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원수의 제자, 멸문의 막내

4화

촛농이었다. 위소연은 밀지를 내려놓으며 곁불에서 올라오는 그 냄새를 먼저 맡았다. 촛농에 벌레 한 마리가 다리를 넣고 굳어 있었다. 약방 창호 너머로는 아직 푸른빛이 섞인 새벽이었다.

서문린이 벽에 걸린 검을 쥐었다. 그 동작에 침상 가장자리가 한 번 삐걱였다.

“공선화를 찾으려면 약방을 나서는 것부터 순찰 눈을 피해야 한다.”

위소연이 진찰대 서랍에서 베껴 쓴 해독 기록 한 벌을 꺼냈다. 약장 아래에 손을 넣어 밑판과 기둥 사이로 다른 한 벌을 밀어 넣었다. 나무가 젖은 손끝을 스치고 손등에 가루가 묻었다.

“이 기록은 두 벌이야. 한 벌은 장로회에 낼 거고, 약장에 둔 것은 아버지가 약방을 뒤져도 남는 개인 기록이 되어야 해.”

서문린은 그 손끝을 보지 않고 창밖을 훑었다.

“장로회까지 가는 길은?”

“내채 뒤쪽 약채 나들문으로 돌아가면 아침 탕약을 나르는 차비들이 오가. 그 틈에 낄 거야.”

위소연은 원본 장부와 진무영 유품 밀지를 약보자기 안쪽에 겹쳐 넣었다. 사본 해독 기록은 품 안에 따로 두었다. 약보자기를 묶을 때 매듭이 장부 모서리에 걸려 두 번 다시 조였다.

“전달 상대는 한 사람으로 좁혀. 장로회 문전에서 이름을 밝히기 전에 증거를 펴지 마라.”

“알아서 해.”

서문린이 약방 문을 한 뼘 열었다. 바깥에서 첫 순찰 방향의 불꽃 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네가 장로회에 닿기 전에 나는 폐객잔에 들르겠다. 공선화가 진무영 시신부터 통제했으니 나루 쪽에서 전갈을 날려 놨을 거다.”

위소연은 약보자기를 한쪽 어깨에 걸었다.

“부상은 어쩔 거야.”

“걸음은 유지한다. 검기 소모보다야 낫지.”

서문린이 먼저 문밖으로 나갔다. 위소연은 촛불을 꺼 약방에 잿냄새를 남기고 뒤를 따랐다. 약방 문이 닫힐 때 빗장은 걸지 않았다.

나루 폐객잔은 안개가 덜 걷힌 채로 서문린을 맞았다. 부서진 처마 아래 낡은 발이 반쯤 내려와 매달려 있었다. 서문린은 뒷문 문턱을 피해 옆문으로 들어섰다. 진무영의 시신은 이미 치워져 있었고, 흙바닥에는 새 짚이 깔려 있었다.

“여기까지 오다니. 냄새로 왔어?”

공선화가 객잔 안쪽 부서진 탁자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손에는 차지않은 술잔 하나. 잔은 기울어 있었고 바닥은 비어 있었다.

“전갈은 언제 보낸 겁니까.”

서문린의 발소리가 퍼지자 공선화가 술잔을 손바닥 위에 뒤집어 놓았다.

“어젯밤 약방 쪽에 갔었어. 창호 밖에서 서두르는 기척이 둘이더라. 나는 그걸로 충분해. 오늘 아침 네가 여기 올 줄 알았지.”

웃음이 낮게 번졌다.

“비급 은닉 표식을 봤군.”

“서까래 문양 틈이라고 들었습니다.”

공선화가 탁자에서 내려와 주머니에서 놋쇠 패 하나를 꺼냈다. 혈영단 비급고 출입패였다.

“이거 받아. 단 출입은 낮 교대가 끝나기 직전. 그때는 순찰 둘이 번주를 비우고 가는 시각이야.”

서문린은 패를 받아 들었다. 놋쇠가 손바닥 온도를 빼앗아 서늘하게 남았다.

“값은.”

“복수 기록. 앞으로 네가 찍는 이름, 순서, 방식 전부. 나한테만 팔아. 다른 정보상 손에 먼저 들어가면 그다음 공도 내가 아니라 무당 문하가 더 비싸게 살 거야.”

공선화가 손가락 셋을 접었다 펴며 말을 이었다.

“진무영 것도 이미 내 손 안이니까 이번 건은 전불로 보낼게. 대신 기록 몫에서 내 우선권을 깨면 다음 비급 위치는 물론이거니와 네 과거까지 값으로 올라가.”

“기록은 드리죠. 우선권도.”

서문린이 출입패를 품에 넣었다.

“함정은.”

“서가 셋째 칸, 가짜 청명검문 겉보기 비급에 폐혈향이 발려 있어. 눌러서 열리는 목함. 손대면 반나절 기가 돌지 않아. 맨 겉장만 보이고 본문은 없다.”

공선화가 검지로 허공에 선을 그었다.

“진짜는 서까래. 기둥에서 손바닥 두 뼘쯤 위, 칼을 겹친 매화 가지 문양이 조각된 틈. 그 안쪽에 종이 묶음이 있어.”

“조작 방법은.”

“누르지 않는다. 오른쪽 매화 가지를 위로 밀어. 걸쇠가 빠지면 문양 전체가 뒤집히면서 함이 열려. 폐혈향 목함은 그대로 두고 서까래만 빼내 오면 돼.”

서문린은 그 말을 곱씹으며 진무영의 시신이 있던 자리를 한 번 짚었다.

“출입패는 쓰고 나면.”

“나루 쪽 석축 아래 큰 바위 옆에 놔둬. 내가 회수해.”

공선화가 빈 술잔을 탁자에 세웠다.

“그리고 비급 내지에서 위무극 밀지와 맞닿는 표식을 봐도 거기서 이름을 새기지 마. 새기면 함정이 아니라 멸문 잔반들이 몰려와.”

“알겠습니다.”

서문린은 객잔을 나서며 안개를 가로질렀다. 나루에 정박한 배 한 척이 물을 밀며 흔들렸다.

해가 중천에 가까워지자 혈영단 비급고 앞뜰에는 약재를 나르는 하급 제자들만 남았다. 서문린은 비급고 서쪽 측문 쪽 담장 뒤에서 교대 순찰이 뜰을 비우는 것을 기다렸다. 놋쇠 출입패가 옷 안에서 갈비뼈 아래를 눌렀다.

순찰 둘이 연무장 방향으로 사라지는 발소리를 세고 서문린은 측문으로 붙었다. 돌쩌귀가 기름칠 없이 마르게 울었다. 그는 문을 몸 폭만큼 연 뒤 곧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비급고 안은 빛이 들지 않았다. 벽 촛대는 절반만 타고 있었고, 서가 사이로 먼저 코를 찌른 것은 쑥과 사향을 섞은 듯한 약냄새였다. 서문린은 숨을 얕게 나누며 셋째 칸을 확인했다. 가짜 청명검문 겉보기 비급이 놓인 목함은 겉면이 반질반질 닳아 있었다. 바로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목함을 피해 안쪽으로 돌았다.

서까래는 기둥 세 개가 받치고 있었다. 안쪽 기둥 위, 손바닥 두 뼘쯤 되는 높이에서 매화 가지 문양이 얕게 새겨져 있었다. 서문린은 오른손으로 가지 끝을 위로 밀었다. 돌가루가 손가락 사이로 부스러졌다. 문양 전체가 뒤집히며 그 뒤로 길쭉한 함이 열렸다.

기름종이로 싼 묶음이 나왔다. 꺼내자 마른 냄새가 한 줄 올라왔다. 서문린은 서까래 자리를 원래대로 닫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함은 열린 채로 남고, 목함은 건드리지 않았다.

비급고를 나오는 길은 더 빨랐다. 측문을 닫을 때 돌쩌귀 소리가 두 번째로 짧게 갈렸다. 담장을 넘어 나루 석축까지 이동하는 동안 기름종이 겉면이 점점 손의 열로 눅눅해졌다.

바위 아래에 출입패를 내려놓고 서문린은 폐객잔 뒤편 빈집으로 들어가 기름종이를 풀었다. 안쪽은 남색 표지였다. 겉면에 청명검문의 칼을 겹친 매화 가지가 얕게 찍혀 있었다.

첫장을 넘기자 내지 첫 여백에 먹색이 번진 표식이 있었다. 위무극이 밀지에서 지운 자리와 같은 위치였다. 서문린은 잠시 그 먹선을 엄지로 눌렀다. 종이는 닿은 자리부터 온기가 번졌다. 비급은 십 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하게 부서지지 않았다.

그는 이튿날 아침까지는 아니었다. 지금은 그것을 품에 넣고 옷깃을 여몄다. 장로회에 갈 시간이 아니었다. 아직 비급을 공개할 자리가 없었다.

몸을 굽혀 빈집을 나서자 배 한 척이 여전히 물가에 매여 있었다. 서문린은 혈영단 쪽 순찰과 반대편 샛길로 발을 돌렸다. 비급고 함은 열린 채 놓고 왔기에 오늘 안으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장로회 별당 입구가 오후 햇살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위소연은 돌섬돌 위에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장부와 밀지를 무릎 앞에 펼쳐 두었다. 손이 옅은 바람에 날리는 종이 끝을 눌렀다. 장로가 오기 전에는 몸을 일으키지 않을 작정이었다.

“거기서 뭘 하고 있느냐.”

위무극의 목소리가 뒤에서 내려앉았다. 위소연은 펼친 것들을 두 손으로 덮었다. 이미 아버지가 보는 것을 막기에는 늦었다. 위무극은 들려 있던 검을 한 번 땅에 끌듯이 내렸다. 칼집 끝이 돌바닥에 짧게 긁히며 소리가 났다.

“제가 직접 장로님들께 보여드리고자 했습니다.”

위소연이 몸을 돌렸다. 위무극의 회청색 눈은 그녀의 두 손과 그 아래 종이에 붙어 있었다.

“네 아비가 장로보다 낮은가 보구나.”

위무극이 두 걸음만에 앞으로 섰다. 손을 내리자 위소연의 왼쪽 어깨가 먼저 밀려났다. 그 틈으로 장부가 빠져나갔다. 위소연은 남은 밀지를 손목으로 감싸 쥐었다. 위무극의 집게손가락이 반대로 꺾이면서 밀지 끝을 잡았다.

“장로님께 직접 아뢰는 것이 잘못이었습니까.”

“네 입으로 무슨 말을 늘어놓으려던 게냐.”

밀지가 한 번에 빠져나가며 위소연의 손끝이 빨갛게 쓸렸다. 위무극은 다른 손으로 약재 기록 종이까지 집어 들어 앞장을 훑었다. 위소연의 해독 기록 사본이었다.

“딸이 아비에게 들키지 않을 재주는 없다. 알았다면 처음부터 내게 왔어야지.”

위무극이 증거들을 옷섶 안으로 밀어 넣고 손을 옆에 붙였다. 위소연은 무릎으로 일어섰다.

“청명검문 표식이 지워진 것을 제 눈으로 봤습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확인받으러 왔습니다.”

위무극의 손이 딸의 앞섶을 잡지 않고 옷깃만 스쳤다. 위소연이 섬돌 위로 반 걸음 밀려났다.

“닥쳐라.”

말소리는 낮았다. 위무극은 그대로 딸의 뒤 옷깃을 잡아 별당 안으로 밀었다. 통로가 어두웠다. 끝방 서고 문 앞에 이르자 입회 진행관 하나가 촛불을 들고 따라붙었다.

“서고 문은 안에서 못 열게 되어 있느냐.”

“밖에서만 여닫습니다.”

위무극이 문을 밀었다. 높은 서가 사이로 공기가 눅눅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위소연을 먼저 들여보낸 뒤, 그는 문지방에 한 손을 올렸다.

“하룻밤 서늘하게 식혀라. 네 눈으로 본 게 다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지우신 것을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위소연은 방 안에서 돌아섰다. 촛불이 그녀의 얼굴 한쪽을 흔들었다. 위무극은 잠시 딸을 내려다보다가 입회 진행관 쪽으로 턱을 움직였다.

“지키고 있게. 장로가 와도 내가 오기 전에는 열지 마라.”

문이 닫혔다. 바깥에서 빗장과 자물쇠가 겹쳐 잠겼다. 위소연은 문에 손을 대었다. 나무가 닫힌 뒤로도 오랫동안 울렸다.

해가 진 뒤, 장로회 별당 밖 회랑에는 풀벌레 소리가 낮게 깔렸다.

서문린은 비급을 품 안에 세로로 눌러 끼운 채 서고 쪽에서 자물쇠 걸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가 난 방향을 두고 발을 옮기던 참에, 회랑 난간 아래서 회색 짧은 도포가 움직였다.

“늦었네, 오랜만이면 잘 왔어야지.”

공선화가 난간 위로 몸을 띄웠다. 오른쪽 눈썹 흉터가 촛불 대신 달빛에 비쳤다.

“위소연이 잡혔다.”

서문린이 회랑 기둥에 등을 붙였다. 공선화는 웃음을 턱 끝으로 삼키며 난간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그쯤 될 줄 알았다. 약방에 온 정황이 많았으니까. 그래도 꽤 버텼네.”

“비급은 있다.”

서문린이 도포 겉으로 품 속 비급의 모서리를 두드렸다. 공선화는 난간에서 손을 떼고 두 걸음 다가섰다.

“담이 좋다. 그거 하나만으로도 장부와 밀지 값은 되겠어. 그런데 이제 어쩌려고?”

“내일 혈영단 대청에서 끝낸다.”

서문린이 기둥에서 몸을 뗐다. 옆구리 봉합 부위가 도포 안에서 뜨거웠다. 그는 호흡을 짧게 하고 회랑 끝을 바라봤다.

공선화는 손가락으로 허리춤의 작은 상자 하나를 돌려 만지작거렸다. 거래를 계산할 때 손이 먼저 움직이는 버릇이었다.

“대청 집회는 아무 때나 열리나? 문주 승인 없이는 좀 곤란할 텐데.”

“장로회에 전갈을 보내면 된다. 진무영의 죽음에 청명검문 생존자가 공개 혈채를 청했다고.”

공선화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직접 신원을 밝히면 그 순간부터 등 뒤가 전부 칼이야. 각오한 거지?”

서문린은 대답 대신 검집에 손을 얹었다. 칼자루에는 힘을 주지 않았다.

“장로 소집은 네 몫이다. 대청 일시는 내일 오후. 그 전에 장로들이 도착하게 해.”

“입회 진행관 둘 꼬드기는 건 어렵지 않아. 문제는 혈영단이 일시를 맞추려 들지 않겠지.”

공선화가 소매에서 작게 접힌 쪽지를 빼 보이고 다시 넣었다.

“너 때문이 아니고 장로들 때문이다. 문주 승인 없이 연 장로회에 안 오면 혈영단 장로 체면이 선다.”

서문린의 손이 검집에서 떨어졌다. 서고 쪽에서 불빛이 회랑 끝 모서리를 비추고 있었다. 감시가 서는 것이 보였다. 위소연은 지금 그 불빛 아래 있다.

“흥정 하나 하자.”

공선화가 난간에 걸터앉았다. 걸터앉은 다리가 회랑 바깥으로 가볍게 흔들렸다.

“네 복수 기록 첫 인명은 이미 난 알아. 이번에 대청까지 열어주면 미리 할 말이 있지.”

서문린이 그쪽을 내려다봤다. 빛이 부족해 눈동자 색은 거의 검게 보였다.

“얼마를 원하지.”

“돈 아냐. 이건 정보야. 네가 벗을 시점까지 벗는 순간을 기록으로 사고 싶다. 얼굴만 보이면 안 되고, 비급을 높이 들고 어디서 왔는지 말하는 그 장면.”

“거래 조건을 받았다.”

서문린은 두 발을 회랑 한가운데로 옮겨 서고 방향을 등졌다. 이제 걸음이 서고에서 대청 쪽으로 났다.

“전갈은 네가 먼저 띄운다. 내가 따라간다.”

공선화가 난간에서 내려왔다. 흙 묻은 신발이 회랑 나무에 소리를 냈다.

서문린은 회랑 입구 쪽 어둠을 향해 세 걸음 걷다가 말했다.

“내일 혈영단 대청에서 공개 혈채로 끝낸다.”

원수의 제자, 멸문의 막내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