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F급 감정사, 미공개 가치를 읽는다

3화

“지금 설명해요.”

서하진의 목소리가 검증대 금속 위를 짧게 울렸다. 복도로 통하는 문은 닫혀 있었고, 검증대 뒤 환풍구 소리만 낮게 돌았다. 한도윤은 손바닥에 남은 열을 천천히 쥐었다 폈다.

“출처를 확인하지 않으면 조사 범위가 넓어집니다.”

서하진은 한 걸음 다가섰다. 무테 안경 너머 회색 눈이 한도윤의 주머니 쪽으로 떨어졌다. 나침반이 그 안에서 미세하게 울렸다. 들릴 리는 없는데도.

서하진은 마치 들은 사람처럼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뭐야, 이 사람.

“못 하겠습니다.”

한도윤이 말했다. 목이 잠겨 있었다. 왼쪽 눈이 볼 안쪽까지 저릿하게 눌려 왔다. 시야 가장자리가 한 번 더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설명이 불가능한 겁니까, 거부하시는 겁니까.”

“지금은 안 됩니다.”

서하진이 단말기를 들어 올렸다. 문양 캡처가 화면에 떠 있었다. 세 개가 겹쳐 배열돼 있었다.

“이 세 점이 같은 계통으로 대조됩니다. 제 눈으로 확인한 기록입니다.”

한도윤은 대꾸하지 않았다. 천 사이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서하진의 시선이 그 빛에 닿는 순간.

한도윤은 몸을 반쯤 돌려 검증대 모서리 쪽으로 비켰다.

들켰다.

아니, 아직이다.

“접촉을 막을 근거가 필요해요.”

국립유물관리원 별관 재심사 사무실은 본관에서 복도 하나를 건너 이어졌다. 서하진이 문을 먼저 열었다. 오세준이 책상 반대편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앉아.”

한도윤은 서류 앞 의자에 앉았다. 서하진은 문가에 선 채 단말기를 접었다.

“촉매는 검증대 보존 상태지요?”

서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증대 밀봉 보관을 확인했습니다.”

오세준이 한도윤을 봤다.

“네가 오늘 만든 숫자, 감정가의 3배를 넘겼어. 워치독은 그걸 단순 재심사로 닫았는데, 봉인고 문양과 겹친다는 기록이 올라왔으니 이야기가 달라.”

한도윤은 서류 첫 장을 보지 않았다. 오세준의 왼손 검은 장갑을 봤다.

이게 다 그 나침반 때문인가.

“봉인고 접근 예비심사 이름으로 너한테 공식 접근제한을 걸겠다. 이의 있으면 지금 말해.”

“근거가 부족합니다.”

“근거는 서 감정관의 대조 기록으로 충분해.”

한도윤이 고개를 들었다.

“저는 그 문양이 봉인고 것인지 확인한 적 없습니다.”

오세준이 짧게 웃었다.

“확인했든 안 했든, 의심이 생겼다는 게 문제야. 의심만으로도 접근을 막는 게 절차지.”

서하진이 반 발짝 나섰다.

“이의 제기 절차는 통지서 수령 후 이틀 안에 서면으로 가능합니다.”

“지금 하는 겁니다.”

한도윤이 말했다.

“그건 서면이 아니지.”

오세준이 서류를 한도윤 앞으로 밀었다.

“받아.”

한도윤은 서류를 집었다. 방 안은 조용했다.

이의를…… 서면으로.

지금 여기서 막을 방법이 있나.

문이 열리고 백아린이 들어왔다.

“끝났으면 데려간다.”

오세준이 눈을 좁혔다.

“아직 이의 절차 중이야.”

“이의는 서면으로 하면 되지요. 통지서는 받았고, 주소는 우리 길드로 됐고요.”

“촉매 원본은?”

서하진이 답했다.

“검증대 밀봉 보관 중입니다.”

“그거 보관 확인서 떼줘. 태하 길드 자문 계약상 원물 관리 경로는 우리가 남겨야 하니까.”

서하진이 오세준을 잠시 봤다. 오세준이 턱짓으로 허락하자 그녀가 단말기를 열어 확인 화면을 띄웠다. 백아린은 자기 단말기에 그 화면을 받았다.

한도윤이 통지서를 반으로 접어 안주머니에 넣었다.

백아린이 한도윤의 팔꿈치를 짧게 쳤다.

툭.

“가자.”

한도윤이 일어났다. 서하진이 그 앞을 막지 않았다. 그녀는 문 옆으로 반 발 물러섰다. 한도윤이 지나갈 때 시선이 어깨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백아린이 먼저 복도로 나갔다. 한도윤이 문고리를 잡고 멈춰 섰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 나침반은 제가 보관합니다.”

서하진이 낮게 말했다.

“지금은 아닙니다.”

한도윤이 문을 닫았다.

복도로 나가자 백아린이 이미 열린 승강기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승강기가 오는 소리가 위에서 아래로 길게 내려왔다.

“길드 사무실로 간다. 거기서 촉매 보관 경로부터 정리해.”

한도윤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통지서의 모서리가 안주머니에서 심장 쪽을 눌렀다.

이제…… 정말 되돌릴 수 없게 된 건가.

한도윤은 승강기 문이 열리기 직전, 주머니 밖으로 나침반이 조용해진 걸 알았다.

태하 길드 청사 회의실 문이 닫힐 때까지 복도 방향의 소음은 완전히 끊겼다. 한도윤은 주머니 속 나침반을 꺼내기 전에 손끝으로 표면을 눌렀다. 길드 청사에 들어선 뒤부터 계속 잠잠하던 진동이 되살아났다.

바닥의 미세한 떨림처럼.

됐군.

그는 코트를 벗지 않은 채 테이블 모서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백아린은 이미 테이블 위에 코트를 벗어 걸쳐 두고 있었다.

“여기가 사무실이야. 문 잠갔고.”

한도윤은 방 안을 한 번 훑었다. 통유리 없는 폐쇄 회의실이었다. 출입 기록 단말기가 문 옆에 붙어 있었고, 긴 테이블 위에는 관리원 통지서가 펼쳐져 있었다.

백아린의 것이었다.

“촉매.”

백아린이 가죽 코트 안주머니에서 검은 보관함을 꺼냈다. 재심사장에서 관리원이 촉매 원물을 검증대에 보존하라고 했지만, 백아린이 직접 확인하겠다고 나서서 인계받은 것이 지금 한도윤의 앞 테이블에 놓인 것이다.

보관함 뚜껑을 열자, 잔열이 올라왔다.

촉매는 표면의 문양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고, 무게는 눈으로 보는 것보다 가벼워 보였다.

“한 시간 뒤면 오세준이 다시 관할권 들고 찾아올 거야.”

백아린이 촉매를 손으로 잡으려 했다.

“멈춰.”

한도윤의 목소리가 그녀의 손목보다 먼저 나갔다. 백아린이 손을 세웠다.

“나침반 먼저 볼게.”

한도윤은 왼쪽 주머니에서 낡은 나침반을 꺼냈다. 금속 테두리에 남은 손때가 촉매의 잔열을 만나자 옅게 끓는 듯했다. 유리가 깨진 자리 아래로 바늘이 서서히 방향을 찾고 있었다.

“물건이 말해.”

한도윤이 나침반을 촉매 가까이 가져갔다.

바늘이 움직였다.

붉게 반전되기 직전의 선명한 금속 반응. 촉매 쪽으로 정렬된다.

이거, 상태가……

“상태가 고르지 않아. 원물을 열면 안 돼.”

“1회 조건이면 되잖아.”

백아린은 촉매를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한도윤. 길드 자금이 오늘 계좌 동결로 기한이 앞당겨졌어. 한 달이 아니라 이번 주 금요일. 사람들이 길드 문 앞에서 기다려.”

한도윤은 백아린의 손을 봤다.

장갑도 없이.

촉매를 잡으려는 손이었다.

“24시간 고열이 온다. 등급 표시 오류도 따라붙어.”

“1회면 하루 버티는 거야. 내가 처음이야?”

백아린이 손가락을 촉매 표면 위로 내렸다. 한도윤은 나침반을 그녀의 손가락과 촉매 사이에 들이밀었다.

“접촉해도 된다는 보장을 내가 아직 안 했다.”

“확실한 것 하나만 말해. 촉매가 내 등급을 올려 주는 건지.”

나침반 바늘이 세차게 흔들렸다. 검붉은 기운이 유리 조각 사이에서 번지며 테두리를 따라 돌았다. 한도윤은 시선을 나침반에 고정한 채 몇 초 멈췄다.

“촉매가 반응할 대상은 너고, 문양은 살아 있다. 감정 결과는 확실해.”

“좋아.”

백아린이 촉매를 잡았다.

순간, 테이블 위의 관리원 통지서가 바람 없이 옆으로 밀려났다.

백아린의 몸이 뒤로 젖혀질 듯하다가 반듯하게 서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아주 짧았다.

“됐어.”

백아린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활짝 편 손바닥 위에서 촉매가 스스로 식어 가고 있었다.

“몸이 뜨거워.”

그 말을 끝으로 백아린이 테이블 모서리를 짚었다.

그 행동만으로는 몸을 지탱하기 어려운지, 그녀의 손등에 잔열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회의실 벽 쪽 등급 표시판이 깜빡였다.

S급으로 고정돼 있던 백아린의 등급이 한 칸 아래로 내려갔다 올라갔다를 반복했다.

벌써?

“표시 오류.”

한도윤의 말에 백아린이 고개를 돌렸다.

“금요일까지 가면 소용없어. 지금 등급이 흔들리는 것만큼은 기록으로 남아.”

등급 표시판이 다시 깜빡였다. 한도윤은 촉매를 보관함 쪽으로 밀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손안의 나침반이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바늘이 회의실 동쪽 벽을 가리켰다.

이 방향은……

그 방향은 길드 사무실 복도를 지나 지하 수장고로 이어지는 벽이었다.

백아린이 식은땀을 닦으며 물었다.

“그게 어딜 가리켜.”

“봉인고.”

한도윤은 짧게 답했다. 나침반은 여전히 동쪽 벽을 향해 있었고, 붉은 기운은 금속 테두리를 넘어 한도윤의 손등까지 번지는 듯했다.

백아린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손등까지?

등급 표시판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깜빡인 뒤, 백아린의 이름 옆에 ‘측정 보류’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재심사장을 나선 서하진은 복도 끝에서 오른쪽으로 꺾지 않고, 곧장 지하 연결 통로로 내려갔다.

오후의 봉인고 외곽은 조명이 절반만 켜져 있었다. 열람대 불빛이 유리 파티션 너머 봉인고 출입구의 금속 면을 얇게 비추고 있었다. 서하진은 구석 자리에 앉아 단말기를 열었다.

봉인체 감정서 원문이 먼저 떠올랐다. 열람 기록이 남지 않는 사본 화면이었다.

다음으로 사고 기록 사본을 열었다. 재심사장에서부터 손에 쥐고 온 종이 뭉치의 끝이 조금 구겨져 있었다. 그녀는 종이를 반듯하게 편 뒤 감정서의 접수번호부터 짚었다.

손가락이 숫자 한 줄을 따라 내려갔다.

멈췄다.

사고 기록의 접수번호와 봉인체 감정서의 접수번호가 같았다.

서하진은 단말기를 들어 두 화면을 나란히 띄웠다.

……번호만 같은 게 아니었다. 사고 기록에 남은 감정 항목의 배열 순서까지 봉인체 감정서와 일치했다. 한 건의 감정서가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하나는 봉인체로.

하나는 오감정 사고로.

그녀는 열람대 테이블에 손바닥을 대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이건 단순한 문양 일치가 아니었다. 나침반의 금속 테두리가 봉인체 표면 문양과 겹쳤던 것도, 촉매 표면의 잔열 반응이 봉인체 감정서의 초기 기록과 겹쳤던 것도, 각각은 우연으로 밀어둘 수 있었다.

그러나 접수번호가 같다는 건 달랐다.

봉인체와 오감정 사고가 출처를 공유한다는 뜻이었다.

서하진은 사고 기록 사본의 마지막 장을 덮지 않고 단말기에 손을 뻗었다. 관리원 내부망을 열었다.

조회는 한 번에 열리지 않았다.

봉인고 접근 권한이 없는 감사관 단말기에서는 외곽 열람만 허용됐다. 그녀는 자신의 수석 감정관 인증을 덧붙여 넣었다.

화면이 두 번 깜빡인 뒤, 열람 이력 창이 떠올랐다.

내부망 우측 상단에 새로운 알림이 하나 올라와 있었다.

‘봉인고 접근 예비심사: 한도윤 — 상정.’

서하진의 손가락이 멈췄다.

벌써?

상정 주체는 워치독 재심사 시스템이었다. 감사관 회의가 아니었다. 오세준도 아니었다.

자동 발효된 절차였다.

그녀가 봉인고 쪽으로 눈을 돌리는 사이, 시스템은 이미 한도윤의 이름을 봉인고 접근 예비심사 대상으로 올려두고 있었다.

그녀는 사고 기록 사본을 한 장씩 정리해 왼손으로 눌러두었다. 단말기의 예비심사 알림은 꺼지지 않았다. 화면 안에서 한도윤의 이름 옆에 ‘대상 등록 시각’이 찍히고 있었다.

그 시각은 촉매 반응 재현이 공식 검증대에서 인정된 직후였다.

서하진은 봉인고 출입구 쪽을 보지 않고, 열람대 유리에 비친 단말기 화면을 내려다봤다.

예비심사는 상정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대상자에게 공식 접근 제한이 예고되는 절차였다.

사고 기록 원본을 들고 관리원에 정식 보고할 수는 없었다. 손에 있는 건 사본이고, 사본의 출처를 밝히는 순간 열람 경로가 먼저 문제가 된다.

어디서부터 꼬인 거지.

그녀는 종이 묶음을 반으로 접어 단말기 밑에 넣었다.

내부망 알림이 다시 갱신됐다.

‘접근 예비심사 1단계: 출처 확인 요청 — 대상자 한도윤.’

서하진은 화면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F급 감정사, 미공개 가치를 읽는다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