞에 서지 않고 잠시 숨을 고른 뒤, 열쇠를 꺼내 빗장을 풀었다. 약방 안은 조용했다. 침상 쪽에서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나왔다.

서문린은 다시 혼수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약실로 들어가 옷섶에서 장부와 밀지를 꺼내 해독 기록 밑에 모아 놓았다. 그리고 다시 약실 문을 잠갔다. 손안은 아직 종이가 닿은 자리에만 열이 남아 있었다.

새벽안개가 골목을 빠져나오며 약방 문지방을 적셨다. 위소연은 빗장을 건 뒤에도 등을 문에 붙인 채 계단 방향으로 두 번 더 눈을 주었다. 동이 트는 대로 서문린의 혼수가 걷히기 전에 약실에서 꺼낸 장부와 밀지를 제자리에 품고 돌아온 것이었다.

새벽 빛이 약방 안으로 밀려들 무렵, 위소연이 돌아왔다. 품 안에는 위무극의 밀서 서재에서 꺼낸 장부 한 책과 진무영의 유품 밀지 한 장이 겹쳐 있었다. 숨이 가빴다. 그녀는 걸쇠를 밀어 넣고 한 번 더 주위를 살폈다.

약실 쪽에서 서문린이 앉아 있었다. 침상 가장자리에 발을 내린 채였다. 혼수는 걷혔고, 왼손은 침상 모서리를 짚고 있었다. 오른쪽 무릎 위에 검을 가로로 얹은 자세가 돌아오는 길 내내 예상했던 것보다 더 온전해 보였다.

“약방 문 열어둔 채 나갔더군.”

위소연은 장부와 밀지를 진찰대 위에 내려놓았다. 겉도포 앞섶이 몸에 달라붙어 있었고, 서재를 나올 때 묻은 먼지가 소매 끝에 얇게 앉아 있었다.

“네가 청명검문 생존자냐.”

서문린은 장부 쪽을 보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진찰대 위에 놓인 물건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걸 가져온 순간부터 내가 널 죽여야 할 이유만 늘었다.”

위소연이 장부에 손을 얹었다. 표지에 눌린 손자국이 보였다.

“묻는 말에 답해. 몸에 남은 흉터는 청명검문 낙인이 지워진 자리와 같아. 손목 칼자국도 검을 오래 쓴 사람의 것이고.”

서문린은 일어서지 않았다. 어깨는 벽 쪽으로 조금 기울어 있었다. 아직 옆구리에 손을 대지 않은 게 이상할 만큼 몸이 곧았지만, 호흡은 얕았다.

“내가 청명검문 사람이면 어쩔 셈이지.”

“그럼 이름이 뭐냐.”

공기가 무거워졌다. 위소연은 두 걸음 안쪽으로 들어섰다. 서문린은 여전히 검을 움켜쥐지 않았고,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도 않았다.

“서문린이다.”

위소연의 등이 잠시 굳었다. 그 이름은 죽은 것으로만 알고 있던 이름이었다. 열 살에 사라졌고, 멸문 뒤에는 거론조차 되지 않던 이름. 서문린이 그 이름을 꺼낸 순간, 그동안 밀지에서 지워진 문양과 약보자기 밑 기록지의 흉터가 한 줄로 이어졌다.

“네가 아버지 얼굴을 지키려 들면 나는 너부터 정리한다.”

서문린은 검을 들지 않았다. 다만 말이 끝나고 침상 옆 공간이 좁아 보였다. 그가 앉은 침상과 진찰대 사이로 위소연이 서 있을 자리가 사라진 것처럼.

“죽이지 않는 대가가 뭐지.”

“막지도 묵인하지도 마라.”

위소연은 진찰대 모서리를 짚었다. 손가락 사이로 장부의 책장이 약간 들렸다.

“막지도, 묵인하지도. 그럼 뭘 하라는 거냐.”

“아버지 위무극을 치는 일에서 손 떼라.”

위소연은 고개를 저었다. 빗장 걸린 문 쪽으로 뒷걸음치지도 않았다. 혈영단을 불러야 한다는 생각은 들다가 가라앉았다. 서문린에게 들킬 만큼 시선이 빨리 움직이지 않도록 두 손을 모았다.

“그건 못 받는다. 내가 아버지의 만행을 알게 된 이상, 모르는 척은 하지 않는다.”

서문린이 천천히 일어났다. 오른손이 검집을 한 번 훑고 내려갔다. 다리가 풀린 듯 반 걸음 비틀거렸지만 곧 자세를 잡았다. 옆구리 봉합 부위가 옷 안쪽에서 뜨겁게 당기는지 숨을 짧게 뱉었다.

“내 증거는 내가 지킨다. 네가 가진 목록도 내가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위소연은 장부와 밀지를 몸 쪽으로 당겼다. 소유를 주장하는 것보다는 그것들이 서로의 몫이라는 걸 못 박는 행동이었다. 서문린은 내려놓으라는 듯 손을 들다가 다시 내렸다.

“조건을 받아들이겠어. 단 우리 맡은 증거를 서로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 밀지는 지금 여기서 봐야 한다.”

서문린은 진찰대 쪽으로 왔다. 위소연이 밀지를 폈다. 혈영단의 붉은 인장이 찍힌 전면은 지시문 몇 줄과 서명뿐이었고, 그녀가 먼저 본 것은 진무영의 숨결이 남은 접힌 자국이었다.

“불빛에 비추면 뒷면이 보인다. 아버지 서재에서는 불빛이 닿지 않게 감춰져 있었어.”

위소연이 촛불을 새로 켰다. 밀지를 두 손으로 펴 불 위로 비스듬히 기울였다. 붉은 인장 아래 종이 뒷면으로 검은 실선 몇 가닥이 떠올랐다. 지시문 사이 빈 곳에 겹쳐 그린 약도 비슷한 것이었다. 한쪽 끝에는 칼을 겹친 매화 가지 문양이 숨어 있었다.

“청명검문 표식이다.”

서문린이 밀지를 한 뼘 가까이 들여다봤다. 입술을 다문 채 한참 선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공선화다. 이 표식은 그자가 은닉할 때 쓰는 방식이다.”

위소연이 밀지를 내렸다. 촛불이 흔들리며 서문린의 얼굴 한쪽을 스쳤다.

“공선화가 청명검문 비급을 숨겼단 말이냐.”

“비급이 어디 있는지를 아는 자가 공선화다. 진무영은 그 증표만 갖고 있었다.”

서문린은 진찰대에서 손을 떼고 검을 쥐었다. 칼자루를 돌리지 않고 그대로 골반 옆에 붙였다.

“위무극을 치려면 비급부터 확보한다. 공선화를 먼저 찾는다.”

원수의 제자, 멸문의 막내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