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살된 황후는 즉위식 아침을 다시 산다
1화
별궁 침전의 동쪽 창으로 아침 햇살이 길게 들었다. 제단 쪽에서는 아직 금속 향로의 재가 식지 않아 은은한 연기 냄새가 흩어졌다. 리에나는 잠옷 위로 겉옷만 걸친 채 탁자 앞에 섰다. 세라핀이 올린 물잔이 쟁반 위에 놓여 있었다. 전생의 아침과 같은 금테 유리잔, 같은 물높이.
“드시지 않으세요?”
문가에서 세라핀이 고개를 갸웃했다. 리에나는 대답 대신 잔을 집었다. 엄지와 검지 사이로 잔의 차가운 벽이 눌렸다.
그대로 탁자 모서리 밖으로 기울였다. 물이 융단에 번지기 전, 리에나는 쟁반 아래 수납칸에서 제단용 은제 시약 접시를 꺼냈다. 대관 전날 황후궁에 머무는 동안 성화 의식을 준비하며 침전에 두는 물품이었다.
잔에 남은 마지막 한 모금을 시약 접시에 떨어뜨렸다.
액체가 은 표면에 닿자 투명했던 가장자리부터 푸른빛이 번졌다. 연기처럼 퍼지지 않고 실처럼 또렷했다. 리에나는 쟁반 위로 접시를 다시 올리고 세라핀을 돌아봤다.
“은린향이야.”
세라핀은 잔을 내려다보던 손을 멈췄다. 웃음기 없이 리에나를 바라보다가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은린향이라니요.”
“입궐 전에 받은 지침 중에 있었어.” 리에나는 접시를 들어 올렸다. 푸른 반응이 빛을 받아 선명했다. “황후궁의 은제 시약은 제단과 침전의 청수를 검사하는 물건이지. 무색 무취라도 은에 닿아 푸르게 변하는 약이 있다. 그게 은린향이야.”
세라핀은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제 손등에 두었다. 리에나가 접시를 제단 서랍 쪽으로 옮기자, 세라핀이 그쪽을 잠깐 흘깃 보고 다시 몸을 곧게 세웠다.
“물러나 있거라. 황제 폐하를 모셔라.”
“지금이요? 폐하께서는 의식 준비로——”
“지금.”
세라핀이 한 번 머뭇거리다 고개를 숙였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길게 났다. 리에나는 잔에 남은 물기를 헝겊으로 눌러 흡수시킨 뒤 접시째 봉지에 담았다. 봉지 입구를 접어 촛농으로 밀봉하려다 멈췄다. 증거물이 훼손되지 않도록 봉지째 제단 서랍에 넣고 열쇠를 빼 들었다.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장화와 마룻바닥이 부딪히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가까워졌다. 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가 두 번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리에나가 열자 칼리안이 제복 차림 그대로 서 있었다. 어깨에 아침 공기가 배어 있었고, 왼손에는 의식 순서지가 말려 쥐어져 있었다.
“세라핀이 아무것도 못 듣게 하라 했소.”
칼리안이 안으로 들어섰다. 시선이 탁자 위의 빈 쟁반을 훑고 리에나의 손에 머물렀다.
“무슨 일이지.”
“전하께서는 어젯밤에 뭘 검사했소.”
칼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리에나는 제단 서랍에서 봉지째 꺼낸 접시를 보였다. 푸른 반응은 아직 남아 있었다.
“세라핀이 올린 물에 은린향이 들었소. 전하의 기사들이 별궁을 지키는 동안, 황후궁 부엌에서 만들어진 잔. 전하께서 전날 저녁에 잔과 물을 따로 검사했다는 보고를 들었소.”
“검사했다.”
짧은 대답이었다. 리에나는 그 말에 숨을 들이쉬었다. 손끝에 힘이 들어가 봉지 주름이 눌렸다.
“검사했으면서 왜 이 잔이 여기 있소.”
“은린향은 검사 당시 반응하지 않았다.” 칼리안이 손에 든 순서지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검사는 물과 잔을 따로 했다. 차는 탑재 전에 승인했고, 잔은 하급 조제사 한 명이 눈으로 확인했다.”
“그럼 그 조제사를 데려오시오.”
“이미 별궁 밖으로 나갔다. 어젯밤 일이 끝나고 하가를 받았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오.” 리에나가 접시를 칼리안 쪽으로 내밀었다. “은제 시약에 닿자마자 푸르게 변했소. 검사가 끝난 뒤에 독이 잔에 들어갔다는 뜻이오. 전하의 눈앞에서.”
칼리안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는 봉지를 받지 않고 제단 서랍 쪽을 가리켰다.
“그건 닫아 둬라. 여기서 꺼내 돌리는 것보다 밀봉해 두는 게 낫다.”
리에나가 제자리에 넣고 서랍을 닫았다. 열쇠는 겉옷 안주머니에 넣었다. 다시 칼리안을 마주 보았다.
“대비의 계획을 언제 아셨소.”
“몰랐다.”
“별궁 봉쇄를 지시한 시각은 어젯밤 늦게였소. 황후궁 부엌에 사람이 드나든 것도 그 뒤요. 전하께서 아무것도 모른 채 잔 검사만 하셨다면, 봉쇄는 왜 지시하셨소.”
“협박장이 도착했다.” 칼리안이 문 쪽을 한 번 보고 말했다. “즉위식 전에 황후궁에서 사고가 날 거라는 익명의 서신이었다. 출처는 확인 중이다. 검사는 그 때문이었고, 봉쇄도 같다.”
리에나는 잠시 그를 보았다. 전생의 아침, 그도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칼끝처럼 얹혔다. 입 밖으로 내면 안 되는 기억이어서 리에나는 묻지 않았다. 대신 테이블 위의 쟁반을 밀었다.
“부엌을 수색하겠소. 지금.”
“봉쇄 중인 구역이다. 수색은 근위대를——”
“전하가 동행하시오.”
칼리안이 리에나를 바라봤다.
“황후는 침전에 남아.”
“거부하겠소.”
칼리안의 붉은기가 도는 눈동자에 창밖 빛이 닿았다. 그가 손가락 하나로 순서지를 반으로 접었다.
“가자. 황후가 발견한 물건은 황후가 봉인한다. 그 조건으로만.”
“좋소.”
리에나가 먼저 문 쪽으로 돌아섰다. 침전 밖 복도는 인적이 끊겨 있었고, 하인이 하나 기둥 뒤로 물러나는 소리만 났다. 칼리안의 장화 소리가 한 발 뒤에서 따라붙었다. 아침 종이 별궁 정원 너머에서 한 번 울렸다. 부엌으로 내려가는 돌계단 입구에 근위대 두 명이 서서 길을 막았다.
“길을 비켜라.”
칼리안의 명령에 근위대가 한 치 지체 없이 양옆으로 물러섰다. 리에나가 그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반쯤 내려가자 벽의 횃불이 드물어지며 서늘한 공기가 소매 안으로 스며들었다. 리에나는 그 온도 차이를 천천히 느끼며 발을 옮겼고, 칼리안은 한 계단 위에서 그녀의 어깨 너머로 부엌 쪽을 훑었다.
부엌으로 내려가는 돌계단은 낮에도 서늘했다. 리에나는 근위대 두 명이 부엌 출입구를 막고 서 있는 것을 보며 소매 끝을 여몄다. 칼리안이 반 발 앞서 걸음을 멈추고 근위대장에게 물었다.
“통제는 걸렸나.”
“예, 폐하. 부엌과 하녀 처소로 통하는 회랑까지 막았습니다. 별궁 인원은 전원 대기 중입니다.”
“들어간다.”
부엌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아침 식사 준비가 멈춘 자리 그대로였다. 밀가루가 얇게 깔린 작업대와, 첫 불도 지피지 않은 아궁이, 은제 쟁반 하나가 개수대 곁에 놓여 있었다. 냄새보다 먼저 발밑의 물기가 시선을 붙들었다. 짚으로 엮은 깔개 쪽으로 어두운 물이 스며 있었다.
리에나는 작업대를 돌아 하녀 처소 쪽 반쯤 열린 문을 보았다. 문틈 사이로 부엌 하녀의 면포가 보였다. 칼리안이 손을 들어 그녀의 팔을 막았다.
“뒤에 있어.”
“직접 봐야 해요.”
리에나가 낮은 목소리로 답하고 문을 밀었다. 하녀 처소 안은 어두웠다. 벽 쪽 침상 아래, 부엌 하녀가 옆으로 누워 있었다.
두 손은 가슴께로 모여 있었고 손가락 사이로 부서진 잔 조각이 박혀 있었다. 도자기 조각은 물기가 마른 표면에 붉은 흔적을 머금었고, 깨진 가장자리에서 검은 침전물이 얇게 갈라졌다. 은제 시약을 떨어뜨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리에나는 무릎을 굽혀 시신의 손목을 보았다. 뻣뻣했다. 죽은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칼리안이 그 옆에 쪼그려 앉아 잔 조각 하나를 꺼내지 않고 바닥에 고정된 각도를 살폈다.
“이 잔이 황후의 물잔이군.”
“궁에서 쓰는 제기와 배치가 같아요. 손잡이 금선이 아침 식사용이에요.”
리에나는 시신 옆의 나무 발받침을 가리켰다. 그 위에 식탁보 끝자락이 말려 있었다. 부엌 하녀가 물잔을 옮기다 넘어진 것인지, 누가 옮기게 했는지 아직 알 수 없었다.
황후궁 응접실에 들어섰을 때 오르가노 백작부인은 이미 안쪽 소파에 앉아 있었다. 검은 부채를 완전히 편 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문 쪽을 향해 앉아 있었다. 그녀의 허락 없이 근위대가 들인 것인지, 응접실 문이 채 닫히기 전에 향수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궁은 아침부터 긴 소식이로군요.”
백작부인이 부채를 한 번 부쳤다. 부챗살이 접히는 소리가 났다.
“황후의 물잔에서 은린향이 검출되고, 그 물잔을 쥔 하녀는 싸늘하다고 들었습니다.”
칼리안이 소파 반대편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들었으면 됐다.”
“예, 폐하께서 직접 수사를 지휘하시는 모양이군요.”
백작부인이 부채를 탁 접고 옆자리의 가죽 서류 겉장을 열었다.
“귀족원은 이 사안을 별궁 밖에서 다루고자 합니다. 별궁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밝히려면 출입부터 막아야 할 테니 말입니다.”
그녀가 서류를 테이블 위로 밀었다. 그 위에 귀족원 서명 두 개가 마른 잉크로 찍혀 있었다. 리에나는 서명을 바로 보지 않았다. 백작부인의 왼쪽 손목, 흰색 반점이 보일 듯 말 듯 소매 위로 올라온 것을 보았다.
“봉쇄 요구서로군요.”
리에나가 말했다.
“누구를 위한 봉쇄인지 묻고 싶네요.”
백작부인이 그녀를 처음 똑바로 바라보았다.
“황후 전하를 위한 것이 아니고요. 증거를 보존하려는 것입니다. 별궁 밖 인원이 제각기 드나들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천천히 밝히지 못할 테니까요.”
칼리안이 테이블의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는 서명 두 개를 훑고 응접실 창 쪽으로 걸어가 팔짱을 꼈다.
“요구는 봉쇄까지다.”
“예. 그 후의 수사는 귀족원이 맡는 것이 온당하겠지요.”
백작부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부채를 쥔 손등에 핏줄이 잠깐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황후는 아직 대관 전 임시 신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사건의 중심에 선 별궁을 움직이는 것은 절차에 맞지 않습니다.”
“봉쇄는 받아들이지.”
칼리안이 서류를 접어 한 손에 쥐었다.
“단, 증거 보존 목적에 한한다. 기한은 24시간.”
백작부인의 부채가 반쯤 열렸다.
“폐하. 그 안에 무엇을 마치실 생각이십니까.”
“그건 내가 정한다.”
칼리안이 서류를 근위대장에게 건넸다. 근위대장이 받아 들고 물러났다.
백작부인이 천천히 일어나 부채를 접어 허리춤에 꽂았다. 그녀의 검은 레이스가 스치는 소리가 응접실을 가로질렀다.
“좋습니다. 귀족원은 회합을 준비하겠습니다. 24시간이라는 기한은 짧으니, 그 안에 증거가 나오지 않으면 별궁의 봉쇄를 누가 풀지도 다시 정해야겠지요.”
칼리안이 대답하지 않았다. 백작부인은 리에나에게 반쯤 절하고 문 쪽으로 걸었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는 부채가 아닌 서류 덮개에서 옮겨진 밀랍 냄새만 남았다.
서재로 옮긴 뒤에도 리에나의 손은 허가서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칼리안이 문을 닫고 벽에 세워 둔 검을 확인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
“봉쇄 해제 조건은 뭐지.”
리에나가 먼저 물었다.
“증거 확보 시.”
칼리안이 책상 앞에 서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은린향이 물잔에 든 경로나, 그 잔을 부엌 하녀에게 넘긴 사람. 별궁 안에서 증거가 잡히면 봉쇄는 귀족원이 와도 못 푼다.”
“조사권은 누가 보증하죠.”
리에나가 말을 받았다.
“귀족원이 봉쇄를 구실로 수사를 가져가면 저는 이 별궁에서 손 하나 못 쓰는 겁니다.”
칼리안이 상의 안주머니에서 봉인된 문서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렸다. 제국 인장이 둥글게 찍힌 허가서였다. 그는 뚜껑이 없는 잉크병 옆에서 허가서를 폈다. 지면이 평평하게 밀렸다.
“이걸로 별궁 내부 수색은 황후가 지휘한다.”
칼리안이 마지막 확인 자리에 자신의 서명을 더했다. 붓에서 떨어진 잉크 한 방울이 허가서 여백을 살짝 젖혔고, 그 위를 칼리안이 손등으로 눌렀다. 잉크가 종이 섬유 사이로 퍼져 옅게 번졌다.
“보고는 나한테 해.”
리에나가 허가서를 들었다. 잉크가 덜 마른 모서리가 그대로 남아 있어 손끝에 번졌다. 그녀는 종이를 똑바로 잡은 채 칼리안의 얼굴을 보았다. 서재 안에는 창에서 들어오는 아침 빛이 반쯤 끊어진 채 걸려 있었다. 리에나는 허가서를 반으로 접지 않고, 곳곳에 남은 잉크 자국을 아래로 향하게 해 책상 왼편에 밀어 두었다.
칼리안이 다시 한 번 검을 묶는 끈을 만졌다. 그 손끝이 허가서 위에 묻은 잉크와 같은 빛을 받고 있었다. 리에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서재 안쪽의 성화 모형을 보았다. 제국 인장과 성화 모형이 나란히 놓이는 자리는 이 별궁에서 유일했다.
“24시간이 온종일이면 짧지 않나.”
칼리안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증거를 못 맞추면.”
“들이닥칠 거예요.”
리에나가 허가서 위에 잉크가 남은 손을 가만히 폈다. 종이 가장자리가 그녀의 손에서 땀으로 눅눅해졌다.
“24시간 안에 은린향 경로를 증명하지 못하면, 귀족원이 임시 황후 지위를 정지한다.”
칼리안이 그녀의 옆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황후는 그 24시간을 뭘 조사할 거요.”
리에나가 허가서를 들었다. 마르지 않은 잉크가 손가락 아래로 어렴풋이 묻어났다. 그녀는 서재 밖으로 연결된 회랑 쪽을 보지 않고, 책상 뒤에 놓인 별궁 구조도를 눈으로 찾았다.
“하녀 처소의 대기실부터 돌겠소.”
칼리안이 부엌에서 넘겨받은 은제 시약 병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병 바닥이 허가서와 닿은 자리에서 푸른 얼룩이 한 번 더 옅은 원을 그렸다. 리에나는 그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허가서는 제가 보관하겠소.”
“흔들지 마.”
칼리안이 허가서에 번진 그녀의 손자국을 보고 말했다. 그 말은 지시라고 하기엔 너무 짧았다. 리에나는 허가서를 말아 쥐는 대신 평평하게 들고 책상 옆의 지도함 위에 올렸다. 종이 끝이 지도함 모서리에 닿자, 방금까지 함께 있던 서재의 모든 흔적은 그곳으로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