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위장 성녀와 성기사의 거래

6화

후문 쪽 회랑 바닥에 횃불 그림자가 겹쳐 누워 있었다. 빛이 지나간 자리만 달아오르고, 벽 쪽 공기는 서늘하게 내려앉는 한밤이었다.

리에나는 후문에서 멈추지 않고 벽을 따라 걸었다. 왼쪽 어깨를 감싼 붕대가 외투 안에서 움직일 때마다 살갗이 당겼다. 카이델의 발소리가 반 보 뒤에서 그녀의 속도에 맞춰졌다.

“순찰 교대가 예상보다 이르다.”

카이델이 낮게 말했다. 리에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얼마나.”

“반 시진은 빠를 거다.”

“충분해.”

후문 바깥 계단참에서 리에나가 몸을 낮췄다. 대주교 관저 서재는 후문에서 꺾인 복도 끝, 장부실은 서재 옆 방이었다. 손끝이 돌바닥에 닿자 밤공기에 식어 있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결계가 겹치지 않는 구역이 여기였지.”

“그렇다. 복도 중앙까지는 안전하다. 서재 문턱부터는 신성력 흔적이 남을 수 있어.”

리에나가 복도 중앙을 밟으며 벽에 바짝 붙지도, 떨어지지도 않은 선으로 나아갔다. 카이델이 후문 쪽을 한 번 돌아본 뒤 그녀의 뒤를 따랐다.

장부실 문 앞에서 그가 멈춰 서고, 리에나가 손을 뻗었다. 문고리 아래 잠금쇠가 두 겹이었다. 위쪽은 단순한 걸쇠였고 아래쪽은 좁은 열쇠 구멍이었다.

“열쇠는.”

“없어. 잠금부터 확인해.”

리에나가 옷소매 안쪽에서 가는 철심을 꺼냈다. 끝부분을 아래쪽 열쇠 구멍에 밀어 넣고 천천히 각도를 틀었다. 철심이 두 번째 톱니에 걸렸다.

“길드에서 배운 거야?”

카이델이 묻되 시선은 복도 쪽에 두었다.

“서면 의뢰 없는 살인보다 쓸모 있는 기술이야.”

철심이 한 번 더 틀리자 쇠가 맞물리는 소리가 작게 났다. 리에나는 문을 한 뼘만 열었다. 방 안의 공기가 차갑게 흘러나와 그녀의 손등에 닿았다.

“순찰은.”

“지금 복도 끝을 돌고 있다. 시간이 없다.”

그가 장부실 문을 지나 복도 방향으로 반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난 여기서 본다. 너는 장부함만 확인하고 나와.”

리에나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은 좁았고, 벽 한쪽에 장부함이 세워져 있었다. 나무 서랍 세 칸 위에 가죽 장부 한 권이 꽂혀 있고, 그 앞으로 밀랍 봉인이 눌린 천 조각이 덮여 있었다.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봉인 조각이 아니라 깨져서 밀려난 밀랍이었다. 가장자리가 손톱으로 긁힌 것처럼 들떠 있고, 천 조각 아래쪽 모서리는 방 안쪽으로 접혀 있었다.

리에나가 허리에 낮춰 찬 단검을 빼지 않고 장부를 집었다. 표지는 낡은 가죽이었지만 닫힌 상태로 무게가 거의 실리지 않았다. 그녀가 펼치자 속지가 없었다. 장부함에 꽂혀 있던 것은 빈 표지였다.

문이 열렸다.

“리에나.”

카이델의 목소리가 방 입구에서 날아들었다. 그 안에 복도 벽에 횃불이 겹쳐 번지는 소리가 실려 왔다. 쇠 갑옷이 걸음마다 서로 부딪히는 소리. 한두 명이 아니었다.

“봉인은 이미 열려 있었어.”

리에나가 빈 표지를 닫으며 말했다.

“장부는 비었어. 이건 미리 준비된 자리야.”

카이델이 복도로 나가려다 몸을 낮췄다. 교단 호위대가 장부실 앞 복도를 막아섰다. 선두 호위병이 검을 뽑지는 않았지만 방패를 가로로 눕혀 진입로를 막았다.

“성기사단장. 그 안에서 나오십시오.”

카이델이 한 발도 물러나지 않았다.

“대주교의 지시냐. 아니면 관저 경비대장이 스스로 움직인 거냐.”

호위병 하나가 뒤로 비켜서자 대주교 관저 경비대장이 걸어 나왔다. 손에 연락용 소형 램프를 든 남자는 장부실로 향하는 복도를 등지고 서서 리에나가 옆에 선 카이델을 쳐다봤다.

“밤장미 길드 소속 성녀 후보의 심야 침입 현장입니다. 두 분 다 무장을 내려놓으십시오.”

리에나가 손에 든 가죽 표지를 본다. 빈 표지였다. 이미 증거는 여기 없다. 그 대신 자기 손안에 있는 것은 함정에 걸린 위장 성녀와, 진입로를 연 성기사단장이라는 구도뿐이었다.

“내가 안내할게.”

카이델이 호위대를 향해 낮게 말했다.

“이 자리에 선 것은 후보 본인의 야간 외출이 아니라, 대주교 관저의 내부 장부를 확인하라는 명의를 받고 움직인 것이다. 그 근거는 내가 낸 서면 조사 동의서로 남아 있다.”

호위대가 움찔하며 서로를 봤다. 경비대장만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동의서는 장부실 안에서 확인하겠습니다.”

경비대장이 손을 들었다.

“둘 다 포박해. 무기는 거둬.”

리에나가 장부를 떨어뜨렸다. 빈 표지가 바닥에 부딪히며 닫힌 채로 미끄러졌다. 호위병 둘이 다가와 그녀의 팔을 뒤로 돌렸다. 왼쪽 어깨가 당겨지면서 붕대 안쪽 상처가 뜨거워졌다.

카이델도 검이 풀리는 소리를 냈다. 그가 호위대 사이에서 마지막으로 리에나를 돌아봤다.

“여기까지가 너의 예측이었나.”

“아니. 여기까지는 대주교가 먼저 움직인 거야.”

리에나는 조이고 오는 포박 끈의 감촉을 턱 끝까지 느끼며 대답했다. 손목이 등 뒤에서 묶이자 손끝이 얼음처럼 식었다.

아침 기도 종이 중앙 대성전 바닥까지 깔리기 전에 호위대가 통로를 막았다. 리에나는 두 팔이 뒤로 묶인 채 석상 앞 포고단 왼쪽으로 끌려 나왔다. 오른쪽으로 두 걸음 떨어진 자리에 카이델도 섰다. 그의 손목에도 결박구가 채워져 있었다.

장부실 복도에서 확인한 빈 표지가 아직 눈앞에 남아 있었다. 함정을 알아챘을 땐 이미 호위대가 진입로를 틀어막은 뒤였다.

석상 앞 제단에는 축성된 은 성유함이 보자기 없이 올려져 있었다. 에드문트가 제단 위쪽 단상에서 내려왔다. 붉은 보석 목걸이가 가슴께에서 한 번 흔들렸다.

“공개 재검증을 시작하지.”

입회 진행관이 군중 쪽을 향해 외쳤다. 대성전 안은 후보 시연 때보다 조용했다. 발소리와 옷깃 스치는 소리만 이따금 났다.

“성녀 후보께서는 어젯밤 대주교 관저 장부실에 무단 출입하셨다.”

에드문트가 리에나 앞에 섰다.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장부 훼손 미수와 야간 출입 위반만으로도 자격 정지 사유지요. 다만 오늘은 그것보다 먼저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그가 장갑 낀 손을 들어 은 성유함을 들었다. 리에나의 목덜미가 바짝 당겨졌다.

“공인된 성흔은 축성된 은 앞에서 정상적인 불꽃을 유지합니다.”

에드문트가 성유함 뚜껑을 열었다. 은빛이 제단 쪽 초에서 번졌다. 그가 한 걸음 다가와 성유함을 리에나의 목 앞까지 내밀었다. 청금석 성흔이 옷 안에서 뜨거워졌다.

불꽃이 흔들렸다. 한 번, 두 번. 셋째 초에 불꽃이 옆으로 꺾였다. 에드문트가 성유함을 거두기 전까지 은빛에 닿은 성흔의 푸른 불꽃이 가늘게 떨렸다.

“방금 세 번, 불꽃이 흔들렸습니다.”

에드문트가 군중을 향해 성유함을 들어 보였다.

“이 성흔은 위조품입니다.”

대성전 안이 한꺼번에 술렁였다. 리에나는 숨을 짧게 삼켰다. 목덜미가 아니라 등줄기를 따라 냉기가 내려앉았다.

“성녀 자격을 박탈하고 이단 심문을 개시한다.”

에드문트가 손을 내렸다. 호위대 둘이 리에나의 양옆에 붙었다. 그는 카이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성기사단장께서는 이 위조 성흔을 여러 차례 보호하셨지요.”

카이델이 입을 열지 않았다. 결박된 손이 뒤에서 한 번 움직였다.

“봉인해 둔 조사 기록을 공개해라.”

입회 진행관이 단상 뒤에서 봉투를 꺼내 에드문트에게 건넸다. 봉인은 이미 뜯겨 있었다. 에드문트가 안의 문서를 펼쳐 첫 장을 군중 쪽으로 들었다.

“성물고 결계 안에서 신성력을 사용한 뒤 심박이 급락한 기록입니다. 기준치 아래로 떨어진 횟수가 한 차례가 아닙니다.”

그가 문서를 리에나 쪽으로 조금 돌렸다.

“불안정한 신성력으로 위조 성흔을 감추려 한 공모로 보기에 충분하군요.”

리에나가 문서를 보려 고개를 들었다. 계측 수치와 사용 시각이 적혀 있었다. 전생의 성물고에서도 비슷한 계측 기록이 대주교의 손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그 기록이 더 빨리 공개되었다.

“카이델 아르겐 성기사단장.”

에드문트가 문서를 접어 진행관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직위를 정지한다. 교단 지하 구금소로 압송하라.”

호위대가 카이델의 팔을 잡았다. 그는 버티지 않았다. 오른쪽 어깨가 살짝 밀렸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결박구가 손목 위에서 짧게 긁히는 소리를 냈다.

리에나는 목 안쪽까지 차오르는 말을 눌렀다. 여기서 나서면 이단 심문 전에 공모가 확정된다. 그보다 먼저, 그가 나를 본명으로 불러 주기를 바라는가.

카이델이 압송되기 직전 고개를 돌렸다. 호위대 어깨 너머로 그가 리에나를 똑바로 보았다. 시선이 닿는 순간,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이브.”

군중의 웅성임이 순간 멀어졌다. 성녀 후보도, 위조 성흔도 아닌 그 이름이 석상 앞에 떨어졌다. 리에나의 발이 바닥에 붙은 채 멎었다.

그가 다시 고개를 돌리기 전까지 한 박자가 걸렸다.

“기회를 남겨라.”

카이델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호위대가 그를 통로 쪽으로 밀고 갔다. 리에나는 그 이름을 꽉 쥔 채 서 있었다. 위조 성녀로 공표된 자리에서, 본명으로 불린 그 한 번이 다음 준비를 정했다.

‘반격은 여기서 시작된다.’

위장 성녀와 성기사의 거래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