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장 성녀와 성기사의 거래
4화
리에나가 겉옷 안쪽 봉투 위치를 손끝으로 짚었다. 준비 통로 쪽에서 황금 자수 끝단이 바닥을 쓸리는 소리가 들렸다. 에드문트가 시종 두 명을 데리고 시연장 입구 쪽으로 지나갔다.
아스텔이 리에나 앞으로 반 걸음 다가서며 문서를 내밀었다.
“공식 기도문 사본입니다. 동선 표기는 둘째 장에 있어요.”
“읽고 바로 갈게요.”
리에나가 사본을 받아 폈다. 성물고 후문에서 확보한 봉투들은 겉옷 안쪽에 그대로 있었다. 종이 모서리가 약간 눌려 있었다. 아스텔이 옆에서 손가락으로 둘째 장 한 줄을 짚었다.
“입장은 서쪽 통로입니다. 중앙 제단까지 직선 거리로 오십여 보, 은 성물 받침대는 오른쪽 세 번째에 놓입니다.”
“성물과 제단 사이는요.”
“일곱 걸음으로 잡혀 있습니다. 공식 동선에는 문제없는 거리로 적혀 있는데요.”
카이델이 준비 통로 안쪽에서 그 말을 끊었다.
“여덟 걸음으로 늘려라.”
아스텔이 되물었다.
“축성된 은 성물과 성녀 후보님 간의 거리 말씀입니까.”
“접근 금지 구역을 그만큼 넓힌다. 남는 공간은 예배용 촛대를 채워라.”
리에나가 고개를 들었다. 카이델은 기록부를 접은 채 벽 쪽에 서 있었다. 두 사람 사이로 성가대 연습 소리가 벽 너머에서 났다.
“시연 중에는 제단 오른쪽으로 가지 않아요.”
리에나가 말했다.
“동선만 지키면 됩니다. 제가 멋대로 성물 쪽을 돌 일은 없어요.”
“사고가 아니더라도 군중이 민다.”
카이델이 통로 끝의 시연장 그림자를 보며 말했다. 리에나는 사본 둘째 장을 다시 보지 않았다.
‘은 성물에 가까이 가면 안 되는 건 나도 알아. 흔들리는 걸 들키지 않으려면 차라리 제단 반대편이 나아.’
“기도는 공식 기도문 그대로 읊조리면 되죠.”
리에나가 아스텔에게 사본을 돌려주며 말했다. 아스텔이 문서를 받아 세 번 접었다.
“규정상 그렇습니다. 임의 기도는 시연석상에서 허용되지 않아요.”
“그 규정대로 할게요.”
‘오히려 잘됐어. 대주교가 쓴 문장만 읽으면 이단 심문 걱정도 없으니까.’
카이델이 리에나 쪽으로 걸어왔다. 준비 통로 천장의 작은 종이 울릴 때마다 그의 발소리가 묻혔다.
“시연이 끝날 때까지 나는 제단 왼쪽에 선다.”
“군중 시야에요?”
“포고단 뒤다. 성기사단장 정복을 입고 제단 바로 옆에 붙으면 의심을 산다.”
리에나가 입술을 열었다. 통로 밖에서 예행 신호 종이 다시 울렸다.
“그럼 저는 가서 서겠습니다.”
아스텔이 사본을 옆구리에 끼고 허리를 숙였다. 리에나가 그에게 낮게 말했다.
“아스텔 기사님, 조금 전 제가 맡긴 봉투는요.”
“제가 기록실로 옮깁니다. 시연이 끝나면 대조용 출납부와 함께 보관하겠습니다.”
“흔들리는 손으로 옮기지만 마세요.”
아스텔이 짧게 웃다가 표정을 다잡았다.
“긴장해서가 아니라 봉투가 두 겹이라 손에 밀려서요. 기록실로 바로 가져가겠습니다.”
아스텔이 준비 통로 왼쪽 문으로 나갔다. 리에나는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지 않고 시연장 입구를 바라봤다. 객석 쪽에서 낮은 웅성임이 벽을 타고 들어왔다.
시연장 중앙 제단은 흰 천으로 덮여 있었다. 리에나는 정해진 동선을 따라 일곱 걸음을 걷고 제단 앞에 섰다. 오른쪽 세 번째 받침대에는 축성된 은 성물이 얹혀 있었다. 리에나는 고개를 그쪽으로 돌리지 않았다.
‘멀다. 여덟 걸음쯤은 되겠지. 그걸로 충분해.’
군중이 길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뒤에서 퍼졌다. 에드문트가 시연장 왼쪽 상단 좌석에서 리에나를 내려다보았다. 흰 장갑을 낀 손이 좌석 팔걸이에 얹혔다.
“성녀 후보께서 공식 기도문으로 기적의 서를 여시겠습니다.”
입회 진행관의 목소리가 시연장 중앙에서 울렸다. 리에나가 공식 기도문 사본을 눈앞의 낮은 독서대에 폈다. 제단 왼쪽 포고단 뒤에 카이델의 검은 정복과 흰 망토 끝이 보였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리에나가 기도문 첫 줄을 소리 냈다.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문장 끝에서 성물고 후문 쪽 봉투가 겉옷 안쪽에서 옷깃에 닿는 감각이 났다.
둘째 줄에 들어설 때 오른쪽 셋째 받침대에서 은빛이 한 번 밝아졌다. 리에나의 성흔 목걸이가 옷 안에서 뜨거워졌다.
‘이건 준비 때와 달라.’
성흔에서 푸른 불꽃이 목걸이 고리 위로 짧게 흔들렸다. 군중 쪽에서는 보이지 않는 높이였다. 그러나 리에나의 시선이 제단 반대편 모서리에 놓인 은 성물에 닿는 순간, 목걸이의 불꽃이 한 번 더 꺾였다.
기도문 셋째 줄이 리에나의 입에서 늦었다. 군중 뒤에서 누군가 자세를 고치는 소리가 났다. 에드문트가 팔걸이에서 손을 들어 시종에게 짧게 무언가를 일렀다.
제단 왼쪽에서 카이델의 오른손이 포고단 아래로 내려갔다. 장갑을 벗지 않은 손이 정복 안쪽 성기사 성흔 위를 눌렀다. 그의 목 오른쪽 화상 흉터가 옷깃에 가려졌다.
성흔의 빛이 제단 앞 성녀 후보에게로 옮겨 가지 않고 포고단 뒤에 머물렀다. 리에나는 기도문 넷째 줄을 읽는 동안 목걸이의 열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카이델이 신성력을 억누르고 있어. 저쪽 성흔으로 내 쪽 불꽃을 누르는 거야.’
리에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다만 공식 기도문을 읽는 목소리가 일정한 높이를 되찾았다. 시연장 위로 흰 낮빛이 내려오고, 성물 받침대의 은빛은 다시 자리를 잡았다.
이어지는 기도가 끝날 때마다 군중의 호흡이 한 번씩 겹쳤다. 에드문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 눈은 리에나의 목걸이가 아니라 목걸이 위로 스친 옷깃과 제단 오른쪽 성물 사이를 오갔다.
마지막 기도문 한 줄이 끝났다. 리에나가 독서대를 닫지 않고 두 손을 모았다. 시연장이 낮게 술렁였다. 성물 받침대 위에 놓인 촛불 여섯 개가 조용히 밝아졌다.
“기적의 서가 열렸습니다.”
입회 진행관이 외치자 군중이 머리를 숙였다. 리에나는 그대로 한 걸음 물러섰다. 겉옷 안쪽의 봉투 두 개가 여전히 제자리에 있었다.
리에나가 퇴장 동선을 따라 제단 왼쪽으로 걸었다. 포고단 뒤, 카이델의 오른손이 정복 안쪽을 짚은 채로 서 있었다. 리에나가 그 앞을 지날 때 그의 얼굴이 한순간 보였다. 평소보다 핏기가 없었다.
‘손이 안 보여. 그 안에서 성흔이 어떻게 됐는지 나는 몰라야 해. 지금은.’
리에나는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준비 통로로 이어지는 서쪽 문이 열렸다. 군중의 기도 소리가 뒤에서 커졌다.
카이델이 리에나가 미처 통로로 들어서기 전에 낮은 소리로 말했다.
“임의 기도는 없었다.”
“들은 걸로도 아셨나요.”
“목소리 높이로 안다.”
리에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쪽 문 옆 벽에 붙어 카이델이 통로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가 리에나의 옆을 지나는 순간, 정복 안쪽에서 눌린 성흔 쪽이 뜨겁게 달아오른 느낌이 손등으로 스쳤다.
‘아직 멀쩡해. 저 사람은, 아직.’
리에나는 통로 벽의 차가운 흰 칸막이를 잠시 짚었다. 시연장에서는 아직도 군중의 마지막 기도가 들려왔다. 에드문트가 좌석에서 일어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시종들이 그쪽 통로로 잰걸음을 옮기는 소리만 났다.
시연장 박수가 사그라지자 카이델이 먼저 몸을 돌렸다. 오른쪽 어깨 쪽으로 망토를 끌어당기는 동작이 평소보다 반 박자 빨랐다. 리에나는 그 뒤를 따라 성구 보관실 쪽 복도로 접어들었다. 군중의 시선이 대주교 쪽으로 쏠린 틈이었다.
보관실 문은 안쪽에서 닫자마자 차가운 돌냄새가 먼저 들어왔다. 천장 가까운 창은 좁고, 빛이 비스듬히 선반 아래까지 닿지 않았다. 카이델이 첫 번째 선반 앞에 섰다. 망토를 여미는 손이 멈췄다.
“보여요.”
리에나가 낮게 말했다. 카이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왼손으로 망토 깃을 조금 젖혔다. 정복 깃 아래, 목 오른쪽으로 번진 검은 얼룩이 옷감에 배어 있었다. 화상 흉터처럼 보이지만 경계가 흐릿했다.
“언제부터.”
“시연 중이다.”
“성물고 결계에서 쓴 신성력 여파예요?”
카이델이 깃을 다시 여몄다. 손가락 끝이 천에 닿는 힘이 세서 검은 자국 위로 망토가 꼬였다.
“모른다.”
리에나는 품에서 흰 겉옷을 꺼냈다. 아스텔에게 받은 봉투들과 섞이지 않게 바깥쪽에 낀 것이었다. 옷을 펼쳐 카이델의 어깨에 두르려다 멈췄다. 그가 한 발 물러섰기 때문이다.
“보관실에서 이걸 걸치고 나가면 누가 봐도 이상해요.”
“그대로 두는 것보다 낫다.”
카이델이 짧게 답했다. 리에나는 겉옷을 접어 그에게 내밀었다. 받은 카이델은 허리띠 바깥으로 흘러내리지 않게 옷깃을 여몄다. 검은 얼룩은 천에 가려졌다. 다만 오른쪽 소매 끝이 평소처럼 가지런하지 않았다.
“시연장 복귀는 중앙 제단 왼쪽 열주 뒤로 우회해요. 보관실에서 나와 연결된 통로가 제일 가깝습니다.”
“그쪽은 보조 집례자들이 오간다.”
“지금은 비어 있어요. 둘째 찬송이 끝나기 전까지요.”
리에나가 문틈으로 복도 쪽을 봤다. 제단 뒤에서 울리는 노래가 한 차례 낮아졌다. 사람 발소리는 복도 반대편에만 몰려 있었다.
카이델이 보관실 문을 열었다. 그가 앞장서는 대신 리에나가 먼저 복도로 나섰다. 벽에 붙어 두 사람 폭으로 걸었다.
열주 뒤까지는 스물 걸음쯤이었다. 넷째 열주를 지날 때 회중석 뒤에서 하급 집례자 두 명이 보였다. 둘 다 손에 초를 들고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카이델이 리에나의 어깨 뒤로 반 보쯤 붙어 걷는 거리를 좁혔다. 겉옷 자락이 바닥에 끌리지 않게 그가 오른손으로 한 번 걷어 쥐었다.
시연장 중앙으로 복귀하자 공기 온도가 한 단계 달랐다. 향 연기와 사람들의 체온이 뒤섞여 따뜻하게 올라왔다. 에드문트 하인리히가 제단 왼쪽에서 내려오는 계단 앞에 서 있었다. 백금발이 어깨 뒤로 넘어간 채였다.
“시연은 아름다웠습니다, 영애.”
에드문트가 먼저 말했다. 목소리는 낮고 정갈했다.
“다만 성흔이 한 차례 흔들렸습니다. 공식 기도문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는지, 이 늙은이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리에나가 고개를 조금 숙였다.
“기도문은 대주교님께서 정해 주신 문장 그대로였습니다.”
“그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궁금합니다. 같은 문장에서 왜 저만 저 불안정을 보았을까요.”
카이델이 리에나 앞으로 나섰다. 정확히 한 걸음이었다.
“공개 재검증은 무리다. 시연 참관자 앞에서 성흔을 다시 확인하는 절차는 성녀 후보 보호 규정에 없다.”
“보호하겠다는 것이 오히려 의문을 키울 수 있습니다. 단장께서는 공개를 피하면 소문이 잦아드는 쪽이라고 보십니까.”
에드문트가 장갑 낀 손을 여미며 카이델을 봤다. 입가에 옅은 웃음이 있었지만 붉은 보석 목걸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비공개 재검증이라면 교단 기록으로 남고, 군중 앞 재현도 없다. 성흔 불안정 원인을 가리려는 절차로는 충분합니다.”
카이델이 말했다.
“그렇다면 성물고에서 하십시오. 내일, 아침 기도 뒤에.”
에드문트가 손등을 내려다봤다. 왼 손등의 반점이 장갑 밖으로 반쯤 비쳤다.
“성녀 후보께서 응하시겠습니까.”
리에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제단 쪽 촛불이 그녀의 은백색 머리 옆으로 얇게 흔들렸다.
“응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에드문트가 몸을 조금 굽혔다. 띄워 주는 인사처럼 보였지만 시선은 리에나의 목걸이 쪽에 멈췄다가 떨어졌다.
아스텔이 귀빈석 옆에서 걸어 나와 작은 기록판을 펼쳤다. 손이 빨라서 기록판 모서리가 두 번 접혔다.
“대주교님, 재검증 요구를 기록하겠습니다. 장소와 시각을 다시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성물고. 내일 아침 기도 직후.”
에드문트가 대답했다.
“기록에 남기십시오. 성흔 불안정 관찰에 따른 비공개 재검증으로요.”
그가 자리에서 물러나자 아스텔이 기록판에 써 내려갔다. 붓 끝이 두어 번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리에나는 그 옆에 선 채 카이델의 겉옷 자락을 봤다.
옷깃 아래 얼룩이 아까보다 위쪽으로 한 뼘쯤 번져 있었다. 망토와 겉옷 사이, 목선 쪽으로 검은 선이 옷 밖으로 살짝 기어 나와 있었다.
리에나는 몸을 틀어 그 선을 가렸다. 카이델은 그제야 옷깃을 한 번 더 당겼다. 에드문트는 이미 회중석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아스텔은 기록판을 접어 어깨에 멘 튜브에 넣었다.
“내일 성물고에서 기록 검증을 마친 뒤, 이 재검증은 종결됩니다.”
카이델이 낮게 말했다. 리에나에게가 아니라 기록판을 멘 아스텔에게였다.
“시중에 소문이 번지기 전에 끝내야 합니다.”
리에나가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카이델의 손이 다시 겉옷 쪽으로 가서 자락을 내렸다. 검은 선은 천 밑으로 들어갔다. 다만 리에나의 눈에는 그 옷감이 조금만 더 젖어 들어가 곧 다시 배어 나올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