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장마가 걷히는 날, 너에게 닿으면

1화

장마가 시작된 지 사흘째.

비는 좀처럼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윤하늘은 서점 카운터에 앉아 창밖을 내다봤다. 유리창 너머로 낡은 상가 거리가 텅 비어 있었다. 빗줄기가 처마를 때리는 소리만 가게 안을 채웠다.

손에 쥔 종이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재개발 심의 공고문이었다. 구청 직인이 찍힌 서류에는 이 거리 일대가 정비구역 지정 심의 대상이라는 문구가 또렷했다.

하늘은 공고문을 반으로 접어 카운터 구석에 밀어넣었다.

서점 안은 고요했다. 삼촌이 남긴 책 냄새가 빗속에서도 가라앉지 않고 공기 중에 떠 있었다. 하늘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십 년 만에 돌아온 이곳은 기억보다 좁고 낡아 있었다. 벽지 가장자리는 누렇게 변색됐고, 천장 한구석엔 지난 장마 때 생긴 물얼룩이 그대로였다.

손끝이 책등을 스치다 멈췄다.

낡은 양장본과 헌책들 사이에 책갈피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빛바랜 종이에 손으로 그린 듯한 작은 꽃무늬. 하늘은 책갈피를 빼내 잠시 들여다봤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삼촌이 끼워둔 걸까.

입구 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늘은 책갈피를 원래 자리에 도로 끼우고 카운터로 돌아섰다. 그 순간 문이 열렸다. 빗소리가 한층 크게 밀려 들어왔다.

“주인장 있나.”

최노인이었다. 거리 건너편 철물점을 운영하는 노인은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왔는지 어깨가 흠뻑 젖어 있었다. 하늘은 급히 수건을 꺼냈다.

“어르신, 우산이라도 쓰고 오시지.”

“잠깐인데 뭘.” 최노인은 손을 내저었다. 수건을 받아 얼굴을 닦으며 서점 안을 둘러봤다. “아직 정리는 멀었구먼.”

“천천히 하고 있어요.”

“그럴 시간 있겠나.”

최노인은 카운터 앞에 놓인 의자에 털썩 앉았다. 빗물이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재개발 심의 공고 봤제?”

하늘의 손이 잠시 멈췄다.

“네.”

“거리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어제는 구청 직원이 와서 건물 실측해 갔고, 앞쪽 약국은 벌써 이사 준비한대.” 최노인은 주름진 손으로 무릎을 톡톡 쳤다. “보상금 가지고는 새 자리 못 구한다고 난리야. 사람들 다 예민해져 있어.”

“저희 서점도 해당되나요?”

“여기가 제일 오래됐잖아. 건물주가 누군데 빠지겠나.”

하늘은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빗줄기가 더 굵어지고 있었다. 거리 입구에 붙은 공고문이 바람에 펄럭이다 빗물을 머금고 축 처졌다.

최노인은 말을 아끼는 타입이었다. 평소에는 가게 앞을 쓸면서도 목례 한 번이 전부였다. 그런 노인이 직접 찾아와 앉아 있다는 건, 상황이 그만큼 나쁘다는 뜻이었다.

“삼촌 양반 살아 계실 때는 이런 소문 돌면 제일 먼저 나서서 막았는데.” 최노인이 중얼거렸다. “참, 세상 모르고 간 사람한테 미안한 소리지만.”

하늘은 수건을 개켜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알아서 할 게 뭐가 있나. 서류도 복잡하고 관공서는 말도 안 통해.” 최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혀를 찼다. “필요하면 우리 아들놈한테 물어봐. 구청에 아는 놈이 있대.”

“네, 그럴게요.”

최노인은 문을 열고 나가다가 다시 뒤를 돌아봤다.

“비 많이 온다. 지하 창고 함 들여다봐.”

문이 닫혔다. 다시 고요가 내려앉았다. 하늘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빈 거리. 끊이지 않는 빗소리. 낡은 서점의 공기는 점점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하늘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서가에서 나는 오래된 종이 냄새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때 다시 문이 열렸다.

이번에는 빗소리와 함께 검은 우산이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우산이 접히고, 문이 닫혔다.

서지헌이었다.

하늘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검은 우산을 세우고 돌아선 남자는 십 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짙은 눈동자, 왼쪽 눈 아래 작은 점, 이마가 살짝 드러난 단정한 검은 머리. 흰 셔츠에 짙은 슬랙스 차림은 예전보다 어깨가 더 넓어 보이게 했다.

다만, 그 눈빛은 더 차가워져 있었다.

서지헌은 손에 든 가방을 고쳐 쥐며 서점 안을 천천히 훑었다. 시선이 하늘에게 닿았다. 짧은 멈춤. 이내 명함 한 장을 카운터 위로 내밀었다.

“지호 법률사무소 서지헌입니다.”

하늘은 명함을 내려다봤다. 글자는 읽히지 않았다. 그저 종이 위의 검은 선들일 뿐이었다.

“네.”

“고 윤상진 씨의 유산 상속 문제로 방문했습니다.”

사무적인 목소리였다. 하늘은 명함을 집어 들었다.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무슨 용건이시죠.”

“삼촌분의 부채 정리 건입니다. 서점 건물을 담보로 한 대출이 세 건 있습니다. 만기가 지난 지 오래됐고, 이자도 상당합니다.”

서지헌은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꺼냈다. 그의 손가락이 봉투를 여는 동작은 정확하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펜을 쥐듯 엄지로 검지 옆면을 살짝 두드렸다.

“법률 구조 공단 시절에 고인께서 의뢰하셨던 건들이 몇 가지 정리되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이 서점이고요.”

“서점이요?”

“네.”

하늘은 서류를 받아 들었다. 숫자와 조문이 빼곡했다.

“변호사님이 신경 쓰실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의뢰인입니다.” 서지헌은 짧게 답했다. “사망으로 종결되지 않은 계약 건이 남아 있습니다.”

시선이 마주쳤다. 하늘은 먼저 눈을 돌리지 않았다. 서지헌의 눈동자가 빛을 반사하며 차갑게 빛났다. 둘 사이의 공기가 미세하게 긴장했다.

“건물 감정이 필요합니다. 가능한 한 빨리.”

“감정이요.”

“부채 변제 방안을 마련하려면 자산 가치를 평가해야 합니다.” 서지헌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매입 제안도 검토하실 수 있습니다.”

하늘의 눈썹이 올라갔다.

“매입이요?”

“제 의뢰인 측에서 건물 매입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변제 금액을 초과하는 부분은 현금으로 지급하는 조건입니다.”

서류 봉투에서 두 번째 서면이 나왔다. 서지헌은 그것을 카운터에 올렸다. 손가락이 서류 모서리를 가지런히 정렬했다.

“검토하시고 연락 주십시오.”

하늘은 서류를 읽지 않았다. 손도 대지 않았다.

“거절합니다.”

서지헌의 손이 멈췄다.

“내용을 확인하셨습니까.”

“확인할 필요 없어요.” 하늘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이 서점은 제가 물려받은 곳이에요. 삼촌이 평생 지킨 곳이고, 매입이니 매각이니 그런 말 꺼내지 마세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서지헌의 표정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눈 아래의 작은 점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듯했다. 시선이 더 깊어졌다.

“상속인이 있습니까.”

“그건……”

“부채 현실을 직시하셔야 합니다. 이자는 매달 불어나고 있고, 담보권 실행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한층 낮고 또렷했다. “감정적인 판단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감정적이라고요?”

“사실만 말씀드린 겁니다.”

“변호사님이 이 서점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러시죠.”

서지헌의 입술이 닫혔다. 짧은 침묵 뒤에 문장이 딱딱하게 떨어져 나왔다.

“할 말씀은 그게 전부입니다.”

표정이 사라진 얼굴이었다. 화가 났을 때 이 남자가 어떻게 변하는지, 하늘은 알고 있었다. 목소리가 낮아지고, 시선이 상대를 관통하듯 고정되고, 말끝이 정확하게 끊겼다.

“다시 방문하겠습니다.”

서지헌은 서류를 그대로 둔 채 가방을 닫았다. 우산을 챙겨 들고 문으로 향했다. 걸음걸이는 단정했고, 허리는 곧았다.

문이 열렸다. 빗소리가 밀려 들어왔다.

닫혔다. 다시 고요.

하늘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카운터 위의 명함이 빗물 묻은 손가락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서류 봉투는 열리지 않은 채 놓여 있었다.

손이 저절로 주먹을 쥐었다. 심장이 갈비뼈 안쪽을 두드렸다. 분노인지, 다른 감정인지 구분하기도 전에 숨이 짧아졌다.

그때였다.

바깥에서 거센 바람이 불어닥쳤다. 빗소리가 갑자기 거칠어지더니, 서점 뒤편에서 뭔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가볍지 않은, 물이 철판을 때리는 소리.

하늘은 고개를 들었다.

소리는 지하창고 쪽에서 났다. 계단 아래서 물이 스미는 특유의 낮은 소음. 장마 때마다 삼촌이 골치를 앓던 바로 그 소리였다.

하늘은 재빨리 카운터를 돌아나갔다.

통로로 접어들자 공기가 달랐다. 습하고 무거운 냄새가 계단 아래서 올라왔다. 하늘은 벽에 손을 짚고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창고 문 앞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바닥이 젖어 있었다.

빗물이 문틈으로 스미고 있었다. 가느다란 물줄기가 콘크리트 바닥을 타고 천천히 번지고 있었다.

하늘은 서점 열쇠를 움켜쥔 채 서 있었다. 빗물의 경로를 눈으로 좇다가 창고 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비가 서점을 집어삼키려는 듯했다.

빗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장마가 걷히는 날, 너에게 닿으면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