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청맹검귀

6화

멀리서 바람이 창틀을 한 번 치고 멎었다. 좁은 길을 벗어난 사음협곡은 더 이상 소리를 뒤집지 않았지만, 강휘는 그 바람 소리가 폐약창 쪽에서 올라온 것임을 알았다. 지금은 밤이 깊어 창고 바깥의 풀과 돌이 서로 다른 온도로 식고 있었다.

강휘는 걸음을 멈추고 폐약창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오르막에서 숨을 골랐다. 발밑에 밟힌 짚과 고운 모래의 소리가 다르다. 앞서 걷던 석대의 발소리가 멈추자 강휘도 섰다.

서리화의 숨소리만은 꾸준히 뒤에서 따라왔다. 폐약창은 거의 다 왔고, 지금부터는 안이 아니라 바깥부터 읽어야 한다. 강휘는 검을 왼손으로 고쳐 쥐고 손잡이 위로 손을 올렸다.

“이 지점은 냄새가 이상해요. 햇것이 아니라 오래 묵은 것 같아요.”

서리화가 낮게 말했다.

“말린 약재라도 창고가 오래 비었으면 냄새가 다르지. 그걸로 안을 알 수는 없소.”

석대가 주판을 옆구리에 붙이고 목소리를 낮췄다.

“억지로 구분할 필요는 없다. 들어가서 확인한다.”

강휘가 앞장서며 말했다.

“문 앞에 횃불을 들이면 안 되겠지. 불빛은 저쪽이 더 잘 보게 만드는 거요.”

“불은 피워라. 어차피 너는 소리로 읽지.”

서리화가 곁으로 와 부싯돌을 꺼냈다. 작은 불꽃이 두 번 튕기고, 들고 있던 송진 막대에 불이 붙었다. 불빛이 폐약창 문 앞의 흙바닥을 밀어 올렸다.

강휘는 그 불빛의 온도가 미치는 범위를 몸으로 가늠했다. 왼쪽 뺨에 닿는 열기가 얕았다. 좁은 입구는 안쪽으로 긴 복도처럼 이어질 것이다.

강휘는 폐약창 문에 손을 대었다. 문짝은 젖은 나무처럼 차고, 쇠 경첩은 녹이 슬어 움직임이 더뎠다. 열리자 바람이 약재 궤짝 사이에서 빠져나오며 가늘게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빈 궤가 많아요. 통로가 두 갈래로 갈라졌어요.”

서리화가 불빛을 들고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천장이 낮고, 벽 쪽에 목재가 쌓여 있다. 바람이 오른쪽으로만 돈다.”

강휘가 문에서 두 걸음 떨어진 지점에 서서 말했다. 소리가 벽에 부딪쳐 돌아오는 속도가 왼쪽과 오른쪽이 달랐다. 왼쪽은 흙벽에 가까운 낮은 울림이고, 오른쪽은 빈 나무 궤 여러 개를 지나며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바람이 오른쪽으로만 돌자, 곰팡이 냄새와 함께 썬 약초 가루가 섞인 냄새가 잠깐 올라왔다.

“기록이 남아 있는 출고장은 어디쯤이지?”

서리화가 물었다.

“안쪽 복도 끝에 벽장처럼 붙어 있소. 내가 알기로 거래 후 남은 장부를 거기 두었는데, 폐쇄하고 나서도 사람이 간 적이 없다 했소.”

석대가 대답하며 주판알을 한 번 굴렸다. 그 소리가 통로 안에서 작게 울렸다.

“움직이지 마. 여기서 안쪽이 막혔는지부터 읽는다.”

강휘가 석대의 발을 멈추게 했다. 숨을 한 번 낮게 내쉬고, 바닥과 천장 사이의 소리 반사가 고르게 겹치는 지점을 찾았다. 세 사람이 만든 기척이 사라진 뒤 폐약창의 고유한 낮은 울림이 남았다.

바람이 외벽을 밀 때마다 오른쪽 어딘가에서 빈 궤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 떨림이 바닥을 따라 검 아래까지 와서 끊겼다. 강휘는 그 끊김이 인위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누군가 약재 궤 하나를 옮겨 놓아 공기 흐름을 막아둔 것이다. 폐쇄된 창고치고는 너무 분명한 흔적이었다.

“안쪽은 비었다. 하지만 오른쪽에서부터 여섯 걸음, 그 안쪽 벽면에 궤를 하나 붙여 막아 놨다.”

강휘가 발을 옮기며 말했다.

“그 안에 출고장이 있을 거예요. 아니면 그걸 숨긴 흔적이거나요.”

서리화가 불빛을 벽쪽으로 돌렸다. 강휘는 그 불빛을 따라 걷지 않고 소리의 결을 따라갔다. 오른쪽 벽에서 여섯 걸음 지점의 공기 흐름이 급히 꺾이는 소리가 났다.

거기 빈 궤 하나가 비스듬히 벽에 기댄 채 놓였고, 아래쪽으로 쥐가 드나든 긁힌 자국이 있었다. 서리화가 다가가 궤의 손잡이를 당겼다. 궤는 얕게 끼어 있다가 툭 빠졌다. 그 뒤로 벽에 낸 깊은 선반이 있었고, 거기에 물기 묻은 장부 두 권이 꽂혀 있었다.

“장부예요. 겉표지가 젖었지만 안쪽은 온전해요.”

“거기서 출고장부터 찾아라.”

서리화가 장부를 꺼내 불빛에 비췄다. 한 권은 출고 원부였고, 다른 한 권은 약재 폐기 일지였다. 출고 원부의 마지막 행은 약재 명이 아니라 거래처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서리화는 손가락으로 그 행을 짚으며 장부를 폈다. 종이가 바람에 들떠 좌우로 조금씩 흔들렸다.

“이 마지막 거래, 출고 날짜가 아까 그 비어 있던 해와 같은 해여요. 약재도 명이초에 가까운 품명이고, 무엇보다 출고지를 반납하지 않고 ‘기록만 남김’으로 처리했어요.”

“백무혼이 그 거래의 받는 이인지를 확인해라.”

강휘가 장부 쪽을 보지 않고 말했다. 다만 불빛 아래에서 서리화의 손끝이 종이를 짚는 소리로 그 위치를 가늠했다.

“여기 받는 사람 칸이 찢겨 있어요. 남은 획은 ‘백’ 자의 윗부분이에요. 그 옆에 중개인의 이름이 남았는데 서진악, 왼손잡이 단검을 쓴다는 그 사람이라는 소문이 있는 이름이요.”

서리화가 장부를 세워 강휘에게 보여주러 다가갔다. 강휘는 받지 않고 고개만 약간 돌렸다.

“서진악. 스승의 은신처에 드나들던 약재 거래 중개인이다.”

“이 장부의 마지막 행에 백무혼이라는 이름이 직접 남아 있지는 않아요. 다만 백 자, 서진악, 명이초. 셋이 한 행에 나란히 있어요. 이게 그 반쪽의 짝이에요.”

서리화는 품에서 거래 기록 반쪽을 꺼냈다. 출고장의 마지막 행과 나란히 대자, 나뉘었던 행의 윤곽이 이어졌다. 종이의 물결과 꺾인 가장자리까지 일치했다. 서리화가 낮게 숨을 들이켰다.

“서진악이 백무혼에게 마지막 약재를 넘긴 거래예요. 이 반쪽은 그 거래를 증명하는 원본이에요.”

“그 원본을 지금 여기서 꺼낸 게 잘한 일인지는 모르겠소.”

석대가 주판을 굴리며 말했다.

“이미 늦었을 수도 있다. 그 반쪽을 다시 품에 넣어라.”

강휘가 서리화에게 말했다. 서리화는 반쪽을 조심스레 접어 옷섶 안쪽에 넣었다. 그 순간, 통로 저쪽에서 궤 하나가 바닥을 긁으며 밀리는 소리가 났다.

강휘는 즉시 손을 검 위에 올렸다. 소리가 아니었다. 바닥을 긁던 궤가 멈추면서 공기 흐름이 아예 끊겼다.

잠깐 뒤, 바람이 통로를 타고 흐르는 기척마저 가늘어졌다. 강휘가 숨을 한 번 내쉬었으나 그 숨소리가 돌아오지 않았다. 벽과 바닥에 소리가 박히는 일은 없었다.

서리화가 쥔 장부의 종이 떨림은 보이지 않았고, 강휘의 귀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왼쪽으로 한 뼘 움직였다. 바닥이 발바닥에 닿는 감각은 있었다. 그러나 그 마찰이 소리가 되어 울리지 않았다.

“강휘, 어디예요?”

서리화의 입술이 움직인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강휘는 등 뒤로 찬 공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약재 궤 너머에서 누군가 아주 천천히 장부장 앞을 가로질렀다.

바닥에서 발을 뗄 때 온도가 조금 바뀌었다. 소리는 없었다. 강휘는 눈을 가로막은 무명 아래로 턱을 끌어당겼다.

5보 안으로 살기를 감지하는 수련은 소리가 아니라 호흡과 공기의 결을 읽는 것. 그 공기의 결조차 지금은 어디로 도는지 불분명했다. 강휘가 검을 조금 뽑았다.

칼날이 칼집에서 빠지며 내는 저항이 손가락에는 전해졌다. 그 미세한 떨림은 남았지만, 귀는 온전히 막혔다. 무음이 폐약창 안을 통째로 삼켰다.

“서리화.”

강휘가 상대를 찾으며 짧게 불렀다. 대답은 들리지 않았지만, 발끝이 닿는 지면 위로 떨림이 아주 가늘게 남았다. 석대가 주판을 쥔 왼손으로 벽을 짚으며 움직이는 것 같았다.

세 사람이 흩어지기 전에 벽으로 붙어야 했다. 강휘는 그 방향으로 한 걸음, 두 걸음 옮겼다. 허공에서 아무 소리도 없는 손이 바로 옆을 스쳤다.

강휘는 몸을 돌리며 검을 뽑았다. 칼날이 전진하자 낮은 공기 저항이 검등을 따라 팔까지 왔으나 소리는 없었다. 아주 짧게, 백무혼이 그 칼날 옆을 지나며 옷소매 끝을 강휘의 손목에 닿게 했다.

차가운 비단이 한 번 감쌌다 스쳤다. 강휘는 검을 겨누었으나 상대는 소리를 남기지 않았다. 옷깃이 지나가는 결, 발밑의 바람 이동, 손가락 마디가 아니라 날렵하게 빠지는 어깨의 움직임. 그것만으로는 원수를 확정하기 어려웠다.

“백무혼.”

강휘가 낮게 불렀다. 대답은 없다. 그러나 백무혼의 손이 서리화의 옷섶을 따라 움직였다.

서리화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손을 옷섶에 가져갔다. 그 손목을 백무혼이 쥐지 않고, 이보다 가벼운 손끝으로 옷고름 아래의 반쪽을 끌어냈다. 서리화는 왼손을 크게 휘둘렀지만 상대는 없었다.

강휘가 그 사이로 검을 밀었다. 칼끝이 옷자락의 흔들림 하나를 얕게 갈랐다. 바로 그때, 기록 반쪽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낚아채였다.

바람은 고요했다. 강휘는 방향을 바꾸지 않고, 귀가 아니라 살기의 결을 따라 오른쪽을 향했다. 백무혼이 움직인 축은 다섯 발자국 안.

손목을 지나치던 그 매끄러운 스침이 살기를 숨긴 움직임이라는 것을 강휘는 몸으로 안다. 숨긴 살기는 아무리 가까워도 5보 안에서만 압력처럼 남는다. 백무혼은 검을 뽑지 않았다.

이번에도 손에 쥔 것은 거래 기록뿐. 강휘는 검을 쥔 오른손 주먹의 마디가 조금씩 굳는 것을 참으며 상대의 퇴각을 세웠다.

“석대.”

강휘가 상대를 불렀다. 석대는 주판을 버리고 어둠 속에서 백무혼의 동선에 몸을 부딪혔다. 백무혼이 비켜나는 대신, 천장 어딘가에 걸린 가는 줄이 팽팽하게 떠는 기척이 강휘의 뺨으로 왔다.

이어서 서늘한 금속선이 석대의 왼쪽 어깨를 찢었다. 피가 옷과 바닥에 튀는 소리는 없었지만, 강휘는 열이 급작스레 섞이는 공기의 맛을 느꼈다. 석대가 숨을 참고 주저앉았다. 백무혼은 그 틈에 기록을 들고 통로를 물러났다.

“닫아라!”

강휘가 급히 소리쳤지만, 그 소리는 폐약창 안에서 아무 울림도 만들지 못했다. 서리화가 약재 궤를 밀어 문 쪽으로 몸을 세웠는지, 작은 부싯불이 한 번 깜빡였다. 그 불빛은 통로를 향해 길게 번졌으나 백무혼의 등은 이미 없었다.

강휘는 검을 뽑은 채로 통로 쪽으로 세 걸음 나섰다. 손끝에 걸리는 공기가 폐약창 안과 밖의 경계에서 갈렸다. 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했고, 멀리서 돌멩이가 구르는 소리가 두 번 들렸다.

흡성귀가 풀렸다. 강휘는 그 소리를 따라 검을 쥔 채로 십여 보를 쫓았다. 그러나 백무혼의 검을 뽑는 소리는 어디에도 남지 않았다. 확정할 소리가 없었다.

강휘는 이를 악물었다. 십오 보쯤 더 나아가자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 소리와 자신의 숨소리가 돌아왔다. 백무혼은 벌써 저편 비탈에 가까웠다.

강휘는 거기서 발을 멈추었다. 서리화가 짊어진 약초 궤짝을 문턱 안쪽에 내려놓는 소리가 뒤에서 났다. 강휘는 비탈 쪽을 한 번 향한 채 서 있다가 폐약창 안으로 돌아왔다.

석대는 기둥 아래 웅크린 채 숨을 빠르게 내쉬었다. 서리화가 벌써 침통을 열었다.

“어깨가 찢겼어요. 얇지만 길어요. 팔을 내리지 말고 이렇게 고개를 숙여요.”

서리화가 석대에게 말했다. 강휘는 검을 천천히 칼집에 넣으며 석대의 호흡 옆에 섰다. 바닥에는 석아의 머리끈이 떨어져 있었다. 백무혼이 기록을 들고 나가며 놓고 간 물건이었다.

“그걸 두고 갔소. 일부러 그랬는지는 모르겠소만.”

석대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쥐고 있어라. 아직 이 아이가 어디 있는지는 여기서 알 수 없다.”

강휘가 머리끈을 집어 석대의 오른손에 쥐여 주며 말했다. 서리화는 약체를 적신 천으로 석대의 어깨를 감았다. 손끝이 피에 미끄러졌으나 동작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강휘는 폐약창 안 공기를 다시 읽었다. 흡성귀는 풀렸지만, 그 잔여인 듯 칼날 떨림을 듣는 귀가 아직은 무뎠다. 그는 무명 안대를 고쳐 매고, 복수 점검표를 품에서 꺼내지 않았다.

점검표의 다음 칸은 손아귀 마디 소리로 확정해야 한다. 백무혼은 그것을 알기라도 한 듯 검을 뽑지 않았다.

“서리화. 그 반쪽은.”

“없어요. 제 옷섶 안이 아니라, 고름 아래를 건드렸어요.”

서리화가 말했다.

“아버지 거래 기록을 제가 놓쳤어요.”

“네가 놓친 게 아니라, 저쪽이 그 위치를 알았다. 여기까지 우리를 부른 이유다.”

강휘가 검을 벽에 기대며 말했다.

“석대는 움직이지 마라. 서리화, 지혈이 끝나면 이 안에서 밤을 지새울 준비를 해라. 여기서 더 쫓는 건 함정이다.”

서리화가 천을 마저 묶고 손을 닦았다. 강휘는 여전히 문 쪽을 향해 섰고, 귀는 다시 조금씩 밤바람 소리를 걸렀다. 흡성귀의 여진이 가시지 않아 소리는 겹쳐 들렸다.

어디서 허공이 갈라지는지, 어디서 사람이 숨을 참는지 아직은 분간되지 않았다. 복수 점검표는 여전히 품 안에 있었다. 강휘는 주먹을 폈다 쥐며 손아귀 마디가 나는 소리를 가만히 떠올렸다.

이제 남은 소리 증거는 하나. 상대가 검을 뽑게 만들어야 한다.

석대는 어깨를 만지며 신음을 삼켰다. 서리화는 약초 궤짝을 끌어와 문 옆에 앉고, 밖을 보지 않은 채 낮게 말했다.

“거래 기록은 백무혼이 가져갔어요. 이제 제가 드릴 것도 없어요.”

강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아귀 마디를 한 번 더 폈다. 그 소리만이 폐약창의 문틈 바람에 섞였다. 불은 서리화의 손끝에서 꺼진 채였다.

청맹검귀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