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살된 황후는 즉위식 아침을 다시 산다
2화
허가서가 지도함 위에 놓인 직후, 마르지 않은 잉크에서 쇠 냄새가 났다. 리에나는 그 냄새를 따라 책상 앞으로 한 걸음 옮겼다. 낮 빛이 서재 바닥을 가르며 문지방까지 와 있었다.
“기록관 열람이 필요하오.”
칼리안이 검 끈에서 손을 내렸다.
“누구를 보낼 거요.”
“이안 로스벨. 왕실 독각 기록을 봐야 하오.”
리에나는 별궁 구조도 아래 놓인 봉쇄 명령서 사본을 보지 않았다. 그보다 칼리안의 오른손이 책상 모서리를 짚는 위치를 보았다.
“부엌 하녀가 쥔 잔과 같은 금선 잔이 어느 경로로 별궁에 들어왔는지 기록관 대출 장부에 남을 수 있소.”
“왕실 기록관은 황제 직속 열람 승인이 있어야 한다.”
칼리안이 그녀의 시선이 닿은 지점에서 손을 거두며 말했다. 목소리는 짧았고 책상 위의 지도함을 향해 있었다.
“봉쇄가 24시간이면, 그 안에 대출 장부부터 좁혀야 하오.”
“조건이 있다.”
칼리안이 서랍을 열었다. 리에나는 그가 봉인된 은린향 반응 잔여물 쪽을 지나 흰 서식을 꺼내는 손끝을 보았다.
“열람 범위는 독각 기록과 그 대출 내역으로 한정한다.”
“그걸로 충분하오.”
“기록관 안에선 이안도 황후의 명을 받았다고 하지 마라. 내 이름으로 발급한 열람 허가로만 움직여.”
리에나가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서식 위에 놓일 인장을 보았다. 칼리안이 서명을 두 번 그었다. 붓이 끝에서 한 번 멎었을 때, 그가 손목을 약간 틀었다.
“이안은 지금쯤 하녀 처소 대기실 앞일 거요.”
리에나가 말했다.
“내가 부른다.”
칼리안이 허가서를 반으로 접지 않고 들었다. 잉크가 마르기 전에 그가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리에나가 그 뒷모습을 보다가 지도함 위의 수색 허가서와 나란히 놓일 자리를 미리 비워 두었다.
“서면 허가는 이안에게 직접 받아라.”
“기록관 수사는 그에게 지시하겠소.”
리에나가 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복도에서 근위대 장화 소리가 두 번 멎었다.
기록관 복도는 오후의 볕이 창틀에 갇혀 길게 번져 있었다. 이안 로스벨은 허가서를 왼손에 든 채 기록관 문 앞에 섰다. 관리인이 문을 열기 전에 그가 오른쪽 벽의 대출 장부 보관 위치를 먼저 보았다.
“황제 폐하의 열람 허가입니다.”
이안이 허가서를 펼쳐 보였다. 관리인이 인장을 확인하고서야 무거운 문을 안쪽으로 밀었다. 기록관 안은 바깥 볕과 달리 서늘했고, 대출 장부가 놓인 열람대 쪽으로 검은 목재 냄새가 낮게 깔렸다.
“최근 사흘 사이 별궁 쪽으로 나간 기록을 봅니다.”
이안이 열람대 앞에 서서 말했다. 관리인이 장부 한 권을 펼쳐 올렸다. 이안은 먼저 별궁 물자 반입 기록을 넘기지 않고, 손가락 끝으로 독(毒) 항목의 대출 번호를 따라 내려갔다.
두 번째 쪽 아래에서 별궁 조제실에 배정됐던 은린향 관련 시약 모음 기록이 잡혔다. 일자 옆에는 ‘폐기 예정’이라는 짧은 표기가 있었고, 그 아래로 이관된 곳이 ‘대비궁 관리인실’이라고 찍혀 있었다.
이안이 몸을 조금 낮추어 그 줄을 다시 보았다. 폐기 직전 날짜와 대출 장부에 남은 관리인 서명은 서로 다른 잉크로 보였다. 그가 열람인 명단을 넘기자 같은 날짜에 열람한 이름 세 개가 보였다. 하나는 별궁 조제실 하급 조제사, 나머지 둘은 대비궁 쪽 관리인 직함으로만 남아 있었다.
“이 세 줄은 사본을 뜨겠습니다.”
이안이 관리인에게 말했다.
“대출 장부 원본은 열람만 허가되어 있습니다.”
“그럼 열람 범위 안에서 이 두 쪽만 눌러 두고, 같은 내용을 황후께 보고할 사본으로 옮깁니다.”
이안이 허가서를 열람대 위에 편 채 두었다. 관리인이 그 옆에 빈 사본지를 놓았다. 이안이 대출 장부의 해당 줄과 열람인 명단을 세 번 확인하고 붓을 들었다. 사본지에 옮기는 손끝이 빠르지는 않았지만, 멈추는 일은 없었다.
기록관 밖으로 나왔을 때 오후 빛이 복도 바닥에서 옆으로 밀려나 있었다. 이안은 대출 장부 사본과 열람인 명단을 가죽 끈으로 묶어 옆구리에 끼웠다. 그가 별궁 쪽 회랑으로 걸음을 돌릴 때, 근위대 한 명이 기록관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
“황후께서 황후궁 서재로 오라십니다.”
이안이 대답 없이 걸음을 옮겼다. 회랑을 반쯤 지나자 서재 쪽 문 앞에 리에나가 서 있었다. 그녀는 대출 장부 사본을 보지 않고 이안의 옆구리 옆으로 늘어진 가죽 끈을 보았다.
“대비 측 반출 정황이야, 기록관에서 잡았다.”
이안이 문 옆에 서서 말했다.
“들어가서 보여 주겠는걸.”
저녁 빛이 복도 끝에서 짧아지고 있었다. 리에나는 서재를 나서며 허가서를 든 손을 가슴께로 올렸다. 이안이 펼쳐 둔 대출 장부 사본이 아직 서재 탁자 위에 있었다. 대비 측이 별궁 물품을 반출한 기록이 장부에 남았다는 보고는 받았지만, 그 반출이 어떤 시녀의 손을 거쳤는지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다.
“황후 전하.”
리에나가 걸음을 멈췄다. 벽 쪽 횃불 아래에서 레오니드가 몸을 곧게 세우고 있었다. 어느 결에 복도로 들어와 있었는지, 발소리는 듣지 못했다.
“레오니드 경.”
“잠깐이면 됩니다.”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리에나가 뒤를 돌아보지 않고 턱을 약간 들었다. 레오니드는 한 걸음 가까이 오지 않았다.
“대비 전하가 오늘 아침, 즉위식 준비 전에 시녀를 따로 불렀다고 합니다.”
리에나의 손끝이 허가서 모서리에 힘을 주었다.
“누구를.”
“어느 시녀인지는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황후 전하를 모시는 시녀 가운데 한 명이라는 말만 들었습니다.”
“그 말을 내게 하는 이유는.”
레오니드가 숨을 한 번 고르게 내쉬었다. 손은 칼자루에 얹지 않았다.
“수사 방향이 대비 쪽으로 좁혀지고 있습니다. 그 앞에서 황후 전하께서 직접 확인하실 게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리에나는 그를 천천히 마주 보았다. 레오니드의 시선은 땅에 닿지도, 그녀의 얼굴에 오래 머물지도 않았다.
“출처는 대지 않겠소?”
“대지 못합니다.”
그가 짧게 잘라 말했다. 복도 공기가 젖은 밀랍 냄새를 머금고 가라앉았다. 리에나가 허가서를 양손으로 모아 쥐었다.
“그 정보가 틀리면, 시녀 하나를 의심한 내가 남게 되오.”
“그래서 혼자 들은 말로 남겼습니다.”
레오니드가 뒤로 반 걸음 물러섰다.
“확인은 황후 전하의 몫입니다.”
그가 목례하고 복도의 어두운 쪽으로 사라질 때까지 리에나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전해지는 사람이 어느 쪽인지는 이미 짐작이 갔다. 아침에 물잔을 올린 손이 떠올랐다.
밤이 내린 응접실은 촛불 두 개만 켜져 있었다. 리에나는 안쪽 소파에 앉아 찻잔을 밀지 않고 손을 무릎 위에 두었다. 세라핀이 문가에 서서 들어올지 말지 망설이다 안으로 걸어왔다.
“부르셔서 왔습니다, 전하. 차를 다시 데워 올려요?”
“됐어. 가까이 와.”
세라핀이 조심스럽게 탁자 앞으로 왔다. 두 손을 앞치마 위에 가지런히 얹고 서 있었다. 리에나는 상대의 손을 보지 않고 찻잔을 들어 입술에 대는 시늉만 했다.
“요즘 집에서는 소식 없어?”
세라핀의 어깨가 조금 풀렸다.
“네에. 오빠가 이번에 제국에서 연 마상 시합에 나간대서 편지가 왔어요.”
“마상 시합이라면 부상도 잦은데.”
“그래도 모레노 가문의 서출이라도 검술 하나는 제법이라는 말을 듣는 사람이에요. 오빠는 늘……”
세라핀이 말을 절반쯤 삼켰다. 리에나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몸을 약간 앞으로 기울였다. 그 동작에 세라핀이 두 손을 모아 매무새를 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내가 모시는 일은 이상 없어요, 전하. 아침 일 때문에 마음이 좀 불안하셨겠다 싶어서……”
“아침에 물잔을 올리기 전에 어디쯤 있었어.”
세라핀의 숨이 짧게 들썩였다.
“주방에서 주전자를 받아 곧장 올라왔는데요.”
“그 전에는.”
“제가 자리를 비운 적은……”
세라핀이 말을 거두고 입술을 연다. 이내 목소리가 빨라졌다.
“아, 다만 짧게 다녀온 일이 참 있었어요. 반출품 확인하러 가라는 말이 있어서요. 그게 벌써 의심스러워 보인다면 제가 해명할게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으니——”
그녀가 오른손으로 왼쪽 손목을 감쌌다. 리에나는 그 손가락에 시선을 떨어뜨렸다. 새끼손톱 가장자리로 푸른빛이 아주 얇게 스며 있었다. 은제 시약에 닿은 잔여물과 같은 빛이었다.
리에나는 찻잔을 들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몸 안의 맥박이 목덜미까지 치받는 것을 느끼며 손끝으로 주름진 치맛자락을 한 번 폈다.
“그래. 다녀온 일이 뭔지는 천천히 말해.”
세라핀이 고개를 들어 리에나를 올려다보았다. 동글어진 눈이 촛불을 작게 반사했다.
“전하, 제가 차를 다시 끓여 올릴까요? 손이 찬데 따뜻한 걸 드시면——”
“네 오빠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잖아.”
리에나가 말을 잘랐다. 세라핀의 다음 말이 공기에서 작게 부서졌다.
“네에…… 오빠는 이번에 좋은 성적을 내면 정식 기사로 추천받을지도 몰라요. 그러면 어머니께도 작은 집이라도 드릴 수 있고요.”
세라핀이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리에나는 상대의 새끼손톱을 다시 보다가 찻잔 쪽으로 손을 옮겼다.
“손 좀 씻고 와. 차를 새로 끓여 오게.”
세라핀이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지금이요?”
“응. 손에 묻은 것 없이 깨끗한 손으로.”
리에나가 찻잔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한 번 톡 건드렸다. 세라핀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바로 끓여서 올릴게요.”
세라핀이 응접실 옆 세면대 쪽으로 걸어갔다. 물이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그 푸른 잔여물이 얼마나 씻겨 내려갔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리에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찻잔을 든 채 그대로 있었다.
잠시 뒤 세라핀이 새 찻주전자를 들고 돌아왔다. 그녀의 새끼손톱은 물에 불어 옅은 흰빛을 띠었다. 리에나는 더 살피지 않았다. 직접 증거는 씻겨 내려간 뒤였다.
“고마워. 이만 물러가서 쉬어.”
“전하, 괜찮으시다면 제가 밤새 밖에서 대기할까요?”
“괜찮아.”
세라핀이 몸을 숙이고 문 쪽으로 물러갔다. 문이 닫히자 응접실 안은 촛불 소리만 남았다. 리에나는 찻주전자를 내려다보지도 않고, 손바닥을 무릎 위에 올렸다. 세라핀을 붙잡아 두었지만 남은 것은 그 손톱을 본 기억뿐이었다.
리에나는 서재 문을 닫는 대신 반쯤 열어 두었다. 세라핀의 발소리가 복도 끝에서 사라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밤 공기가 문틈으로 스며들었다. 책상 앞에는 칼리안이 서 있고, 창가 쪽에는 레오니드가 등을 곧게 세운 채 대기하고 있었고, 이안은 서재 탁자 옆에서 대출 장부 사본을 넘기고 있었다.
“돌아왔소.”
칼리안이 그녀의 옷자락에 묻은 물기를 보았다.
“세라핀은 손을 씻었소. 잔여물은 남지 않았을 거요.”
리에나가 책상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칼리안의 손이 허가서가 놓인 지도함 위를 한 번 짚었다.
“그래도 잔여물이 그 손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진범이라 단정할 순 없소. 하녀가 손님의 잔을 씻기 직전에 묻었을 수도 있소.”
“세라핀은 침전에서 물잔을 내려놓기 전에 손을 씻소. 시중드는 사람의 물에 닿는 습관이 그리 가볍지 않소.”
리에나는 지도함 앞까지 걸음을 옮겨 허가서를 집어 들었다. 종이가 아직 눅눅했다. 그녀는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허가서를 넣었다.
“가설이면 됐소. 증거는 내가 잡을 테니.”
칼리안이 레오니드를 향해 턱짓했다. 레오니드가 책상 위로 서류 두 부를 올렸다. 같은 문구였다. ‘은린향 배후를 증명하지 못하면 황후 지위에서 물러난다.’ 아래에 리에나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건 뭐요.”
“진범 증명 시가 아니라 진범 증명 실패 시 황후가 자리에서 떠난다는 서약이오. 귀족원 회부 조건이 그렇게 붙었소. 황후가 아니면 24시간 조사권도 사문서가 되니.”
칼리안이 첫 장을 들어 올렸다. 붉은기가 도는 눈동자가 촛불에 잠깐 붉게 물들었다.
“서명 전에 검증할 게 있소.”
리에나가 서약서를 받아 들지 않고 내려다봤다. 레오니드가 먹을 갈아 둔 붓을 건넸다.
“세라핀에게 물은 건 잔여물뿐이오. 이 서약은 내가 진범을 증명 못 하면 황후 지위를 반납한다는 조건인데, 그 실패가 오늘 밤 귀족원의 봉쇄 연장을 위한 명분이 될 수도 있소.”
“그렇소. 그래서 서명한 뒤엔 하녀 처소와 대비 쪽 기록을 함께 돌리겠소. 황후 혼자 지게 두지 않소.”
칼리안이 한 걸음 가까이 왔다. 리에나는 그의 그림자가 서약서를 덮는 것을 보면서 붓을 들었다.
“레오니드, 증인 봉인을.”
리에나가 두 부에 이름을 썼다. 칼리안도 같은 자리 아래에 서명했다. 레오니드가 밀랍을 떨어뜨려 인장을 눌렀다. 두 부 다 봉인이 마르자 하나는 리에나 앞으로, 하나는 칼리안 앞으로 밀렸다.
리에나는 서약서 원본을 접어 품 안에 넣었다. 허가서가 든 봉투는 왼손에 쥐었다.
“그럼 하녀 처소부터 가겠소.”
칼리안이 문 앞으로 먼저 움직이지 않고 그녀의 오른쪽 소매를 짧게 붙잡았다. 옷감이 팔꿈치 아래로 조금 당겨졌을 뿐 손목은 닿지 않았다.
“한 가지만 묻소.”
리에나가 걸음을 멈췄다.
“황후는 왜 세라핀을 지금 돌려보냈소.”
그의 손이 소매에서 떨어졌다. 레오니드가 창밖을 돌아보는 기척이 났다.
“증거가 없는 사람을 붙들어 두면 세라핀이 대비 쪽 입구를 피해 숨을 거요. 돌려보낸 게 아니고, 먼저 보낸 거요.”
리에나가 서재 문을 열었다. 레오니드가 창가에서 몸을 돌려 그녀를 불렀다.
“황후께서 나가시기 전에 보셔야 할 게 있소.”
레오니드가 창밖을 가리켰다. 리에나가 문턱을 넘다 멈춰 서서 그의 손끝이 향한 쪽을 보았다. 하녀 처소 바깥 벽등 아래, 대비의 하인이 세라핀을 부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