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장마가 걷히는 날, 너에게 닿으면

2화

카운터에 놓인 서류 봉투는 열리지 않았다. 서지헌의 명함은 빗물에 번진 손자국이 마를 때까지 그대로였다.

하늘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창고 앞 통로는 바닥이 반쯤 젖어 있었다. 벽을 따라 흘러내린 물기가 콘크리트 바닥에 얕은 고랑을 만들고 있었다. 장마철마다 삼촌이 밤새 물을 퍼내던 모습이 떠올랐다.

하늘은 창고 문을 열었다.

습한 공기가 얼굴에 달라붙었다. 천장 형광등이 깜빡이고 있었다. 켜졌다 꺼질 듯 불안한 빛이었다. 벽 한쪽 면에는 삼촌이 붙여둔 비상 연락처와 구청 방수 공사 안내문이 누렇게 바래 있었다.

선반 아래 쌓아둔 상자들이 습기를 머금어 바닥 쪽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아직 물이 고이진 않았지만, 시간 문제였다. 하늘은 벽 쪽 배관을 따라 걸으며 물이 스미는 지점을 살폈다.

틈새는 두 군데였다.

하나는 창고 안쪽 구석, 오래된 수도 배관이 벽을 뚫고 지나가는 부분. 다른 하나는 환기구 아래쪽 콘크리트 접합부였다. 하늘은 벽에 손을 대 보았다. 차가웠다. 손바닥에 물기가 번졌다.

돌아서려던 순간, 발끝에 무언가 걸렸다.

상자 하나가 선반 아래로 밀려나와 있었다. 비에 젖은 골판지가 눅눅하게 주저앉아 뚜껑이 반쯤 열려 있었다. 하늘은 무심코 상자를 선반 안쪽으로 밀어 넣으려다 멈췄다.

종이 냄새. 습기와 먼지에 섞인, 오래된 책 냄새가 났다.

열린 틈 사이로 책등이 보였다. 절판된 지 오래된 문고본들이 대부분이었다. 삼촌이 창고에 보관하던 재고들. 하늘은 상자를 선반 쪽으로 밀어 올리려고 허리를 굽혔다.

골판지가 축축하게 무너지며 상자 옆면이 찢어졌다.

책 두 권이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그 사이에서 무언가 가볍게 떨어졌다. 얇은 종이 한 장. 크기는 손바닥만 했다.

하늘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

서점 로고가 찍힌 포장지였다. 연한 크림색 바탕에 갈색 잉크로 찍힌, 이제는 쓰지 않는 옛 로고. 삼촌이 십 년도 더 전에 바꾼 문양이었다. 종이 가장자리가 누렇게 변색됐고, 접힌 자국은 좀처럼 펴지지 않을 만큼 낡아 있었다.

손이 멈췄다.

(이 로고…….)

기억 속에선 이 포장지가 선명했다. 새 책을 살 때마다 삼촌이 정성스럽게 싸주던 종이. 그때는 흔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

하늘은 천천히 종이를 접었다. 냄새를 맡지 않았다. 글씨를 확인하지도 않았다. 그냥 조심스럽게 반으로 접어, 찢어진 상자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바로 몸을 돌렸다.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하늘은 작업용 장갑을 찾아 선반 위를 더듬었다. 지금 필요한 건 빗물을 막을 방법이었다. 십 년 전 포장지가 아니었다.

장갑을 끼고 벽 쪽으로 돌아왔다. 환기구 아래 틈새에서는 물이 조금씩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때였다.

밖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늘은 고개를 돌렸다. 발소리가 계단 위에서 멈추더니,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구두 굽이 콘크리트 계단을 짚는 소리. 한 걸음, 한 걸음.

서지헌이었다.

“아직 안 가셨나 봅니다.”

하늘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계단 방향을 향해 말하면서도 손은 계속 벽에 대고 있었다.

“서류 봉투를 그냥 두고 와서요.”

서지헌이 계단 입구에 섰다.

그는 창고 안을 훑어보았다. 벽에 스민 물기, 바닥에 널린 상자들, 하늘의 젖은 신발. 시선이 짧게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누수인가 보네요.”

“곧 멈출 겁니다.”

하늘은 대답을 던지고는 구석으로 걸어갔다. 차단 밸브가 있는 자리. 삼촌이 표시해둔 빨간 손잡이가 벽 가까이 붙어 있었다.

“비가 더 오기 전에 손봐야 할 것 같은데요.”

서지헌은 퇴장하지 않았다. 대신 창고 입구에서 한 걸음 더 안으로 들어왔다. 우산을 접어 벽에 기대 세웠다. 양복 소매에 빗방울이 묻어 있었다.

“도움 필요하시면—”

“변호사님이 신경 쓰실 일은 아닙니다.”

말이 끊어졌다. 하늘은 밸브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손잡이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오래된 금속이 녹슬어 있었다.

서지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창고 벽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습기가 찬 콘크리트 벽을 눈으로 더듬으며 틈새를 확인하는 움직임이었다. 하늘은 그를 보지 않았지만, 그의 구두 소리가 어디쯤에서 멈추는지 알고 있었다.

환기구 아래.

“여기 틈이 꽤 깊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늘은 숨을 한 번 고르고 밸브 손잡이를 힘껏 돌렸다. 처음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두 번째, 체중을 실어 양손으로 눌렀다.

딱, 소리가 났다.

금속이 부러지는 소리였다.

손잡이가 손에서 빠져나갔다. 동시에 배관 안쪽에서 둔탁한 소음이 울렸다. 마치 막혔던 통로가 갑자기 뚫린 것처럼, 벽 틈새에서 쏟아지는 물줄기가 더 굵어졌다.

“잠깐만—”

서지헌이 다가왔다.

하늘은 부러진 손잡이를 든 채 굳어 있었다. 물은 틈새에서 연신 새어 나왔고, 바닥으로 흘러내린 물이 신발 밑창을 적셨다. 몇 초 만에 발목 높이까지 차올랐다.

“물러나 계십시오.”

서지헌이 하늘의 팔꿈치를 잡아 세웠다. 큰 손이었다. 힘이 실려 있었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그 순간, 창고 뒤편에서 쿵, 하는 무거운 소리가 울렸다.

출입문이었다.

습기로 팽창한 목재 문틀이 문을 완전히 밀어 닫아버린 소리. 서지헌이 재빨리 문 쪽으로 걸어가 손잡이를 잡았다. 두 번, 세 번, 힘껏 당겼다.

열리지 않았다.

“……잠겼습니다.”

하늘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에 쥔 부러진 밸브 손잡이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녹슨 파편이 장갑에 박혀 있었고, 손바닥이 약간 따가웠다.

서지헌은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을 두어 번 두드리더니 이마를 약간 찌푸렸다.

“신호가 약합니다. 그래도 문자는…… 갔습니다. 119와 지인에게.”

“지인이요?”

“구청 쪽 아는 사람입니다. 이 근처 상가 구조를 잘 알아서.”

하늘은 고개를 끄덕였다. 묻지 않았다. 대신 선반 위에 걸린 비상용 양동이를 내렸다.

“물부터 퍼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서지헌이 재킷을 벗었다. 안쪽 주머니에 넣어둔 넥타이는 이미 푼 상태였다.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렸다. 깔끔한 셔츠와 구두가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둘은 말없이 움직였다.

하늘이 양동이로 물을 퍼내는 동안, 서지헌은 벽 쪽에 쌓인 상자들을 더 높은 선반으로 옮겼다. 물이 차오르는 속도는 빨랐지만, 둘이 함께 움직이자 더 이상 바닥에 고이지 않았다.

창고 안에는 빗소리와 물 퍼내는 소리만 반복됐다.

형광등이 깜빡였다.

하늘은 양동이를 내려놓고 잠시 허리를 폈다. 숨이 가빴다. 이마에 땀이 솟았다.

그때, 서지헌이 벽에 기대 세워둔 나무 상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선반보다 높이가 낮아서 물이 조금 스며든 듯, 바닥 면이 젖어 있었다. 다른 상자들과 달리 테이프가 아닌 끈으로 묶여 있었다.

하늘은 무심코 끈을 풀었다.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오래된 책들, 그리고 서점 로고가 찍힌 포장지 여러 장. 접힌 채로 가지런히 포개져 있었다. 그 아래엔 헌 책을 싼 비닐 커버, 그리고 손글씨로 ‘보관용’이라고 적힌 메모지.

하늘은 손을 멈췄다.

이 로고.

조금 전에 보았던 것과 같은 문양이었다. 삼촌이 십 년도 전에 썼다가 바꾼 옛 로고. 이 상자 안에는 그 포장지가 수십 장은 들어 있었다.

서지헌은 그녀를 보지 않았다. 벽을 등지고 서서 다른 상자를 옮기는 중이었다. 그러나 하늘의 움직임이 멈추자, 그도 손을 멈췄다.

짧은 정적.

“……더 이상 물은 안 차는 것 같습니다.”

서지헌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

하늘은 포장지를 도로 상자 안에 넣었다. 정리하지 않고 그냥 밀어 넣듯이. 뚜껑을 닫고 끈을 조였다. 손끝이 약간 저렸지만 그뿐이었다.

상자를 선반 위로 올렸다. 서지헌은 다시 일을 시작했다.

둘 다 묻지 않았다.

양동이질이 이어졌다. 물은 바닥에 얇게 고인 정도로 줄었다. 환기구 아래 틈새도 물이 멎은 듯했다. 서지헌이 벽 쪽에 남은 방수 테이프를 발견하고는 틈새를 두드려 막았다.

“임시 방수입니다. 비가 그치면 제대로 손봐야 합니다.”

“그때는 제가 합니다.”

대답은 짧았다. 그러나 아까와는 달랐다. 거절이 아니라 구분이었다. 네 일과 내 일을 나누는 선.

서지헌은 그 선을 넘지 않았다. 방수 테이프를 한 번 더 눌러 붙이고 물러났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형광등이 다시 깜빡이기 시작하더니, 한 번 길게 떨렸다. 그리고 꺼졌다.

완전한 어둠이었다.

“……잠시만요.”

서지헌이 휴대폰 플래시를 켰다. 좁은 공간을 겨우 비출 만한 빛이었다. 그는 천천히 선반 위를 더듬었다.

“비상 손전등이 어디쯤……”

“제 왼쪽 위입니다.”

하늘의 목소리는 어둠 속에서도 차분했다. 서지헌은 휴대폰을 들고 그 방향으로 손을 뻗었다. 플래시 불빛이 선반 위를 훑고 지나갔다.

하늘은 그 빛을 따라 무심코 시선을 옮겼다.

빛이 비춘 곳.

젖은 상자 더미 뒤편, 먼지 쌓인 책들 사이에서 무언가가 삐져나와 있었다. 종이 조각. 아니, 책갈피였다. 낡고 누렇게 바랜 종이의 귀퉁이. 절판된 문고본 한 권의 페이지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플래시가 한 번 더 그 위를 지나갔다.

하늘의 숨이 멎었다.

책갈피 끝에 연필로 쓴 글씨. 희미했지만 분명히 남아 있었다. 두 글자.

‘하늘’.

서지헌이 손전등을 찾았다. “있습니다.” 그가 전등을 켜며 돌아보았을 때, 하늘은 이미 그 책 앞에 서 있었다.

플래시 불빛 사이로 보인 찰나의 형상. 서지헌은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무언가를 발견했음을 알았다.

움직임이 멈췄다. 손이 허공에서 정지한 듯한 그 실루엣.

“……윤하늘 씨?”

하늘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전등 불빛이 천천히 그녀 쪽으로 향했다. 빛이 닿기 직전, 하늘이 입을 열었다.

“그냥…… 책 한 권이에요.”

서지헌은 더 묻지 않았다.

빗소리는 여전했다.

그 너머로, 어둠 속에서 책갈피가 빛을 기다리듯 가만히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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