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위장 성녀와 성기사의 거래

5화

어제 번진 검은 선은 카이델의 목덜미를 따라 옷깃 위로 거의 올라와 있었다. 성물고 전실에 들어서면서 리에나는 두 번 다시 그쪽을 보지 않으려다 세 번째 걸음에서 시선을 뗐다. 재검증은 곧 시작된다.

카이델이 앞서 걸으며 전실의 촛대 위치를 훑었다. 걸음이 일정했다. 리에나가 그의 왼쪽 반 보 뒤에서 속도를 맞췄다.

“재검증 중에는 신성력 쓰지 마.”

카이델의 발이 반 박자 늦게 떨어졌다.

“전날 거 안 낫고 오늘 또 쓰면 성물고 안에서 발작할 수도 있어.”

“성녀 보호가 우선이다.”

그가 앞만 보며 답했다. 리에나가 한 걸음 더 붙었다. 둘 사이 간격이 팔 하나로 좁혀졌다.

“보호가 필요하면 내가 검증대에 직접 설게. 성흔 검증은 성녀 후보 몫이잖아.”

“그 검증대가 널 해칠 수도 있다.”

“해쳐도 네 신성력 없이 버티는 게 낫다.”

카이델이 멈춰 돌아봤다. 리에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목선의 성흔이 옷 안에서 조금 위로 움직이는 게 보였다. 카이델의 눈이 짧게 거기 닿았다가 다시 얼굴로 올라왔다.

“오늘 이상 징후가 없으면 요구를 거둔다.”

“거두지 않아도 돼. 네가 안 쓰면 그만이니까.”

카이델이 한 걸음 물러서서 전실 쪽 문을 열었다. 안에서 낮은 복도 바람이 밀려 나왔다. 그는 잡고 있던 문 손잡이를 놓으면서 낮게 말했다.

“요구는 기각이다.”

리에나가 그의 곁을 지나 문 안으로 걸었다.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였지만, 그녀는 시야 끝으로 목덜미의 검은 선이 번지는 속도를 재고 있었다.

‘거부할 줄 알았어. 그래도 오늘만은 버티게 만들지.’

재검증장은 성물고 안쪽 원형 공간이었다. 에드문트가 이미 동쪽 가장자리에 서 있었고, 서기가 그 옆에서 잉크병을 열어 두고 있었다. 검증대는 방 중앙. 리에나가 걸어 들어가자 에드문트가 몸을 반쯤 돌렸다.

“좋은 아침입니다, 영애. 그쪽은 컨디션이 괜찮아 보이는군요.”

리에나가 검증대 앞 두 걸음 지점에 섰다. 카이델은 오른쪽 한 걸음 반 뒤, 근접 경호 위치를 지켰다.

“왜 이렇게 자리를 붙이셨습니까.”

카이델이 물었다.

“성흔 검증에서는 검증자와 후보 사이 세 걸음이 규정입니다. 항의입니까.”

카이델은 항의하지 않았다. 대신 검증대 반대편 쪽을 훑었다. 리에나도 재검증장을 한 번 둘러봤다.

벽을 따라 놓인 향로 받침 셋, 그 아래 넓적한 돌바닥. 전생에서 본 그대로였다. 첫 재검증에서 향로 받침 하나가 중앙을 향해 넘어지고, 거기 서 있던 경호 기사가 화상을 입었다. 이번엔 그 자리에 카이델이 서 있었다.

‘받침은 곧 움직여.’

기에 손을 호주머니에 넣지도, 기록판을 꺼내지도 않았다. 시선을 받침 다리 아래에서 위로 천천히 옮겼다.

“성물고 검증 규정에는 향로를 검증 시작 전에 벽 쪽으로 옮기도록 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아닙니다만.”

에드문트가 말했다.

“향로는 장식이 아니라 검증 정화용입니다. 그대로 두십시오.”

리에나가 검증대 앞으로 다가섰다. 몸을 살짝 비틀어 벽 쪽 향로와 카이델, 자신이 한 선상에 서지 않게 발끝 각도를 고쳤다.

“영애, 검증대에 올라 주십시오.”

검증대는 한 뼘쯤 높은 원형 단이었다. 리에나가 오른발을 디디는 순간 방 안에 낮은 쇳소리가 났다. 정면 향로 받침의 다리 하나가 돌바닥을 긁는 소리였다. 뒤이어 첫 번째 향로가 천천히 기울었다. 재가 흩어졌다.

“카이델.”

리에나가 불렀다. 카이델이 몸을 튼 사이, 그녀가 왼쪽에서 달려들어 그의 오른팔을 붙잡고 동시에 몸을 밀어 넣었다. 넘어오는 향로가 두 사람 옆을 스치며 검증대 다리 쪽으로 떨어졌다. 가장자리 금속이 리에나의 어깨 뒤를 한 차례 그었다. 흰 사제복이 갈라지며 피가 번졌다.

리에나는 신발 앞코로 바닥을 디뎌 다시 몸을 세웠다. 카이델은 이미 검을 뽑지 않고 그녀의 팔을 잡아 자기 쪽으로 당기고 있었다.

“보호 대상이 보호했다.”

카이델의 말이 낮게 깔렸다.

“아직 검증은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에드문트가 다가와 쓰러진 향로를 내려다봤다. 손이 가슴 쪽으로 가서 붉은 보석 목걸이를 짧게 움켰다. 그 보석 아래 금속 테가 잠깐 비었고, 안쪽으로 얇은 빛이 새어 나가듯 보이다 사라졌다. 리에나는 시선을 어깨 출혈 쪽으로 돌렸다.

“시험을 다시 잡겠습니다. 오늘 오후, 같은 장소에서요.”

서기가 기록판을 다시 폈다. 카이델이 손수건을 꺼내 리에나의 어깨를 눌렀다. 흰 천이 금방 붉게 물들었다.

“이 사고도 기록에 남기십시오.”

카이델이 서기를 보며 말했다. 에드문트가 문 쪽으로 두 걸음 가다 멈췄다.

“남기겠습니다. 다만 영애가 스스로 경호 위치를 벗어났다는 점도 분명히 기록될 겁니다.”

그가 몸을 돌려 문으로 나갔다. 서기가 기록판을 챙겨 뒤따랐다. 방 문이 닫히자 카이델이 손수건을 그대로 누른 채 말했다.

“어깨다.”

“알아. 네가 안 쓴 것만으로도 반은 건졌어.”

리에나의 말에 카이델은 대꾸하지 않았다. 다시 열린 문으로 들어온 입회 진행관이 외쳤다. 응급 이송을 준비시키겠다고. 리에나는 눌린 어깨 너머로 검증대를 바라봤다. 쓰러진 향로 옆 탄 자국이 검은 물처럼 바닥으로 번지고 있었다.

응급 이송 준비를 뒤로하고 치료실이 아닌 숙소 쪽으로 발길을 돌린 채, 리에나는 별관으로 이어지는 회랑을 가로질렀다. 오전 햇살이 벽면을 반쯤 씻는 바깥으로 나오자, 뒤에서 카이델의 검이 칼집에 닿는 소리가 한 번 났다.

회랑 바깥은 오전 햇살이 벽면을 반쯤 씻고 있었다. 리에나는 왼쪽 어깨를 감싼 천이 젖는 속도로 걸음을 재촉했다. 뒤에서 카이델의 검이 칼집에 닿는 소리가 한 번 났다.

“서지.”

카이델의 목소리가 회랑 돌기둥에 부딪혀 짧게 울렸다. 리에나는 멈추지 않았다. 성물고 후문 쪽 철문을 지나쳐 별관으로 이어지는 계단 참에 다다랐을 때, 카이델이 옆으로 붙어 팔을 내밀었다. 그녀의 어깨가 아니라 그 앞, 벽과의 사이를 막듯이.

“응급 처치라며 성물고를 벗어났다. 그게 여기까지 오는 길이냐.”

“숙소에 약초가 있어요.”

리에나가 성녀 톤으로 답했다. 카이델은 물러나지 않았다.

“사고 지점을 네가 먼저 알았다. 우연이라고 하면 거기서 끝나.”

리에나의 왼손이 상처 위 천을 눌렀다. 손가락 끝이 차갑게 젖었다.

“사고가 났을 거라는 걸 안 게 아니라, 어디서 날지 알았어요. 그 차이예요.”

“그래서 묻는 거다.”

카이델의 녹색 눈이 한 번 좁아졌다. 검은 정복 위로 겉옷 깃이 올라가 있었지만, 리에나는 그 아래 검은 선이 눌린 자리를 짐작했다. 그도 지금 상처를 숨기고 서 있다.

“말해.”

리에나는 어깨에서 손을 떼었다. 천이 피부에 붙었다가 떨어지며 따끔했다.

“나는 3년 뒤에 죽었어요. 성녀 취임식이 아니라, 성물고에서였고요. 그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취임식 7일 전이었어요.”

카이델이 대답하지 않았다. 회랑 바깥에서 예배 종이 한 번 울렸다. 리에나는 그 종소리 뒤로 카이델의 오른손이 검자루 쪽으로 조금 움직이는 걸 봤다. 칼을 뽑으려는 움직임은 아니었다. 확인하는 듯한 손짓이었다.

“지금 그게 무슨.”

“믿으라는 게 아니에요. 증거를 고르세요.”

리에나가 짧게 말했다. 카이델의 손이 검자루에서 떨어졌다.

“관찰 가능한 증거를 대라.”

“내일 새벽이면 돼요. 대주교 관저 장부실에 장부함이 하나 있어요. 겉봉에는 내부 출납부라고 쓰여 있는데, 안에는 지난 후보들의 향유 수령 기록이 있어요. 우리가 관리실에서 복원한 것보다 더 빠른 원본이죠.”

“장부실 위치를 어떻게 아는.”

“3년 뒤에 그 장부를 직접 봤으니까요. 늦게요. 모두가 죽은 뒤에.”

카이델이 그녀의 젖은 천을 봤다. 한 박자 늦게 시선을 회랑 입구 쪽으로 돌렸다.

“증거가 거기 있다고 치고. 그걸 꺼내면 내일 재검증은.”

“성물고 검증은 무너지지 않아요. 대주교가 재검증을 걸어도 장부가 먼저 나오면 성흔 문제는 그다음이에요.”

카이델이 천천히 팔을 내렸다. 리에나와의 거리를 반 보쯤 유지한 채였다.

“도주할 생각이었다면 이 말을 꺼내지 않았을 거다.”

“도주 준비는 늘 해요. 그게 제 직업이고요.”

리에나가 대답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예측을 증명할게요. 성기사단장께서 믿을 수 있는 방식으로요.”

카이델은 한동안 그녀의 왼쪽 어깨, 젖은 천, 그리고 회랑 아래로 이어지는 길을 번갈아 봤다. 아침 햇살이 기둥 사이로 얇게 들어와 그의 검은 정복 가장자리를 밝혔다. 그는 스스로 깃을 당겼다.

“숙소에 돌아가 상처부터 지져라.”

카이델이 말했다.

“내일은 아침 기도 뒤 재검증이다. 장부는 그 전에 확인한다.”

“새벽에요. 성물고 후문이 잠기는 시간 뒤에.”

“시각을 잡아라.”

그가 돌아섰다. 리에나는 회랑을 내려가는 카이델의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어깨를 계속 눌렀다. 손이 피로 미끄러웠다.

숙소 내실 문을 열자 벨라가 창가에 서 있었다. 회색 메이드복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고, 오른손으로 창틀에 걸친 타월을 만지고 있었다. 리에나가 들어오는 소리에 돌아보며 한쪽 눈썹을 올렸다.

“어깨, 재검증장에서 다친 모양이네. 성기사단장이 뒤따라온 것도 그래서고?”

“문 잠가.”

리에나가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벨라가 문을 지나쳐 밖을 한 번 훑고 잠갔다. 빗장이 내려가는 소리가 났다.

“약은 발랐어?”

“아직.”

“그럼 앉아. 내가 꿰매 줄까? 소독은 해야지, 언니.”

벨라가 내실 구석의 작은 약장에서 헝겊과 증류주 병을 꺼냈다. 리에나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지 않고 문 옆 의자에 걸터앉았다. 벨라가 다가와 어깨 쪽 천을 걷어 냈다. 상처는 길지 않았지만 가장자리가 자줏빛으로 붓기 시작했다.

“이거, 성물고에서 난 거 맞아?”

벨라가 증류주를 헝겊에 적셨다.

“재검증 중에 결계가 흔들렸어. 파편이 날아왔고.”

리에나는 벨라가 상처를 닦을 때 숨을 한 번 짧게 들이쉬었다. 알코올이 벌어진 살에 닿자 어깨 전체가 화끈했다. 벨라는 손놀림을 늦추지 않았다.

“에드문트가 재검증 걸었다던데, 사고로 끝났다며? 모양새가 이상해, 언니.”

“모양새가 원래 이상한 사람이야.”

벨라가 낮게 웃었다. 증류주 병을 내려놓고 작은 바늘과 실을 꺼냈다. 상처를 세 바늘 꿰매는 동안 리에나는 어깨 대신 벨라의 손을 봤다. 손끝이 여린 듯해도 바늘 쥐는 힘이 길드에서 살아남은 손이었다.

“자, 됐어.”

벨라가 실을 잘랐다. 리에나가 어깨를 조심히 움직여 보았다. 당기는 아픔이 남았지만 팔은 올라갔다.

“그래서? 성기사단장이 왜 따라왔는데? 어디까지 말했어?”

“필요한 만큼만.”

벨라가 헝겊을 접어 약장 위에 올렸다. 그녀가 창가로 가서 타월을 만졌다. 아침 햇살이 짧은 검은 머리카락을 밝혔다.

“내가 보기엔 오늘 밤이 마지막이야, 언니.”

벨라가 타월 밑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어두운 액체가 반쯤 찼고 마개는 낡은 밀랍으로 덮여 있었다.

“빼돌린 자살 독약이야. 시중에서 성녀 후보가 손에 넣을 수 있는 농도로 희석해 왔어. 네가 이걸로 죽은 척하면 돼. 성녀 리에나는 숙소에서 자살했고, 시체는 길드가 빼내고, 넌 수도 밖으로 나가는 거야.”

벨라가 병을 리에나 쪽으로 내밀었다. 그녀의 손이 조금 흔들렸다. 리에나는 받아서 손바닥 위에 올렸다. 유리가 체온을 빼앗아 갔다.

“성녀 죽음 위장이에요? 독약병 하나로?”

리에나가 물었다.

“내가 그럴 시간은 벌어 줘. 밤장미 장례인에 익숙한 사람들이 와 있어. 관 운반 행렬에 섞어 보내면 돼. 넘어가면 끝이야, 언니.”

벨라가 병을 쥔 리에나의 손을 보며 한 걸음 다가왔다.

“가자. 이 성당에서 오래 버티면 널 알아본다. 성기사단장은 이미 널 의심해. 대주교는 내일 재검증으로 목을 조르고. 도망쳐, 언니.”

“못 가요.”

리에나가 병을 가슴 높이에서 그대로 쥔 채 말했다.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내가 지금 여기서 죽은 척하면, 남는 기록은 자살뿐이에요. 벨라가 말한 행렬도, 수도 밖 탈출도 다 길드 사람 손을 빌려야 하고요. 그 인간들은 이 일을 공짜로 하지 않아.”

벨라가 입술을 세게 붙였다.

“그럼 언제까지 성녀 짓을 해? 이번 생은 성녀로 죽을 거야?”

“이번 생엔 성녀로 죽지 않아요.”

리에나가 병을 내려다봤다. 어두운 액체가 손의 떨림 없이 창문 빛을 받았다.

“길드 추격대가 움직이기 전에 결판을 낼게요. 7일 안에.”

벨라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타월을 다시 병이 있던 자리에 덮으며 리에나에게 등을 보였다.

“그 말, 지난번에도 비슷하게 했어. 그리고 3년 뒤에 죽었고, 언니.”

리에나가 병을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유리가 마룻바닥에 닿는 소리가 작았다.

“이번엔 달라요.”

“뭐가? 그 성기사 때문이야?”

벨라가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리에나는 벨라의 말끝에 실물처럼 올라온 칼날이 몸에 닿는 느낌이었다.

“아니요. 내가 도망치지 않기로 한 것뿐이에요.”

벨라가 창틀을 손으로 내리쳤다가 바로 폈다. 이번에는 진짜로 돌아봤다.

“후회할 거야. 넌 매번 그렇게 안 도망쳤지.”

벨라가 약장 위에서 자른 실과 헝겊을 치웠다. 문 앞으로 걸어가다 리에나의 손에 남아 있는 병을 바라봤다.

“이틀 뒤까지만 기다릴게. 그때 마음 바꾸면 이 병이 아니라 나한테 말해, 언니.”

“그땐 아무 말도 없을 거예요.”

벨라가 빗장을 풀었다. 문이 열리면서 복도 쪽 찬 공기가 들어왔다.

벨라가 물러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문 너머에서 발소리가 멎었다. 리에나는 독약병을 내려다본 채 앉아 있었다. 문이 한 번 가볍게 울렸다. 벨라와는 다른 무게였다.

“열어.”

카이델의 목소리였다.

리에나가 일어나 문을 열었다. 카이델은 문지방 바로 밖에 서 있었다. 검은 정복의 깃은 약간 젖어 있었다. 그는 복도를 가리지도 않고 내실 안으로 시선을 던졌다.

“누구였지.”

“벨라요. 내 길드 후배예요.”

리에나가 병을 든 채 물러서며 안으로 들였다. 카이델이 문을 닫고 한 걸음 들어왔다. 내실은 약초 냄새와 증류주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 여자가 남긴 거냐.”

카이델이 병을 봤다.

“맞아요. 자살 독약이래요. 성녀를 죽음으로 위장해서 도망치라더군요.”

“받은 이유는.”

리에나가 병을 손바닥 위에 올렸다. 유리가 식은 손을 더 식혔다.

“그게 제 거래 증명이니까요.”

카이델이 병에 닿지 않게 몸을 조금 세웠다.

“증명이라.”

“성녀로 위장한 암살자와 그걸 알아본 성기사. 서로 약점을 하나씩 쥐고 있으면 거래가 성립해요. 벨라가 가져온 이 병도 이제 약점이 아니고 증거예요.”

리에나가 병을 침대 옆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어두운 액체가 유리 안에서 천천히 출렁였다.

“대주교 장부를 내일 새벽에 탈취해요. 제 예측이 맞으면 그게 재검증보다 먼저 그를 옭아맬 거예요.”

카이델이 팔짱을 끼지 않은 채 탁자와 그녀 사이를 가만히 봤다.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나.”

“알고 있어요.”

리에나가 말했다.

“이단 심문에 회부될 거고, 그다음은 성물고가 아니라 지하 감방이에요.”

“알고 제안하는 거냐.”

카이델이 한 박자 느리게 말했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내일 새벽, 대주교 관저 장부실. 복도 순찰이 한 번 비는 시간이 있어요. 신성력 결계가 겹치지 않는 구역도 제가 알고요. 성기사단장께서는 후문 쪽을 맡아요.”

“관저 후문은 경비가 바뀐다. 그 시간을 다시 확인해.”

카이델이 말했다.

“예상한 거보다 순찰이 빠르면 복도에서 제가 막을게요. 망만 서는 게 아니라 직접 들어갈 수도 있어야 하고요.”

“그것까지 조율해.”

리에나가 탁자 옆으로 가서 병을 다시 쥐었다. 그의 눈이 병을 따라 움직였다.

“독약은 내가 보관하겠어요. 도망치지 않는다는 뜻으로.”

그녀가 병을 손에 쥔 채 그의 눈을 봤다.

“나는 도망가지 않아요. 내 예측을 증명해요.”

카이델의 손이 겉옷 깃에서 떨어졌다. 그는 탁자 너머로 독약병을 한 번 더 본 뒤, 리에나의 어깨 쪽으로 시선을 짧게 두었다.

“증명은 장부가 할 거다. 실패하면 그 병도 네가 가지지.”

그가 말했다.

“기회는 내일 새벽까지다.”

리에나가 병을 들고 그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유리병이 손바닥 온기를 오래 빼앗아 갔다. 카이델은 문으로 돌아서기 전, 내실 안쪽 벽에 걸린 낡은 기도문 액자를 한 번 쳐다봤다.

“지금 자.”

카이델이 문고리를 잡으며 말했다.

“성물고 재검증보다 먼저 움직일 몸을 만들라.”

리에나는 병을 침대 옆 서랍 가장자리에 내려놓고 어깨를 움직였다. 꿰맨 자리가 옷 안쪽에서 뜨거웠다. 카이델이 문을 열고 나갔다.

그의 발소리가 복도 쪽에서 한 번 멎는 듯하다가 다시 이어졌다. 리에나는 닫힌 문 쪽을 보지 않고 서랍을 열어 독약병을 깊숙이 밀어 넣었다. 서랍 안쪽에 공식 기도문 사본이 접혀 있었다. 그 위로 병을 눕히고 다시 닫았다.

새벽까지, 그냥 시간이 아니라 증명이 필요하다. 리에나는 어깨를 감싼 붕대를 손끝으로 짚으며 생각했다. 이번에는, 그 증명이 나만 아는 예측이 아니라 장부로 남을 거다.

위장 성녀와 성기사의 거래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