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부를 베니 돈이 보인다
1화
나는 영수증 노예다. 하지만 이제 장부를 베면 돈이 보인다.
오후의 공용 오피스텔 사무실은 프린터 토너 냄새가 조금 남아 있었다. 윤가람이 문을 열고 들어와 테이블 위에 서류 뭉치를 내려놓았다. 가죽 서류 가방을 치우기도 전에 장부 사본이 코앞까지 밀려왔다.
두껍고, 모서리가 반듯했다.
“S급 안전예산 장부야.”
윤가람이 손가락 두 개로 뭉치를 눌렀다.
눌린 종이 표면이 미세하게 일렁였다.
마나 잔상이다.
왼손 검지를 펴서 맨 윗장을 넘기다가, 검지 끝이 그 잔상에 스쳤다.
순간 종이처럼 얇은 통증이 스며들었다.
베인 거다.
피 한 방울이 장부 사본 귀퉁이에 번졌다.
[세무 대리인 시스템] 판독 완료 추정 횡령액: 2,340,000,000원 수수료 정산: 5,200,000원 (지급 예정)
숫자가 먼저 들어왔다.
그다음 장면이 겹쳤다.
돈의 흐름이 지새는 안개처럼 종이 위를 지나갔다.
중간에 장부 한쪽에서 ‘재무 건전성 확인서’로 이어지는 흐름이 스쳤다.
검지에서 피가 한 방울 더 맺혔다.
23억 4천만 원. 수수료 520만 원.
종잇장에 피 두 방울.
아깝지 않은 출혈이네.
“얼마지.”
“추정 횡령액 23억 4천만 원입니다.”
윤가람이 팔짝을 풀었다. 손끝이 허리 검집 고리에 닿았다 떨어졌다.
“세무 업계는 못 믿어.”
그 불신이 오늘 내 선금을 가로막는 거라면, 내가 설득해야 할 건 숫자의 출처가 아니라 결제 타이밍이다.
“확인하겠습니다만, 세무 업계를 다 믿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이 장부를 읽은 건 저고, 수치는 제 앞에서 떴습니다.”
“증거 없는 숫자는 조작이야.”
“그래서 두 가지 조건을 첨부하겠습니다.”
23억 4천이라는 숫자를 한 번 더 두드려 보였다.
“첫째, 원본 전표와 통장 사본을 확보해서 수치를 재검증해야 합니다. 원본이 있어야 숫자가 확실해집니다.”
“둘째.”
“세무조정 선금 520만 원을 오늘 중으로 입금해 주십시오.”
윤가람이 눈을 가늘게 떴다.
“계약보다 먼저 돈부터?”
“계약서는 지금 준비해도 됩니다. 다만 제 노동은 선불입니다. 그동안 이 업계에서 수수료를 떼여 본 횟수가 7월까지 열두 번입니다.”
한 달에 두 번쯤 무료 봉사.
내 연봉은 누가 채워 주냐.
“계산은 빠르네.”
“빠른 계산이 제 무기입니다.”
윤가람이 장부 사본을 자기 쪽으로 다시 끌어당겼다. 나는 손을 얹지 않았다. 사본을 돌려받든 말든 판독은 끝났다.
이제 남은 건 입금 알림 하나.
기다리는 동안 마음이 차분해졌다.
이런 차분함은 돈이 가까워졌을 때만 온다.
“숫자 출처는 어떻게 아냐.”
“사본 표면에 마나 잔상이 남아 있는 걸 보면, 이 서류는 아크길드 내부 보안 구역을 거쳐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복사기 스캔 흔적과 잔상 위치가 일치합니다.”
“내부 제보라면 믿겠어?”
“제보 루트는 아직 묻지 않겠습니다.”
윤가람이 검집 고리에서 손을 뗐다.
“제보자 신원은 안 밝혀.”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단, 제보 물건이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 저에게 넘어왔다는 기록은 남기겠습니다. 계약서에 ‘의뢰인 제공 자료’로 명시하지요.”
“그건 좋아.”
“그리고 이미 말씀드렸듯 선금입니다.”
“520.”
“정확히 5,200,000원입니다. 부가세 별도면 더 좋고요.”
“부가세는 나중에.”
나는 고개를 숙였다.
“확인하겠습니다.”
검지와 중지가 나란히 종이 쪽에 닿았다.
“원본은 네가 구해.”
“네?”
“원본 전표랑 통장 사본. 네가 확보해.”
……이제야 본론이네.
내 수수료에 위험 수당이 붙는 순간이다.
나는 얼굴을 들었다.
“그 조건이면 위험 부담이 다릅니다. 아크길드는 S급 길드입니다. 제가 문으로 들어간다고 원본을 보여줄 것 같지 않습니다.”
“그 문에 안 들어가도 될 수 있어.”
“근거가 필요합니다.”
“내가 다리 놔 줄게. 회계팀에 문의는 넣었어.”
계산이 멈췄다가, 다시 돌았다.
뭐야, 그럼…… 서류는 이미 식탁 위에 차려진 거잖아.
“좋습니다. 원본 확보 시도는 제가 합니다. 단, 선금은 시도 전에 들어와야 합니다.”
“오늘 넣어.”
“입금 확인되면 계약서 바로 보내겠습니다.”
“나쁘지 않네.”
윤가람이 그 한마디를 남기고 몸을 돌렸다.
사본은 안 가져간다.
……어?
“저, 잠시만요.”
윤가람이 문 앞에서 섰다.
“세무조정 선금 520만 원을 입금해 주시면, 접수 시간 기록까지 남겨 두겠습니다. 나중에 관청 감사 대비하실 거면 이 기록이 필요할 겁니다.”
“수수료 떼일 준비까지 하네.”
“대비하는 겁니다.”
윤가람이 문을 열면서 짧게 말했다.
“오후 다섯 시 전에 넣을게.”
문이 닫혔다.
남는 숫자도 크고, 들어올 숫자도 작다.
……작네.
내 수고에 비하면.
첫 화면에 잔액 7,842,150원이 떴다. 입금 전 금액이다.
오후 네 시 사십칠 분.
입금 알림이 떴다.
[국민은행 입금] 5,200,000원 — (주)아크길드 세무조정 수수료 (잔액: 7,842,150원)
잠금 화면 그대로였다. 나는 입금 알림을 띄운 채로 계산기를 다시 두드렸다.
이 시간만큼은, 숫자가 거짓말을 안 하네.
인생에서 가장 정확한 존댓말이 손끝에서 나왔다.
“감사합니다, 고객님.”
이제…… 원본입니다.
아크길드 본사 로비에 들어서자 에어컨 바람이 먼저 목덜미를 때렸다. 늦은 오후인데도 회계팀 문 앞엔 사람이 없었다. 윤가람이 엘리베이터에서 먼저 내려 별관 쪽으로 사라졌다.
제보 루트 보호랄까.
나한테까지 오지 말라는 거겠지.
회계팀 유리문 안쪽에서 차민규가 일어났다. 넥타이 핀의 아크길드 로고가 형광등에 반짝였다. 금장 시계가 책상 모서리를 스쳤다.
“서 대리인님. 이렇게 직접 오실 일이었습니까.”
그가 웃었다. 웃어도 눈이 좁아지지 않았다.
“네, 팀장님. 안전 보급비 원본 전표를 잠깐 열람하려 왔습니다.”
“아, 그 건 말입니다.”
차민규가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표지에 ‘재무 건전성 확인서’라 적혀 있었다. 내 이름이 빈칸 위에 떠 있었다.
“길드 재무 건전성을 위해 외부인이 원본 장부를 열람할 땐 이 확인서에 서명을 하셔야 합니다. 열람 후 유출 시 법적 책임을 지겠다는.”
나는 서류를 받았다. 허리를 약간 숙였다.
“팀장님, 그런데 말입니다.”
“말씀하세요.”
“밀린 수수료 미지급 건부터 확인하겠습니다. 원본 열람 전에 지난 분기 정산부터 맞춰야 제가 뭘 확인할 자격이 생기는지 알 것 같아서요.”
차민규의 시선이 내 왼손 검지에 잠깐 멎었다.
종이 상처가 난 자리였다.
그는 웃음기를 유지했다.
“재무 건전성 원칙에 따라 관청 실사 전엔 원본 열람이 어렵습니다. 그것도 아시죠.”
“네, 압니다. 압니다만, 관청 실사 전엔 확인서 서명도 효력이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열람할 원본이 없는데 책임만 지는 거라.”
차민규가 목을 약간 젖혔다. 넥타이 매듭을 만졌다.
“서 대리인님은 참 꼼꼼하시네요. 그런데 그 꼼꼼함이 가끔 거래처엔 부담입니다.”
“죄송합니다. 제 꼼꼼함 때문에 밀린 수수료가 늘어나서요.”
한 호흡.
책상 위로 밀려온 확인서.
차민규가 확인서를 다시 책상 위로 밀며 말했다.
“아, 그렇게 나오시면 곤란한데요.”
“곤란한 건 저겠죠, 팀장님. S급 길드 수수료가 6개월째 안 들어오는데 확인서부터 받으시면 저도 일을 진행할 근거가 안 서서요.”
차민규가 팔짱을 꼈다.
왼손 약지의 길드장 직인 반지가 보였다.
“수수료는 관청 실사가 끝나면 정리됩니다. 그때까지 확인서에 서명하시고 기다리시면 될 텐데.”
나는 확인서를 보다가 차민규를 봤다.
그리고 시선을 서류 빈칸에 두었다.
……여기다 서명하라고?
“팀장님, 이 확인서에 안전 보급비 원본 열람 동의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냥 막연한 장부 열람 책임이에요. 저는 원본도 못 봤는데 무슨 책임을 지라는 건지 납득이 안 됩니다.”
차민규의 턱이 약간 당겨졌다.
“서 대리인님. 지금 저한테 길드 규정을 가르치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수수료 산정 기준을 여쭙는 겁니다.”
그가 낮게 웃었다.
소리가 아니라 어깨가 들썩였다.
“좋습니다. 그럼 이 확인서는 제가 보관하죠. 서명하실 마음이 생기면 다시 오시고요.”
“네, 감사합니다. 그때는 원본 열람 목록과 수수료 입금 내역을 같이 준비해 주시면 제가 검토하겠습니다.”
회계팀 문을 나왔다.
복도가 길었다.
뒤에서 차민규의 시선이 등을 따라붙는 느낌이었다.
안전 보급비 원본 없는 확인서.
서명받고 장부 불법 반출 시도로 엮으려는 패턴.
……수수료 떼먹으려는 회계 드립이네.
시간당 단가로 치면 방금 그 말싸움, 0원 벌었다.
내 통장은 누가 확인해 주냐.
사무실 문을 열자 볶음밥 냄새가 났다.
노태식이 전기레인지 앞에 서 있었고 윤가람은 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내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말고 나를 봤다.
“원본은?”
“없습니다.”
윤가람의 회청색 눈이 좁아졌다.
“차민규가 확인서 서명부터 요구합니다. 원본 열람은 관청 실사 전엔 불가하답니다.”
“확인서?”
노태식이 뒤에서 웍을 내려놓으며 끼어들었다.
“아니, 원본도 안 보여주면서 서명부터 받는다고? 그게 무슨——”
“응, 그게 그쪽 방식이야.”
윤가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었다.
유리 너머로 밤이 내려앉고 있었다.
“수치는.”
“판독한 사본 기준입니다. 원본 전표가 없어서 정확도는 떨어지지만.”
나는 가방에서 아크길드 S급 안전예산 장부 사본을 꺼내 책상에 폈다.
윤가람이 천천히 걸어와 내려다봤다.
그녀의 눈이 사본 위 숫자들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훑었다.
“추정 횡령액이요.”
“얼마.”
“23억 4천만 원.”
쨍그랑.
노태식이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스테인리스가 타일 바닥에 부딪혀 길게 울렸다.
“이거 미쳤——”
“계산기 두드려 봐.”
내가 노태식을 봤다.
그는 숟가락을 줍지도 않고 식탁 위 계산기를 끌어당겼다.
손가락이 멈칫하다가 숫자를 눌렀다.
조용히.
23억 4천만.
……수수료로 환산하면 몇 달치지?
윤가람이 내 눈을 똑바로 봤다.
“그 수치를 관청에 낼 거야.”
“그 전에 근거가 필요합니다. 사본만으로는 부족해요.”
“알아.”
그녀는 주머니에서 폰을 꺼냈다. 화면을 몇 번 두드렸다.
그 순간 내 폰이 울렸다.
[출력] (빈 출력)
윤가람이 폰을 접어 코트 안쪽에 넣었다.
“선금 보냈어.”
여덟 자.
잔액 7,842,150원.
6개월 밀린 수수료가 아니라 별도 입금.
내 회귀 통장이 아니고 지금 눈앞에서 확인되는 돈.
차민규한테 털린 하루치가 만회되고도 남는다.
……이게 단순한 선금일까.
아니다. 계산부터 해야지.
“유입처가 선명합니다. 세무조정 착수로 보고하겠습니다.”
윤가람이 입을 열었다.
“수수료 확인은 됐고.”
“네.”
“이제 증거.”
노태식이 계산기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숫자 소리가 났다.
그는 계산기 액정을 보다가 나를 봤다.
“야, 근데 이거 정말 되는 거냐. 사본 판독으로 23억을 관청에——”
폰이 울렸다.
이번엔 진동이 아니라 벨소리였다.
번호는 02로 시작하는 아크길드 대표 번호.
노태식이 입을 다물었다.
윤가람이 코트 자락을 밀며 반 걸음 다가왔다.
받았다.
스피커폰은 아니다.
차민규의 기름진 목소리가 폰 안에서 작게 올라왔다.
“서 대리인님, 방금 잘못 짚으셨어요.”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그 사본 말입니다. 아크길드 회계 자료를 동의 없이 반출한 탈취 자료로 보고하게 됐습니다. 제가 회계팀 보안 로그를 돌려봤거든요.”
……로그를 돌렸다고?
그가 잠시 뜸을 들였다. 나는 폰을 귀에 붙인 채 윤가람을 봤다. 그녀의 시선이 내 옆얼굴에 닿아 있었다.
“돌려놓지 않으면 수수료 전건 지급 보류하겠습니다. 관청 제소도 검토 중이고요.”
내 통장은 누가 돌려놔 주냐.
“팀장님——”
“내일 오후까지 가져오세요. 아니면 윤가람 헌터님이 아무리 옆에 있어도 못 막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노태식이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야, 이건 진짜 사기——”
윤가람이 나를 봤다. 그녀의 검집에 달린 마나 잔량 게이지가 창가 불빛에 파랗게 빛났다.
“차민규지.”
나는 폰을 내려놓았다. 사무실 천장등이 갑자기 밝아 보였다.
……수수료 회수하려고 회계 로그까지 돌린 거냐.
“네. 수수료 전건 지급 보류랍니다.”
윤가람의 입가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나는 그 앞에서 통장 잔액을 한 번 더 떠올렸다.
7,842,150원.
오늘 하루.
이걸 지키려면 원본이 아니라 관청 접수가 먼저다. 차민규가 ‘탈취 자료’를 꺼내는 순간, 요구한 적 없는 확인서가 내게 유리해졌다. 하지만 지금은 말하지 않는다.
이 흐름은 내가 계산한다.
“내일 오후까지요.”
윤가람이 가만히 말했다.
“아니.”
그녀가 답했다.
“먼저 움직이는 쪽이 이겨.”
그 말이 사무실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