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장 성녀와 성기사의 거래
7화
리에나는 대기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손에서 힘을 뺐다. 호위대는 복도 밖에 두 명. 안쪽엔 벨라뿐이었다. 공개 석상에서 끌려온 지 채 한 시진이 지나지 않았다.
“이거, 예전 거야.”
벨라가 메이드복 소매에서 손가락만 한 유리병을 꺼내 탁자에 내려놓았다. 뚜껑은 밀랍으로 봉해져 있었다. 리에나가 병을 집어 촛불에 비춰 보았다.
“네가 빼돌린 거.”
“버리라니까 왜 남겼겠어, 언니.”
벨라는 문 쪽을 한 번 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암살 실패용 독이잖아. 이걸로 가는 척해야 해. 대주교가 직접 시신 확인하기 전에.”
리에나는 병을 손바닥으로 굴렸다. 유리 안에서 액체가 느리게 벽을 탔다.
“삼키진 않는다.”
“알아. 호흡으로 사망 징후 만드는 거, 길드에서 몇 번 봤지.”
벨라가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난 밖에서 검시 지연 구실 만들게. 성녀 후보 시신은 함부로 옮길 수 없다는 규정으로 버티면 돼.”
“시신 보관실로 옮겨.”
리에나가 병의 밀랍을 엄지로 눌러 깨며 말했다.
“거기가 대성당 서고로 가는 길목이야.”
벨라가 잠시 그녀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에나는 병을 기울였다. 쓴 냄새가 혀뿌리까지 닿기 전에 입술을 다물었다.
독은 목젖 뒤로 넘기지 않고 입천장과 혀 사이에 가뒀다. 암살자 호흡법. 횡격막을 끌어올려 호흡을 얕게 만들고, 맥박이 가라앉을 때까지 어깨와 목의 힘을 순서대로 지웠다.
벨라가 문을 열며 밖에 소리쳤다.
“성녀 후보님께서 쓰러지셨어요. 검시 전에 옮기지 마세요.”
호위대의 발소리가 겹쳤다. 리에나는 탁자 모서리를 짚은 자세로 천천히 무릎이 접히게 했다. 시야를 바닥 타일의 이음새에 두고 눈을 뜬 채 호흡을 끊었다.
“시신 보관실로 모시겠습니다.”
하급 조제사 한 명이 달려와 리에나의 맥을 짚었다. 벨라가 그 손목을 제지했다.
“맥 짚는 법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왜 나서.”
“기록을 남겨야 합니다.”
“검시관이 오기 전엔 아무도 못 만져. 이분은 성녀 후보야, 함부로 하지 마.”
호위대가 들것을 가져왔다. 리에나는 몸에 힘을 완전히 풀었다. 두 사람이 그녀를 들것에 옮기는 동안 벨라가 빈 유리병을 소매 안으로 챙겼다. 리에나의 손은 굳어지지 않게 반쯤 쥔 채 옆구리에 두었다.
시신 보관실은 대성당 서고에서 계단 하나를 내려간 지하에 있었다. 들것이 내려지는 순간, 리에나는 눈꺼풀을 얇게 떠 주변을 살폈다. 벽을 따라 길게 놓인 석판 하나, 모서리에 접이식 침상, 촛불 두 자루.
벨라가 검시관에게 보낼 사람을 찾으러 나갔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복도에서 희미해졌다. 호위대 두 명은 문 밖으로 물러났다.
리에나는 호흡을 되살렸다. 독을 뱉을 곳이 필요했다. 석판 옆 천 조각을 입에 대고 천천히 액체를 흘려보냈다. 쓴맛이 혀를 물고 늘어졌다. 물로 헹굴 수 없으니 옷소매 안쪽으로 입술을 닦았다.
발소리가 복도 끝에서 멈췄다. 벨라가 아니었다. 리에나는 다시 침상에 눕고 눈을 감았다. 문틈으로 횃불 그림자가 스치고 사라졌다. 순찰이었다.
벨라가 돌아온 건 촛불이 한 뼘쯤 줄었을 때였다.
“서고 쪽 순찰, 지금 빈틈이야. 계단은 비었고.”
리에나가 일어났다. 벨라가 침상 밑에서 검은 외투 한 벌을 꺼내 건넸다. 언제 준비했는지 묻지 않았다. 휘감자 성녀 후보복의 흰 소매가 가려졌다.
“이건 챙겨.”
벨라가 빈 유리병을 내밀었다. 리에나가 받아 외투 안주머니에 넣었다.
“나중에 대조해야지, 목걸이 독이랑 같은 계열인지.”
“목걸이는 대주교가 지금도 걸고 있을걸, 언니.”
벨라가 낮게 웃었다.
“그걸 어떻게 빼.”
“오늘 밤 부순다.”
리에나는 계단 쪽을 보며 말했다.
“서고부터 가.”
서고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밤에도 들어갈 수 있는 건 야간 기록 열람 명부에 이름이 오른 자뿐이었지만, 그 문은 손가락으로 밀자 열렸다. 리에나는 문틈으로 안을 살폈다. 아스텔이 등지고 서 있었다.
“늦었습니다.”
아스텔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
“서고 순찰이 아까 끝났어요. 여기가 제일 안전합니다.”
그가 긴 탁자 위에 천으로 싼 꾸러미를 올렸다. 층층이 겹친 천을 열자 문서 세 묶음이 드러났다.
“수정 전 위조 성흔 등록 원본입니다. 사본은 제가 손본 흔적을 남겨 놨어요. 덧칠한 잉크가 자외선에 반응하도록 해 뒀습니다.”
리에나가 원본을 집어 첫 장을 넘겼다. 도장 옆 날짜 표기가 방금 본 것처럼 선명했다.
“후보 사망 기록도 여기 있어요. 사인은 모두 심장마비로 되어 있고, 검시관 서명이 빠져 있습니다.”
아스텔이 목소리를 낮췄다.
“이걸 제가 왜 드리는지 아시죠.”
“서류 심의에서 내 서류를 손봐준 사람이 당신이잖아.”
리에나가 사본 위로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지금은 그 흔적이 증거야.”
아스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금소 면회 기록은 제가 만들겠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성기사단장과 접촉할 공식 명분이 생깁니다.”
리에나는 문서들을 다시 천으로 싸서 품에 안았다. 무게가 겨드랑이 쪽으로 쏠렸다.
“어디로 가시려는지 묻진 않겠습니다. 다만, 서고를 나가기 전에 한 가지만요.”
아스텔이 손을 내밀었다.
“제가 손본 사본은 여기서 한 번 제 앞에서 확인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위조 흔적이 제 것이라고 증언할 수 있습니다.”
리에나가 사본 한 장을 펼쳤다. 아스텔이 그 위에 손가락을 댄 채 천천히 긁었다. 잉크가 번질 듯 흐트러졌다가 다시 자리 잡았다. 뭔가가 은은하게 반짝였다.
“됐습니다.”
아스텔이 물러났다. 리에나가 꾸러미를 여몄다. 서고 문 밖으로 시신 보관실 쪽 공기가 차갑게 밀려 들어왔다. 리에나는 문을 등지고 물러나지 않았다. 계단은 아직 비어 있었다.
구금소 바닥의 습기가 무릎을 타고 올라왔다. 카이델은 등을 돌로 된 벽에 붙인 채 앉아 있었다. 손목의 결박구는 호위대가 채운 그대로 조여들고 있었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갈비뼈 아래에서부터 갑갑한 무게가 번졌다.
새벽녘이 지나며 철창 밖 복도에 발소리가 겹쳤다. 아스텔이었다. 기록판과 먹병을 든 그가 구금소 앞에 서서 철창 안을 힐끗 보았다.
“구금 기록입니다. 세 항목만 확인하면 끝납니다.”
아스텔의 말이 빠르고 끝음이 약간 갈렸다.
“성흔은.”
카이델이 낮게 물었다.
“확인 항목에 없습니다.”
아스텔이 철창에 기록판을 붙들고 펜을 들었다. 그 순간 카이델의 목 오른쪽에서 검은 얼룩이 옷깃 위로 기어올랐다. 얼룩이 피부를 칠하는 속도는 전날보다 한 박자 느렸지만, 그 대신 어깨와 가슴 쪽으로 넓게 번졌다.
카이델의 몸이 벽에서 떨어지지 못했다. 손가락 하나가 결박구를 사선으로 긁었다. 바깥 복도 등불 아래에서 아스텔의 근접한 관찰이 그 동작을 놓치지 않았다.
“발작이군요.”
아스텔이 먹병을 내렸다. 면회 기록 자리를 재빨리 덮었다.
“열지 마라.”
카이델이 말했다. 아스텔은 손에 쥔 기록판을 다시 들었다.
“이 상태에서 구금 기록을 남기면 안 됩니다. 신성력 주기와 무관합니다.”
하급 기록관의 말이 문장 사이에서 또 끊어질 듯 빨라졌다. 카이델은 왼쪽 손을 가까스로 정복 안으로 넣었다. 금속이 손가락에 걸렸다. 인장 반지였다. 손끝에 혼자 꽉 눌리는 감각이 있었다.
“책상 서랍 오른쪽 기록지. 뒤집어 봐.”
카이델의 목소리가 목 안쪽에서 좁게 새어 나왔다.
아스텔이 잠시 망설였다. 결박구를 채워 놓은 수감자가 무언가를 요구한다는 것만으로는 문을 열 수 없었다. 하지만 카이델이 도착하기 전에 그 자리를 지키던 기록관의 별도 지침이 큰 소리로 떠올랐다.
“열쇠와 질문은 제가 한다. 단, 아르겐 성기사단장의 격리 확인은 기록을 먼저 받는다.”
아스텔은 호위대 교대 시간표를 짧게 확인했다. 지금이 면회 기록 작성이 허용된 한 시각이다. 그는 구금소 바깥 서랍에서 정해진 책상 오른쪽 기록지를 꺼내 빈 칸이 있는 쪽을 위로했다.
카이델이 그 쪽을 손가락 없이 고개로 가리켰다. 반대쪽이 뒤집어져야 하니 않느냐는 뜻의 고갯짓이 헛돌았다. 아스텔이 종이를 뒤집자 그제야 카이델이 반지를 쥔 손등을 쇠창살 가까이 뻗었다. 검은 얼룩이 이미 옷 안쪽을 다 덮은 것처럼 손의 움직임이 더뎠다.
“누르고 안 찍어도 된다.”
아스텔이 뒤집힌 기록지 안쪽으로 펜 끝을 넣어 받침 접힌 틈을 벌렸다. 그 틈 위에 카이델이 반지를 눌렀다. 종이가 이중으로 접힌 자국을 따라 반지 문양이 반만 찍혔다. 축성된 필멸 불가 잉크가 아니라 그냥 먹과 눌림 자국이었다. 카이델은 손을 다시 정복 안으로 넣지 못한 채 멈췄다.
“다음 주기 전에 붉은 보석 목걸이를 확보해라.”
아스텔의 어깨가 멈칫했다.
“성녀 후보 공개 재검증 때 대주교가 찬 목걸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속이 빈 홈에 뭐가 들었는지 확인할 가치는 있다. 대주교 관저 서재 장부실, 예전 출납 기록과 같은 금고다.”
카이델이 그 말까지는 한 번에 붙였다. 문장 끝이 얇아져도 속도는 변하지 않았다.
아스텔이 인장 자국 지시서를 교복 안쪽에 밀어 넣었다. 기록판과 먹병을 든 손이 다시 분주해졌다. 그는 감시병이 없는 사이 확인 서류 두께를 정리한 뒤, 원래 기록지를 서랍에 되돌려 넣었다.
“이 기록은 끝까지 쓰고 가겠습니다.”
“써서 리에나에게 전달해.”
카이델이 말했다. 아스텔은 대답 대신 기록지에 잉크가 번지지 않도록 종이를 한 번 흔들었다가 관 밖 복도로 물러났다.
카이델은 다시 벽에 기댔다. 목 오른쪽의 얼룩이 쇄골 아래로 내려가는 것 같은 열이 천천히 퍼졌다. 인장 반지를 평소처럼 손가락에서 빼내 정복 안쪽에 돌려 끼우는 일을 하지 못했다. 그 반지는 오른손에서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은 채 다음 호흡까지 남아 있었다.
대주교 관저 서재는 오후가 되어도 볕이 들지 않았다. 서쪽 장부실 금고는 커튼이 드리운 벽 뒤에 숨어 있었다. 리에나는 벨라의 회색 겉옷을 두른 채 장부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스텔이 구금소에서 가져온 인장 자국 지시서는 벨라를 통해 리에나의 손에 닿았고, 그 종이에는 서재 서쪽 장부실 금고의 위치와 은제 손잡이 방향이 짧게 눌려 있었다.
성물 보관함을 겉옷 안쪽에 대각선으로 붙들고 있던 리에나가 금고 앞에 섰다. 열쇠는 없었다. 그러나 아스텔의 지시서가 마지막으로 알려준 단서는, 금고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 들어간 날짜에만 잠금쇠가 늦게 걸린다는 점이었다.
리에나는 무릎을 낮추고 장부실 바닥 가죽 밑을 눌렀다. 장부 진열 아래 깔린 반듯한 목판이 한 개만 뒤로 밀리는 위치가 있었다. 그 틈으로 금고 하단의 잠금쇠가 보였다. 손잡이를 들고 잠금쇠 끝을 손톱이 아니라 미리 준비한 목판 조각으로 눌렀다. 금고 문 안쪽에서 금속이 한 번 물러나는 소리가 났다.
“늦게 온 사람이나 늦게 걸린 문이나.”
리에나가 짧게 숨을 내쉬며 문을 당겼다. 안쪽 선반 위에 붉은 보석 목걸이가 검은 융 안에 놓여 있었다. 공개 재검증에서 에드문트가 목에 걸었던 그 물건이었다. 리에나는 보관함 안쪽에 이미 넣어 둔 작은 밀랍 종이와 핀셋을 꺼냈다. 목걸이 뒤쪽의 보석 장식을 뒤집었다.
붉은 보석 뒤판의 얇은 뚜껑이 손가락 끝을 더디게 만들었다. 좌측 어깨에 베인 상처가 외투 안에서 조여드는 바람에 팔꿈치를 금고 문에 한 번 부딪쳤다. 리에나는 신음 대신 이를 세게 다물었다.
뚜껑이 들리자 속에 파인 홈이 보였다. 홈 안에는 연하고 어두운 재 같은 가루가 손톱보다 얇게 쌓여 있었다. 지난 세 후보의 사망 보고에 남은 독과 비슷한 색이었다.
핀셋으로 홈 안을 두 번 긁어 밀랍 종이 위에 모았다. 리에나는 빈 자살용 독약 병을 미리 준비하지 않았다. 벨라가 보관하던 빈 독약 병은 성물 보관함 안에 있었다. 병의 마개를 열고 종이 가루를 반쯤 쏟아 넣고 마개를 눌러 밀봉했다.
“금고 문은 처음 위치보다 반 뼘 더 열리면 안 돼.”
리에나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금고 안 선반 위의 검은 융을 덮고, 문을 밀 때 잠금쇠가 목판 조각과 함께 제자리로 돌아왔다. 리에나는 보관함 안에 병과 밀랍 종이를 넣고 겉옷을 여몄다. 서재 밖 복도에서 하급 조제사 한 명이 약장 서랍을 여는 소리가 가까웠다. 리에나는 뒷문으로 나갈 때 그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중앙 대성전 지하 예배당은 저녁 기도가 끝난 뒤 드물게 통행이 끊겼다. 리에나가 벽감 앞에 앉았을 때 벨라는 이미 촛대 뒤에서 까치발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스텔은 제단 계단 아래에 쪼그려 구금소 면회 기록과 서류 묶음을 방바닥 천 위에 펼쳐 두고 있었다.
“금고는 열렸어.”
리에나가 보관함에서 봉인된 병을 꺼냈다. 벨라는 받지 않았다.
“이거 그냥 여는 게 아니지.”
벨라가 낮게 말했다.
“열어 봐. 열면 대주교가 아는 게 아니라 우리 중에 누가 먼저 기침할지가 문제다.”
리에나가 병을 벽감 아래 작은 석재 홈에 눕히고 그 옆에 위조 성흔 서류 뭉치와 후보 사망 기록 사본을 가지런히 놓았다. 벨라가 코를 감싸며 병 뚜껑 가장자리를 확인했다.
“안쪽에 종이 한 번 감아 버릴까, 언니.”
“감아서 벽감 천에 고정해. 비스듬히 두면 흔들릴 때마다 가루가 병 밖에 안 묻게 되니까.”
리에나의 말에 벨라는 헝겊 대신 성물 보관함 안에 있던 밀랍 종이의 안쪽을 찢어 병 목을 감쌌다. 아스텔이 서류 묶음 사이에서 비어 있는 인장 자국 지시서를 꺼냈다. 반지 문양 자국은 종이를 접은 흔적 위로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구금소 면회 기록 여기다. 지시서 여기.”
아스텔이 지시서를 리에나 쪽으로 밀었다. 리에나가 두 손으로 받아 접는 시늉 없이 위에서 아래로 반듯하게 접었다. 이미 접힌 직선을 따라 한 번 더 눌렀다.
“교대 순서는 어떻게 하지.”
리에나가 벨라와 아스텔을 번갈아 보았다.
“새벽 전까지는 언니가 먼저. 그 후 오전 기도 종까지는 내가.”
벨라가 등 뒤 촛대에 기대며 말했다.
“저녁 예배 뒤부터 그 앞 제단 청소 시간 전까지 제가 오겠습니다. 기록실 근무를 피하기 어렵습니다.”
아스텔이 손등을 옷에 문지르며 일어났다.
“좋아.”
리에나가 서류 묶음을 벽감 안쪽으로 눌렀다. 목걸이 가루병은 그 오른쪽, 카이델 인장 자국 지시서는 병 아래 깔았다. 손등에 습기가 배어드는 것 같았다.
“취임식 전에 구금소에서 그를 빼내고 증거를 공개한다.”
리에나가 아직 반쯤 접힌 지시서의 끝을 손끝으로 눌렀다. 벨라가 리에나의 손등 위로 검지를 짧게 올렸다가 뗐다. 아스텔은 아무 말 없이 제단 계단을 확인하고 돌아섰다.
“그게 지금 우리가 할 전부야. 도망이 아니라.”
리에나가 중얼거렸다. 지하 예배당 안쪽에서 촛불 하나가 꺼지며 심지 냄새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