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장 성녀와 성기사의 거래
1화
청금석 성흔이 옷 안에서 목걸이 줄을 타고 흔들렸다. 리에나는 숨을 죽인 채 성물고 서쪽 벽의 감실 앞에 쪼그려 있었다. 늦은 밤 대성당 성물고, 순찰이 복도 끝을 돌아나간 지 채 반 시진이 지나지 않았다. 손끝에 감촉이 남아 있었다. 금고 문지방에 금속 부스러기가 조금, 지난 이틀 동안 경비가 쓰던 열쇠와 같은 합금이었다.
그녀는 세 번째 감실 서랍을 손가락으로 밀었다. 등록 서류 원본은 방금 그 안에서 두 겹의 밀랍 봉인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회귀 전, 이 자리에서 성물고가 봉쇄되고 성녀 후보 셋이 심문받았다. 사흘 뒤 첫 후보가 침실에서 숨졌다. 이번 생은 그 서류가 밖으로 넘어가기 전에 손에 넣어야 했다.
서류 뭉치를 옷 안쪽으로 밀어 넣을 때, 등 뒤로 칼집에서 칼날이 빠지는 소리가 났다.
“복도를 돌던 게 아니었나.”
리에나가 몸을 틀며 감실 문을 닫았다. 등 뒤에서 검은 성기사단 정복이 어둠을 밀고 들어왔다. 오른손에 은장 장검이 뽑혀 있었다.
“성녀 후보가 성물고 금고 안이냐.”
“야간 기도를 다녀오다 길을 잃었습니다.”
“이 시각 성녀 후보는 별관 숙소를 벗어나면 출입 기록이 남는다. 기록에는 없다.”
카이델 아르겐이 한 걸음 들였다. 촛불 한 자루만 켜져 있는데도 녹색 눈동자가 또렷했다. 리에나는 감실 가장자리로 반 보쯤 물러나며 어깨를 벽에 스치지 않게 세웠다. 왼손이 옆구리로 조금 기울었다. 암살용 단검은 신전 안에 들고 오지 못했다.
“손을 보여라.”
“기도하러 온 사람에게 그런 명령을 하십니까.”
“네가 움켜쥔 게 기도문이 아니라서.”
카이델이 턱짓을 했다. 그의 시선은 옷섶이 불룩한 곳에 정확히 멈춰 있었다. 리에나는 입술을 붙였다.
한 시진 전, 금고 앞 통로의 횃불이 한 번에 두 갈래로 흔들렸다. 새로 보충된 기름 냄새에 겹쳐 바깥에서 사람 냄새가 났다. 여기까지 온 것도 촉각을 곤두세운 끝이었다.
도주로는 한 곳. 서른두 살의 성기사단장이 막고 있는 문뿐이었다.
리에나가 몸을 낮췄다. 달아나는 척 왼쪽으로 어깨를 틀다가, 즉시 오른쪽 감실 사이로 빠졌다. 카이델이 장검을 휘둘지 않고 손을 뻗어 그녀의 옷깃을 잡았다. 몸을 틀자 검날의 평면이 목걸이 줄을 스쳤다.
청금석 성흔에서 불꽃이 일었다. 푸른 불꽃이 석 점, 흔들리며 세 번, 그 다음에도 채 가라앉지 않았다.
카이델의 손이 멈췄다. 그 짧은 틈에 리에나는 그의 손아귀를 뿌리치고 반대편 금고 앞에 섰다. 숨이 가빴다. 품에 넣은 서류 모서리가 갈비뼈를 눌렀다. 그가 걸음을 멈추고 검을 아래로 내렸다.
“축성된 은이 닿으면 불꽃이 흔들리는 성흔은 없다. 불길이 꺼져야 정상이다.”
카이델이 검날을 다시 올리지 않았다. 대신 한 발 물러서서 성물고 입구를 막듯이 섰다.
“네 목에 걸린 성흔은 가짜다. 품에 든 서류는 그걸 덮는 위조 등록 원본이겠지.”
리에나는 숨을 내쉬었다. 옷섶이 찢어졌다. 손끝이 무의식으로 찢어진 자리를 만졌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지만 목소리는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성흔이 흔들린 것만으로 가짜라니. 증명이 필요한 얘기군요.”
“서류를 꺼내.”
카이델이 말했다. 낮고 짧았다. 그의 검지에 낀 교단 인장 반지가 성흔 불꽃에 반사됐다. 리에나는 옷섶을 여미며 서류를 꺼내지 않았다.
“성물고 순찰 중이신 분이 봉인 열쇠가 어디 있는지부터 확인하는 게 순서겠지요. 제가 어떻게 안으로 들어왔는지에 비하면 성흔 운운은 뒷전이군요.”
“네가 쥔 원본이 곧 증거다. 그걸 알면 출입 방법은 부차적.”
카이델이 검을 칼집에 꽂았다. 금속이 맞물리는 소리가 금고 안에 울렸다. 그가 빈 손으로 가까이 왔다. 리에나는 피했지만 진로가 애매했다. 카이델의 체격이 감실 너머 불빛을 가렸다.
“밤장미 길드.”
그 말에 리에나의 어깨가 멈췄다. 카이델이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손끝에 굳은살. 왼쪽 쇄골 아래 칼흉터. 성흔을 맨살에 붙이는 습관. 기도하는 손이 아니라 단검을 쥐는 손이다.”
그가 한 걸음 더 들이밀었다. 리에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젖은 밀랍 냄새가 옷에 배어 있었다.
“그 길드 소속 암살자가 성녀 후보로 들어온 이유를 대라.”
“드릴 답이 없습니다.”
“답이 아니라 조건을 듣는 게 낫겠다. 지금 이 성물고에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나뿐이다.”
리에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회귀 전, 이 성물고는 이틀 뒤 봉쇄됐다. 그러나 지금 카이델이 여기 있었다.
예정에 없던 시간, 예정에 없던 질문. 그가 서류를 쥐면 위조 성흔의 출처가 교단 도장 기록까지 닿는다. 그건 위험했다. 하지만 막힌 문보다 그가 쥔 정보가 더 빨랐다.
“조건이란 말, 꺼내 보시지요.”
카이델이 그녀 오른손을 봤다. 서류가 없는 쪽 손이었다.
“정체가 발각된 밤장미 소속을 내가 왜 살려 줄 거라고 보지?”
“그래서 조건이 필요하잖아요. 살릴 이유가 있다면.”
둘 사이의 거리가 두 걸음으로 줄었다. 밖 복도에서 바람 소리가 지나갔다. 그때, 성물고 안쪽 가장 깊은 금고 쪽에서 천장 돌이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리에나가 돌아봤다. 카이델도 얼굴을 돌렸다. 촛불이 흔들렸다.
검은 복면이 중앙 금고 봉인에 손을 대고 있었다. 침입자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 천장 매다는 쇠줄을 잡아당겼다. 봉인 두 개가 이미 떨어져 있었다. 카이델이 장검을 뽑으며 앞으로 나섰다.
“퇴로를 차단해.”
명령조였다. 리에나는 잠깐 망설였다. 지금이라면 침입자가 낸 틈을 타 달아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침입자가 만진 봉인은 성녀 취임 서약에 쓰는 예비 인장함이었다. 회귀 전 사라졌던 물건.
리에나는 입구 왼쪽으로 몸을 붙였다. 침입자가 달아나려는 쪽에 차단선을 만들었다. 침입자가 품에서 수면 가루 주머니를 꺼내 바닥에 던졌다. 푸른 가루가 퍼졌다. 시야가 흐려졌다.
“숨 쉬지 마.”
카이델이 몸을 낮추며 장검을 그었다. 검이 허공을 가르자 성물고 결계에 은빛 선이 번졌다. 신성력이 한 줄기 뻗어 침입자의 오른팔을 쳤다.
침입자가 비명 없이 벽에 부딪혔다. 리에나는 쓰러진 촛대를 낚아채 그 쪽으로 던졌다. 촛대가 침입자의 다리에 맞고 튕겼다.
침입자는 날개 없는 몸놀림으로 천장 쪽 환기구에 매달렸다. 다쳤는데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 봉인을 손톱으로 긁어 내리자 인장함 덮개가 열렸다. 비어 있었다. 리에나가 숨을 들이켰다.
카이델이 두 번째로 장검을 올렸지만, 침입자는 이미 환기구 안으로 상체를 밀어 넣은 뒤였다.
“잡아!”
리에나가 입구 반대편 서랍에서 은제 촛대 하나를 꺼내 던졌다. 침입자의 발목을 스치지 못하고 벽에 맞았다. 환기구 안에서 돌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인장함이 열린 채 굴러다녔다.
“놓쳤어요.”
“봤다.”
카이델이 벽에 붙었다. 그의 숨이 거칠었다. 신성력 한 차례 사용에 그의 왼손이 저리는지 장검을 바꿔 쥐었다.
리에나는 흘러내린 옷섶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귀에서 뛰었다. 이 기회를 놓친 것도 그였고, 그 기회를 준 것도 그였다.
“그 침입로는 내부 구조를 아는 자 외엔 못 쓴다. 바깥에서 온 놈이 아니다.”
카이델이 검을 내리며 말했다. 금고 안의 가루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리에나가 열린 인장함을 보았다.
속이 비어 있었다. 회귀 전에는 닫힌 채 사라졌는데, 지금은 열렸다. 그들의 선택이 사건을 바꾼 것이었다.
카이델이 안감을 열어 리에나의 옷섶에서 서류 원본을 꺼냈다. 리에나가 잡으려 했지만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다른 손으로 서류를 들었다.
“등록 서류. 도장 옆에 수정된 흔적이 있다. 덧칠된 날짜 표기. 이거, 네가 만든 거냐.”
“아니요.”
“그럼 어디서 난 거.”
“성물고에 있었어요. 만들어진 채로.”
카이델이 서류를 접어 정복 안감에 넣었다. 그의 녹색 눈이 얇게 금색으로 빛났다. 흥분이 아니라 긴장이었다.
“가져가실 셈이군요. 그건 제가 죽을 일을 줄여 주는 유일한 증거인데.”
“그래서 내가 보관한다.”
리에나는 이를 물었다. 이 남자는 알고 있다. 그녀가 밤장미에서 정체를 숨기고 교단에 들어온 것을. 그리고도 아직 칼을 쓰지 않고, 인장함 사건까지 목격자가 되었다.
“그럼 이걸 성찬위원회에 보고하시면 저는 이 밤으로 죽고, 당신은 증인 신분을 얻겠네요.”
“성물고 사건을 덮어 주고, 네 위장 성녀 신분을 보호한다.”
카이델이 손목을 놓았다. 리에나가 두 걸음 물러섰다.
“대신 교단 내 배신자를 찾아. 오늘 그 놈이 내부 인물인 게 확실해졌으니 네 임무와도 겹친다.”
“보호인가요, 감시인가요.”
“통행 제한과 문서 보관은 내가 정한다. 그게 조건이다.”
리에나가 성물고 문 쪽을 흘끗 봤다. 복도는 멀었고, 카이델은 그보다 가까웠다. 도주는 이제 불가능했다. 아니, 이제는 서류를 건네받기 전에는 움직일 이유도 없었다.
“알아요.”
“이건 거래다.”
카이델이 그녀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촛불이 그의 오른쪽 목 화상 흉터를 넘었다. 리에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서류가 없는 양손을 옆에 붙이고 그가 지시할 문으로 돌아섰다. 그것이 동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