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음검가(斬音劍歌)
4화
벽감 안쪽은 등나무 덩굴이 늘어진 돌틈으로, 해질녘 제례장의 잔향이 겹겹이 내려앉고 있었다. 소류화가 먼저 몸을 낮췄다. 하진운은 그녀의 숨결이 벽 쪽으로 기울어지는 소리를 듣고 한 걸음 뒤에 앉았다. 검집 끝이 돌바닥에 닿지 않게 무릎 위로 눕혔다.
“등불 걸리는 소리.”
소류화가 말했다. 목소리는 입술을 거의 떼지 않았지만 하진운에게는 충분했다.
“남쪽 회랑 여섯, 동쪽 계단 세 개. 방울 달린 것도 있다.”
“이제 순번대로 들어온다.”
하진운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바람이 제단 앞 포장도로를 쓸 때마다 향로의 재가 비늘처럼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너머로 문파 장정들의 장화가 흙을 다지는 발소리가 가지런해졌다.
“넌 여기서 움직이지 마라.”
“검무가 끝나면 내려온다.”
소류화가 제단 기둥 쪽으로 상체를 조금 틀었다.
“소리가 어긋나면?”
“먼저 간다. 내가 신호를 줄 때까지 숨어.”
소류화가 대답 대신 약통 끈을 한 번 당겨 어깨에 밀착시켰다. 제례장 중앙에서 첫 북소리가 한 번, 길게 났다. 이어 장정들이 두 줄로 갈라서는 소리, 검집 뒤축이 차례로 돌바닥을 가볍게 스쳤다. 하진운은 그 마찰음들을 낱낱이 들었다. 모두 오른손 걸이에 익숙한 자세였다.
“사범이 오른다.”
소류화가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들린다.”
섬돌 아래쪽에서 옥패가 허리춤에 부딪히지 않게 잡는 손소리가 났다. 흰 비단 무복이 밤공기를 가르며 움직였다. 서문혁이 제단 아래에서 장정들 앞에 섰다. 그가 몸을 한 번 굽히자 나머지 사람들이 함께 허리를 굽혔다.
“제를 올리기 전에, 사문 대제자로서 검무 한 편을 올리겠습니다.”
서문혁의 목소리는 제례장 뒤쪽까지 퍼질 만큼 분명했다. 하진운은 그의 심박이 지나치게 고르게 유지되는 것에 손가락을 구부렸다. 숨을 쉴 때마다 허리춤 은방울이 옷자락에 스치며 아주 작은 금속음을 냈다. 아직 검집을 뽑지는 않았다.
“시작.”
북소리가 다시 짧게 두 번 울렸다. 서문혁이 반보 나가며 왼손으로 검집을 잡아 뒤로 젖혔다. 오른손이 아니라. 하진운의 귀가 그 손의 위치에 닿았다. 왼손가락이 검집 주둥이를 쥐고 검을 뽑는 순간, 칼날이 낡은 홈 안쪽을 타고 나오는 마찰음이 사방으로 퍼졌다.
하진운은 무릎 위에 놓인 검을 쥔 손에 힘을 뺐다. 소리가 같았다. 사부가 숨을 거두던 밤, 복수표에 눌러 쓴 그 마찰음과 똑같은 결이었다.
서문혁이 몸을 회전하며 첫 초식을 썼다. 왼손은 검을 쥐고 오른손은 뒤로 평형을 잡았다. 검날이 공기를 베자 허리춤 은방울이 한 차례 크게 울렸다.
하진운은 고개를 조금 틀었다. 방울 소리가 단단했다. 안에 추 하나가 온전한 채 몸통에 부딪혀 두 번, 세 번 여운을 남겼다. 사부 살해 밤의 방울은 한쪽이 갈라진 듯 여운이 반에서 뚝 끊어졌다. 지금 이 소리는 끊기지 않는다.
“다르다.”
하진운이 낮게 뱉었다.
“뭐가요.”
소류화가 기둥 뒤로 몸을 더 붙였다.
“검집은 맞다. 방울은 아니다.”
서문혁의 검무가 이어졌다. 왼발 축으로 도는 순간마다 검집 끈이 허리 옷고름을 때렸고, 방울이 규칙적으로 세 번씩 울었다. 하진운은 그것을 셌다. 세 번 모두 온음이었다. 한 번도 반에서 잘리지 않았다.
“여기서 벨 수 없다.”
그가 검집에서 손을 뗐다. 손가락이 천천히 풀리는 소리만 났다.
“복수표가 성립되지 않아.”
소류화가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심박이 한 차례 빨라졌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하진운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말하지 않았다. 그녀가 무언가를 삼켰다는 것까지만 알았다.
“확실합니까.”
“두 번째 검집 마찰까지 같았다. 방울은 반음이 아니다.”
소류화가 제단 기둥에 이마를 잠깐 기댔다가 뗐다. 서문혁이 마지막 초식을 올리며 오른발을 뒤로 뺐다. 방울이 옷자락에 걸려 마지막 한 번 짧게 울렸다. 장정들이 일제히 검을 옆에 내리며 박자를 받았다.
“물러나야 한다.”
하진운이 몸을 낮췄다.
“저쪽 회랑으로.”
“검무가 끝났으니 문파 사람들이 다시 움직일 거요.”
소류화가 약통 끈을 손으로 감싸쥐었다.
“그 전에.”
하진운이 먼저 벽감 바깥쪽으로 무릎을 옮겼다. 제단 아래에서 서문혁이 검기를 거두고 검집에 칼날을 천천히 물리는 소리가 들렸다. 검집 속 마찰음이 한 번 더 났다. 하진운은 그 소리를 머릿속에 눌러 담으며 일어나지 않고 몸으로 돌기둥 뒤를 돌았다.
소류화가 그 뒤를 따라 웅크린 자세로 나왔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섞여 회랑 쪽 어둠 속으로 번졌다. 제례장에서는 장정들이 검무를 마친 사범에게 허리를 굽히는 소리가 한꺼번에 났다.
제단 뒤 계단은 돌이 식어 있었다.
제단 뒤 계단은 돌이 식어 있었다. 하진운의 발끝이 마지막 층계를 짚었을 때, 뒤편 제례장에서 검무를 마친 기척이 일제히 흩어졌다.
소류화가 그의 한 발 뒤에서 숨을 짧게 내쉬었다. 어깨에 멘 약통이 돌벽에 닿지 않도록 팔을 붙들고 있었다.
“왼쪽.”
하진운이 낮게 말했다. 후원 샛길로 이어지는 회랑은 바람이 벽 모서리에 부딪히며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그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때, 제례장 위쪽에서 은방울이 한 번 울렸다.
하진운의 목덜미가 굳었다. 그 소리는 방금 검무장에서 들었던 온음 방울과 같았다. 그러나 울림이 한 번뿐이었다. 마지막 여운이 회랑 기둥에 부딪혀 셋으로 갈라졌다.
“저쪽으로 흔든다.”
그가 말했다.
“누가?”
“방울을 든 자.”
서문혁의 목소리가 제례장 방향에서 들려왔다. 거리는 스무 보가 조금 넘었다. 바람이 없었다면 더 멀리까지 닿았을 위치였다.
“후원 샛길 양쪽을 막아라. 검무가 끝났으니 제례장 주변은 출입을 통제한다.”
서문혁의 말은 조용했고, 지시는 정확했다. 하진운은 그가 방울을 흔든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발소리를 지워도 회랑을 지나는 호흡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방울 하나가 벽 사이의 울림을 퍼뜨려 위치를 좁힌 것이다.
“뛰지 마라.”
하진운이 소류화의 소매 쪽으로 손을 뻗지 않고 말했다.
“그냥 걸어라. 회랑 끝에 벽이 있다. 거기서 왼쪽으로 꺾는다.”
소류화가 대꾸 없이 걸음을 맞췄다. 그녀의 발소리가 돌바닥에 닿는 간격이 조금씩 빨라졌다. 하진운은 제례장 쪽에서 장화 밑창이 자갈을 쓸며 흩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회랑 끝에 닿았다.
왼쪽으로 꺾자 온도가 반 층 내려갔다. 건물 뒤편이라 바람은 없었지만 흙냄새에 젖은 이끼가 섞여 있었다.
“여기가 어디요.”
“제기고 가는 통로다.”
하진운은 몸을 벽 가까이 붙였다. 뒤쪽 회랑에서 봉쇄를 지시받은 사람들이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한쪽은 후원 샛길 입구를, 다른 한쪽은 제단 뒤 돌계단을 막고 있었다.
“막혔다.”
“그쪽으로 갈 거요?”
“아니. 약방으로 간다.”
소류화의 호흡이 한 층 옅어졌다. 하진운은 그녀의 손이 약통 끈을 움켜쥐는 소리를 들었다.
“제기고 쪽은 좁아서 한 사람씩 지나가야 한다. 저들은 샛길만 아는 것 같다. 움직여라.”
하진운이 몸을 돌려 좁은 통로로 들어섰다. 천장이 낮은 곳이라 허리를 약간 숙였다. 소류화가 뒤를 따랐다. 그녀의 치맛자락이 돌가루에 쓸리는 소리가 아주 가까웠다.
통로는 제기고와 본전 사이 담장 밑을 돌아 나 있었다. 반쯤 지나자 제기고 안에서 촛농 타는 냄새가 스며 나왔다. 하진운은 발끝 앞으로 기름때와 밀랍 조각이 흩어진 바닥을 피해 다음 지점까지 걸음을 줄였다.
제기고 어귀는 제기고 벽이 끝나고 오래된 은행나무 울타리가 시작되는 모퉁이였다. 하진운은 바람이 울타리를 지나치는 소리로 뒤를 살폈다. 따라오는 인기척은 없었다.
“여기서 한숨 돌린다.”
소류화가 벽에 기대어 약통을 바닥에 내렸다. 옥색 저고리 소매가 은행나무 거친 껍질에 스쳤다.
“제례장에서 검집 소리를 확인했소?”
그녀가 물었다.
“왼손으로 뽑는 소리를 들었다. 검집 안쪽이 한쪽만 닳아 있다. 복수표에 쓸 수 있다.”
하진운은 품 안에서 복수표 초안을 만지지 않았다. 이미 손에 넣지 않아도 되는 위치에 있었다. 그가 손끝을 바지 옆에 내렸다.
“문제는 지금 방울이다. 반이 아니라 온전한 소리였다.”
소류화가 머리 뒤쪽 옥색 비녀를 만지는 작은 소리를 냈다.
“네 약방에 은방울이 있었느냐.”
하진운이 정면으로 물었다.
“몰라요.”
소류화가 손을 내리며 말했다.
“나는 듣지 못했습니다.”
“첫날 약방에서 들었던 숨소리와 다르다. 지금은 목 왼쪽이 빨리 뛴다.”
소류화의 턱이 약방 쪽으로 아주 조금 돌아갔다.
“그건 제가 밤새 몸이 안 좋아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약방 서랍 어느 쪽에 은방울이 있었느냐.”
소류화가 벽에서 등을 떼며 약통 끈을 집었다. 그녀의 손가락 마디가 끈을 거머쥐는 소리가 바스락거렸다.
“약방 서랍이라니요. 불이 나서 다 탔잖아요.”
“불이 나기 전에는 남아 있었을 것이다. 네가 그걸 몰랐다고 하기에는 지금 손끝이 너무 차다.”
소류화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발뒤꿈치가 은행나무 뿌리에 닿아 작은 흙덩이가 굴렀다.
“그런 물건 없습니다.”
방금 전보다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그러나 하진운에게는 그 차분함이 거짓말 뒤에 오는 것으로 들렸다. 숨을 들이쉬고 내뱉는 사이가 어긋나 있었다.
“가지 마라.”
하진운이 말했다.
“나는 안 간다.”
소류화가 다시 반발음으로 답했다. 그녀는 이미 약방 쪽 골목을 향해 어깨가 열려 있었다.
“확인한다.”
하진운이 검을 옆구리에서 다시 세웠다.
“약방 서랍이다. 은방울이 있다면 가져온다. 없어도 네가 무엇을 숨기는지는 거기서 나온다.”
소류화가 대답하지 않았다. 손가락 끝이 주먹 쥐어졌다가 풀어졌다. 두 사람 사이로 제기고 앞 낙엽이 한 번 굴렀다. 하진운이 먼저 걸음을 돌렸다.
“들리면 곧장 멈춰라. 제기고 뒤로 돌아가면 약방 가는 샛길이 있다.”
밤이 골목을 눌렀다. 약방 앞 골목은 제례장에서 한참 떨어진 외곽이라 인적이 끊겨 있었다. 두 사람은 불에 타고 남은 약방 처마가 끝나는 지점에서 몸을 낮췄다.
약방 안에서는 사람 손이 진열장을 뒤지는 소리가 났다. 하진운은 골목 끝에 쪼그리고 앉아 귀를 열었다. 소리는 세 방향에서 났다. 한 사람은 벽 쪽 진열장 서랍을, 다른 하나는 문 옆 탕약 선반을, 나머지 한 사람은 안쪽 약장을 뒤지고 있었다.
“셋이다.”
하진운이 소류화의 팔을 잡지 않고 그녀의 소매 옆자락을 검집 끝으로 살짝 건드렸다.
“은방울 소리는 없다.”
소류화가 긴장한 채 고개를 돌렸다.
“왜?”
“은방울은 허리춤에 차고 다니면 걸을 때마다 나야 한다. 저 셋은 방울을 안 찼다. 다만 서랍을 뒤지는 순서가 같다. 누가 시킨 일이다.”
소류화의 턱이 다시 약방 쪽으로 향했다. 입술이 달싹였지만 소리는 내지 않았다.
약방 안의 서랍 하나가 끝까지 열렸다. 그다음 잠깐 멈췄다. 누군가 종이 같은 것을 집어 들었다. 하진운의 손가락이 검집 입구를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